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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한국의 종교건축물 03(마지막회)
문화·신학·목회 (2020년 6월호)

 

  대한기독교서회 빌딩(3)
  

본문

 

건축의 책임을 맡은 스와인하트는 1931년 기독교서회 신사옥 낙성식에서 다음의 성서 구절을 인용하며 연설을 시작했다. 이 구절은 그가 얼마나 힘겹게 고생하며 서회 신사옥을 건축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삼하 24:24) 그의 연설문을 요약하면서 글을 전개하려고 한다.
한 나라의 문화적 척도는 그 나라의 문학에 주로 의존한다. 역사를 보면 조각, 건축, 그리고 인문학은 인간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쳐왔는데, 이 중에 문학은 사람에게 사상의 틀을 만들어주는 동시에 삶의 길을 안내해준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은 이 점을 일찍 인식하였고 이분들의 헌신적인 수고로 말미암아 서회가 창설되었다.
대부분의 큰 사업들이 그래왔듯이 서회의 시작은 미약했고 또 직원들은 수년 동안 업무를 수행하기에 적절하지 못한 공간에서 일을 해왔다. 1929년이 되어서야 신사옥을 완공할 수 있을 만큼의 건축기금이 마련되었고, 서울에서 가장 두드러진 중요한 거리에 세워졌다. 6,000톤 이상의 석재와 철골, 콘크리트와 벽돌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에 관한 세부적인 설계와 디자인에 관한 사항들을 신중하게 연구하고 계획하였으며,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고 사람들에게 유용한 건물로 쓰임을 받고자 하였다.
이 두 가지 목표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증거는 이 건물 구조의 하자를 살피러 온 공무원이 신사옥 건물에 관해 상세히 설명을 들은 후 “이 건물은 기독교인이 사용하기에 아주 훌륭한 건축물이다.”라고 했다는 점이다. 공무원이 이렇게 말한 그 의도와 의미를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런데 만약 그가 다른 종교 종파가 세운 시내의 어떤 사당이나 절과 기독교 기관을 비교해보고 한 말이었다면 이 사옥이 기독교 문헌의 제작을 위한 본부로 사용된다는 점과 당시 세간에 기독교에 대한 비난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위상을 세우는 이중의 기능을 하게 된다는 점을 일컫는 평가로 이해할 수 있다. 영국의 예술비평가 존 러스킨(John Ruskin)이 『건축의 일곱 등불』(Seven Lamps of Architecture)에서 말했듯이, “목회에서 주님의 성전에 물질적인 봉헌을 하는 것보다 주님의 이름을 알게 하고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미덕을 실천하는 것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유익하며 더 훌륭한 예물을 바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건물의 구상과 계획은 기독교인 건축가가 맡았고, 시행자는 기독교인 중국인이었다. 서회가 임명한 건축위원회가 지시하고 감독한 이 사업은 건축에 임한 모든 사람이 기독교 형제로서 어느 정도로 온전히 협력하며 일했는가가 성공을 가늠한다고 할 수 있다.
스와인하트는 신사옥 건물의 열쇠를 서회 이사장인 로즈 박사(Dr. H.A. Rhodes)에게 전달하면서 “건물 열쇠는 나에게 매우 개인적인 것이다. 그 이유는 이 건물 벽 안에 내 일부를 남겨둔 것 같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열쇠가 논란이나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을 열기 위해 사용되지 않을 것이며, 또 어떤 식으로든 형제들의 신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헌을 허용하는 문을 여는 데도 사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기독교 연합기관으로서 서회의 지향점과 직무가 무엇인지를 엄중히 경고하는 개원 인사를 한 것이다.
스와인하트의 부인 로이스 혹스 스와인하트(Lois Hawks Swinehart)는 당시 신사옥 개원을 기념하는 시 <그 건물 이야기>(The Story of the Building)를 낭독했다. 이 시에서 그녀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알려진 먼 동방 서울 시내에 성서와 잡지와 여러 문헌이 인쇄된다는 사실과 함께 서회의 사명, 사옥 건축의 형태와 재료, 그리고 건축가에 대하여 섬세하게 묘사하였다.
개원식에서 서회 이사장 로즈가 스와인하트에 대한 감사와 찬사로 시작한 그의 개회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스와인하트는 미국의 친구들에게 5만 2,400달러를, 엘리베이터 설치를 위해 5,000달러를 추가로 부탁했으며, 협력 선교본부에도 1만 7,500달러를 요청했다. 1931년 3월 24일, 이사회에서 스와인하트께 감사를 표하기로 하고 함태영 목사, 최재학, 김필수 목사, 백낙준 박사, 하디 박사(R. A. Hardie), 김인영 목사, 오긍선을 위원으로 모셨다. 위원회는 한국어와 영어로 감사의 말을 담은 동판을 새 건물의 정문 입구 근처 홀에 배치하고, 위원회는 이사회 회의실 벽에 설치할 실물 크기의 스와인하트 그림을 제작했다. 그리고 YMCA 강당을 가득 채워주신 하객께 감사를 드리며, 개관식은 신사옥 옥상에서 하였는데 그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순서 개회-주악/고봉경 양-찬송 22장-기도/함태영 목사-성경 낭독/김영섭 목사-개회사/로즈-축시 <그 건물 이야기>/스와인하트 부인-바이올린 솔로/곽정순-감사/청중 기립-답사/스와인하트-합창/시(市) 찬양대 대표유지-축사/윤치호-열쇠 전달식/사장-모두 기립-찬송 3장-송영-축도/양주삼 목사-후주/고봉경 양
개관식 찬송 23장-성경봉독/클라크 박사(W. M. Clark)-기도/정인과 목사


이어서 스와인하트에 대한 감사 동판에 새겨진 글은 다음과 같다고 소개했다. “개인적으로 기금을 모아 이 건물을 온전히 건축하신 미국 장로교 선교사 마틴 루터 스와인하트의 열정적인 봉사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1931년 6월 8일.”
서회의 신사옥을 건립하기 위한 스와인하트의 갖은 노력과 활동으로 한국의 많은 기독교 단체가 연합하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서회 사옥은 서울의 주요 교회 세 곳이 근접해 있는 도시의 중심에 확고한 자리를 마련하였는데, 당시 영국성서공회를 비롯한 외국의 여러 성서공회가 인접해 있었고 길 건너편에는 한국YMCA와 태화사회관이 있었다.
스와인하트 부부는 이내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이사장 로즈는 축사를 통해 한국에서 20여 년 동안 봉사한 두 분께 한국에 있는 모든 한국인 및 일본인 교회와 선교사 및 선교단체가 깊이 감사드리며 한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시게 될 것이라는 희망의 의사를 전했다. 또한 서회 이사회는 스와인하트에게 향후 40년 동안 서회 업무가 큰 문제 없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10만 달러의 기부금을 모금해주시기를 간곡히 요청드린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한국 기독교와 기독교 문헌에 큰 공헌을 한 스와인하트에게 감사를 표하는 말로 축사를 맺었다.
종로 한복판에 세워진 서회의 신사옥은 이후 6・25전쟁으로 인해 벽돌로 세운 담과 콘크리트 바닥만 남기고 불에 탔다. 연합군의 후퇴와 함께 정부는 부산으로 옮겨졌으며, 서회의 직원들도 부산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1952년 7월 하순에 인근 가옥 5-6채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부산 사무실 건물 뒷부분과 2층 사무실까지 화마가 미쳐 6,000만 환을 지출하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그해 9월부터 서울로 다시 올라오게 된 서회는 2개월 동안 종로의 불타버린 사옥을 수리하였다. 이 비용이 무려 1만 2,000달러였는데, 이 중에 절반을 뉴욕에 있는 극동위원회가 부담해주었다. 서회는 건물 수리를 마친 후 업무를 재개하였고, 이어서 기독교 기관들도 서회 사옥 각 층에 입주하여 업무를 시작하였다. 3년 만의 귀가였다.
한편 대한기독교연합회는 1950년 봄에 서회 건물에 한 층을 증축하여 기독교 방송국을 개설하려고 했으나, 전쟁으로 인하여 1954년 봄에 증축 공사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그해 크리스마스를 기해 서회 사옥 5층(옥상)에 기독교 방송국이 개설되어 첫 방송이 시작되었다. 서회와 대한기독교연합회 사이의 중요한 계약 조건은 다음과 같다.

갑: 대한기독교서회, 을: 대한기독교연합회
- 을이 서회 건물을 사용함에 있어서 불편을 주지 않는 한, 을은 25년간 차용료 없이 5층을 집단방송전달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다.
- 을은 갑의 실행위원회의 승인 없이는 세를 놓거나 빌려주지 못한다.
- 을은 5층을 사용하는 동안 제반 수리비와 수위 및 경비를 담당할 의무가 있다.
- 을은 서회 건물에 대한 세금, 보험료, 시 부과금, 상하수도, 난방비의 20%를 부담할 의무가 있다.
- 갑이 건물의 소유권을 타인에게 매도하는 경우라도 을은 5층 사용권을 확보한다.


서회는 피난 시절인 1952년 봄, 부산의 중심지인 창선동 138번지 소재의 건평 52평 건물을 1억 2,000만 환에 매입하여 아래층은 판매부로, 위층은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1965년에는 서회의 부산사무실 신축을 위해 창선동 건물을 520만 원에 매도하였다. 그리고 30평 대지를 매입하는 데 300만 원, 3층 사옥의 건축비로 260만 원을 지출하였다.
1969년 말, 서울시의 도시계획에 따라 서회 건물이 헐리게 되자, 1970년 3월 말에 종로구 연지동의 한국기독교회관 3층으로 이전하고, 마포구 신수동 93-16, 17번지에 서고를 신축하게 되었다. 이 대지 가격으로 325만 1,920원, 건축비로 1,129만 4,250원이 들었다.
사옥의 신축 문제가 당면 과제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1972년 3월 30일 한국기독교회관 대강당에서 위원장 김춘배 목사의 사회로 서회 총회가 열렸다. 그리하여 1972년 예산으로 전년도보다 25% 증가한 1억 6,122만 4,000원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서회의 출판사업 운영난을 타개하고 판매장을 개척하기 위해 서회 빌딩을 건축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3억 이내의 기금으로 빌딩을 건축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서회 사옥 신축 문제는 1969년 말 서회 사옥이 헐린 이후 2년 동안 서회 총회에서 계속 논의돼오던 사안이었다. 부채와 적자 운영을 이어가던 상황에서 구체적인 건축비 예산도 없이 3억 원이 투입되는 규모의 건축을 하려는 것에 관한 논의였다. 그러나 서회 측은 현재 건축기금은 없으나 건물대여금으로 건축비를 충당할 것이라고 했다.
1970년도에 이미 서회는 건축가 김중업 씨에게 960만 원을 주고 건물 설계를 의뢰하여 지하 2층, 지상 20층의 매머드급 빌딩을 설계했으나, 400만 달러라는 건축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당시 서울 시내에 고층 빌딩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는 바람에 임대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어 대규모 빌딩 신축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8명의 건축위원이 인선되고, 1972년 1월 13일 건축위원들은 서회 사옥을 지하 2층, 지상 6층으로 건축하되 향후 12층으로 증축할 수 있도록 하는 설계를 다시 요청하기로 하고 이를 실행위원회에 보고하였다. 대한기독교교육협회의 토지 지분 20분의 1인 약 12평, 금액으로는 1,800만 원 상당에 관한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서회의 조선출 총무는 교육협회가 그동안 어떤 권리행사도 하지 않은 채 지금 와서 지분을 요구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사회는 총무의 감독 아래 건축에 관한 전임 실무자를 두어 건축을 추진하였다. 1972년 3월 실행위원회는 서회 사옥 건축위원들로부터 건축에 관해 보고받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규모: 지하 2층, 지상 6층, 총 건평 약 1,731평
- 용도: 지하 2층/기계실 및 주차장, 지하 1층/점포, 지상 1-2층/은행, 3-6층/사무실
- 공사비: 은행 전세금 및 임대 보증금으로 충당
- 준비 경과: 설계 완료, 건축인가 신청, 시공업자 선정 중


건축위원회는 시공업자를 금강산업주식회사(대표 이주훈)로 선정하고 그해 5월 15일에 서회 회관 건립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처음 계획보다 약간 차이가 발생했는데, 총 건평은 1,705.5평, 총공사비로는 3억 3,023만 3,798원이 투입되었다. 당시 회관 건축비 충당을 위해서 1972년 1월에 외환은행으로부터 1억 원 내에서 대출받기로 하고 은행이 회관 1, 2층을 사용한다는 계약을 체결하였다. 1972년 6월 실행위원회는 건축위원들의 제안에 따라 건축비 조달 계획의 일부로서 미국교회협의회의 연차 보조금 10년분(약 20만 달러)를 일시에 앞당겨 원조해달라고 미국 측에 청했다.
시공사에 2차 공사비 5,190만 원을 지불하고 나자 700만 원이 남아 있었다. 서회는 건축비 충당을 위해 한국기독교회관의 지분을 일부 양도하였다. 당시 서회가 한국기독교회관에 투자한 재산은 대지 59.39평, 건물 242.05평으로 회관 건물의 9.58%에 해당하는 지분이었다. 이 가운데 200평을 평당 20만 원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자선사업재단에 매각하였고, 한국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에 12.35평을 평당 20만 7,000원에 매각하기에 이르렀다.
1972년 5월 15일에 착공한 서회 회관은 1973년 12월 31일에 완공되었다. 그동안 건축위원회는 57회의 모임을 가졌다. 서회는 1974년 1월 4일부터 새로 지은 서회 회관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1973년 12월 31일로 종료된 서회 신사옥의 공사비 조달과 그 지출 내역은 다음과 같다.

자금조달: 3억 8,607만 8,178원
•임대 보증금-외환은행 종로지점 1억 5,000만 원(1-3층, 380평), 고려화재보험회사 2,630만 원(3-5층, 526평), 엄기택 치과의원 411만 6,000원(3층, 13.72평), 금강산업주식회사 442만 5,000원(6층, 110.63평), 금강화학주식회사 133만 5,200원(6층, 33.38평), 허버트니스 주식회사 263만 7,000원(6층, 52.74평), 훼미리식당 1,344만 6,518원(지하 1층, 113평): 총 2억 225만 9,918원
•융자금-외환은행 종로지점 2,900만 원(연 15.5%), 신탁은행 청계지점 4,000만 원(연 23.5%), 전국신학대학협의회 4,000만 원(연 13.6%), 대한화재해상보험회사 950만 원(연 23.5%): 총 1억 8150만 원
•지불 어음-금강산업주식회사 2,000만 원(연 15.5%)

건축공사비 및 지출: 3억 323만 3,798원
건축비 3억 130만 3,761원, 설계비 800만 원, 감리비 200만 원, 세금 573만 3,025원, 건물 등기비 280만 원, 융자비용 650만 5,646원, 건축위원 교통비, 회의비 54만 4,154원, 현장책임자(감독) 급료 109만 9,804원, 투시도 및 잡비 224만 7,408원


1931년에 준공하여 사용하다가 도시계획에 의해 헐린 건물에 비하여 1973년에 새롭게 준공된 건물은 여러 면에서 훌륭했다. 그러나 당시 서울 장안에서 가장 빼어난 건물 중의 하나였다는 이전의 칭송은 사라졌다. 이것은 한국 사회의 문물이 교회보다 앞서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 이정구 교수님의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좋은 글 보내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부


이정구 | 한신대학교에서 교회사를 전공하고, 영국 버밍엄대학에서 건축과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한국교회건축 탐사』, 『교회건축의 이해』 등이 있다. 성공회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며, 현재 동 대학 명예교수이다.

 
 
 

2020년 8월호(통권 7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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