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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신학·목회 (2020년 8월호)

 

  몽양 여운형과 기독교(1)
  

본문

 

| 머리말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은 기독교라는 특정한 한 종교인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큰 인물’이다. 마치 안중근(安重根)을 천주교인으로, 백범(白凡) 김구(金九)를 동학이나 기독교인으로 한정해 볼 수 없듯, 여운형 역시 기독교라는 특정한 종교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옳은 이해가 아닐 수 있다. 또한 몽양을 특정한 이념주의자로 묶는 것도 바람직한 판단이 아닐 것이다. 최근 여운형에 관한 무게 있는 평전을 펴낸 이정식(李貞植) 교수가 “여운형을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등의 용어에 끼워 맞출 수 없다.”라고 한 말도 그런 의미라 할 것이다.
몽양 여운형이 개인적으로 기독교를 신앙한 기독교인이었던 것은 역사적 진실이다. 그러나 오늘의 제도권 교회와 교인의 눈으로 보면 그는 기독교인으로 비쳐지지 않을 수 있다. 몽양 또한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모습을 본다면 “나는 그런 기독교인은 아니다.”라고 할 것 같다. 과연 몽양에게 기독교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기독교에서 무엇을 보았고,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에 기독교는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이정식 교수는 몽양을 가리켜 “지난 50년간 서재필, 이승만, 김규식에 관한 전기를 비롯해 여러 독립운동가들을 연구한 바 있지만 여운형을 가장 좋아한다.”라고 하면서 그 이유는 “그가 ‘완전한’ 사람이었기 때문도 아니고 그의 ‘사상’을 추종하기 때문도 아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는 너무나 멋진 사람이었고 한국의 근현대사가 낳은 호걸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라고 했다. 이뿐만 아니라 “여운형은 지용(智勇)이 뛰어나서 독립운동 선상에서 빛나는 공훈을 세웠고 그의 풍모와 인품은 많은 외국인들을 압도하여 조선 민족에 대한 존경심을 갖도록” 했다면서 “여운형이 살던 시대에는 ‘조선인’(죠센징)이라는 용어 자체가 경멸과 멸시의 표현이었으며 ‘존경’이라는 말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는 점에 유념할 때 더욱 그렇다.”라고 하였다.1
이 글은 지용이 뛰어나고 풍모와 인품이 높아 외국인들을 압도하며 조선 민족에 대한 존경심을 갖도록 한 여운형의 인격 이면에 담긴 기독교 부분을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새로운 사실을 밝히기보다는 지금까지 나온 몽양에 관한 여러 전기와 평전, 그리고 이와 관련된 기존 연구 업적을 토대로 기독교와 연관된 내용을 추려 재구성하고자 한다. 대상 시기도 여운형이 출생한 1886년부터 중국에서 피체되어 귀국한 1929년까지로 한정하고자 한다. 1929년에서 1947년 사망하기까지 국내 행적에서 기독교 관련 부분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 한 이유라 하겠다.

| 태양을 품고 태어나 신문명의 세계로
어느 시대나 그 시대를 지배하는 지도이념과 시대정신이 있다. 원시시대에는 샤머니즘, 고대사회는 불교, 조선시대는 유교, 구한말 개화기에는 기독교가 시대정신과 지도이념으로 작동하였다. 또한 한 사람이 성장하고 사상을 형성하는 데는 그 시대의 지도이념과 사상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몽양 여운형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역시 당대의 이념과 시대정신에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으니, 그 정신사적 영향 배면에 기독교가 자리를 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자면, 기독교 이전에 동학사상(東學思想)의 영향을 먼저 받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운형은 모친이 ‘태양을 치마폭에 감싸는’ 신비한 태몽 속에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골’에서 여정현(呂鼎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고을 이름은 본래 ‘묘곡’(墓谷)이라 불렸다고 한다. 묘지가 많은 산골 동네였기에 동네 이름이 그렇게 불린 것 같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묘골’(墓谷)이라는 동네 이름은 ‘묘골’(妙谷)로 바뀌어 불리기 시작했다. ‘묘지마을’이라는 동네명보다는 한결 운치가 있어 보인다. 이뿐만 아니라 ‘묘한 기운이 도는 마을’이라는 동네명은 마치 훗날 몽양의 ‘미묘한 생애’를 예언한 듯해 더욱 ‘묘한 인상’을 준다.
이렇듯 ‘묘한 기운이 도는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여운형은 그 집안이 양반 가문이라고는 하나 그리 평탄치 못했다. 여운형의 절친한 친구 이만규(李萬珪)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여운형의 함양여씨(咸陽呂氏) 가문은 소론(少論)계인데, 조선 효종(1649-59) 때 영의정을 지낸 여성재(呂聖齋, 1625-91)의 아우 규재(圭齋)의 분묘를 양주 신원리 ‘묘골’에 모시면서였다고 한다.2 여운형이 태어나기 거의 200년 전의 일이다. 말하자면 소론계의 여운형 문중은 200년간 권력에서 소외되어 두메산골 묘지골에 칩거해 살았던 것이다.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 때 여운형의 조부 여규신(呂圭信)이 동학에 입도한 배경도 이러한 가문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동학에 심취한 조부 여규신이 1902년까지 묘골에 살았으니 10대의 여운형 역시 집안 어른 중 가장 존경하던 조부가 심취한 동학에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된다. 젊은 시절부터 여운형이 남달리 강한 평등사상을 보인 것도 동학신앙의 영향이라 하겠다. 이렇듯 여운형은 기독교를 접하기 전부터 이미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곧 인간 평등사상에 눈을 뜬 것이다.
여운형의 회상기에 따르면, 어린 시절 조부 여규신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함양여씨 문중이 중국 중원(中原)3에서 왔다고 하면서 “어렸을 때부터 자나 깨나 귀에 익숙해온 저 중원(中原)의 땅, 조부의 주름 잡힌 손가락이 지도 위에 몇 번이나 그어지든 그 땅의 길 그것이 나의 마음을 희망과 기대에 높이 고동하게 하였다.”4라고 술회했다. 이렇듯 여운형은 어린 시절 동학사상과 더불어 중국 중원에서 비롯되었다는 함양여씨 가문의 정체성(identity)에 대해 깊은 의식을 갖고 있었다. 요컨대 여운형은 기독교에 접하기 이전에 이미 동학과 동학사상을 통해 평등의식에 눈을 떴으며, 북벌(北伐)을 꿈꾸던 반골적인 조부로부터 감화를 받으며 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키워나간 것이다.
몽양 여운형은 1886년에 출생했다. 그가 태어나기 10년 전인 1876년에 타율적(他律的) 개항(開港)이 이루어진 후 혼돈과 변화가 증폭되던 변혁기였다. 그가 태어나기 2년 전인 1884년 야기된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실패 후 청국의 간섭이 더욱 강화되던 시기였으며, 반면에 최초의 서구식 근대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이 설립되던 해였다. 말하자면 여운형이 태어나 성장하던 시기는 한마디로 봉건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이행되던 역사의 전환기였던 것이다. 따라서 여운형은 정통적 기존 질서에서 새로운 서구적 문명과 가치를 받아들인 첫 세대에 해당한다. 특히 9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때에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이 먼 친척인 족숙 여병현(呂炳鉉)5이었다.
여운형이 시골 묘골을 벗어나 넓은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해준 것, 특히 기독교와 관계를 맺게 해준 이도 여병현이었다. 여병현의 주선으로 여운형은 15세가 되던 1900년에 상경하여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배재학당에서 채 1년도 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는 이 시기에 기독교에 대한 종교적 ‘감화’ 대신 서양 선교사들의 ‘우월의식’ 등 좋지 않은 인상을 받은 것 같다. 여병현의 인도와 주선으로 서울로 ‘진출’한 여운형의 이후 생애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새로운 꿈을 키우는 결정적인 전기가 되었다.6 여병현은 일찍이 일본과 미국을 거쳐 영국까지 다녀온 후 1899년경 귀국하여 배재학당에서 영어 선생을 하고 있던 차에 여운형을 배재학당에 입학시킨 것이다.7 그러나 이때 조부와 부친은 강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당시 저간의 사정을 이만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몽양이) 14세 때에 족숙 여병현(呂炳鉉) 씨가 미국에서 돌아와 배재학당 영어교사로 있었다. 그이의 인도로 배재학당 아펜젤러의 사택을 참관하고 비로소 미국의 문화가 조선보다 낫다고 느꼈으며 배제에 입학 일을 부친에게 천했으나 부친은 반대하였다. 모양은 부친의 반대를 불복하고 입학을 단행했다.8

여병현의 알선으로 상경한 여운형은 여러 면에서 그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YMCA)를 중심으로 서울 장안의 기독교계 지도적 인물들, 예컨대 당시 청년회의 유력한 역할을 하고 있던 외무대신 서리 출신의 윤치호(尹致昊), 학무대신 민영환(閔泳煥), 한성부 경무관을 지낸 김정식(金貞植), 그리고 훗날 중국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등과 인맥을 맺게 된 것도 YMCA 한국인 이사 중 한 사람이자9 미국 공사관 통역관이던 여병현의 ‘인적 통로’ 덕분이었다.
1900년 배재학당에 입학한 여운형이 1년도 마치지 못하고 그만둔 이유를 이만규는 여운형의 몸에 배인 ‘양반 기질’ 때문이었다고 한다.10 배재학당에서는 일요일마다 학생들을 예배당에 출석케 하고 이를 어기는 학생은 교실에 남아서 자습을 하도록 했는데, 소년 여운형은 이런 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남에게 억압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기질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전 생애 동안 특정한 인물 혹은 사상이나 이념에 매이지 않는 자유인의 삶을 살았던 그의 성품은 이렇듯 타고난 것이었다.
한편 외국 선교사들의 ‘우월의식’ 등도 배재학당을 그만둔 원인으로 작용한 것 같다. 그 후 그가 옮겨간 곳이, 민족정신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민충공(閔忠公)이 세웠으며 ‘국적 있는 교육’을 내세운 흥화학교(興化學校)라는 점도 이러한 이유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지금의 서울 수송동(壽松洞)에 있던 흥화학교에서 그는 매우 열심히 공부했다. 우등생으로 뽑혔을 만큼 성적도 좋았고 학교 생활에도 만족했던 것 같다. 당시 「황성신문」 기사에 의하면, 주학을반(晝學乙班), 곧 주간학교에 속해 있던 여운형이 여름학기 시험에서 우등성적을 받았다고 한다.11 그러나 여운형은 흥화학교에서 다시 관립 우무학교(郵遞學校)로 전학하는데, 그 이유는 직업을 갖기 위해서였다.12 당시 우무국 기술관으로 채용되면 월급이 27원이나 되었다고 하니, 동생과 함께 어렵게 서울생활을 하던 처지에 우무국 기술관이라는 직업은 매우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우무학교는 체신강습소 같은 곳이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통신국이 설립되어 우표가 발행되고, 서울-인천, 서울-의주 간에 전신사업이 개시되었으며, 1900년에는 만국우편연맹가입, 전신국 설치 및 한글전신 부호규정 등이 이루어지면서 이 분야의 전문 기술자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우무통신기사를 신속하게 양성할 목적으로 우무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가세가 기울었던 여운형에게는 더없는 안성맞춤의 직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좌절되고 말았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터지고, 이어 1905년 4월 군사기밀을 구실로 ‘통신기관 위탁에 관한 취지서’를 발표한 후 일본은 전보, 우체, 통신 등 관련 업무를 일본인들로 교체했기 때문이다. 이에 여운형은 동료 학생들과 함께 반대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허사였다.13 통신원 일이 일본인 관리에게 넘어간 이후에 기술관을 채용하겠다는 통지가 왔으나 취업하지 않았다.14 이정식 교수는 이때 여운형이 거절한 것은 잘한 결단이라며 만일 이때 통신원 기술자의 길을 걸었다면 “훗날 심금을 울리는 지도자 여운형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15 당시로서는 상당한 월급의 유혹을 뿌리친 용기가 훗날 여운형을 만들었다는 뜻이라 하겠다.

| 기독교 입교 과정과 ‘백정교회’ 조사 활동
여운형은 1906년 고향 묘곡에 묘곡교회(妙谷敎會)가 설립됨과 동시에 기독교에 입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상)』에 1906년(丙午)에 열린 공의회(公議會)에 보고된 각 지역 교회 설립에 관한 기록 중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楊平郡(양평군) 妙谷敎會(묘곡교회)가 成立(성립)하다. 本里人(본리인) 卓仁漢(탁인한)이 分院敎人(분원교인) 朴鳳來(박봉래), 卞錫鎬(변석호), 成炳燮(성변섭), 等(등)에게셔 福音(복음)을 得聞(득문)하고 信主(신주)한後(후) 上心里(상심리) 敎人(교인) 車相晉(차상진), 裵雲吉(배운길), 傳道人(전도인) 李起南(이기남), 李春景(이춘경), 등과 合力(합력)하야 呂運亨家(여운형가)에 傳道(전도)한 結果(결과) 呂氏(여씨)의 門中(문중)이 相繼歸道(상계귀도)하니 敎會設立(교회설립)되야 禮拜堂(예배당)을 建築(건축)하며 學校(학교)를 設立(설립)하고 幷力傳道(병력전도)하니 敎會(교회)가 漸進(점진)하더라.16

위의 기록에서 보듯 묘골에 교회가 설립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배경은 그 동네 여운형 집안, 곧 여씨 문중이 기독교에 입교하는 ‘귀도’(歸道)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묘골의 여운형을 비롯한 여씨 문중을 전도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이는 같은 마을 사람 탁인한(卓仁漢)이었고, 이웃 동네인 상심리교회(上心里敎會)의 차상진(車相晉)17과 배운길(裵雲吉)18 등이 합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의 내용 중 주목을 끄는 것은 ‘呂運亨家’(여운형가)와 ‘呂氏(여씨)의 門中(문중)이 相繼歸道(상계귀도)’라는 대목이다. 당시 여운형의 나이로 보아 그가 묘골의 여씨 문중을 대표할 만한 위치에 있다 할 수 없다. 그런데 그의 이름을 앞에 내세운 점으로 보아 묘골 여씨 문중 중 기독교에 ‘귀도’한 첫 인물이 여운형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해 여씨 문중 사람들에게 전도했으나 누구도 선듯 ‘귀도’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는데, 여운형이 제일 먼저 귀도함으로 비로소 여씨 문중 사람들이 ‘계속해서 귀도’(相繼歸道)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밖에도 위의 내용 행간(行間)에 담긴 뜻으로 보아, 당시 묘골의 기독교 전도는 여씨 문중의 귀도가 있었기에 그 후 교회가 설립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은 당시 묘골에서 여씨 집안이 차지하는 위상을 시사해준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앞서 언급했듯 기독교를 접하기 전까지 여씨 문중의 종교적 성향은 동학적 분위기였다. 기본적으로 서학(西學)을 반대하며 출발한 동학 문중이 기독교로 개종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결단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용단을 여운형이 앞장서 내린 것은 어떤 연유에서였을까? 이는 여운형이 서울에서 5-6년간 생활하면서 세상이 크게 변하고 있음을 체험했고, 그 경험을 문중 어른과 동민들에게 설득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여운형은 동학과 기독교가 추구하는 교리적・사상적 동질성을 이해했으며, 특히 인간평등사상을 중시하는 면에서 동학과 기독교가 매우 유사점을 지니고 있었기에 이러한 점을 강조하며 문중 사람들을 설득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그가 남들을 설득하는 타고난 웅변술을 발휘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한편 이때 여운형이 기독교에 입교하기로 용단한 데는 그의 남다른 아픔을 극복하려는 종교적 의지(依支)와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 같다. 여운형은 18세가 되던 1903년에 상처(喪妻)하고, 그가 그토록 존경하며 따르던 조부마저 여의는 아픔을 겪었다. 게다가 2년 뒤인 1905년과 1906년 연이어 모친과 부친까지 세상을 떠났으니, 10대의 여운형에게 상당한 충격과 아픔을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 주목할 때 그가 종교에 귀의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이 시기 동학도들이 집단으로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은 흔히 있었다. 한국 최초의 자립교회로 1885년경에 세워진 황해도 소래교회(松川敎會)에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동학도 가운데 기독교로 개종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익히 알려진 백범 김구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 경우에 해당한다. 훗날 민족지도자로 큰 역할을 한 인물들, 예컨대 이승만, 안창호, 이동휘, 이동령, 이상재 등이 새로운 시대의 지도이념으로 부상한 기독교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비전을 보고 과감하게 개종하였듯, 여운형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따라 자기변신을 시도한 것으로 이해된다.
1906년 묘곡교회가 설립될 때 “여씨 문중이 잇따라 귀도했다.”라는 내용과 6년 뒤인 1912년 장로회 경기충청노회록에 여운형의 숙부 여승현(呂升鉉)이 묘곡교회 장로로 장립한 사실이 확인된다.19 이 점으로 보아 숙부 여승현도 묘곡교회 창립 때부터 믿기 시작한 것 같다. 후술하듯 숙부 여승현이 장로가 되던 그해(1911) 11월 서울 안동교회(安洞敎會)에서 개최된 제3회 노회(老會長 韓錫晉)에서 여운형은 상심리교회의 차상진과 훗날 장로회 『사기』(史記)를 집필하고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20 목사가 된 차재명(車載明)과 함께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취학하였다.21
그러나 여운형이 본격적인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시작한 것은 곽안련(郭安連, Charles Allen Clark) 선교사와 연을 맺고 승동교회(勝洞敎會) 조사(助師, helper)가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02년 9월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한 곽안련은 당시 승동교회 담임목사인 무어(Samuel F. Moore) 목사 밑에서 동사목사(同事牧師)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부임 초기 그는 지방 순회전도 목사로 경기와 강원 일대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펼쳤다. 상심리교회와 묘곡교회 등 양평군 일대에 여러 교회를 개척한 것도 곽안련 선교사였다.22
곽안련 선교사가 묘곡교회를 세우기 전 경기도 일대 순회 전도활동을 하면서 곽안련과 여운형 두 사람 사이에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승동교회를 설립한 무어 목사가 1906년에 세상을 떠나자 그 후임으로 곽안련 선교사가 교회를 맡게 되면서 두 사람은 더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승동교회 담임목사가 된 곽안련은 여운형을 그의 조사로 임명하였다. 이후 여운형은 5년간이나 승동교회 조사로 시무하였다. 동생 여운홍이 훗날 “곽 목사는 우리 형제의 은인이었다.”23라고 회고하듯, 여운형 형제가 상경하여 가장 어렵던 시절에 곽안련은 이들 형제를 돌보아주었다. 곽안련의 조수가 되어 “월 20원의 봉급”24을 받게 되었으니 당시 어려운 형편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곽안련은 같은 해 8월 승동교회 부속으로 기독소학교와 여자소학교를 설립했는데, 선교와 교육을 위해 더 유능한 조수가 필요했고 여운형 또한 동생의 학비와 숙사 마련을 위해 도움이 필요했기에 두 사람의 만남과 협력은 기독교적 신앙으로 보면 ‘여호와 이레’라 하겠다. 이렇게 해서 여운형 형제는 “약간의 가구를 가지고 와 자취를 시작”25하여 동대문 밖 창신동에 임시 숙소를 마련하게 되었다.
몽양의 집은 동대문 밖에서 손님을 많이 치르기로 이름난 집이었다. 매일 2-3명의 손님이 찾아왔고, 그중에는 말과 마부까지 데리고 오는 손님, 또 여비까지 줘야 할 손님도 있었다. 가계는 넉넉하지 못했지만, 손님 접대를 잘하는 것이 당시 양반가의 좋은 풍습이었다.26 이때 여운형의 숙소에서 모임이 많았는데, 당시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관동학회(關東學會) 등의 동지들이 모였다고 한다.27 이 모임의 지회 임원과 회원 명부에는 57명이 기재되어 있는데, 여운형은 평의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나타난다.28 여운형이 이 모임의 평의원으로 취임한 것은 1908년 9월에서 10월 사이로 추정된다.29
학회 간부가 된 여운형은 거의 매월 개최된 기호흥학회의 총회와 연설회에 참석했고, 임시총회와 지회 업무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훗날 한국적 신학과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를 제창한 김교신(金敎臣)과 함석헌(咸錫憲)의 스승인 유영모(柳永模)가 당시 경신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그때 결원이 발생한 용문학교의 임시 교사로 지원했다는 미담이 신문에 실린 것도 이때였다.30
한편 서울에는 상동, 연동, 묘동, 새문안, 안동, 승동 등 많은 교회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특히 구국계몽운동을 중심으로 한 상동교회(尙洞敎會)에는 “덕망이 높고 애국심이 많은 전덕기(全德基) 목사를 중심으로 우국지사와 우국청년들이 모여들어”31 그들은 ‘상동파’(尙洞派)라 불렸다. 여운형은 배재에서 성서입문을 담당했다. 비록 충분한 실력은 아니었으나, 성서를 더욱 깊이 탐독하고자 했다. 조선어가 서툰 곽안련 목사와 달리 전덕기 목사의 설교는 더욱 마음에 다가왔다. 전 목사의 말에는 항상 “가난한 자에게 기쁨을, 갇힌 자에게는 해방을, 억압받는 자에게는 자유를, 계급사회를 평등하게”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32
이 밖에도 전덕기가 주최하는 상동청년학원에는 이시영(李始榮), 이회영(李會榮), 이동녕(李東寧), 이상재(李商在), 여준(呂準), 주시경(周時經), 김규식(金奎植), 박은식(朴殷植), 김구 등이 참여했다.33 상동청년학원은 마치 민족운동의 ‘아지트’ 같은 양상을 띠었으며, 기독교 신앙의 에너지를 구국투쟁으로 승화시킨 구국단체였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친목회를 열어 고문, 평의원, 찬성원을 선정했는데 매회 100명에서 150명 정도가 모였다. 그 기저에는 “기존의 합법적인 학회와 단체가 다하지 못한 구국운동을 적극적이고 투쟁적으로 전개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신민회(新民會)의 비밀결사활동34이 깔려 있었다. 이러한 구국단체에 여운형이 참여하면서 당대의 대표적 우국지사들과 인맥을 두텁게 맺은 것이다.
한편 “첫째로 말하자면 체육건강이요, 둘째로 말하자면 지식교환이요, 셋째로 말하자면 친목돈독”이므로 국가정간의 인재를 키운다는 취지의 청년동지회(靑年同志會)가 조직된 것도 이즈음이었다.35 1908년 이상재를 중심으로 황성기독교청년회관(YMCA)이 종로에 준공되면서 우국지사들이 연일 모임을 갖고 “재능은 덕에 앞서는가”, “신문 사업의 필요”, “학회의 의무”, “부유하되 교만하지 않는 것이 가난하되 아첨하지 않는 것보다 쉽다”, “교육의 장래는 어떻게”, “스승의 길은 온고하는 것이 지신에 앞서는 것일까” 등 일반 교양에서 시국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를 설정해 강연회, 토론회, 환등회 등을 개최했다. 당시 신문을 보면 매회 청중이 ‘1,200명’, ‘1,800명’, ‘3,000명’ 등의 규모로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36 여운형은 이처럼 애국계몽활동의 최전선에 서서 통감부, 이사청과 관련된 복잡한 인허가 업무를 처리하기도 했다. 서울에 입국한 첫 복음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를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37
여운형이 5년간 조사로 활동한 승동교회는 특별한 교회였다. 승동교회는 당시 서울 장안의 다른 교회들과 달리 천민층이 중심이 된 교회였다. 흔히 승동교회를 ‘백정교회’라 부르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승동교회를 설립한 무어 목사는 처음부터 기존 교회와는 달리 과거 봉건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소외된 천민층 선교에 관심을 갖고 승동교회를 시작했다. 이러한 교회의 특성으로 승동교회에는 백정 출신의 천민층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무어 목사는 이들에게 교회문을 개방한 것이다. 예배당 가운데 휘장을 치고 남녀를 구분하여 예배를 드리던 시절에 양반과 노비, 더욱이 당시 짐승 취급을 받던 백정들을 교회로 불러들여 함께 예배를 드리도록 했으니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승동교회에 출석하던 양반층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 새로운 ‘양반교회’를 세웠다. 그 교회가 바로 안동교회(安洞敎會)이다.38 안동교회 설립과 관련해 채필근(蔡弼根)은 이렇게 전한다.

1909년 융희(隆熙) 3년이었다. 이해 봄에 완고한 양반들만 살고 있던 서울 북촌에도 복음의 빛이 비쳐서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그 당시 勝洞敎會(승동교회)와 蓮洞敎會(연동교회)에 다니던 교우 몇 사람이 齊洞(제동) 金昶濟(김창제) 댁에서 주일 저녁과 3일 저녁이면 기도회로 모임을 시작하였으니 이 기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金昶濟(김창제), 趙重完(조중완), 李柱浣(이주완), 張錫允(장석윤), 兪星濬(유성준) 등이었다. 그후 얼마 안 되어 朴勝鳳(박승봉), 黃耆淵(황기연), 鄭敬德(정경덕), 李秀三(이수삼) 등이 참가하게 되었고 박승봉의 주선으로 소안동에 있는 초가집을 매수하여 예배당을 사용했으니 이것이 현 안국동의 전신이다.39

여운형이 5년 동안 조사로 있던 ‘백정교회’인 승동교회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익히 알려진 일이지만 1988년 10월 종로 네거리에서 개최된 만민공동회 때 당시 총리대신 박정량(朴定陽)을 비롯한 고관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연설한 박성춘(朴成春)은 다름 아닌 백정 출신의 승동교회 교인이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박성춘의 딸이 성균관 박사이자, 항일독립운동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의 동생인 신필호(申弼浩)의 부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별난교회’ 승동교회에서 20대의 여운형이 5년간(1907-10, 1911-13)이나 조사로 활동했다는 점은 음미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순히 생활비를 벌기 위해 5년씩이나 조사 생활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1906년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집안 대대로 모시던 조상 신주를 불태우고 노비를 해방시킨 자유주의자, 평등주의자의 기질을 지닌 그였기에 5년이라는 긴 기간을 함께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합당하다 할 것이다.
승동교회 조사로 활동하기에 앞서 여운형은 『장로회사기』에서 보듯 고향 묘골에 예배당과 함께 학교를 세웠다. 그는 이 지역 선교를 관장하고 있던 곽안련의 지원을 받아 여운형의 집안에 ‘기독광동학교’(基督光東學校)40를 세우고 학생들을 모아 수신(修身)과 이과(理科) 및 성경(聖經)을 가르치고 주일이면 예배를 드렸다.41 이 학교는 당시로서는 동대문 밖에 세워진 첫 근대 학교였다고 한다.42
여운형은 또한 1910년 봄에는 강릉읍 근처에 세워진 초당의숙(草堂義塾)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오래 하지는 못했다. 국권을 강탈당한 후 그전까지 사용하던 단군기원(檀君起源) 연호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여 서기(西紀) 연도를 사용했으나 이마저 불가하다고 하며 일본 연호 ‘메이지’(明治)를 쓰도록 강요한 일제가 퇴거 명령을 내리자, 결국 강릉을 떠나 다시 승동교회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어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했다. 당시 평양신학교는 1년 중 9개월은 교회 일을 하고 3개월 동안 집중강의를 받도록 운영되었다. 때문에 여운형은 승동교회에 조사로 근무하면서 평양신학교를 1년에 3개월씩 2년간 다녔다. 정식으로 졸업하려면 5년을 다녀야 했지만 2년의 과정만 마치고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다음 호에 계속)


1 이정식, 『몽양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2.
2 呂運弘, 『夢陽呂運亨』(靑厦閣, 1967), 1.
3 여기서 ‘중원’(中原)은 중국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황하와 양자강 사이의 만리장성 남쪽 평원을 말한다.
4 여운형, 「나의 回想記」, 「中央」(1936년 3월호); 『夢陽呂運亨全集 1』(한울, 1991), 39-45.
5 여정현과 여병현은 같은 항렬, 16촌 지간이다. 여운형에게 여병현은 17촌 아저씨, 먼 촌수이다.
6 이정식, 앞의 책, 32.
7 여병현은 1895년 박영효 내각 때 도일 유학생으로 선발된 151명 중 한 사람으로 일본에건너가 케이오대학(慶應義塾)에서 유학하다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이후 다시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다가 1899년경 귀국하여 배재학당에서 영어 선생으로 근무했다. 당시 한국인으로서 서구 문물을 일찍이 접한 개화된 인물이었다.[박찬승, “1890년대 후반 관비유학생의 도일유학”, 『근대교류사와 상호 인식』(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2001), 89-103.]
8 李萬珪, 『呂運亨鬪爭史』(叢文閣, 1946), 12.
9 1903년 서울YMCA가 창립될 때 12명의 창립이사 중 한국인은 여병현과 세브란스의전 제1회 졸업생인 김필순(金弼淳) 2인이었다.[전택부,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1994), 65-66.]
10 이만규, 앞의 책, 12.
11 「皇城新聞」, 光武 6년 7월 10일.
12 여운홍, 앞의 책, 12.
13 이만규, 앞의 책, 14.
14 이만규, 위의 책, 11.
15 이정식, 앞의 책, 44.
16 車載明,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上)』(新門內敎會, 1928), 148.
17 차상진은 1875년 상심리에서 태어나 1906년 묘곡교회를 비롯해 문호교회 등을 설립하는 등 양평 지역의 대표적인 기독교 개척자로 1910년 상심교회 최초의 장로가 되었고 191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5년에는 조사로, 그 이듬해에 목사가 되어 상심리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였다.[한종환, 『지나온 백년 앞으로』(삼심교회, 2005), 34.]
18 배운길은 ‘배운선’이라고도 전해지는데 ‘눈물의 장로’라는 별칭이 말해주듯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서 못 박히어 죽으신 대목을 생각하며 늘 눈물을 흘리며, 전도하다 몰매를 맞고 따귀를 때리면 다른 뺨을 돌려대는 등 노방전도를 했다 한다. 자신의 온 재산을 교회를 세우는 데 내놓기도 했다고 전한다.(한종환, 위의 책, 35-37.)
19 백낙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하)』(한국교회사학회, 1968), 56.
20 윤경로, 『새문안교회100년사』 개정증보판(새문안교회출판부, 2019) 참조.
21 백낙준, 앞의 책, 56.
22 곽안련 선교사는 1906년 이후 경기도 일대에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여러 교회를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상)』, 147-150 참조)
23 여운홍, 앞의 책, 21.
24 여운홍, 위의 책, 8.
25 여운홍, 위의 책, 8.
26 이만규, 위의 책, 5.
27 강덕상, 김광열 옮김, 『여운형 평전(1): 중국 일본에서 펼친 독립운동』(역사비평사, 2007), 66-68.
28 「기흥흥학회 월보」, 제3호(1908): 55.
29 강덕상, 앞의 책, 67.
30 「대한매일신보」, 1909년 11월 15일.
31 이만규, 앞의 책, 15. 전덕기는 여운형과 동향인 양평 출신으로 젊은 시절 숯을 파는 상인었다고 한다.
32 강덕상, 앞의 책, 68.
33 『白凡逸志』(平凡社, 1973), 158.
34 尹慶老, 『105人事件과 新民會 硏究』(一志社, 1990), 182.
35 「대한매일신보」, 1908년 10월 10-11일.
36 강덕상, 앞의 책, 69.
37 강덕상, 위의 책, 69.
38 승동교회는 본래 존 헤론(John W. Heron)이 1894년 동현(銅峴)에 홍문동교회(弘文洞敎會)로 시작해서 1904년 승동교회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승리하는 교회’라는 뜻에서 ‘승동’(勝洞)의 이름으로 불린다고 한다. 현재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교회 건물은 곽안련 목사가 설계, 시공했다고 전해진다.
39 蔡弼根 編, 『韓國基督敎開拓者 韓錫晉 牧師와 그 時代』(대한기독교서회, 1971), 198-199.
40 현재 기독광동학교가 있던 터 앞에 ‘몽양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41 여운홍, 앞의 책, 15.
42 여운홍, 위의 책, 15.



윤경로 |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학위와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105인 사건과 신민회 연구』, 『한국근대사의 기독교사적 이해』 등이 있다. 한성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2020년 8월호(통권 7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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