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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한국 근대소설 속의 기독교 조명 06]
문화·신학·목회 (2020년 7월호)

 

  미주 유이민 소설과 기독교-<송뢰금>, <월하가인>
  

본문

 

| 두 편의 미주 유이민 소설
구한말기 이 땅의 민중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한 극단의 질곡 속에 빠져 있었다. 잇단 재해와 외세의 침탈도 있었지만 왕조의 무능과 부패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경제적 궁핍과 정치적 억압을 벗어나기 위해 고향을 버리고 국경을 넘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방편이었으나 나라가 기울면서 점차 정치적・사회적 변혁을 위한 수단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불가항력의 외부 요인들로 인해 고국을 떠나 외국에 나가 생계를 도모하거나 이념 실현의 길을 찾는 사람들을 일컬어 ‘유이민’(流移民)이라 부른다. 나라를 잃고 세계 각지를 떠도는 유대인들을 뜻하는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를 끌어다 쓰는 이들도 많다. 우리 역사는 ‘유이민의 역사’라 해도 좋을 만큼 뿌리가 깊지만, 일제강점기에는 특히 그 규모가 커져 해방될 무렵에는 만주, 연해주, 일본, 미주 등지에 무려 450만 명가량의 유이민이 있었다.(현규환, 『한국유이민사』)
그중 미주 지역 유이민 사회의 형성 과정은 다소 특별한 점이 있다. 다른 지역의 경우 유이민 이출이 대부분 개인이나 소집단 형태로 이루어진 데 반해, 미주 지역의 경우 표면상 공식적 절차에 따라 모집된 대규모 집단으로 이주가 실현되었다는 점이다. 잘 알려진 대로 하와이와 멕시코 지역의 한인 이주는 동서개발회사 또는 대륙식민회사를 매개로 한 농장주들과의 공식적인 계약 관계에 의해 성사되었다. 이들 계약에 따라 공개적인 광고를 통해 모집된 이주민들은 구한국 정부가 발행한 여권을 가지고 수민국(受民國)의 규범에 따르는 소정의 입국 절차를 밟아 송출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하와이와 멕시코 지역 유이민 사회 형성에 기독교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와이는 유이민 이출 과정에 깊숙이 연관되어 있고, 멕시코는 이주가 실현된 뒤 유이민들의 비참한 실상을 국내에 알리고 그 해결 방안을 찾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전말을 기독교인 소설가들이 작품에 담아 증언하고 있다. 바로 육정수의 <송뢰금>(松籟琴)과 이해조의 <월하가인>(月下佳人)이 그것이다. <송뢰금>은 하와이 이민 송출 과정을 아주 구체적이고 실감나게 재현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직도 다른 예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대표적인 하와이 유이민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월하가인> 또한 김영하가 『검은 꽃』(2003)이라는 장편에 담아 제대로 재현해내기 전까지는 거의 유일하다 할 만한 멕시코 유이민 소설이다.

| 하와이 유이민 과정의 증언–육정수의 <송뢰금>
하와이 이민을 맨 처음 주선한 사람은 주한 미국공사 알렌(H. N. Allen)이다. 알다시피 그는 본래 선교사 신분이었다. 그는 선교 활동이 공식적으로 허가되지 않은 상황에서 의료 활동을 통한 간접 선교 방식을 취하다 왕실의 신임을 얻어 공사까지 된 인물이다. 그가 한인의 하와이 이주를 주선하고 나선 것은 하와이 농장주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지만(윤병석, “미주 한인사회의 성립과 민족운동”), 그것이 한국민을 돕는 일이며 한국의 장래를 위해서도 유익한 일이라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알렌은 자신의 강력한 후견인인 민영익을 움직여 정부의 승인을 받아내고 수민원(綏民院)을 설치해 이민 업무를 관장케 하는 한편, 동향의 친구 데슐러(D. W. Deshler)를 추천해 이민 업무를 대행케 했다. 데슐러는 인천에 동서개발회사와 데쉴러은행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이민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민자 모집은 부진했다. 우리 민족의 낯선 경험에 대한 두려움,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대접하는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宾客)의 오랜 전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번엔 알렌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으면서 감리교 인천 지역 책임자로 내려와 있던 존스(G. H. Jones) 선교사가 나섰다. 이는 후일 하와이 유이민 사회가 기독교 신앙 공동체로 성장하고 미주 지역 애국독립운동의 구심체가 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존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그가 담임하고 있던 내리교회 교인을 비롯해 기독교인 상당수가 이민 대열에 합류했다.(『내리백년사』)
1902년 12월, 121명이 출발한 첫 번째 이민단에는 기독교인이 절반가량이나 되었다. 그중에는 장경화, 안정수, 현순, 육정수 등과 같이 이민 회사의 사무원이나 통역으로 합류한 경우도 있고, 홍승하나 민찬호처럼 하와이 이주민들을 위한 목회자 신분으로 건너간 경우도 있다. 이들은 대부분 이주 전부터 배재학당, 협성회, 독립협회 등에 관계하면서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해온 사람들이다. 이들의 면면을 통해 이민 초기부터 향후 하와이 유이민 사회의 밑그림이 그려져 있던 셈이다.
<송뢰금>은 1908년 박문서관에서 간행된 장편 소설이다. 처음에는 상과 하, 두 편으로 계획된 듯하나 하편의 발행 사실이 확인되지 않으니 미완인 셈이다. 작가 육정수(陸定洙)는 충북 옥천 태생으로, 고 육영수 여사와는 사촌남매 지간이다. 열한 살이던 1896년에 배재학당에 들어가 서재필의 주도로 조직된 협성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협성회가 강제 해산된 뒤에는 질레트(P. L. Gilett)의 주도로 조직된 기독학생회의 사찰로 활동하면서 일찌감치 기독교 세계에 깊이 잠겼다. 그는 정동제일교회에 적을 둔 감리교인이었다. 기독학생회를 통해 만난 질레트와의 인연으로 1904년 처음 YMCA에 들어가 간사, 관장, 부총무 등을 두루 거치며 40년 넘게 “종신 봉사”한 ‘Y맨’이었다.(전택부,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 이해조나 안국선 등과 같이 그도 기독교 문명화에서 민족의 활로를 찾은 개화 지식이었던 것이다.
그는 생전에 모두 여섯 편의 소설을 남겼다. 앞선 글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듯이, 구한말기 개화 지식인들에게 소설은 애국충정의 마음을 표현하는 효과적인 글쓰기 전략이었다. 일제의 검열과 탄압을 피해가면서 더 많은 독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채호나 최병헌처럼 소설을 피(稗)나 상수리나무(櫟)만큼도 못한 글이라고 흰 눈 뜨고 보던 유학자들도 소설을 썼다. 옛사람들에게 피나 상수리나무는 곡식 중에 가장 보잘것없고, 나무 중에 제일 쓸모없는 것이었다. ‘전업작가’이던 이해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김필수나 안국선의 소설 쓰기가 그랬고, 육정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외치고 싶은 말,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는 많은데 감시하는 눈길이 많고 ‘들을 귀’를 가진 자는 많지 않으니 할 수 없이 우회적인 글쓰기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육정수가 <송뢰금>을 통해 소리쳐 들려주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같은 시기 애국계몽운동을 선도하던 다른 기독교 지식인들의 사상이나 주장과 일치한다. 요약하면, 나라와 민족이 처해 있는 현실이 매우 엄중하다는 것, 바뀌고 변하지 않으면 난국을 피해갈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전체 5장으로 구성된 작품은 크게 여주인공 계옥 중심의 이야기와 남주인공 근암(이충국) 중심의 이야기가 서로 교직된 구조를 띠고 있다. 계옥 중심의 서사가 주로 현실의 비극성을 드러내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면, 근암 중심의 서사는 이 비극을 벗어날 수 있는 활로를 모색하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작품은 가장이 온다 간다 말도 없이 만리타국으로 떠난 뒤 1년이나 되도록 소식이 없어 불안과 근심 속에 살고 있는 원산의 가족들 이야기로 시작된다. “10여 년을 날로 나라 근심을 집일보다 더 하”던 개화파 지식인 김 주사가 유이민 신세로 전락하게 된 배경과 그로 인한 가족 이산의 비극성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실제로는 규중에 갇혀 사는 봉건적 주체이기를 거부하고 근대적 주체로 우화(羽化)하려는 계옥의 열망과 집념이 더 치열하다.
작품에는 김 주사 같은 상류 지배층마저 유이민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고발과 비판이 전체 서사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물밀듯 밀려 들어오는 외세의 침탈,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정부의 무능과 부패가 핵심이지만, 오랜 유학적 전통에서 말미암은 낡은 봉건 유제, 공동체 내부의 분열과 도덕적 피폐, 실업의 부진 등이 폭넓게 제시되어 있다. 이런 처지에서 계옥은 아버지 김 주사의 뜻을 받들어 “우리나라 여자사회에 좀 일해보자.” 하는 일념으로 하와이 이주를 결단하지만 끝내 좌절하고 만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둔 후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면서 취해진 이민 금지 조치가 결정타였다. 실업을 일으켜 나라를 위하겠다는 근암의 노고도 허사가 되고 만다. 해운업에 투신하여 태극기 단 “상선이 반도 삼면에 연락”하기를 꿈꾸던 그의 노력이 결국 거듭된 동료들의 배신과 식민자본의 위력 앞에 좌절하고 만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송뢰금>은 음산한 분위기를 연상케 하는 제목에 은유되어 있듯이,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내비친 희망의 서사가 아니라 비관적 현실을 영탄하는 절망의 서사라 할 것이다.
이렇듯 작가 육정수가 하와이 유이민 발생 현실을 천착하고 작품 속에 불러낸 것은 물론 현실 개변 의지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던 당시 기독교 지식인 일반의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가 직접 하와이 이민 송출 사업에 관여한 경험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동서개발회사가 설립될 때부터 문을 닫을 때까지 4년간 사무원 겸 통역으로 일했다. 훗날 그는 이때의 경험을 두 편의 글로 남겼는데 “개발회사 투쟁사”(1930)와 “개발회사 진출사, 40년 전 옛 시대의 남방 진출 비화”(1942)가 그것이다. 이들 자료에 의하면 그는 인천 본점과 부산 지점에서 각 1년씩 근무하고 원산 지점에서는 책임자로 2년을 근무했다.
<송뢰금>이 원산을 주요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데는 이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며, 개발회사의 이민 모집 수법과 업무 내용, 배편을 이용한 이동 장면, 고베에서의 신체검사 등에 대한 상세한 서술도 이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작품에서 기독교에 대한 언급이 굳게 절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작중인물 중 기독교인은 없으며, 기독교에 대한 의미 있는 진술도 보이지 않는다. 화자의 언술 속에 “천하만국에 강약을 무론하고 하나님의 우로는 편벽됨이 없으시도다.”라는 표현이 보이고, 계옥이 외조부의 부음을 듣고 혼잣말처럼 드리는 기도 속에 “하나님께서 굽어 살피옵소서.”라는 표현이 보일 뿐이다. 수학기부터 기독교 교육을 통해 세계 인식의 지평을 열고, 평생 기독교 선교 단체인 YMCA에서 일하다 생을 마친 사람의 작품으로서는 의외의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송뢰금>뿐만 아니라 애국, 독립, 자유, 교육, 자조 등을 강조한 유사한 주제의 다른 단편인 <혈(血)의 영(影)>, <과라(蜾蠃)의 자(子)>, <수륜(水輪)의 성(聲)> 등에서도 기독교적 단서를 철저히 감추고 있다. 이들 작품이 모두 민족주의 문명 개화 사상을 적극 표방하고 있는 작품임을 감안하면 더욱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발표한 “개발회사 투쟁사”(1930), “개발회사 진출사, 40년 전 옛 시대의 남방진출 비화”(1942) 등의 산문들에서는 하와이 이민사 논의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알렌이나 존스 같은 인물들을 굳이 숨기기까지 하여 궁금증이 더할 수밖에 없다.
왜 그랬을까? 우리는 다만 육정수가 평생 기독교와 관련을 맺고 살았다고는 해도 인격신으로서의 하나님을 만나는 데 이르지는 못했을 가능성, 일제의 탄압을 의식한 자기 검열을 의심해볼 수 있을 뿐이다. 육정수의 조부이자 동도서기론자이던 육용정(陸用鼎)은 기독교에 대해 깊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랑(愛)을 기본 종지로 삼는 기독교가 동양의 ‘삼강오상(三綱五常)의 법’에 해당하는 이치라며 “선리(善理)가 없을 수 없다.”라고 인정했다.[『의전기술』(宜田記述)] 그러면서도 유교적 합리주의에 입각하여 기독교의 애(愛)나 선(善)이 유교의 인(仁)이나 도(道)에 미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 오병이어의 이적 등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보이며, 제국주의 침략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경계하기도 했다. 그는 불귀의 망명객이 된 아들 육종윤(陸鍾允)을 대신하여 홀로 키운 손자 육정수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 이런 그의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기독교 인식이 손자 육정수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의심해볼 수 있다. 한편 육정수가 평생 몸담고 일해온 황성기독교청년회는 창립 초기부터 일제의 간섭과 탄압을 피하기 위해 애써 정치 문제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초대 회장인 게일(J. S. Gale)이 특히 그랬다.(전택부,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 육정수로서는 조직의 노선과 안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송뢰금>이 당대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하던 기독교 민족주의 진영의 이념과 노선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외세 자주자강 운동, 반봉건 문명개화와 교육 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자조론을 바탕으로 한 실업의 진흥 등이 모두 그렇다. 말하자면 <송뢰금>은 육정수가 배재학당, 정동교회, 황성기독교청년회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체득한 기독교 지식인으로서의 이념을 소설을 통해 구현한 작품인 셈이다.

| ‘가련한 묵서가 동포’와 기독교–이해조의 <월하가인>
1905년 4월에 있었던 한인의 멕시코 이주는 하와이 이주와는 달리 처음부터 계획적인 사기집단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멕시코 국적을 가지고 있던 영국인 마이어스(John G. Myers)가 유카탄 농장주협회 대리인 자격으로 한국에 와 일본 대륙식민합자회사의 서울지부 직원인 오바 간이치(大庭貫一)와 결탁해 저지른 사기극이기 때문이다. 멕시코의 노동조건이 열악해 중국이나 일본인 이민 모집이 불가능해지자 한인을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그들은 하와이 이민 알선 방법을 그대로 이용해 지방에 사무소를 두고 한국인 통역을 앞세워 광고를 내어 인부를 모집했다. 모집된 인원은 남자 702명, 여자 135명, 아동 196명으로 모두 1,033명이었다. 그 가운데 납치된 아동도 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이자경,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 먼저 하와이로 떠난 사람들의 뒷소식이 과히 나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것이나 이는 함정이었다. 메리다시(市) ‘애니깽’ 농장으로 간 이들은 곧장 가혹한 노예노동에 내몰렸다. 감금과 폭행이 자행되고 병든 자는 내다버렸다. 탈출을 기도하다 맞아 죽거나 자살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이들의 참상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뜻밖에도 중국인 하혜(河惠)에 의해서였다. 메리다 현지에서 한인들의 참상을 목격한 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던 중국계 「문흥일보」에 제보해 기사화되고, 이를 본 한인 유학생 안정수(安鼎洙) 등이 서울 상동교회에 알려옴으로써 비롯된 것이다. 노동자들이 고국을 떠난 지 4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소식을 접한 상동교회 청년회는 전덕기 회장과 정순만(鄭淳萬) 등을 중심으로 이를 국내 언론에 알려 공론화하는 한편 ‘가련한 묵서가 동포’ 구출 운동을 벌였다. 청년회는 통상회와 강연회 등을 통해 의연금을 모아 박장현(朴章鉉)과 이범수(李範壽)를 조사단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돈도 정보도 부족한 상태로 떠난 이들의 행로는 순탄하지 않았다. 이범수는 질병 때문에 중도 귀환하고, 박장현 혼자 뉴욕으로 가서 유일한(柳一韓)을 대동해 멕시코로 건너갔다. 하지만 이들은 멕시코시티에서 속전을 지불하고 풀려나 있던 한인 두 명과 메리다 현지에서 한인 노동자들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미국인 여행자와 중국인 상인을 만나 얼마간의 정보를 얻었을 뿐 유카탄 현지에는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언제나 가장 문제는 여비였지만 험란한 여정도 그중의 하나였다. 정부는 정부대로 ‘적자(赤子) 귀환’을 촉구하는 칙유를 내리고 윤치호를 파견해 사태 해결을 모색했으나 이 또한 모두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동포들은 계약기간이 만료된 1909년 5월에야 풀려날 수 있었으나 상당수의 동포가 희생된 후였고, 일부는 여전히 농장에 묶여 있기도 했다. 풀려난 이들 중 288명은 1921년 쿠바로 이주해 쿠바 한인사회의 토대가 되었으며,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1920년대에 멕시코 국적을 얻어 오늘날 멕시코 교민사회의 기초가 되었다.
이 비극적인 ‘묵서가 이민’은 당대부터 흔히 ‘기민’(棄民)으로 표현되었다. ‘사기 브로커에 의한 불법 이민’으로 정의되기도 하지만, 마이어스나 오바 같은 간교하고 탐욕스러운 외국인 모리배들이 이 땅에서 그토록 사악한 협잡질을 자행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무능하고 허약한 정부 탓이었다. 그래서 멕시코 이민 100년이 다 된 시점에 김영하가 다시 조명해낸 『검은 꽃』에서 제기된 화두도 ‘나라’이다. 나라다운 나라는 최소한 백성들의 생명과 안전을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 나라가 백성의 생명과 안전을 담보하지 못할 때 백성이 버림받은 신세로 전락하는 것은 필연이다. 우리는 예부터 수많은 ‘기민의 역사’를 경험해왔으며, 지금도 한쪽에선 진행형이다.
이해조의 <월하가인>(1911)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15년 전 우리 민족이 겪은 또 하나의 기민의 역사에 대한 증언이다. 본래 충주 일군에 명망 높은 선비이던 심 진사는 “갑오년 동학란” 이후 급격한 전락의 길로 들어섰다. 생계가 곤란한 처지에 이르렀을 때 친구 정윤조가 멕시코 이민을 제의하고 나섰다. 그가 심 진사와 나누는 대화 속에는 당시 이민 브로커들이 얼마나 허황된 감언이설로 노동자들을 속였는지가 상세히 드러나 있다.

(윤) 자네 말이 그렇게 나오기가 용혹무괴하지마는 내용을 자세히 듣고보면 아무라도 한 번 가볼만 하데. 개척을 한다니까 우리나라같이 호미 괭이 가래를 가지고 인력으로 땅을 파고 곡식도 손으로 심고 손으로 베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일동일정을 모두 기계로 하는데 이름이 노동이지 별 것이 아니라 기계를 둘러 주기나 하고 고동을 틀어놓기나 하는데 그것도 시간을 작정하여 하루 몇 시 동안쯤 하고 그 남아 시간은 제 자유로 공부를 하려면 공부도 하고 장사를 하랴면 장사를 하며 고가(雇價)는 아무리 박한 주인을 만난대도 매일 거기 돈 삼사 원은 된다니 거기 돈 사원이면 여기 돈 팔 원일세 매일 가껏 먹는대도 일이 원밖에 아니 들 터이니 의례히 육칠 원은 남을 것이 아닌가. 그것을 며칠만 붓쳣스면 당년에 긔가를 하고 말 것이니 그런 자리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나.

그러나 모두 거짓이었다. <월하가인>은 돼지고기 값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소나 말처럼 팔려 다니는 ‘버림 받은 백성’들의 참상을 아주 구체적으로 진술해놓고 있다.

이곳 돼지고기 값은 80전 하는데 한인 값은 30전 하니 돼지값에 비교해도 그 가치가 너무 싸다. 모두 조각조각 떨어진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짚신을 신었으니 이곳 본토 토인(원주민) 남녀가 보고 비웃는 소리는 가히 듣기 거북할 지경이다. 연일 큰 빗속에 한인이 여러 어저귀 농장으로 흩어져 일할 때 부인이 아이를 팔에 안고 혹은 등에 업고 길가를 배회하는 모양은 실로 우마(牛馬)와 가축과 같고 보는 이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다.

상동교회 정순만에 의해 국내에 처음 공개된 중국인 하혜의 편지 기사 중 일부이다. 작품에서는 주인공 심 진사를 권유해 함께 이민길에 올랐다가 불귀의 객이 된 친구 정윤조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그 몹쓸 매를 맞아가며 힘에 부치는 노동을 하다가 하루는 병이 나서 누웠는데 저 몹쓸 주인 놈이 오더니 손목을 끌어내어 큰 나뭇가지에다 동그랗게 매달고 잔채질을 어떻게 하였던지 전신에 성한 곳이 없이 터져서 유혈이 낭자한 것을 저 고(庫) 속에다가 가두고 물 한 모금 주지를 아니하더니 그날부터 장독이 나서 며칠을 못살고 인하여 세상을 하직하였는데 그 사람 있는 근처를 현영을 못하게 함으로 문병 한 번도 하여 보지 못했어요.

주인공 심 진사는 다행히 중국인 왕대춘의 도움을 받아 몸값을 물어주고 노예 상태를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작품은 결국 민 판서와 왕대춘 같은 유력한 조력자들을 만나 가족이 모두 이산의 아픔을 극복하고 해후하는 것으로 끝난다. 작품은 후반으로 갈수록 우연과 기연이 거듭되는 안이한 서사전략으로 미학적 완성도가 크게 떨어질 뿐 아니라 작가의 의도조차 모호해지지만 무능한 정부를 만나 수많은 백성이 노예 상태로 전락된 유이민 현실을 재현해낸 성과는 신소설 가운데 단연 독보적이다.
그런데 이 작품 역시 앞의 <송뢰금>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대한 언급이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앞서 「제국신문」에 발표한 <고목화>나 <만월대>와는 사뭇 다른 현상이다. 작품에서 유력한 조력자를 중국인으로 내세운 것은 동포들의 참상을 최초로 세상에 알린 중국인 하혜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해조는 멕시코 동포 문제의 실상이나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구제 운동의 전말을 잘 알고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사실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화자의 언술 속에 딱 한 번 등장하는 미국의 “예수교 목사”에 대해서조차 애써 가치중립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심 진사는 미국 유학에서 기독교인이 되어 돌아와 헌신적 삶을 사는 <고목화>의 조 박사 같은 인물이 될 법하지만, 작가는 외면하고 있다.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것일까? 작품이 발표된 매체 또는 발표 시기의 차이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통감부 시절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제국신문」과 ‘합방’ 뒤 총독부 기관지로 개편된 「매일신보」의 차이가 이들 매체를 통해 발표한 작품들의 기독교 담론에도 차이를 보이게 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통감부 시절의 기독교 정책은 회유가 주조였으나 총독부 시절의 그것은 탄압이었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창간 사원인 이해조가 총독부 시책을 거슬러 기독교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 맺는말–기독교 없는 기독교 소설
<송뢰금>과 <월하가인>은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하와이와 멕시코 유이민 문제를 중심 화소로 삼고 있는 작품임을 살폈다. <송뢰금>은 하와이 유이민 발생 현실을 주요 화소로 호명해낸, 이 부문에서 거의 독보적인 성과작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작가 육정수가 협성회, YMCA, 대한협회 등에 참여하면서 확보한 현실 인식의 지평 위에 직접 참여한 바 있는 개발회사 경험이 더해져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송뢰금>은 이 점 말고도 같은 시기에 발표된 신소설 가운데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도 주제의식이 견고하고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이인직이나 이해조의 소설들이 대부분 지나친 낭만적 이상주의에 매몰돼 현실감각을 잃고 지리멸렬해지는 대신, <송뢰금>은 한결 과학적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현실 인식 태도를 보여주면서 그것을 올곧게 내연화하는 데도 상당한 솜씨를 보여준다. 서사를 더 진전시키지 못한 한계가 있으나 오히려 바로 그 점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줄 수 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송뢰금>의 시대는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패권 경쟁에서 일본의 절대 우위를 증명해준 러일전쟁 이후 어떠한 낙관적 전망도 허락되지 않는 강고한 식민주의의 질곡 속에 빠져들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각각 현실 타개를 열망하던 주인공 계옥과 근암의 처참한 좌절이 이를 은유한다.
이해조의 <월하가인>은 1905년에 있었던 멕시코 ‘노예이민’ 사건을 재현한, 이 부문 유일의 성과작이다. <송뢰금>이 작가의 의도를 우회적으로 암시하는 제목이라면, <월하가인>은 아예 작가의 의도를 속이기 위해 소환된 제목이다. 굳이 ‘애정소설’(哀情小說)이라는 제호까지 달아 독자의 눈길을 돌리고자 한 이 작품의 진짜 의도는 버림받은 멕시코 동포들의 참상을 폭로해 무능한 정부를 비판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인 회사가 주도해 팔아넘기고 기독교 단체가 앞장서 구출 운동을 벌인 이 제재의 작품을 총독부 신문에 연재하는 일은 참으로 난처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해조는 당시 「매일신보」에 영입되어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던 ‘전속작가’이었으니 말이다. 멕시코 동포들의 참상을 격정적으로 파헤쳐 보인 작품이 후반부로 가면서 갑자기 방향을 잃고 해피엔딩의 애정서사로 바뀐 사정이 여기에 있다. 다만 미국을 멕시코와는 다른 문명국가로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가츠라-태프트 밀약’ 이후 밀월 관계에 있던 미일 관계의 영향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송뢰금>과 <월하가인>은 ‘기독교 없는 기독교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 논거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우선 육정수나 이해조가 모두 현실 교회에 적을 둔 기독교인이었음은 이미 확인된 바와 같다. 작품의 중심 화소로 소환한 하와이와 멕시코 이민 문제에는 기독교가 아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 이민 문제에 대한 서사적 인식은 당시 육정수와 이해조를 포함한 기독교 민족주의 진영의 인식과 어긋나지 않고 일치한다. 그런데 정작 작품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언급이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그것은 육정수의 경우 그가 소속된 YMCA가 당시 일본 식민주의 세력과 긴장 관계에 있었던 점이나 지도부의 탈정치주의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이해조는 일제의 대기독교 정책이 ‘회유’ 대신 ‘탄압’으로 전환된 이후 그가 소속해 있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연재한 작품이란 점을 고려할 만하다.


표언복 |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다 퇴직했다. “해방 전 중국 유이민 소설 연구”로 학위를 받았으며 일본, 러시아, 미국 유이민 소설 연구로 관심을 확장해 후속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2020년 7월호(통권 7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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