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사진이 신학을 만났을 때 01]
문화·신학·목회 (2020년 10월호)

 

  사진의 역사와 신학의 만남
  

본문

 

분명히 주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이 거룩한 명상에 몰두해 있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울에서 보는 것처럼, 모든 피조물에게서 하나님의 지혜, 공의, 선하심, 권능의 무한한 풍요함을 조용히 지켜볼 때, 그것들을 단순히 호기심으로, 말하자면 일시적으로 보아 넘길 것이 아니라 충분하게 생각하고 또 진지하고 충실하게 심사숙고하며 계속 그것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장 칼뱅, 『기독교 강요』 1권 14장 21

사람들은 사진을 찍는다.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위해 찍고, 머무르고 싶은 세상의 순간들을 기억하기 위해 찍는다. 사진을 찍는 순간은 늘 반성과 묵상과 기도의 순간이다. 사진기에 나타난 대상을 애착과 보살핌의 마음으로 바라보며 숨을 죽이고 셔터를 누른다. 창조된 세상이 준 선물, 창조주의 선물을 받는 순간이다. 나와 창조된 세상이 의도적으로 만나는 순간이다. 마치 창조된 세상의 중심이 그곳에 있는 것처럼, 마치 창조주와 대화를 나누듯이 그 선물을 받는다. 바로 믿음의 순간이고, 초월의 순간이다. 사진은 세상을 은혜로 보게 만든다.
칼뱅의 영감을 통한 필자의 명상이다. 칼뱅은 창조된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 공의, 선하심, 권능의 무한한 풍요로움을 마치 거울을 통해 보듯이 조용히 지켜보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기억하기를 우리에게 권했다. 그리고 이것을 거룩한 명상이라고 말했다. 자연에서, 또 타인의 얼굴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진리를, 거울을 통해 보듯 기억하고 명상의 대상으로 만드는 도구는 카메라이다.
사진은 신학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 그 관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설령 신학적인 관계가 증명된다 하여도 어떤 가치가 있을까? 먼저 이 시대의 상황을 상기시켜 보자. 현대의 삶은 사진 이미지를 빼고 설명할 수 없다.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사진을 찍고 또 사진에 노출되고 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양의 사진이 매일 인터넷을 통해 공유되고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감당하기도 힘든 카메라 기술을 자랑하는 핸드폰을 손에 들고 다닌다. 말보다 이미지로 소통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리고 정제된 말만큼이나 세련된 사진을 찍어서 공유한다. 그 속엔 자신의 기술만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이 투영되어 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사진은 일상에서 영성을 실천하고 다듬는 도구일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목회적 돌봄의 영역이다. 사진으로 일상의 영성을 실천하고 있거나 영상 이미지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어떻게 교회 안에서 신학
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신앙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할지는 현대 교회가 생각할 과제라 할 수 있다. 앞으로 6회에 걸쳐 연재될 이 글에서 사진과 신학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부분, 그 역사와 가능성을 다루고자 한다.
사진과 신학, 이 두 단어를 동시에 떠올리는 게 다소 어색하다면 그 이유는 두 단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본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사진이 19세기 중반 이후 수많은 분야의 학문과 서구 문화가 형성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고, 그 역사에 대한 연구가 개별 학문 내에서 활발하게 이뤄져 왔다는 사실을 참고하면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 원인을 사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진은 1830년대 산업사회의 기술혁명이 낳은 발명이다. 그 시기는 서구 사회가 세속화를 겪고 교회의 영향이 급속히 약화되던 때였다. 인간 중심의 사회를 만들려는 운동이 일어나던 시기였고, 기계와 기술은 그런 인간을 돕는 도구였다. 그 이해에 의하면 사진은 인간이 만든 기술로 빛을 조작해 세상을 재현해내는 매우 세속적인 기계였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증언하는 도구였기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대하는 신앙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사진에 대한 다른 이해도 가능하다. 사진은 19세기 중반에 갑자기 나타난 발명이 아니라 서구의 오랜 역사에서 발전시켜 온 개념과 사유가 19세기 기술과 만나 이루어진 것이다. 그 역사를 고찰하면 사진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열등한 이미지
사진과 신학이 더 긴밀하게 소통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 신학의 전통적인 기본 전제에 있다. 바로 신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 대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삼고 있다. 성서에도 이미지를 만드는 행위를 금하는 계명이 있고, 이를 근거로 이미지를 금하고 파괴하던 예를 역사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림으로 설명하는 일은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란 생각도 뿌리가 깊다. 글을 이미지로 해석하면 그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관념도 마찬가지이다. 공부는 언제나 글공부였고, 학문은 문자화된 글이 대상이었다. 고전은 책을 연상시켰고, 이미지를 해석의 대상으로 여기는 일은 흔치 않았다. 이미지를 만드는 예술은 손을 사용하는 작업이지만, 진정한 학문은 머리를 쓰는 것이라는 인식도 있었고, 이미지는 감성을 자극하기 때문에 합리적인 사고를 방해한다는 시각도 있었다. 그림은 가벼운 놀이와 여가의 대상이지 진지한 담론의 형성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생각도 흔했다. 글과 이미지에 대한 차별된 이해는 아직도 남아 있다.
문제는 이런 인식이, 인간이 어떻게 해석하고 인식하면서 사는 존재인지에 대한 이해의 폭을 좁혀왔다는 점이다. 또 최근에는 현대인들의 삶과 문화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이와 연결된 문제는 이런 문제의식이 있어도 기존 학문과 신학의 체제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이를 타파할 방법을 찾기가 쉽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역시 고전적인 학문의 가치인 내적인 성찰과 새로운 배움을 추구하는 자세에서 찾아야 한다. 이미지가 나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 이미지를 어떻게 이해하고 살았는지에 대한 성찰이다. 그리고 이미지의 덕목을 옹호하기 위한 역사, 특히 기독교 역사 속의 수많은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변론들을 살펴보면서 현대 이미지 문화와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 빛의 신학
1839년 사진을 만드는 기술이 세상에 처음 공개되었을 때 그 기묘한 발명품을 지칭하는 합의된 이름은 없었다. ‘포토그래피’(빛의 글)라는 이름으로 최종 정리가 되었지만, ‘힐리오그래피’(태양의 글)라는 표현이 사용되기도 했다. ‘사진’(寫眞)이라는 단어를 인터넷 사전에서 찾아보면 두 가지 정의가 먼저 등장한다. 첫 번째 뜻은 “광학적 방법으로 감광 재료면에 박아 낸 물체의 영상”, 두 번째 뜻은 “물건의 모양을 그대로 그림”이다. 우리말 사전의 ‘사진’ 정의에서는 ‘빛’이나 ‘태양’ 또는 ‘글’이라는 단어는 찾을 수 없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사진기술을 만들어낸 서양에서는 왜 사진을 빛으로 쓴 글이라 부르고, 인쇄된 글에 비유했을까? 사진을 글에 비유한 이유는 회화와 같은 그림과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사람의 손으로 그린 게 아니라, 태양의 빛이라는 객관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재현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빛으로 쓴 글이란 표현이 더 적합하다는 의미였다. 만일 사진의 역사가 유럽이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면 사진을 ‘빛’이나 ‘글’로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진은 세상을 실제로 복사하는 기술이라는 의미에서 ‘베낄 사’(寫)와 ‘참 진’(眞), 이 두 글자로 만족했을 것이다. 19세기 사진이 등장하기까지의 서양 역사를 이어받지 않은 문화권에서 사진기술을 처음 접했을 때, 그 가치를 빛으로 설명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진은 빛을 이해하고 연구해온 오랜 역사의 결과물이었다. 서양에서 그 역사는 철학의 역사였고 또 신학의 역사였다.
플라톤과 같은 그리스의 철학자에게 존재의 본질은 빛을 찾아가는 데 있었다. 빛을 진리로 표현한 동굴의 우화는 지금도 철학적인 삶의 근본적인 자세를 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빛의 근원인 태양은 최고의 선이었고 최상의 이데아를 상징했다. 빛은 모든 형이상학적인 상상력의 근원이었다. 빛이 어떻게 움직이고 작용하며 어떻게 인간이 세상을 볼 수 있게 하는지에 대한 연구는 수학과 과학을 발전시켰다. 이런 역사 속에서 시각은 인간의 감각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등장했다. 과학적인 사고가 등장한 중세는 물론이고 17세기 과학혁명을 이끌던 갈릴레이, 케플러, 뉴턴 등은 모두 빛의 원리와 비전을 연구했다. 중세의 신학자 로저 베이컨(Roger Bacon)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은혜의 원리가 기하학을 통해 표현될 수 있다고 믿었다. 예술가들에겐 기하학 공부를 요구하면서 이를 통해 성서의 진리를 실제로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기존의 성화가 비유적인 해석이었다면, 기하학의 원리를 통해 사람들이 실제로 보는 시각에 맞는 그림을 권유한 것이다. 그는 이미 르네상스 원근법을 예견하고 있었다. 흔히 원근법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적인 시각이 아니라, 사람의 시각으로 사물의 위치를 배치하면서 사람의 눈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근대적이고 세속적인 세상을 만드는 데 공헌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출발은 성서의 말씀을 더 인간의 시각 경험에 적합한 미술기법으로 표현하자는 신학적인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빛을 신학의 주제로 만든 건 성서였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첫 말씀이었고, 요한1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라’ 선언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었고, 교회는 빛의 공동체로 이해되었다. 그 빛은 세상을 보이게 만들었고, 보이지 않는 것을 묵상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이 빛이었기에 빛은 존재의 근거였고, 존재가 아름다운 이유였다. 신학의 역사에서 빛은 진리의 상징이었고, 진리에 다가가는 행위는 빛을 받고 좇는 행위였다. 중세 신학자 로버트 그로스테스(Robert Grosseteste)는 하나님의 빛을 형이상학적으로만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빛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며 인간의 시각과 비전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탐구하여 자연과학의 신학적인 토대를 닦기도 했다. 그에게는 빛을 연구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을 연구하는 일이었고, 그 연구는 세상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방법이었다. 사진은 이런 빛의 역사 속에서 등장했다.
1839년 이전의 카메라는 빛을 이용해 세상을 좀 더 세밀히 관찰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관찰된 이미지를 기록하는 필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카메라는 밀폐된 공간에 바늘구멍을 내면 햇빛에 반사된 대상의 이미지가 어두운 공간의 벽에 위아래가 거꾸로 된 채 드러나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중세의 이슬람과 기독교 신학자들은 그 원리를 이용해 일식(日蝕) 현상을 관찰했고, 빛을 조절해 벽에 남겨진 이미지를 더 선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의 카메라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빛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를 관찰하는 데 쓰였다. 벽에 비친 이미지를 통해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을 주는 카메라는 16세기에 와서야 만들어졌다. 르네상스의 원근법을 이용해 세상을 더 실감나게 그리는 데 도움을 줄 도구를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라 불렀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카메라는 결국 카메라 옵스큐라에 필름을 대서 빛의 이미지를 고정시킨 것이다. 서양에서는 그 빛의 역사에서만 사진의 이해가 가능했다.

202010_sbm1.jpg

| 19세기 사진과 신학이 만나던 순간들
사진기술의 발명가로 인정받는 프랑스의 루이 다게르(Louis Daguerre, 1787-1851)는 자신이 카메라(옵스큐라)에 비친 이미지를 은을 섞은 약품으로 코팅이 된 구리판에 영구적으로 고정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라지는 빛을 잡아 가두었고, 태양으로 하여금 강제로 그림을 그리게 만드는 법”을 터득했다고. 이 말은 아무리 읽어도 과장된 표현이다. 하지만 다게르가 자신을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라 생각했으면 달라진다. 신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는 그 프로메테우스 말이다. 다게르는 19세기 서양에서 사진기술을 연구하면서 빛을 연구하고 인간의 비전을 연구해온 신학의 역사를 알았을 것이고, 그 역사에서 빛의 흔적을 은판이나 필름을 통해 보존한다는 사진의 발명이 갖는 특별한 의미를 잘 알았을 것이다. 그 때문에 다게르는 한순간 유명인이 되었고, 빛을 잡아 가둔 프로메테우스 같은 일을 해낸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실제로 다게르의 발명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에 대한 호평 또는 혹평도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기독교 내의 반응도 다양했다. 그중 세 개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1931년의 글 “사진의 작은 역사”에서 다게르의 발명에 대한 당시 독일 언론의 반응을 전했다. “순간적인 거울상을 영구 고정하겠다는 것이 불가능한 소망이라는 사실은 독일의 철저한 연구로 밝혀졌지만, 사실은 그런 소망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신성 모독이다. 인간이 창조된 것은 신의 형상대로이고, 신의 형상을 인간의 기계로 영구 고정하기란 불가능하다.”1 프랑스에서 그런 기술이 먼저 개발된 사실에 상처 입은 독일의 질투심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반응은 분명 신학적이다. 사진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는 발상 자체가 신을 모독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문제는 사진이 기계로 형상을 찍는다는 데 있었다. 사람이 영감을 받아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그릴 수는 있어도, 영혼이 없는 기계로 그 모습을 찍어내듯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실제로 사진이 기계적이란 논란 때문에 사진의 예술성은 매우 오랜 시간 논란의 대상이었다.
19세기 말 자신의 조직신학 저술(Systematic Theology)에서 사진의 개념을 등장시킨 미국 신학자가 있었다. 바로 코닥 카메라 회사의 대표를 지낸 동생을 두었던 신학자 어거스투스 스트롱(Augustus Strong, 1836-1921)이다. 스트롱은 여러 차례 사진기술을 예로 들면서 신학 이론을 펼쳤다. 네 복음서를 각기 다른 각도에서 찍은 사진에 비유했다. 그 시기는 사진이 과학적인 진실을 말한다는 신뢰가 아직도 높던 때였다. 복음서의 진실이 사진처럼 과학적이란 것이다. 복음서에서 묘사한 그리스도가 실제 사진처럼 정확하다는 그의 주장이나 성서가 엑스레이(X-ray)처럼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든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중생’(重生)이라는 신학의 개념을 카메라의 필름과 비교하기도 했다. 필름에 화학약품을 입혀 준비하는 과정은 하나님이 영혼을 가진 인간을 만드는 과정과 같았고, 필름이 빛에 노출되는 과정은 영혼이 하나님 진리의 빛을 받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고 했다. 아마도 중생에 관한 제일 중요한 비유는 빛에 노출된 필름이 현상되고 인화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중생도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라는 것이라 생각된다. 현대에는 생소한 비유이지만, 조직신학 서적에서 이렇게라도 사진의 메타포가 등장한 것은 처음으로 보인다.
사진이 세상에 등장한 1839년, 영국의 목사 알렉산더 키이스(Alexan-der Keith, 1791-1880)는 사진기라는 새로운 도구를 들고 팔레스타인으로 떠났다. 그가 쓴 Evidence of the Truth of the Christian Religion(기독교 진리의 증거)라는 책은 성서의 예언이 이미 이루어졌고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출판된 지 12년 만에 20회가 넘게 새로운 판을 찍은 베스트셀러였다. 그는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성서의 예언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면 된다고 믿었다. 성서의 예언은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에 이스라엘이 재건되어야 했고, 그 이전에 이미 그 지역은 사람이 살기 힘들 정도로 황폐해졌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1839년 책의 새로운 판을 준비하면서 이제 성서의 예언에 관한 가장 확실한 증거를 자신이 직접 가져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갓 세상에 나온 카메라를 이용해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증거를 찍어오겠다는 의지였다. 그러나 자신의 종말론적인 신학을 증명해줄 사진을 찍기 위한 그의 첫 팔레스타인 여행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키이스 목사가 사진기술이 처음 공개된 해에 사진을 기독교의 진리를 증명해줄 선교의 도구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그 후 사진은 19세기 서양 선교사들의 동반자가 되었다. 키이스에 관해서는 이 지면에서 다시 언급할 예정이다.


1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 외』(길, 2007)


서보명 | 시카고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신학과 철학, 문화이론 등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대학의 몰락』, 『미국의 묵시록』 등이 있다.

 
 
 

2020년 10월호(통권 742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