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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수도원, 그 현장을 가다 02]
문화·신학·목회 (2020년 12월호)

 

  카파도키아 수도원, 자연의 신비와 인간의 역사가 만나는 곳
  

본문

 

카파도키아의 괴레메 계곡과 인근 지역을 방문해본 적이 있는가? 요정이 살 것만 같은 신비로운 모습에 분명 매혹당할 것이다. 시간이 켜켜이 쌓여 역사가 되고, 그 역사가 다시 선물이 되어 다가오는 곳, 그곳이 카파도키아이다. 안토니우스와 파코미우스를 비롯한 사막 수도사들의 영적 고향인 이집트와 더불어, 터키의 카파도키아 지역은 또 다른 동방교회 수도원 운동의 요람이었다. 먼저 카파도키아, 특히 괴레메에 있는 교회와 수도원을 살펴본 다음, 동방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실리우스의 생애와 수도규칙에 대해 알아보자.

| 카파도키아

카파도키아는 터키 중앙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남쪽 토로스 산맥과 북쪽 흑해 사이에 넓게 자리 잡고 있다. 고고학적 연구조사에 의해 1만 년 전 신석기 시대와 5,000년 전 초기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발굴되었을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 땅이다. 이 지역에 있던 고대 도시 하투샤[오늘날의 보아즈칼레(Boğazkale)]가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 후기 청동기 시대 히타이트제국의 수도였을 정도로 카파도키아는 역사의 중심 무대였지만, 그 이후 페르시아,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차례로 겪기도 했다.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된 그리스도교가 카파도키아로 전해지면서부터 이 지역은 동방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흔히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라 불리는 카이사레이아의 바실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카파도키아는 물론이고 다른 지역까지 폭넓게 영향력을 행사해 동방 그리스도교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았을 계곡과 동굴에는 지금까지도 교회와 수도원의 흔적이 남아 있어, 당시 카파도키아 교회의 초기 신앙생활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괴레메 지역에 있는 버섯 모양으로 생긴 신기한 ‘요정의 굴뚝’과 동굴을 판 후 그 안에 세워놓은 수도원이나 교회의 모습과 벽화는 당시 그리스도인의 예배와 생활을 잘 보여주고 있다. 괴레메를 비롯한 카파도키아 지역의 동굴 예배당과 기도처, 그리고 지하도시는 중세 이슬람 세력, 즉 11세기 셀주크제국과 15세기 오스만제국이 이 지역을 점령했을 당시 그리스도인의 피난처 역할을 하였다. 괴레메와 인근 데린쿠유와 카이마클리의 지하도시는 198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괴레메를 비롯한 카파도키아 지역에는 정확히 셀 수는 없지만 400여 개의 교회, 예배처소, 은수처가 남아 있다.
726년, 비잔틴제국의 황제 레오 3세가 성화상을 조각하거나 그리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공포하면서부터 성화상 문제는 카파도키아가 속한 동방 그리스도교 세계의 주요 논쟁 주제로 달아올랐다. 성화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성화상 제조가 우상 제조와 다르지 않다고 비판하였고, 성화상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신심을 위한 보조적 수단이라며 옹호하였다. 성화상 논쟁은 무려 117년이 지난 843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메토디우스의 합법 선언으로 비로소 일단락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성상과 화상의 대부분은 성화상 논쟁 이후의 작품들이다. 성화상 논쟁이 끝나면서 괴레메 계곡에도 다양한 조상과 그림이 있는 새로운 교회와 수도원들이 재건되었고, 그 덕분에 오늘날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프레스코 벽화와 장식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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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레메

괴레메(Göreme)라는 이름은 “이 같은 장소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 이름 그대로 카파도키아의 괴레메는 화산암과 풍화작용이 만나 동화 속에 나오는 나라에서나 봄직한 신비로운 장관을 연출한다. 고대도시 니사[오늘날 네브셰히르(Nevşehir)]에서 동쪽으로 15km 남짓 떨어진 괴레메 지역은 6-9세기 동방 그리스도교의 주요 거점 가운데 하나로, 400여 개의 동굴 교회와 은수처가 흩어져 있다. 대표적인 동굴 교회로는 Tokali(Buckle, 허리띠교회), Çarikli(Sandals, 샌들교회), Karanlik(Dark, 암흑교회), Elmali(Apple, 사과교회), Yilanli(Snake, 뱀교회), Sakli(Hidden, 숨겨진교회), Mother Mary(마리아교회), St. Barbara(성바르바라교회), El Nazar(엘나자르교회), St. Basil(성바실리우스채플) 등이 있다. 여기서는 특별히 동방 수도원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실리우스 벽화가 그려져 있는 교회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성바실리우스채플(Saint Basil’s Chapel)

괴레메 야외 박물관의 초입에 있는 성바실리우스채플은 11세기경에 지어진 건축물로 추정된다. 동굴 교회당 바깥에 있는 무덤은 아마도 기증자의 무덤일 것이다. 배랑(拜廊, narthex)이라 불리는 입구에는 평평한 지붕의 직사각형 방이 있는데 그 바닥에 여러 개의 무덤이 있으며, 더러 보이는 작은 무덤은 어린아이의 것으로 추정된다. 배랑에서 세 개의 아치형 문을 통해 회중석에 해당하는 신랑(身廊, nave)으로 들어갈 수 있다. 신랑은 반원통형 천장에 세 개의 후진(後陣, apse)을 가진 구조로 되어 있는데, 중앙 후진에는 <전능하신 구세주 그리스도>(Christ Pantocrator) 성화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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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바실리우스채플 입구. 왼편에 기증자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이 보이고, 오른편 작은 출입구를 통해 교회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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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바실리우스채플 입구. 교회의 현관인 배랑에는 여러 개의 무덤 흔적이 있다.

신랑의 왼편 북쪽 벽에는 두 인물이 그려져 있는데, 그중에 곧게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카이사레이아의 주교 성 바실리우스이다. 그는 니케아신조의 정통주의를 옹호하고 동방 수도원 운동을 선도한 인물이다. 그 옆에서 붉은 말을 타고 창으로 뱀을 찌르고 있는 인물은 폰투스(오늘날 터키 북부 지방)에서 319년경 순교한 테오도루스(Theodore Stratelates)이다.
오른편 남쪽 벽에는 테오도루스와 짝을 이루는 인물의 성화가 있는데, 그는 다름 아닌 흰 말을 타고서 악한 뱀을 무찌르는 성 게오르기우스(St. Georgius)이다. 게오르기우스는 302년경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 때 니코메디아[오늘날 터키의 이즈미트(Izmit)]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전투 장면을 그린 성화상이 많은 것은 어쩌면 박해에 맞서 신앙의 절개를 끝까지 지키며 따르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주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쪽 벽에 그려져 있는 세 개의 몰타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성부, 성자, 성령을 나타낸다는 해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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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의 왼편 벽에는 바실리우스의 모습과 붉은 말을 탄 테오도루스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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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편 남쪽 벽에는 흰 말을 탄 게오르기우스가 보인다.

2) 뱀교회(Snake Church)

‘뱀교회’라는 특이한 이름이 붙은 것은 내부에 그려져 있는 뱀을 무찌르는 성 게오르기우스 벽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교회당은 단순하게 하나의 신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원통형 둥근 천장을 지닌 이 방은 처음에는 배랑으로 계획된 듯하다. 그런데 이후 건축 과정에서 별도로 신랑 부분이 만들어지지 않자 이 공간을 개조해서 신랑, 곧 교회당의 몸체 공간으로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만일 원래의 계획대로 건축되었다면 가까이 있는 바실리우스채플과 비슷하게 긴 배랑을 지나 아치형의 문을 통과하여 신랑에 이르는 구조가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교회당이 미완성의 형태를 띠게 된 것은 아마도 1070년대 셀주크투르크의 침략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교회당 내부는 내용이나 양식 면에서 독특한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왼쪽 벽에는 다섯 인물이 등장하는데, 붉은 옷을 입고 서 있는 오네시모(빌립보서에 언급된 인물), 흰 말을 타고 뱀을 무찌르는 성 게오르기우스, 붉은 말을 탄 성 테오도루스,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어머니 헬레나이다.
오른쪽 벽에 그려진 세 인물은 누드 형태로 등장하는 이집트 사막의 은수자 성 오누프리우스(길고 굵은 머리카락이 몸 전체를 감쌌다고 전해진다.), 사도 도마, 성 바실리우스이다. 이 세 사람은 각각 은수자, 사도, 교부를 대표하고 있다. 남쪽 벽에는 교회당을 위해 재산을 기증한 테오도루스가 예수 그리스도 곁에 작게 그려진 벽화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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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벽에는 오누프리우스, 도마, 바실리우스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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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벽에 그려진 다섯 인물 중 오네시모, 게오르기우스, 테오도루스가 보인다.

3) 허리띠교회(Buckle Church)

일명 ‘허리띠교회’는 800년경 이름 모를 고독한 수도사가 머문 작은 은수처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도 남아 있는 작고 어두운 방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915년경 이 은수처 바로 옆에 옛 건물(Old Tokali)이 만들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 건물(Lower Tokali)이 묘지로 조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960년경 옛 건물을 대체하는 새 건물(New Tokali)이 들어섰고, 마지막으로 새 건물 옆에 측면 예배당(Side Church)이 세워졌다. 이 교회는 카이사레이아의 바실리우스와 특별한 관련이 있다. 아마도 그에게 헌정되었을 이 교회 안에는 그의 장례식을 보여주는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바실리우스의 삶과 사상을 담고 있는 프레스코화는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새 건물 북동쪽 구석에 그려진 <바실리우스의 장례식에서의 기적>은 훼손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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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건물에 묘사된 바실리우스의 장례식 그림

4) 규뮤쉴레르 수도원(Gümüşler Monastery)

비잔틴 시대의 수도원인 규뮤쉴레르 수도원은 터키 니데주의 작은 마을에 있으며, 카파도키아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보존 상태가 좋은 암석 수도원 중 하나이다. 이 수도원은 1962년에야 발견되었으며, 이후 고고학 발굴을 통해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다. 수도원은 안마당이 있는 형태의 복합 구조물로, 북쪽에는 교회당이 있다.
수도원 탐방객은 터널을 통해 중앙의 안뜰로 들어갈 수 있는데, 높은 암벽에 둘러싸여 지하 요새처럼 형성된 큰 규모의 수도원에 깜짝 놀라게 된다. 넓이 15m, 길이 14m, 높이 11m에 이르는 큰 입방체 안의 정원은 마치 지하세계에서 열린 하늘을 쳐다보는 느낌이다. 수도원은 세월의 영향으로 파손된 부분도 많지만, 그나마 지하 건축물이라 외부에 쉽게 발견되지 않아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탐방객의 시선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 북측 벽은 중간 부분에 아홉 개의 작은 아치 모양이 있고 윗부분이 앞으로 돌출되어 있어 피난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랫부분에는 안으로 이어지는 세 개의 입구가 있다. 왼쪽 문은 평탄한 직사각형의 방(아마도 부엌으로 사용되었을 공간)으로 연결되며, 중심에 있는 가운데 문은 교회 입구로 연결되고, 오른쪽 문은 벽돌로 하단이 막혀 있는 상태이지만 교회의 중심 공간으로 이어진다.
동굴 안 교회의 실내 그림들은 상당히 잘 보존되어 있는데, 아마도 예외적으로 두텁게 칠한 회반죽의 두께 때문일 것이다. 특히 후진의 벽에 그려진 작품은 상당 부분 훼손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보존 상태는 좋은 편이다. 중앙 후진의 그림은 3층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일 위쪽에는 예수가 중앙의 보좌에 앉아 있고, 옆에는 어머니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이 있으며, 사복음서 저자의 상징 동물과 함께 천사들도 등장한다. 가운데에는 예수의 제자인 사도들이 등장하고, 제일 아래쪽에는 초대교회 교부들이 그려져 있는데 중앙에 마리아가 있고 바로 오른편에 카파도키아의 교부인 카이사레이아의 바실리우스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가 묘사되어 있다. 이 프레스코화는 보편교회의 질서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만왕의 왕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온 복음이 사도들을 통해 인류에게 드러났고, 교부들을 통해 이 땅 위의 교회가 든든히 세워졌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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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뮤쉴레르 수도원 안뜰. 수도원의 주소는 Efendibey, 51310 Gümüşler/Niğde Merkez/Niğde, Turkey. 홈페이지는 https://nigde.ktb.gov.tr/TR-74360/gumusler-manastiri.htm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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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안뜰 오른편에 있는 수도사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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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뮤쉴레르 수도원 교회당 중앙 후진의 벽화. 마리아의 오른쪽에 바실리우스의 모습이 보인다.

| 데린쿠유 지하도시

데린쿠유는 괴레메에서 남쪽으로 35km 남짓 떨어진 곳으로 땅속 지하도시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어 탐방객들이 많이 찾는 장소이다. 데린쿠유는 ‘깊은 우물’이라는 이름의 뜻처럼 지하 8층까지 내려가는데, 히타이트, 로마, 비잔틴, 이슬람 제국을 거치면서 때로는 거주지로, 때로는 신앙의 박해를 피해 숨는 피난처로 사용되었다. 석회암 지질이라서 땅을 파기가 수월하다고는 하지만, 원시적인 도구들만 가지고 지하 8층까지 파고 내려가 수천 명이 살아갈 공간과 시설을 마련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다. 그래서 1965년 일반에게 공개된 데린쿠유 지하도시는 고대 세계의 9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힌다. 현재 일부 구간은 안전상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으며, 공개된 구간의 제일 아래층에서 교회의 유적과 흔적을 볼 수 있다.
현재 카파도키아 지역에는 데린쿠유와 유사한 지하도시가 37개 이상 남아 있다. 이런 지하도시는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박해로부터 몸을 숨기고 은밀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보금자리이자 피신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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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린쿠유 지하도시의 구조

데린쿠유 지하도시 1층과 2층에는 교회, 학교, 세례 우물, 부엌, 음식 저장소, 침실, 식당, 와인 저장고, 가축우리 등이 있다. 3층과 4층에서는 은밀한 피난처, 외부로 이어지는 터널, 무기 보관소 등이 발견되었다. 마을이 외부의 공격을 당했을 때, 주민들은 터널을 통해 지하로 피신하였다. 3층의 한 터널은 한때 9km 떨어진 카이마클리 지하도시까지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지금은 막혀 있다.
터널로 외부 세력이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연자 맷돌로 입구를 봉쇄할 수 있게 만들어, 안쪽에서 이 맷돌을 작동시키면 바깥에서는 열 수 없도록 해놓았다. 제일 아래쪽에는 우물, 비밀 탈출 통로, 교회 회의실, 고해소 등이 있다. 데린쿠유 지하도시는 전체 8층인데 지상 표면의 위치에 따라 70-85m 깊이로 내려가며, 물과 공기의 유입을 위해 53개의 수직 환기 터널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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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마클리 지하도시의 교회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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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데린쿠유 지하도시 내의 맷돌 구조물

| 동방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 바실리우스

동방교회의 중심지 카파도키아에 수도원 운동이 자리를 잡고 부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실리우스(c.330-379)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카파도키아 지역에 속한 카이사레이아[‘황제의 길’이라는 뜻을 지닌 지명으로, 오늘날은 카이세리(Kayseri)로 불리며 괴레메에서 동쪽으로 70km 떨어져 있다.]에서 태어났다. 바실리우스의 집안은 조부모, 부모, 누나 마크리나, 두 남동생 그레고리우스와 페트로스가 모두 성인 반열에 올랐을 정도로 독실한 그리스도교 가문이었다. 바실리우스는 동생인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친구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카파도키아 세 교부’로 불린다. 더욱이 바실리우스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와 더불어 동방정교회 전체의 ‘위대한 세 명의 주교’로도 꼽힌다.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모두 그에게 ‘교회 박사’라는 칭호를 부여했으며, ‘우라노판토르’(Ουρανοφαντωρ, 천상 신비의 계시자)라는 별칭도 주어졌다. 바실리우스는 아리우스주의를 비롯한 이단에 맞서 니케아 정통주의를 옹호한 신학자, 동방교회 예전의 구축자, 동방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로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위대한 업적으로 인해 ‘대(大) 바실리우스’라 불린다. 바실리우스는 카이사레이아, 콘스탄티노플, 아테네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 아테네에서 수학할 때는 평생의 친구가 될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와 후일 로마 황제가 된 율리아누스를 만났다. 바실리우스는 356년경 고향 카이사레이아로 돌아가 수사학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그러던 중 누나 마크리나의 간곡한 권유와 설득으로 수도생활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357년경에는 팔레스타인, 이집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여행하면서 금욕주의와 수도생활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폰투스 지방의 네오카이사레이아(오늘날 터키의 Niksar)에서 고독한 은수자의 수도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공주(共住) 수도생활이 자신에게 더 적합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358년 남동생인 세바스테의 페트로스(Pétros tou Sebaste)를 비롯해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함께 네오카이사레이아에서 가까운 안네시(오늘날 터키의 Uluköy/Sonusa)의 가족 영지에 수도공동체를 설립하였다. 이곳에서 이루어진 수도생활의 면모에 대해서는 친구 그레고리우스와 주고받은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이 편지에서 그는 금욕적 수도생활이야말로 바로 ‘지혜를 사랑하는 것’(philo+sophia), 곧 진정한 철학이고 고대 철학자들이 말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며 수도사로서의 삶에 대한 자긍심을 내비친다.
그러나 당시 교회가 처한 여러 상황은 바실리우스가 수도사로 은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카이사레이아의 주교 에우세비오스의 요청에 따라 바실리우스는 당시 아리우스파를 옹호한 비잔틴제국의 황제 발렌스에 대항하여 니케아 정통신앙을 옹호해야만 했고, 370년에는 에우세비오스의 후임으로 카이사레이아 주교로 서품을 받았다. 이후 379년 죽기까지 주교로서 또한 교회의 학자로서 이단들을 논박하여 정통을 세우고, 교회 예식과 예전의 토대를 마련하고, 병자들을 돌보는 구빈원을 설립하며, 금욕적 수도공동체를 위한 규칙을 제정하는 등 교회와 수도원의 근간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바실리우스는 수도원 운동에서 몇 가지 특징적인 유산을 남겼다. 첫째, 성서에 근거한 수도원 운동을 제시하였다. 그의 규칙서는 성서에 대한 인용으로 넘쳐난다. 특히 그의 『도덕규칙서』에는 무려 1,542개의 신약성서 구절이 인용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얼마나 성서 중심적인 인물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둘째, 통합적 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전 수도원 운동의 여러 흐름과 다양한 규칙서를 종합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수도생활의 기본 지침을 제시했다. 셋째, 바실리우스는 대안의 제안자였다. 그는 극단적 금욕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절제된 금욕과 실천적 애덕을 강조하였고, 안토니우스의 독(獨)수도승 전통이나 파코미우스가 선보인 독수도승과 회(會)수도승의 중간 형태보다는 함께 살면서 수도생활을 하는 공주 수도회 전통을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이렇게 하여 바실리우스는 동방뿐만 아니라 서방 수도원의 역사에도 항구적인 흔적과 영향을 남겼다.


박경수 | 종교개혁사를 전공하였다.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인물로 보는 종교개혁사』, 『스코틀랜드 교회치리서』, 『교회사클래스』, 『종교개혁 핵심톡톡』 외 다수가 있고, 역서로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 『스위스 종교개혁』 등이 있다.

 
 
 

2020년 12월호(통권 7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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