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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신학·목회 (2020년 9월호)

 

  몽양 여운형과 기독교(2)
  

본문

 

| 중국 유학시절과 기독교 활동
훗날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呂運弘)이 형을 회고한 글의 일부이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우리(형제)에게 애칭삼아 아호(雅號) 하나씩을 지어 주었는데 형님은 ‘천리구’(千里駒)라 했고 나는 ‘만리붕’(萬里鵬)이라 했던 일이 있다. 형님이 나에게 말을 계속했다. “얘, 너는 ‘만리붕’이니 태평양 수만 리를 건너 미국으로 가라. 나는 ‘천리구’인 고로 중국 대륙으로 가겠다.1

이런 대화를 나눈 때가 언제인지는 알수 없으나 ‘말이 씨앗’이 된다고 동생 여운홍은 미국으로, 여운형은 중국으로 떠났다. 그가 중국을 향해 떠난 날짜는 자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1914년 말이며 첫 도착지는 청도(靑島)였다.2 오래전부터 함께 동지적 관계를 맺고 지내던 후배 조동호(趙東祜)와 함께 중국 유학길에 오른 여운형은 청도에서 중국의 고도(古都)인 남경(南京)에 있는 진링대학교(金陵大學校)에 입학했다. 그가 특별히 진링대학교를 택한 것은 이 대학이 기독교 대학이었기에 평양신학교에서 다하지 못한 신학 공부를 마칠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진링대학교 입학 추천서를 써준 언더우드가 “당신과 같은 사람이 끝까지 신학을 연구할 것 같지는 않소. 조선의 청년들은 모두 정치적 지향성이 강하오. 나는 김규식(金奎植)에게도 이 같은 말을 했는데, 당신도 분명 정치운동을 할 것이오”3라고 했다고 한다. 여운형의 생애를 생각할 때 적중한 ‘예언’이라 하겠다. 아무튼 대학에 입학은 했으나 영어로 강의하는 수업을 듣기에는 너무도 어려움이 많았다. 여운형은 당시 형편을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처음 입학해서 중국어도 모르고 영어도 몰라서 여간 고생을 하지 않았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우선 영어만은 속히 해야겠다는 결심 밑에서 밤이 깊도록 자전(字典)과 싸워가며 애쓰던 일은 아직도 눈에 선하며, 처음엔 영어책을 펼치면 한 페이지에서 내가 아는 단어로는 불과 2, 3개였기 때문에 연필을 가늘게 깎아가지고 책장 전면에 새까맣게 자전을 들춰가며 조선말로 번역해서 달아가지고는 6개월간 분투했더니 영어와 한어(漢語)를 대략 다 읽게 되었습니다.4

이때 여운형의 나이가 28세였음을 감안할 때, 6개월 만에 영어와 한어를 ‘대략’ 다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은 뼈를 깎는 노력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또한 외국 유학생들이 처하는 고독함에 힘들어하기도 했다. 당시 여운형과 유학생활을 함께한 사람으로 추정되는 이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여운형은 “예수교 조사로 있다가 진링대학교을 다니던 여씨는 일개 범상한 불평객에 불과했다. 풍옥상(馮玉祥)5의 군영(軍營)에서 바람벽에 붙은 표어 ‘亡國之人 不如聚之家狗’(망국인은 모여든 개들만도 못하다.)란 문구를 보고 돌아서서 훌쩍훌쩍 우는 그런 ‘센치메탈’한 성격의 낭인(浪人)이었다.”6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매사를 긍정적, 적극적으로 사고하며 운동을 즐겨했던 여운형은 곧 우울증에서 벗어나 어린 동료 학생들과 잘 어울리며 즐겁게 생활했다. 특히 장대한 체구에 힘이 좋았던 그는 중국인 학생들과 함께 운동을 즐기면서 중국어 실력도 남들보다 훨씬 빠르게 익힐 수 있었다. 타고난 그의 활달한 성품과 뛰어난 적응력의 결과라 할 것이다. 이렇게 3년간 대학시절을 보냈지만 졸업에 이르지는 못했다. 2년간 더 공부해야 했는데 가족까지 거느린 처지라 더 이상 학업을 지속할 형편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7
진링대학교 유학생활을 중도에 하차한 그는 1916년 말 상해로 옮겨 직장을 찾았다. 상해에서의 첫 직장은 영국인 선교사 에드워드 에반스(Edward Evans)가 경영하는 종교도서관인 이문사서관(伊文思書館)의 영문사무원이었으나, 이듬해 정월부터 협화서국(協和書局)의 위탁 판매부 주임으로 옮겼다.8 협화서국은 상해 미국교회연합회가 경영하였는데 미국인 선교사 조지 피치(George A. Fitch)가 운영 책임을 맡고 있었다. 피치 선교사는 중국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 태생으로 아버지 때부터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한 대표적인 재중 미국인 선교사였다.9 그는 1909년부터 상해 기독교청년회(YMCA) 총무로 활동하면서 당시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전도유망한 젊은 중국인 엘리트를 중심으로 중국 내에 기독교 사회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명성과 신망이 높았던 선교사였다.10
이 시기 중국 기독교청년회는 기독교 사회운동의 전위(前衛)로 공중보건계획, 아편금지운동, 각종 스포츠・오락 활동, 교육・사회적인 쟁점에 관한 강연회 개최 등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유스호스텔 운영 등을 통해 많은 회원을 확보했다. 군벌 간의 전쟁이 만연한 극심한 혼돈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기독교청년회 운동이 전국 도시를 중심으로 경이적인 성공을 거둔 점은 주목된다. 그리고 이 같은 성공의 배후에 외국인 선교사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11
여운형이 상해 기독교청년회에서 활동하던 조지 피치를 만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조지 피치는 나라를 잃은 조선과 조선인에 대해 매우 동정적이었다. 특히 여운형을 도와 상해에 있는 조선인을 위해서 서신 왕래를 비롯해 기타 연락의 편의를 제공해주는 등 큰 도움을 주었다. 여운형이 이 시기에 30-40명에 달하는 한인들의 도미 유학을 알선할 수 있었던 것도 조지 피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여운형은 3・1운동 이전인 1918년에 상해에 거류하던 500명가량의 교포들의 친목단체인 교민단(僑民團)을 신석우(申錫雨) 등과 함께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다. 그는 교민 사이의 친목 도모와 취업 알선, 그리고 교민 사회의 민원과 분쟁을 조정하면서 신임과 덕망이 높은 ‘준수’한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1918년 가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 이듬해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준비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피압박 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논의가 있을 것으로 예견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여운형은 이에 대비하여 이 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를 작성하는 일에 나섰다. 여운형은 장덕수(張德秀) 등과 함께 작성한 청원서를 들고 조지 피치를 찾아가 교열을 부탁했고, 피치 선교사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12 그뿐만 아니라 1919년 말에 여운형의 도쿄(東京)행을 주선하기 위한 막후 활동을 적극 전개한 인물도피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술하기로 한다.
여운형의 상해 생활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회 활동이다. 그는 협화서국에 근무하면서 동시에 교민단 단장, 그리고 상해 한인교회 일로 매우 바쁜 생활을 하였다. 상해 교민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시작한 것은 1913년 최재학(崔在鶴)13이 상해에 오면서부터였다. 1914년 가을부터는 평양신학교 동기생 김종상(金鐘商)에 이어 선우혁(鮮宇爀)이 전도를 맡았다. 처음에는 미 해군 YMCA, 나중에는 중국 기독교청년회관(YMCA)을 빌려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 인원은 30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교회 임원을 선임했는데 전도인으로 여운형이 선임되고 서기에 임학준(林學俊), 회계에 한진교(韓鎭敎)가 뽑혔다.14
이처럼 상해 한인교회가 기틀을 잡아감에 따라 전담 목회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여운형은 1918년 9월 3일 평북 선천북교회에서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7차 총회에 상해 한인교회 대표로 참석하여 “목자 업난 양과 갓흔 우리 교우가 본인을 대표로 보내여 출가한 딸이 본가에 와서 달나는 것 갓치 간졀 청원”하였고 초교파 신문인 「기독신보」에 “상해에 재한 조선인의 상황”이란 글을 기고하여 상해 한인교회 설립 역사와 상황은 물론 상해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 교포사회의 실상을 본국에 알렸다.15 그러면서 여운형은 정주 오산학교의 “李昇薰氏(이승훈 씨)를 만나 國外(국외) 情勢(정세)와 國內(국내)에서 할 일을 報告兼討議(보고 겸 토의)하고 서울로 와서 李商在(이상재)와 같은 報告(보고)와 討議(토의)를 하고” 그해 10월 상해로 복귀하였다.16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상해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따라서 상해 한인교회도 점차 확장해나갔다.
그런데 여운형이 1918년 9월 장로회 총회 참석을 표면적 이유로 국내에 들어와 이승훈과 이상재를 만나 “정세 보고와 토의”를 했다는 사실은 6개월 후 일어난 3・1만세운동과 관련지어 살펴볼 대목이다. 여운형과 함께 상해 한인교회 및 신한청년단에서 활동한 선우혁은 1919년 1월 21일경 비밀리에 입국하였다. 그리고 바로 선천에 있는 이승훈을 찾아가 신한청년당의 결성 경위 등을 설명했다. 특히 신한청년당 이름으로 파리강회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독립을 청원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전했다. 이는 국내에서 3・1만세운동이 발발하기 직전의 일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여운형의 신한청년당 결성이 3·1운동의 단초(端初)가 된 것이다.
여운형은 상해에서 교민들의 자녀교육을 위해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세워 운영하는 사업도 진행했다. 여운형은 상해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17년 봄 교민 자녀들이 중국어를 몰라 중국 학교에 입학할 수없는 형편을 알고 학교 설립에 나섰다. 학생 5명으로 시작한 인성학교는 이후 점차 늘어나 1929년에는 50여 명으로 늘어났다. 여운형은 9년간 교장을 맡았으며, 이후 한글학자 김두봉(金枓奉)과 선우혁 등이 교장직을 맡아 교민 자녀들을 위한 교육사업은 지속되었다.

| 일본 방문과 조합교회의 막후공작
여운형은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이후 ‘임정’으로 약칭) 수립과 관련해 의견을 달리했다. 그는 임정의 수립보다는 정당(政黨)을 결성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입장이었다.17 앞서 언급한 신한청년당을 결성한 것도 이러한 연유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또한 임정 헌장에 ‘舊皇室(구황실)을 優待(우대)함’이라는 조문을 넣는 데도 강하게 반대하였다. 이 밖에 임정의 국호에 ‘大韓’(대한)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도 합당치 않다는 입장이었다. 한마디로 임정의 성격이 봉건사상과 전통적 관념의 껍데기를 벗지 못한 채 파쟁을 일삼고 있는 점에 우려와 불만이 있었다.18 이러한 이유 등으로 여운형은 초기부터 임정과 약간의 간극(間隙)이 있었던 것이다. 반면 상해 거류민단 단장으로 상해 교민들을 돌보는 교육사업과 교회봉사 활동, 그리고 조지 피치를 비롯한 중국 기독교계 지도자 및 서양인 선교사들과의 폭넓은 교제를 통해 국제적 인맥을 쌓아갔다.
이상과 같은 여운형의 다양다기한 행보와 활동은 일본 정보망에 포착되었다. 3・1운동 이후 조선의 식민통치 정책을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정치’로 전환하기로 한 일제 당국은 여운형을 주목하였다. 이즈음 상해 주재 일본공사관 무관인 사토(佐藤三郞)가 본국에 보낸 서한에 “조선인에 대한 영구적 방책은 그들 조선인 사이에 이미 내분이 일고 있으므로 그 틈을 교묘히 편승, 이용하여 조선 내지의 그들 정객 사이의 연락을 차단하는 것이 첩경”19이라고 했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임정 내부의 교란과 국내 연락 차단에 이용할 인물을 찾았고, 이에 적합한 인물로 여운형을 지목했다. 임정의 외무차장이면서도 임정과 거리를 두고 있는 여운형이 가장 적합하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가 기독교인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여운형 회유 및 유치 공작에 일본 기독교 목사들을 동원했다.
이 공작에 일본기독교청년회 총무 후지타(藏田九臯)와 후루야(古屋孫次卽) 및 와다세((渡瀬常吉)20가 동원되었다. 후루야는 먼저 여운형이 평소 존경하며 가까이 지내고 있는 조지 피치를 사이에 넣어 회유 공작에 착수했다.21 이즈음 여운형은 독립운동을 선전할 목적으로 중국에 거주하며 활동하는 서양인들을 찾아다녔는데, 특히 중국기독교청년회 총무인 조지 피치를 자주 만났다. 이러한 여운형의 동향을 파악한 일본은 피치를 중간에 세웠다. 조지 피치가 여운형에게 “일본 정부의 초대가 있으니 생각이 있으면 오라.”라는 전보를 보낸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전보를 받은 여운형은 ‘그럴 생각이 없다.’는 답장을 보냈지만 이때부터 여운형의 도일 공작이 은밀하게 추진되었다.22
여기서 여운형의 도쿄 방문 경위를 상술할 여유가 없기에 기독교와 관련된 부분만 추려보기로 한다. 3·1운동으로 큰 충격을 받은 일본 정부는 무마책의 일환으로 임정 요인 중 영향력 있는 인물을 도쿄로 초치하려 했다. 이 계획은 일본 육군성에서 발의했으나 그 성격상 식민지 문제 담당인 척식국(拓殖局)이 맡았다. 그런데 이 공작에 ‘행동대원’으로 동원된 실무진이 일본 조합교회(組合敎會) 목사들이었다. 미국에 체류하다가 귀국하여 해군성으로 촉탁된 후루야 목사가 밀명을 받고 급거 상해로 왔고, 경성학당(京城學堂) 책임자로 있다가 1907년 일본 조합교회 목사로 변신, 조선 기독교의 일본 기독교화를 도모한 와타세, 그리고 상해 기독교청년회 간사(총무)인 후지타 등이 공작에 투입되었다.
밀명을 받고 상해로 파견된 후지타와 후루야는 당시 70세의 원로 선교사인 조지 피치를 내세웠으나 앞서 언급했듯 성사되지 못했다. 여운형은 신변의 안전 등을 이유로 일단 제의를 거절했으나 이후 회유책은 더욱 집요해졌다. 일본 본국에서 밀명을 띠고 상해로 달려온 전 평양복심법원(平壤覆審法院) 서기장 출신 무라카미(村上唯吉)가 파견된 것도 이때였다. 상해에 도착한 그는 “난 조선의 벗이다”, “조선 내에서 일어난 만행은 정말 잘못된 일이나 이는 조선 총독의 과실이지 일본 정부의 정책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총독을 바꾼 다음에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니 잘 양해해달라.”23라는 등 당시 고조되어 있던 상해 한인사회의 반일감정 무마작업에 나섰다. 무라카미와 후지타는 주일에 조지 피치의 안내를 받아 여운형이 실질적으로 목사로 있는 교민교회를 방문하는 등 여운형에게 접근해왔다.24
일본 조합교회 측은 왜 여운형의 유치 공작에 이토록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일까. 이에 대해 강덕상(姜德相) 교수는 일본 조합교회의 왜곡된 ‘애국심’과 ‘돈’에 대한 물욕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후지타와 후루야 등이 나선 이면에는 이들이 당시 만주 봉천(奉天) 등지에 조합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상당한 자금이 필요했는데 이 공작에 협력하여 일본 정부와 자본가들로부터 공작금과 기밀비를 타내려는 속내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1만 2,000냥의 기부금을 받아 그 돈으로 중일 조합교회에 필요한 부지와 건물을 구입했다고 한다.25
한편 조선에서 조합교회를 확장시킨 와타세가 이 공작에 적극 참여한 이유도 3・1만세운동 이후 조선 내의 조합교회 교세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부심하고 있던 때 제의를 받고 적극 나서게 된 것이다. 와다세를 이 공작에 끌어들인 것은 유일선(柳一宣), 선우순(鮮宇筍), 차학연(車學淵) 등 한인 출신 조합교회 목사들을 이용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특히 유일선은 여운형이 승동교회에서 조사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인물이라 이용 가치가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 유념할 때 당시 일본 조합교회 목사들은 “명목상 목사일뿐 부업이었고 10여 년간의 그들의 본업은 총독부의 앞잡이었다. (중략) 선우순, 유일선 등도 실로 종교라는 가면을 쓴 고등형사로서 적의 졸개 노릇을 한 자이다.”26라고 질타한 당시 「독립신문」의 기사는 크게 틀리지 않았다 할 것이다. 일본 측의 적극적인 유인책과 여러 우여곡절 끝에 여운형은 1919년 11월 14일 상해를 출발하여 나카사키로 향하는 여객선에 올랐다.27 당시 임정 내에서는 도일하는 여운형에 대해 ‘나라를 팔아먹는 배신자’라며 비난의 소리가 높았다. 이렇게 시작된 3주간의 일본 방문 기간에 여운형은 나카사키에서 시모노세키로, 다시 특급열차로 교토를 거쳐 도쿄에 동년 11월 18일에 도착, 고가 렌조(古賀廉造) 척식장관과 와다세, 그리고 백남훈(白南薰) 등 재일YMCA 학우회 관계자 등 30여 명의 마중을 받고 제국호텔에 투숙했다. 이후 바쁜 일정 가운데 11월 20일 오전에는 3시간에 걸친 척식장관과의 회담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고가렌조는 “조선은 자치가 적절하다. 귀하가 자치운동을 한다면 현재 조선에 투옥된 사람을 전부 석방시키겠다.”라고 하며 조선 내 자치운동에 나서줄 것을 제의했다.
이 부분에 대해 훗날 여운형은 이렇게 회상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의 독립은 절대 허용하지 않겠지만 장래에는 정도가 진행되면 자치를 줄 것이니, 당신은 국외에서 독립운동 하는 것을 그만두고 조선으로 돌아가 총독부와 협의하여 조선 민족을 선도 노력해주시오. 그러면 상당한 지위 및 그에 응하는 자금을 제공할 것이며 현재 감옥에 있는 사람도 당신이 면회하여 협력한다고 동의하는 사람은 방면해주겠소.”28 이 밖에 고가는 “만주에 척식회사를 설치하여 재만조선인의 구제사업을 하는 것은 어떠냐”, 그렇게 한다면 “개인적으로 어디까지 원조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거금 30만 엔 매수금을 준비하고 있다.”29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여운형에게 던진 ‘미끼’는 자치제 운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의 절대독립은 불가능하니 먼 훗날의 독립을 위해 우선 자치를 청원하도록 여운형을 ‘자치운동 전도사’로 회유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내심을 이미 간파하고 어떠한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품고 적지(敵地)를 찾은 여운형은 이에 당당하게 맞섰다. 즉 ‘자치제 운동’ 운운하는 고가의 제의에 오히려 한국 독립운동의 4대 원칙으로 반격을 가했다. 첫째, 독립은 한국 민족의 복리를 위한 것이다. 둘째, 한국의 독립은 일본의 신의(信義)를 위해서도 좋다. 셋째, 한국의 독립은 동양 평화에 기여할 것이다. 넷째, 세계 평화에도 도움이 된다. 이에 대해 고가는 “평화의 보장은 실력만이다. 구미인(歐美人)의 동양 정책은 동양의 구미화(歐美化)이기 때문에 실력이 없는 조선이 독립하는 것은 동양 평화를 파괴할 위험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한일합병이 필요하다.”30라고 반박했다. 이에 여운형은 “평화의 진수는 정신적 융화”에서 비롯되며, 특히 한국의 독립은 ‘신(神)의 의지’라는 점을 힘주어 강조했다.31 조선의 독립이 그가 믿는 하나님의 뜻임을 천명한 것이다.
이렇듯 여운형은 그가 신앙하는 기독교 정신과 사상을 결정적일 때마다 적절하게 구사했다. 그의 사상 저변에는 늘 기독교적 사상이 배면 깊게 깔려 있었다. 이 점과 관련해 최상용(崔相龍) 교수는 “여운형의 사상 요인으로는 왕도적 도덕관과 기독교적 인간관을 들지 않을 수 없다.”라면서 “여운형의 무계급 사회에 대한 이상은 그의 사상 형성에 중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전통 유교의 도덕관과 기독교적 평등사상과 쉽게 결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왕도적 이상과 기독교적 휴머니즘이 그에게 계급투쟁이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 거부감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32라고 했다.
여운형을 일본으로 초치한 일본 정부의 회유책은 마치 이 공작에 조선 지배의 사활을 건 듯 매우 적극적이었다. 3주간의 체류 기간에 일본이 국빈에 버금가는 후한 대우를 한 것이며, 그와 만난 각계 인물들의 면면을 볼 때 더욱 그러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융숭한 대접과 국빈급 대우에도 불구하고 여운형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이를 역이용하여 조선 독립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유감없이 표출하였다. 기대 이상의 개가를 올린 쾌거였다. 일본을 향해 떠날 때 높았던 비난의 소리가 잦아들고 ‘외교적 개가’라는 평가가 나온 것은 너무도 당연하였다.
한편 일본 체류 기간 동안 미리 잡혀진 일정으로 매우 바빴음에도 불구하고 여운형은 일본에 거주하는 옛 신앙의 동지들을 만나고 교회를 방문하는 일을 빼놓지 않았다. 그는 11월 21일 요코하마에서 평양신학교 동기이자 1914년 상해 교민교회 조사로 함께 활동하며 한인 유학생들의 도미 유학을 도왔던 김종상(金鐘商) 등 수많은 유학생들과 동지들을 만났다. 특히 김종상과는 남다른 감회가 있었을 것이다. 김종상은 당시 요코하마에서 여관업을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일본에 체류 중인 조선인 학생들이 미국 등지에 밀항하는 일을 주선하는 일종의 독립운동을 하고 있어 일제 당국으로부터 ‘요시찰 갑호’의 딱지가 붙어 있던 인물이었다.33 이 밖에도 일본 조합교회의 총본산이라 하는 아카사카(赤坂)의 렌난자카교회(靈南坂敎會)와 도코교회(東光敎會), 오모리교회
(大森敎會) 등을 방문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와다세, 기무라 등 일본 조합교회 목사들의 방문 요청이 있었지만,34 상해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는 여운형 뜻이기도 했을 것이다.

| 여운형의 인맥과 기독교 신앙
여운형의 인맥은 매우 넓고 다양했다. 특히 15년간(1914-29)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맺은 넓은 인맥은 한마디로 국제적이었다. 상해 활동 초기에는 조지 피치 등 기독교 관련 인물들과 주로 교제했으나, 해를 더해 갈수록 보폭을 넓혀갔다. 특히 1918-21년 모스코바 극동피압박민족대회 참가를 전후하여 그 보폭이 훨씬 확장되었다. 모스코바에서 레닌(V. I. Lenin)을 비롯한 지노비예프, 트로츠키 등 러시아 공산당 거물급 지도자들을 만났는가 하면, 중국 신해혁명의 지도자 쑨원(孫文)과 마오쩌둥(毛澤東) 등을 수차례 만났으며, 그런 가운데 쑨원의 개인 고문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정식 교수의 평전35에서 지적했듯, 여운형의 인맥과 활동 공간은 대단히 넓고 방대했다. 당시 한국인으로서 그처럼 국제적 인맥과 전 지구적인 활동 반경을 지닌 인물은 없었을 것이다. 다만 훗날 해방공간에서 여운형의 운신의 폭이 좁아진 점을 생각할 때, 1945년 이후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과의 인맥을 갖지 못한 점이 아쉬움이라 하겠다.한 사람의 크기는 그 주위의 인물들을 보면 안다는 말이 있듯, 여운형은 당대 한인으로서는 가장 화려한 인맥과 넓고 큰 공간에서 활동한 ‘세계화’(global)된 인물이었다. 필자는 이를 가능하게 한 이면에 기독교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에 관한 보다 천착된 연구가 필요하다. 그에 대한 시론(試論)의 하나로 국내 기독교 인사와의 관계 한두 가지를 소개하기로 한다.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과 관련된 일화이다.
1920년 상해에서의 일이다. 3・1만세운동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일본의 조선통치 문제가 세계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이 조선 시찰에 나서게 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그런데 미국의원단 일행은 서울 입국에 앞서 상해를 경유했다. 바로 이때 여운형은 상해 교민단 단장 자격으로 미국의원단 일행 환영회를 개최하였다. 환영회 자리에 임정을 대표해 안창호가 참석했고, 상해 거류민단을 대표하여 여운형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여운형은 다음과 같은 요청을 미국의원단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이에 관해 여운형이 ‘신문조서’에서 진술한 내용에 주목해보자.

<문> 그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가?
<답> 北京(북경)호텔에서 同團(동단) 외교부장 뽀-타-씨와 장시간 회담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나는 것은 조선에 가면 實情(실정)을 충분히 視察(시찰)해 달라 했고 朝鮮(조선) 事情(사정)을 누구에게 청취하려거든 李商在(이상재) 씨를 만나라고 했고 日韓合倂(일한합병은)은 米國(미국)에도 책임이 있다. 日露戰爭(일노전쟁) 후까지 미국은 조선에 公使(공사)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일한합병이 無理(무리)한 것을 보고도 아모런 발언도 없이 公使(공사)를 撤收(철수)시키고 말았다. 이런 것은 조선의 眞相(진상)에 충분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이니 今後(금후)는 충분한 시찰과 이해 밑에서 우리 獨立運動(독립운동)에 積極的(적극적) 援助(원조)가 있기를 바란다는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되오.36


여운형은 미국의원단 일행을 상해에서 만나 북경까지 동행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해줄 것을 부탁하며, 특히 작금의 조선 사정을 정확하게 청취하려면 월남 이상재를 만날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여운형이 평소부터 이상재를 신뢰하고 존경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위의 내용에서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책임이 미국에 있음을 강조한 점이 주목된다. 1905년 11월 을사늑결(乙巳勒結)이 체결되자 대한제국에서 제일 먼저 공사관을 철수한 나라가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한 점이 매우 돋보인다. 그만큼 여운형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매우 밝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한 사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위의 일이 있은 지 2년 뒤인 1922년의 일이다. 월남 이상재는 1922년 4월 4일부터 9일까지 중국 북경에서 열린 제1차 WSCF(만국기독교학생동맹) 세계대회에 한국 기독교청년회 대표로 참석했다. 한국대표단은 회장 이상재, 총무 신흥우(申興雨), 간사 이대위(李大偉)와 이화학당 김활란(金活蘭), 김필례(金弼禮) 등이었다. WSCF 창립 25주년 기념총회인 이 대회에는 30여 개국에서 700여 명이 참석하여 칭화대학(淸華大學)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었다.37 그런데 이 대회 기간에 이상재는 뜻밖에 손정도(孫貞道)와 여운형을 만났다. 손정도와 여운형은 임정에서 노선을 같이하는 의기투합한 사이였다. 1919년 5월 상해 주재 일본총영사가 본국에 보낸 한 보고에 “손정도, 여운형, 이시영 3명에 대해 정치범으로 체포장을 발부하기로 했다.”라면서 “손(孫)은 ‘사기죄’로, 여(呂)는 ‘사기협박죄’로, 이(李)는 ‘강도교사죄’로 체포하기로 했다.”38라는 내용이 있다. 당시 세 사람은 상해 한인사회와 임정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39 상호 두터운 기맥(氣脈)을 통하는 사이였다.
이상재가 북경에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여운형과 손정도 두 사람은 북경까지 달려왔다. 당시 임정 내부에서 일고 있는 분란을 수습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임정은 노선갈등과 대립, 이승만 탄핵 문제, 그리고 모스크바 자금 40만 루블 문제 등으로 내분이 매우 심각했다. 이에 두 사람은 북경에 온 이상재를 찾아 “귀국하지 말고 상해로 가서 임정 내분을 수습해달라.”라고 청원했다.40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이상재와 가까운 사이였다.
손정도는 105인사건 이후 1년간의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1914년 동대문교회(東大門敎會) 목사로 파송받을 때 정동교회(貞洞敎會) 최병헌(崔炳憲) 목사, 이승훈, 그리고 월남 이상재의 도움을 받은 인연이 있었다. 이후 정동교회 목사로 시무하면서 이상재와 더욱 가까워졌다. 여운형 또한 1907년경부터 기독교청년회(YMCA)에 출입하면서 이상재를 선생으로 모시며 존경하고 따랐다. 최근 발견된 사진[1913년 8월 1일 조선기독교청년회 제1회 학생연합회 하기(夏期) 대사경회(大査經會) 기념사진]을 보면 이상재와 여운형이 함께 앞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여운형은 평양신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이때가 여름방학 기간이라 특별 강사로 참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여운형과 손정도는 북경에 이상재 선생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북경에서 상해까지 달려와 임정 분규를 수습해줄 것을 부탁할 만큼 상호 신뢰가 두터웠던 사이였다.41 그러나 이러한 청원을 받은 이상재는 “나까지 조국을 빠져나가면 국내에 있는 동포들이 불쌍하지 않소.”라면서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한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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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맺음말
여운형의 60여 년의 생애와 활동, 그리고 행적의 보폭은 너무도 크고넓다. 이념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동학사상에서 인간평등의식에 눈을 뜬 후 기독교에 입교하여 전도자로서 한동안 활동했으나, 이에 머물지 않고 다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 이념과 사상의 외연을 확대하였다. 여운형의 이념적 편련은 한마디로 재단할 수 없을 만큼 변화무상했다. 그러나 그의 정신 저변에 깊게 각인되어 있는 정신은 역시 기독교와 기독교 신앙이었다 할 것이다. 그는 1929년 여름 상해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검사의 신문을 받았는데 그 신문조서 가운데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문> 너는 맑스의 唯物史觀(유물사관)과 같은 사상에서 하는 말인가?
<답> 唯物論(유물론)을 읽은 관계인지 모르오. 그러나 나는 한편 基督敎(기독교)를 信仰(신앙)해서 ‘神’(신)이란 관념이 아모래도 腦裏(뇌리)에서 떠나지 않아서 사실인 즉 煩悶(번민)하고 있소. 나는 唯物論(유물론)이 唯一(유일)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소.


위의 신문 내용에서 보듯, 검사는 여운형이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젖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냐고 물었다. 여운형의 여러 행적과 활동을 볼 때 그를 사회공산주의자로 규정할 만한 점이 없지 않다. 1921년 말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피압박약소민족대회 참석을 시작으로 이후 행적을 돌아볼 때 이를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 시기 그가 탐독했다는 서적 면면을 보아도 그렇다. 여운형 또한 “유물론을 읽은 관계인지 모르오.”라고 답하며 이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여운형은 유물론과 관련된 여러 서적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우리말로 처음 번역하기도 했다. 그만큼 사회공산주의에 한때 심취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뒤의 진술에 주목해보자. “나는 한편 기독교를 신앙해서 ‘신’이란 관념이 아모래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서 사실인 즉 번민하고 있소.” 이 말을 한 때는 1929년 여름, 그러니까 여운형이 사상적으로 사회공산주의에 깊게 경도된 시기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모스크바를 다녀온 1920년대 초반 이후 다소 사상적 회의가 없지 않았지만 1920년 말까지 그의 독립운동의 이념적 기반은 여전히 사회공산주의에 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위의 진술에서 보듯 이러한 사회공산주의에 ‘물젖어 있던’ 시기에도 그는 번민했다. 그 이유는 기독교를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라는 관념이 머릿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진술의 진정성 유무를 놓고 이론(異論)이 있을 수 있으나, 필자는 이 진술이, 여운형의 일종의 ‘신앙고백’으로 보아
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1919년 11월 27일 제국호텔에서 연설을 마친 후 여러 질문을 받았을 때 아래와 같은 요지의 발언에서도 그의 기독교 신앙인의 단면이 짙게 풍긴다.

(전략) 나는 열렬한 기독 신자로 기독교는 세계에 담을 쌓으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평화와 복지를 주라는 신의 명령에 따라 세계의 모든 것에 유쾌한 천지를 개척할 임무와 책임을 갖고 일체의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 일찍이 우리 선조는 살육과 검극(劍戟)으로 오늘을 만들었으나 이제 우리는 서로 돕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신이 창조한 자유와 평등이란 균등해야 하며 조선인이므로 행복하고 일본인이므로 불행하다는 논리는 없는 것이다. (중략) 현재 조선인은 한 민족으로서 자유를 요구하고 독립을 희망한다. 이는 조선국으로서 당연한 권리이고 일본이 일본제국으로서 엄염한 독립을 희망하는 것도 당연하다.43

자신을 ‘열렬한 기독 신자’라고 강조한 여운형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며 부여한 자유와 평등은 균등해야 한다면서 일본이 그렇듯 조선국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도 당연한 귄리이자 하나님의 뜻이라는 ‘신앙고백적’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발언과 태도에서 그의 기독교 신앙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강덕상 교수는 여운형이 기자들과의 대담에서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어떤) 운동이라 해도 음모라든가 난폭한 부분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을 가리켜 “목사이므로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언설(言說)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여운형이 늘 사용한 방패막이”44였다고 지적했듯, 여운형이 기독교를 필요에 따라 활용한 점 또한 사실이라 할 것이다.
여운형의 전 생애의 행적과 활동을 돌아볼 때 그는 특정한 이념과 주의(主義)에 매몰된 적이 없어 보인다. 그가 평생 추구한 지고(至高)의 가치는 민족독립과 민족해방이었다. 따라서 그의 삶의 절대가치인 민족 독립과 민족해방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 어떤 이념과 사상이든, 그리고 어떤 부류의 사람이든 활용하려고 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 근현대사에 등장했던 수많은 지도자 가운데 몽양만큼 이념과 주의를 넘나들며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자유인의 삶을 영위한 인물은 드물다 할 것이다. 향후 분단시대를 마감하고 통일조국을 건설해야 할 오늘의 우리에게 몽양의 삶이 담고 있는 메시지, 곧 정신사적 유산과 교훈은 결코 적다 할 수 없을 것이다.


1 백여운홍, “兄님 夢陽을 回想하며”, 이기형, 『몽양 여운형』(실천문학사, 1984) 부록, 528.
2 이정식, 『몽양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111.
3 강덕상, 깅광열 옮김, 『여운형 평전(1): 중국 일본에서 펼친 독립운동』(역사비평사, 2007), 108.
4 여운형, “南京金陵大學留學時代”, 「三千里」, 1940년 6월호: 126-128.
5 풍옥상은 당시 이름을 날리던 군벌 장군 출신으로 1913년 중국 여러 도시를 돌며 순회전도활동을 하던 북미 기독교청년회(YMCA) 국제위원회 학생부 담당 총무였던 모트(John R. Mott)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 장군’이 되었다고 한다.
6 李壽永, “呂運亨論”, 「전선」, 1권 3호(1933. 3): 35-38.[『여운형전집』 제2권(한울, 1993), 49-54.]
7 여운형은 이즈음(1916년경) 귀국하여 가족을 데리고 간 것으로 전해진다.(이정식, 앞의 책, 133.)
8 강덕상, 앞의 책, 136.
9 이기동, “한국의 독립운동과 기독청년회를 도운 은인, 피치”, 「한국사 시민강좌」 제34집 (2004): 56.
10 이기동, 위의 글, 57.
11 이기동, 위의 글, 57.
12 이기동, 위의 글, 59.
13 최재학은 감리교 목사인 탁사 최병헌의 아들로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 1904년부터 김정식(金貞植), 김규식(金奎植), 육정수(陸定洙) 등과 황성기독교청년회 간사(서무 담당)로 활동한 인물이다.(전택부,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 85쪽 참조)
14 「基督申報」, 1922년 7월 12일.
15 『조선예수교장로회 제7회 총회 회록』(1918), 16; 여운형, “상해에 재류하는 조선인의 상황”, 「基督申報」, 1918년 9월 25일.
16 이만규, 앞의 책, 20.
17 이기형, 『몽양 여운형』(실천문학사, 1984), 39.
18 이기형, 위의 책, 39-41.
19 “在上海 육군소좌 佐藤三郞, 田中 육군대신 앞”, 「上海時事報」 1919년 8월 15일; 「在上海朝鮮人노 行動」, 1919년 8월 27일, 『齋藤實文書』, 강덕상, 앞의 책, 318쪽 재인용.
20 와타세와 한국에서의 일본 조합교회에 관해서는 서정민, “일본기독교와 ‘조선전도론’”, 『한일기독교 관계사 연구』(대한기독교서회, 2002), 169-195 참조.
21 여운형은 이 제안을 단연코 거절했다고 한다. 여운홍, 『몽양 여운형』, 47.
22 강덕상, 앞의 책, 320.
23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2, 85.(강덕상, 앞의 책, 311-312에서 재인용)
24 강덕상, 앞의 책, 313.
25 韓晳曦,『日本の朝鮮支配と宗敎政策』(未來社, 1988), 110.
26 「獨立新聞」, 1920년 2월 2일.
27 「獨立新聞」, 1919년 11월 15일.
28 이경남, 『설산 장덕수』(동아일보, 1981), 135.
29 강덕상, 앞의 책, 374.
30 朴殷植, 『韓國獨立運動之血史』(維新社, 1920), 90.
31 朴殷植, 위의 책, 90.
31 최상용, “여운형의 사상과 행동”, 『여운형을 말한다』(아름다운책, 2007), 70.
31 강덕상, 앞의 책, 379-380.
31 강덕상, 위의 책, 380-381.
31 이정식 교수는 여운형이 만나고 교류한 인물로 레닌, 트로츠키, 지노비에브, 카라한, 보이틴스키, 보로딘 등의 볼세비키들, 쑨증산(孫中山), 쑹칭량(宋慶齡), 왕징웨이(王精衛), 쟝제스(蔣介石), 마오쩌뚱(毛澤東) 등 중국인, 요시노 시꾸조오(吉野作造), 우가끼 카즈시케(宇垣一成), 오까와 슈메이(大川周明) 등 일본인, 그리고 베트남의 호지밍(胡志明) 등 당시대 세계적인 ‘큰별’들과 교류했다고 했다.(이정식, 앞의 책, 9-10.)
36 “여운형신문조서급판결문”, 1929년(昭和4년) 4월 8일.[이기형, 『몽양 여운형』(실천문학사, 1984) 부록, 274.)
37 전택부, 『월남 이상재의 생애와 사상』(연세대학교출판부, 2001), 163.
38 「일본외교성육해군성문서」 제2집, 『한국민중운동사료(중국 편)』(1976), 63.
39 김창수・김승일, 『해석 손정도의 생애와 사상연구』, 187-189.
40 전택부, 『월남 이상재의 생애와 사상』, 163.
41 세 사람이 만난 장소는 당시 북경에 있던 이회영(李會榮)의 집으로 알려져 있다. 이회영과 이상재는 상동청년회 시절부터 매우 가까운 사이로 1911년 말 이회영이 만주 망명에 오르면서 “향후 중대사는 이상재와 전덕기 양인과 의논하라.”라고 할 만큼 상호 친밀한 관계였다.[李恩淑, 『民族運動家, 아내의 手記』(正音社, 1975), 157.]
42 전택부, 위의 책, 164.
43 강덕상, 앞의 책, 428.
44 강덕상, 위의 책, 421.



윤경로 |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학위와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105인 사건과 신민회 연구』, 『한국근대사의 기독교사적 이해』 등이 있다. 한성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2020년 9월호(통권 7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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