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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신학·목회 (2020년 9월호)

 

  초기 아케메니드 예후드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제사장과 레위인의 관계
  

본문

 

“초기 아케메니드 예후드 지방의 정치, 경제의 빛에서 바라본 에스겔 40–48장에 나타난 제사장과 레위인의 관계 연구”
한신대학교 일반대학원, 2018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하려면 제출해야 하는 서류 가운데 연구 계획서가 있다. 필자는 목회를 하면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에 평소 관심이 있던 주제를 계획서로 작성하였다. 구약성서에는 제사장과 레위인에 대한 위계 문제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필자의 학위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에스겔 40-48장에서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관계가 엄격히 구분되고 있지만(겔 40:46, 43:19, 44:15, 48:11), 민수기에서는 제사장과 레위인을 구분할 때 오히려 그 이유가 나타나지 않는다.(민 3, 16장) 그리고 신명기에서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위계가 동등한 것으로 나타난다.(신 18:6-8)
제사장과 레위인의 위계가 구약성서 안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약성서 편집 과정에서도 제사장 집단의 갈등이 담겨 있으며, 성서 편집 역사와 제사장 역사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독계열 제사장의 정치권력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제출한 연구 계획서는 에스겔서 연구사에 대한 개인 지도를 받으면서 수정되었고, 논문의 제목은 최종적으로 “초기 아케메니드 예후드 지방의 정치, 경제의 빛에서 바라본 에스겔 40-48장에 나타난 제사장과 레위인의 관계 연구”로 결정되었다.
이 논문은 크게 두 가지 주제로 구분된다. 첫째, 초기 아케메니드 예후드의 정치와 경제를 논의한다. 이 시기는 바벨론 포로기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후 제2성전을 완성시키는 단계까지이다. 둘째, 에스겔 40-48장에 나타난 제사장과 레위인의 관계이다. 이는 에스겔 40-48장을 텍스트로 하여 초기 아케메니드 예후드의 정치와 경제의 관점에서 이 시기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두 집단인 사독제사장과 레위인을 살피는 일이다.

| 초기 아케메니드 예후드의 정치와 경제
초기 아케메니드(Early Achaemenid)는 기원전 539-486년까지의 기간이다. 이 용어를 사용한 대표적인 학자들은 베드포드(Peter R. Bedford, 1996), 케슬러(John Kessler, 2002), 그래브(Lester L. Grabbe, 2006), 미들마스(Jill Middlemas, 2006)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초기 아케메니드의 시기는 대략 기원전 539-515년 혹은 기원전 5세기 말까지이다. 아케메니드 역사에서 다리우스(Darius I)는 이집트를 견제하기 위한 요충 지역으로 예후드(Yehud)를 예의주시하였다. 그러다가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한 다음 그의 권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이후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났고(기원전 486년) 다리우스가 죽은 후 예후드와 이집트는 아케메니드 행정 정책에서 소외되었다. 크세르크세스(Xerxes, 아하수에로)는 예후드와 이집트보다는 헬라 지역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그러므로 초기 아케메니드는 다리우스의 행정 정책이 예후드와 이집트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시기까지 설정하는 것이 옳다고 보며 이 시기는 고레스(기원전 539-532년)부터 다리우스(기원전 522-486년)까지이다.1
예후드는 바벨론 시대 이후 유대 지역을 일컫는 일반적인 용어이다.(단 5:13b, 스 5:1, 8, 7:14, 단 2:25, 5:13a, 6:14) 필자의 학위 논문에서 자주 인용한 카터(Charles E. Carter)는 예후드를 지리적, 정치적 용어로 정의하고 있다.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면서 그달리야는 미스바를 중심으로 이들 지역을 관할하였다.(왕하 25:23, 25, 렘 40:18, 10, 12-13, 41:1, 3, 6-7, 10, 14, 16) 이 정책은 유다 말기를 지나 초기 아케메니드까지 이어진다.
초기 아케메니드 당시 바벨론 지역은 바벨론과 ‘에비르-나리’가 속해 있는 네 지역, 즉 페니키아, 사마리아, 시리아, 아라비아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 지역 가운데 예후드는 유다 말기와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면서 사마리아 속주 가운데 포함되었다. 이러한 행정구역은 초기 아케메니드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학위 논문은 기원전 539-486년까지의 초기 아케메니드 당시 유대 지역을 일컬었던 예후드를 정치와 경제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학위 논문을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이 시기의 자료가 구약성서 안에 제한되어 있지만(에스겔 40-48장, 학개서, 에스라 1-6장, 스가랴 1-8장), 아케메니드 역사 연구에서는 연구 업적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일반적인 아케메니드 역사 연구를 중심으로 자료를 살펴보고 아케메니드 정책 가운데 구약성서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경제 정책 중 농업 경제와 세금 정책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초기 아케메니드의 경제는 농업 경제와 세금 정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일단 아케메니드 정책은 바벨론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다. 바벨론의 행정 정책은 예후드를 중심으로 농업에 종사할 수 있는 사람들을 남겨 두었고 이들이 일정한 세금을 바칠 수 있도록 하였다. 예후드는 대부분 농업 기반 시설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농업 유형(regional agriculture patterns)을 가지고 있었다.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면서 미스바 중심의 경제는 예루살렘 중심의 경제로 옮겨가게 되는데 이러한 기반 경제는 예후드의 세금 정책과 연관이 있다. 샤퍼(Joachim Schaper)는 아케메니드 제국의 성전 정책과 세금 징수와의 관련성에 대해서 주장한다.2 아케메니드 제국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전의 제국이었던 바벨론이 행한 정책들을 제국
초기에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초기 아케메니드 당시 왕의 대리인인 사트라피(Satrapy)들은 재판, 행정, 군사, 재정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사트라피들은 일반적으로 여섯 개의 범주, 즉 농업 생산품, 광물 자원, 시장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 토지세, 가축의 첫 새끼, 인두세와 장인세로 세금을 구분하였다. 이러한 세금은 조공, 관세, 통행세를 포함하여 토지세와 인두세, 장인세와 같은 여러 종류의 세금으로 거두어지고 있었다. 특별히 바벨론이 주로 자신들의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방법 가운데 성전세(temple tax)와 십일조(tithe)는 초기 아케메니드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성전세와 십일조는 예후드에서 거두어들일 수 있는 제국의 주요 재원이었다. 아케메니드 제국은 기금 조성을 위한 목적으로 성전을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창구로 유용하게 활용하였다.3
초기 아케메니드까지 바벨론 정책의 일부를 그대로 가지고 오면서 이를 활용했음을 수용한다면 예루살렘 성전 정책과 아케메니드 제국 정책의 상관관계를 풀어낼 수 있는 실마리를 찾게 된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알트만(Peter Altmann)이 지적했듯이, 샤퍼의 주장대로 예루살렘 성전이 제국의 정책을 위한 주물공장의 역할을 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후드 지역에서 동전이 사용되기 시작한 흔적이 나타나는 적어도 느헤미야까지의 기간 동안 이곳에서 성전과 관련된 어떤 경제적인 활동을 비롯하여 제국을 위해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활동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아케메니드 제국의 집권 초기에는 이러한 제도들이 자리 잡지 못했지만 다리우스를 거치면서 제국의 시
스템이 확충되고 자리가 잡히면서 느헤미야 때에는 이러한 경제 활동이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베드포드(Peter Bedford)는 이러한 시간적인 흐름의 연속성 가운데 이 지역 경제 활동의 중심에는 성전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 또한 스턴(Ephraim Stern)은 아케메니드 시기 동안 예후드 지역의 유대인들의 생활과 경제에서 가장 중심적인 특징은 성전에 있음을 강조한다. 예루살렘에서 성전 재건이 이루어지고 있는 배경이 되는 에스라 1-6장과 학개서, 그리고 스가랴 1-8장은 아케메니드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 체계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세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샤퍼는 유다에서 거두어들인 세금과 이 세금을 아케메니드 중앙으로 보내는 역할 사이에서 주로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한다.5 유다 말기 이후 엘리트들이었던 이들이 권력은 잃어버렸지만 예후드로 돌아오고 나서 성전 재건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되찾으려고 하였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유다 말기 이후 자신의 위치가 강등되고 고착화되었지만 초기 아케메니드 당시 성전과 관련하여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 아케메니드 제국이 성전 제도를 강조한 것은 예후드 지역에서 거두어들인 세금과 제국 사이의 세금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고레스 칙령 이후 성전 재건이 중단되었다가 다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순전히 유대인의 예배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성전 재건과 관련된 아케메니드 제국의 정책은 예후드 지역에서 세금을 내는 사람들과 아케메니드 정부 사이에서 조화롭게 행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다. 이것은 예후드 지역에서부터 중앙 정부에 이르는 세금의 흐름을 일원화하면서 동시에 이것을 세밀하게 조직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샤퍼는 이러한 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집단을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보고 있다.

| 에스겔 40-48장에 나타난 사독제사장과 레위인
성전이 아케메니드 제국의 세금 조달 창고로 활용되었다는 주장은 초기 아케메니드 예후드를 조명해볼 수 있는 에스겔 40-48장에서 잘 드러난다. 에스겔 40-48장은 새로운 성전(40:1-43:11), 새로운 법(43:12-46:24), 새로운 땅(47:1-48:35)으로 구분되며, 사독제사장과 레위인의 위계가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사독제사장은 번제단의 봉헌물을 직접적으로 관리했고(겔 43장) 희생 제의를 수행했다. 또한 율법을 가르치며 필요한 장소에 제의에 대해서 관리도 해야 했다.(겔 44장)
특별히 학위 논문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에스겔 44장 6-16절은 사독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위계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구분은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을 성전에 데려왔기 때문이다.(겔 44:7) 그러므로 이스라엘 족속도 가증하며 레위인 역시 가증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사독제사장과 레위인의 위계가 구분되기 시작했다. 사독제사장은 레위 사람 제사장으로 활동하지만 레위인은 제사장으로 활동하지 못했다. 사독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무 수행을 비교해보자면, 사독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지만(겔 44:15), 레위인은 사람들 앞에서 행한다.(겔 44:11) 사독제사장은 성소 내부에서 활동하지만(겔 44:16), 레위인은 성소 문 옆에 서 있다.(겔 44:11) 레위인은 성소에서 일할 수 있지만 그 일은 제사장을 돕는 일이다. 이들의 일은 사람 앞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제사장은 성소에 출입할 수 있고 제사장의 일은 하나님 앞에서 진행된다. 사독제사장은 하나님이 계시는 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레위인은 들어갈 수 없다. 이방인을 비롯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의 활동 범위가 정해지면서 이제 새로운 위계로 자리가 잡힌다. 이후 제2성전이 구체화되는 시점에서부터 성전과 관련된 일은 사독제사장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성전과 관련된 이들의 역할은 결국 아케메니드 제국으로 들어가는 세금 징수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케메니드 제국은 사독제사장의 권한을 철저하게 인정하면서 동시에 성전 세금과 관련된 일을 독점하도록 조정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에스겔 43장에서 하나님의 영이 돌아오면서 번제단이 봉헌되는 과정에서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겔 43:18-27) 이러한 사독제사장의 주도적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레위인을 내치지 못한 것은 여전히 성전과 관련하여 레위인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레위인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성전과 관련된 주도권에서는 철저하게 레위인을 배제하면서 사독제사장은 자신과 관련된 족보를 정비하며 레위인과 관련한 모든 자료를 수정해나갔다.
이러한 수정 작업 가운데 하나는 에스겔 47장 13절부터 제시되는 땅의 분배에서 나타난다. 사독제사장의 땅에는 성전이 있지만 레위인의 땅에는 성전이 없다. 결국 에스겔 40-48장의 성전 회복 프로그램은 초기 아케메니드의 제사장과 레위인의 위계를 확실하게 구분하면서, 제사장과 관련된 정치권력에서 사독제사장이 주도적인 위치에 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필자의 박사 학위 논문은 포로기와 초기 아케메니드를 거치는 예후드 지역의 정치, 경제적 상황과 관련하여 특별히 에스겔 40-48장을 사회과학 비평으로 재구성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학위 논문을 마치기까지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구약성서 내에서 지엽적으로 드러나는 사실들을 재구성한다는 소명감으로 학위 논문을 마무리하였다. 앞으로 진행할 연구는 초기 아케메니드 시대 예후드 지방의 사회적 정황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우선 아케메니드 정책과 관련된 연구를 진행하고, 이를 토대로 제2성전 문헌(에스겔서, 에스라-느헤미야서, 학개서, 스가랴서)을 연구할 예정이다. 나아가 여력이 된다면 오경의 편집 과정에서 아케메니드 정치권력과 제사장의 연결고리를 확인하는 작업도 진행하고 싶다.


1 초기 아케메니드와 초기 페르시아에 대한 용어에 관해서는 다음의 논문 각주 3을 참조하라. 김지훈, “초기 아케메니드 예후드(Early Achaemenid Yehud): 경계와 정착 그리고 인구”, 「구약논단」 74(2019): 315-316; Pierre Briant, From Cyrus to Alexander: A History of the Persian Empire(Winona Lake, IN: Eisenbrauns, 2002), 107-146.
2 Joachim Schaper, “The Jerusalem Temple as an Instrument of the Achaemenid Fiscal Administration”, Vetus Testantum 45(1995): 528-539.
3 Christopher Tuplin, “The Administration of the Achaemenid Empire”, in Coinage and Administration in the Athenian and Persian Empires: The Ninth Oxford Symposium on Coinage and Monetary History(ed. Ian Carradic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149-153.
4 Peter Altmann, “Tithes for the Clergy and Taxes for the King: State and Temple Contributions in Nehemiah”, Catholic Biblical Quarterly 76(2014): 215-229.
5 Joachim Schaper, Priester und Leviten im achämenidischen Juda: Studien zur Kult-und Sozialgeschichte Israels in persischer Zeit(FAT 31; Tübingen: Mohr Siebeck, 2000), 121-125.



김지훈 | 한신대학교 신학과에서 구약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신대학교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논문으로 “초기 아케메니드 예후드(Early Achaemenid Yehud): 경계와 정착 그리고 인구”가 있다.

 
 
 

2020년 9월호(통권 7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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