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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한국 근대소설 속의 기독교 조명 05
문화·신학·목회 (2020년 6월호)

 

  계몽기 소설 속 교회사 풍경 두 장면
  

본문

 

| ‘감옥학교’와 대부흥운동
1880년대 중반에 시작된 개신교의 한국 선교는 세계적으로 다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빠른 양적 성장을 이뤄냈다. 일본이나 중국 등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나 인도는 우리보다 훨씬 앞선 선교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국가에서의 교회 성장이 지지부진한 데 비해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가 ‘기적’이라 부를 만큼 빠르게 성장했다. 이처럼 빠른 성장세는 선교 초기부터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기독교의 성장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친일파 송병준은 1909년 당시 한국의 기독교인이 35만 명에 달한다고 보고 있었다.(김승태, “개화기 기독교 전파의 사회・문화적 의미”) “철퇴를 가하여” “전멸”시켜야 할 대상으로 기독교를 바라보던 인물의 계산인 만큼 이 숫자를 객관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빠른 상승 곡선을 타고 있는 기독교의 성장세에 대한 두려움을 엿볼 수는 있다. 그는 실제로 “기독교도 문제는 필경 장래에 한국 문제 가운데 중요한 것이 될 것”이라고 걱정하기도 했다.
초기 한국교회의 성장 배경에 대해서는 그동안 수많은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있다. 오랜 지배층의 학정과 수탈, 해를 거르지 않고 불거진 정치적 격변 등에 시달리고 좌절한 민중이 기독교에서 현실 타개의 가능성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교회 성장과 관련해, 선교 초기의 한국교회사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1899년에서 1904년 사이, 종로감옥 안의 정치범들을 대상으로 한 ‘옥중 선교운동’과 1907년 평양을 중심으로 절정을 이룬 기독교 대부흥운동이다. 두 사건 모두 초기 한국교회의 성장을 추동한 강력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한국교회 고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능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1902년 12월 무렵, 종로 네거리(지금의 서린동)에 있던 종로감옥에는 350명가량의 죄수들이 수감돼 있었다. 그중에는 훗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과 초기의 한국교회사와 항일 독립운동사의 중추가 되는 신흥우(申興雨), 이상재(李商在), 이준(李儁), 유성준(兪星濬), 이원긍(李源兢), 홍재기(洪在箕), 김정식(金貞植), 안국선(安國善), 이종일(李鍾一), 이동녕(李東寧), 박용만(朴容萬) 등을 비롯한 많은 정치범도 있었다. 외세 앞에서는 무능한 정부도 힘없는 백성에게는 사나운 호랑이였다. 왕권의 안위를 도모해 국권 상실의 길을 걸으면서도 개혁을 열망하는 백성의 절규에는 가혹했다. 이 정치범들은 기울어가는 국운을 비통해하며 국권 수호의 길을 고민하던 개화 지식인들이었다.
1902년 10월, 감옥 안에 “획기적인 일”(이광린, “구한말 옥중에서의 기독교 신앙”)이 생겼다. ‘학교’가 설립되고 이어 도서실까지 생긴 것이다. 교육은 주로 이승만, 신흥우, 양의종 등이 맡았으며, 도서실은 감리교 선교사 벙커(Delzell A. Bunker. 房巨)의 주도로 조성되었다. 처음엔 250여 권의 장서로 시작됐으나 상해와 일본 주재 선교사들의 기증이 잇달아 나중에는 523권으로 늘었다. 기독교 관련 서적이 많아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유성준, 홍재기, 이원긍, 김정식, 이상재 등의 독서열이 특히 왕성했으며, 『신약전서』, 「그리스도신문」, 『국문독본』, 『천로역정』 등의 순으로 대출 빈도가 높았다. 이른바 ‘문서선교’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벙커 외에 선교사 아펜젤러, 언더우드, 게일 등이 번갈아 방문하여 선교 활동을 펴기도 했다. 투옥 전에 이미 선교사들과 교유가 깊었던 이승만, 신흥우 등은 먼저 기독교 신자가 된 뒤 동료 죄수들을 믿음으로 이끌었다. 이렇게 해서 얻게 된 결신자가 40명이 넘었다. 이상재, 이원긍, 홍재기, 김정식, 유성준, 안국선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은 모두 출옥 후 게일 선교사가 있는 연동교회의 교인이 되었다.
이들의 개종은 단순한 교세 확장 이상의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유교가 더 이상 국가의 지도 이념이 될 수 없을 만큼 쇠락한 상황이기는 하였으나, 이제 막 선교를 시작한 기독교로서는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이나 다름없었다. 박래(舶來)의 기독교를 처음부터 사교(邪敎)로 규정한 ‘척사파’(斥邪派)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지만, 민중의 삶과 의식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유교적 인습과 가치를 허무는 일이 결코 수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터에 재래의 유학에 정통한 지식인이자 지배 계층에 속해 있던 개화파 지식인들의 집단적 개종은 기독교가 유교의 벽을 넘어 굳게 닫혀 있던 선교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상류 지배층 인사들의 개종이 잇따르고, 더불어 교회 내의 신분 계층이 다양해지면서 교회 성장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이들 개신 유학자들의 개종으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민족주의 국권회복운동의 중추로 자리매김하는 단초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일찍이 「대한매일신보」가 이 무렵 붐을 이루고 있던 “경향신사”(京鄕紳士)들의 개종 소식을 전하면서 “국권을 만회할 기초”를 기대한 데서 알 수 있듯이(1907. 8. 6, ‘잡보’), 선교 초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유학자들은 대부분 망국의 현실을 고민하다 기독교 문명화에서 출로를 찾은 사람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계층과 신분을 뛰어넘어 명실 공히 전민족적 저항운동으로 승화된 3・1만세운동도 바로 이들 개신 유학자들의 개종으로부터 배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 기독교인이 된 개화파 지식인–<다정다한>
우리 소설사에는 위 옥중 선교 체험을 통해 기독교인이 된 한 개화파 지식인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 존재한다. 1907년에 나온 작품, 백악춘사의 <다정다한>이 그것이다. 소설이란 시에 비해 순발력이 더딘 장르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발빠른 반응임을 알 수 있다. 종로감옥의 기독교 선교는 이승만의 <옥중전도>(1903), 이능화의 『조선기독교급외교사』(1928), 이상재나 신흥우의 전기 등을 통해 단편적으로 알려져 왔으나 소설 속에 호명된 것은 <다정다한>이 처음이자 유일하다. 그리고 옥중 전도의 실상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조명되어 연구의 물꼬를 터주었다.(이광린, 위의 글)
작품은 「태극학보」 6호와 7호(1907년 1월, 2월)에 발표되었으며, 실존인물 김정식(金貞植, 1862-1937)을 모델로 한 소설이다. ‘사실소설’(寫實小說)이라 한 표제에서 짐작되듯이, 구한말 경무관 출신인 김정식이 옥중 선교를 통해 기독교에 귀의한 뒤 일본에 건너가 유학생 선교와 지도활동에 투신하기까지의 행적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런 점에서
<다정다한>은 일종의 전기소설이며, 실존 인물의 아호를 주인공의 이름으로 내세우고 있으니 일종의 실명소설이라 할 만하다. 주인공의 이름으로 쓰인 ‘삼성’(三醒, 三星)이라는 호를 가진 김정식은 황해도 해주 태생으로, 한국 기독교 청년운동사에 빼놓을 수 없는 자취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작품에 그려진 삼성 선생은 옳은 일을 위해서라면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진보적 성향의 인물이다. 한성부 경무관으로 있을 때는 만민공동회 인민들을 도륙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다 좌천당하고, 목포 재직 시에는 패장(牌將)의 허락 없는 부당한 사형(私刑)을 제지하거나 미신 숭배를 일삼는 신당을 없애는 등의 행적이 이를 말해준다. 결국 경무관 직에서 해임당하고 옥살이까지 하게 된 그는 옥중 선교를 통해 기독교인이 된 뒤 기독교 청년운동에 투신했다. 황성기독교청년회 초대 한인 총무, 재일본대한기독교청년회 창설 총무 등이 대표적인 이력이며, 재일본조선기독교회를 조직하여 동포를 지도, 보호하는 데 앞장선 것도 그의 공적이다.
지은이 백악춘사는 장응진(張應震, 1890-1950)의 필명으로 밝혀져 있다. 안창호가 망명길에 오르면서 대성학교와 신민회에 관련된 모든 업무를 위임할 정도로 신임이 두터운 인물이다.(윤경로, 『105인사건과 신민회연구』) 개명한 부친의 영향으로 일찍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신앙인으로서의 활동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작가 장응진과 모델 김정식 사이의 관계는 무엇이었을까? 두 사람은 아마도 김정식이 재일본대한기독교청년회 창설 책임을 지고 도쿄에 건너간 1906년 8월 이후 깊은 사귐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정식이 28년 위인 나이 차이로 보나 그때까지의 행적으로 미루어볼 때 두 사람을 연결시킬 수 있는 고리라고는 같은 황해도 출신이라는 점과 기독교인이라는 점밖에 없다. 김정식이 도쿄에 도착했을 때 장응진은 관서지방 출신 유학생 모임인 태극학회와 그 기관지 「태극학보」 발행에 몰두하고 있었다. 장응진은 같은 신앙인이라는 점을 매개로 김정식과 자주 만나며 김정식의 행적을 취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작품이 발표된 1907년 1월까지, 두 사람의 사귐이 가능했던 기간은 겨우 3-4개월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짧은 기간에 취재와 집필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김정식에 대한 장응진의 신뢰와 존경심이 대단히 깊고 컸음을 짐작케 한다. 전택부는 “장차 귀국하여 민족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김정식 총무”였다며, 독실한 신앙심, 여유 있는 마음 자세, 기독교적인 생활 태도가 학생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한국YMCA운동사』) 김정식에 대한 작가의 신뢰와 존경심은 작품 속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김정식은 1902년 6월 체포되어 종로감옥에서 옥살이를 했다. ‘개혁당사건’ 또는 ‘조선협회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작품에서는 ‘일본협회사건’으로 기술돼 있어 혼란스럽다. 구한말, 하루가 멀다 하고 불거져나온 여러 정치적 사건들의 실체를 정확히 정리해야 할 필요가 시급해 보인다. 이때 함께 체포된 김정식 등의 정치범들은 사실상 구체적인 범죄 사실이 확정되지 않은, 유길준 역모 사건의 단순 포섭 대상이었다는 견해도 있어 주목된다.(이광린, 같은 글) 그가 무죄로 풀려난 것은 1904년 3월. 옥살이 기간은 만 2년이 안 되지만, 작품에서는 ‘3년 만의 사출(辭出)’로 되어 있다. 흔히 ‘햇수’로 따지는 셈법에 따랐을 것이다. 작품은 실제적 인물 김정식에 대한 작가의 신뢰와 존경심의 표현이며, 이를 독자들에게 두루 알리고자 하는 의도가 창작 동기라 할 것이다. 방점은 ‘기독교인 김정식’에 두고 있으면서도 입교 이전의 행적을 그리는 데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것은 주인공의 특별한 사람됨을 강조하고 신비화하기 위한 일종의 서사 전략일 뿐이다. 작품이 “선생은 지금도 일신을 구세(救世)에 자위(自委)하여 전도 사업에 열심 종사합내다. 아멘.”으로 끝맺고 있어 작가가 여전히 ‘삼성 선생’과 현실 속에서 가까이 교유하고 있음이 드러나 있다. 이 점은 인물 서사에서 ‘양날의 칼’이다. 한편으론 사실성에 신뢰도를 높일 수 있지만, 그 뒤엔 미화, 과장, 은폐 등의 유혹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작품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정치・사회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독자는 만민공동회운동, 관리 행정 및 행형제도, 민간 생활상의 일단 등을 엿볼 수 있지만, 여기서 주목하는 바는 종로감옥의 실상을 그려낸 부분이다. 작품에는 “도야지 우리 같은 작은 방”들로 구성된 감옥 안에서 “연약한 신체에 무겁고 무거운 착고를 이기지 못하여”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견뎌야 하는 수감자들의 실상이 묘사되어 있다. 가장을 잃고 생계의 어려움에 내몰린 가족들 생각으로 인한 수감자들의 고통은 옥살이를 주요 화소로 불러 쓰고 있는 소설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주인공이 옥중에서 성서와 『천로역정』 등을 읽고 믿음에 이르는 과정을 비교적 소상하게 기술함으로써 향후 한국교회사의 지형을 바꾸게 될 옥중 선교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증언해주고 있다.

| 기독교 대부흥운동
말하거나 글 쓰는 이에 따라 ‘대부흥운동’, ‘대각성운동’, ‘대회개운동’, ‘대사경회’ 등으로 불리면서 일각에서 아직도 용어에 대한 시비가 있다. 따지고 보면 어느 것 하나 온전한 용어가 아니며,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잘못된 것이라 할 수도 없을 만큼 다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방외인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각성(혹은 회개)운동의 성격을 띠고 시작되었지만 뒤에 ‘백만인구령운동’으로까지 연장되었으며, 결국 교회의 획기적인 성장과 부흥을 견인한 사실을 감안하면 ‘대부흥운동’이라는 용어가 좀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다른 용어들보다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는 것도 아마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아직 선교 초기라 할 수 있는 1900년대 벽두의 기독교 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사 제일의 ‘사건’이라 할 만한 것이다. 1907년 평양에서 절정에 달해 흔히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으로도 불리지만, 맨 처음 시작은 1903년 원산이었으며, 한국 교인들이 아닌 일곱 명의 감리교 선교사들이 가진 작은 성서 연구 모임이 발단이었다. 더욱이, 성과 없는 선교활동에 심한 자괴감을 느끼며 자책하던 한 선교사의 자기 성찰과 죄의 고백이 이후 전개될 대부흥운동의 불씨였다는 사실은 놀랍다. 바로 캐나다 출신의 의료선교사 하디(R. A. Hardie, 河鯉泳, 1865-1949)가 그 주인공이다.
이 작은 모임에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된 부흥운동은 이후 교파를 초월한 전국적인 부흥운동으로 번져갔다. 1905년에는 감리교와 장로교의 세계 6개 선교회의 대표들로 구성된 선교공의회가 조직되어 부흥운동을 계획하고 지도하기도 했다. ‘부흥회’ 혹은 ‘사경회’의 이름으로 모이는 집회마다 만원을 이루고 새로운 결신자가 쏟아졌다. 그 결과 교회는 괄목할 만한 양적 성장을 이뤘다. 대부흥운동 기간에 평양에서만 무려 2,000명이 개종하여 전체 5만 명의 인구 중 기독교인이 8,000명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이창기, 『한국교회 초기 부흥운동』) 1905년에서 1907년 사이 교세가 무려 267% 이상 증가했다는 기록도 보인다.(『한국기독교의역사 1』)
이렇게 맞이한 성장 기조는 당대의 일시적 현상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어 오늘의 교세를 추동하는 동력으로 작용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는 한국교회 고유의 전통적 특징, 예컨대 부흥회, 새벽기도, 적극적인 집회 및 전도 활동, 심방 등이 모두 이에서 비롯된 것들임을 감안하면 대부흥운동의 역사적 성격과 의미가 자명해질 것이다.
대부흥운동은 이후 ‘백만인구령운동’으로 이어져 교회 성장을 촉진했다. 백만인구령운동이란 1909년에서 1910년 사이, 감리교 선교사들로부터 처음 시작된 신자 배가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감리교뿐 아니라 장로교에서도 노회의 결의를 거쳐 교단 차원의 운동으로 추진되었다. 서울과 지방에 초교파적 전도단이 조직되어 전도집회를 열고, 교인들은 노방 전도나 방문 전도 활동을 전개했다. 권서인(勸書人)이나 전도부인들을 통한 문서 전도 활동은 특히 이 시기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서는 학생들과 교사들이 전도운동에 동원되기도 했다. 백만인구령운동의 열기나 성과는 비록 대부흥운동의 그것에 비할 바 못 되었으나, 초기 교회사에서 자취가 분명한 또 하나의 신앙운동이었다. 1907년 「황성신문」에 연재된 반아의 <몽조>는 기독교 대부흥운동과 백만인구령운동을 배경으로 삼고 있어 흥미롭다.

| 기독교 대부흥운동에 대한 냉소–<몽조>
<몽조>(夢潮)는 1907년 「황성신문」에 연재된 신소설이다. 지은이가 누구인지 몰라 깊이 있는 논의가 어려웠으나, 필명으로 쓰인 ‘반아’(槃阿)가 석진형(石鎭衡, 1877-1946)의 아호라는 최원식 교수의 주장이 제기됨으로써(『한국계몽주의 문학사론』) 논의가 좀 더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반아 석진형은 일제강점기의 법학자이자 관료이다. 일본 호세이(法政)대 법률과를 나와 구한말 법부의 법률기초위원, 법관양성소 교관을 지냈다. 1910년대에는 금융계와 실업계에 몸담은 적도 있고, 1920년대에 들어서는 행정 관료로서 충남지사와 전남지사 직을 거쳤다. 남긴 글이 많지 않아 주로 살다 간 행적으로만 평가되는 편인 그가 소설을 썼다는 사실은 좀 의외이지만, 그로서는 이미 검열과 탄압이 법률적 기제로 작동되던 시절에 내면화된 현실인식을 드러낼 수 있는 글쓰기 방식의 하나였을지 모른다.
<몽조>는 그동안 작품 속에 호명된 기독교 담론을 중심으로 꽤 논쟁적인 조명을 받아왔다. 논의는 주로 <몽조>가 기독교 소설이라는 견해와 그렇지 않다는 견해로 갈린다. 똑같은 작품을 두고 이렇듯 서로 다른 이해나 평가가 대립하는 경우는 우리 소설사에서 흔히 보아온 일이다. 현진건의 <적도>(1933)나 채만식의 <탁류>(1937)가 그랬고, 일제 말기 현경준의 <유맹>(1940) 또한 그렇다. 가혹한 검열 현실을 피하기 위해 간접화, 내연화 방법을 취하면서 생긴 불가피한 현상이라 할 것이다. 성서에서 예수가 알레고리 화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과 비슷하다. 문제의 발단은 다음의 일절에 있다.

하느님을 믿으면 내 속에 뭉친 이 생각이 다 풀어지고 근심이 없겠오. 믿다 뿐이겠오. 아마 내가 다 죄가 많아 바깥 남정도 돌아갔지요. 어떻게 회개하나. 잘 믿고 구하면 돌아갔던 사람이라도 다시 살아 올 수가 있겠오. 네에. 그러면 믿다 뿐이겠오. 이 내 몸이 부서져서 콩가루 세모래가 되더라도 믿다 뿐이겠오. 네 이 내 머리를 베어 신을 삼아 신고라도 가다 뿐이겠오. 에구구 어찌하면 회개하나. 하느님 마옵소서.
주인공 정부인이 정동교회 전도부인의 전도를 받고 보여준 반응이다. 예수를 믿겠다는 말인가, 믿을 수 없다는 말인가? 많은 연구자들이 위 진술의 표면적 의미에 이끌려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놓쳤다. 오독인 것이다. 주인공 정부인은 개화운동을 하던 남편이 사형당한 뒤 아이들과 함께 삶의 벼랑에 내몰려 있다. 이때 찾아온 전도부인이 쪽복음서 하나를 주고 가더니 다시 나타나서는 아주 긴 설교를 통해 예수 믿기를 권한다. 권서인(勸書人)이나 전도부인을 통한 문서 전도나 방문 전도는 대부흥운동기의 대표적인 선교 활동이었다.
작품에서 전도부인의 설교는 무려 연재 3회에 걸쳐 이어질 만큼 장황하다. 인간의 불행은 죄로 말미암은 것이며, 죄는 인간이 마귀의 유혹에 빠져 짓게 되는 것이므로,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이런 전도부인의 설교 끝에 보인 정부인의 반응이 바로 위에 인용한 내용이다. 죽은 남편이 살아올 수 있다는 절대 불가능한 조건을 전제로 한 반어적 선언을 그대로 믿겠다는 약속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근심이 없겠오?” 혹은 “…다시 살아올 수가 있겠오?” 하는 식으로 오늘날처럼 물음표(?) 하나만 더해 읽어도 오독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인용은 정부인이 예수를 믿겠다고 결신하는 내용이 아니라, 반대로 예수 믿기를 거부하고 냉소하는 것으로 읽어야 정확하다. 남편을 죽음으로 내몬 정치현실에 대한 분노와 이로 인해 삶의 벼랑 끝에 내몰린 정부인 자신의 고통에 대한 절규인 것이다.
<몽조>는 앞서 <다정다한>을 살피면서 언급했듯이, 수많은 정치범을 양산하던 정치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정부인의 남편 한대흥은 정치개혁운동에 나섰다가 사형을 당했다. 나라가 “세계에 병신구실함을 분히 여겨” 투신한 애국운동이었으나 보람없이 죽고 가족들까지 불행한 지경에 빠뜨리고 말았다. 작가에 의하면 “자기의 잡은 생각을 이루기 위하여 이 세상의 이러한 풍조를 거슬러 노는 사람”일 뿐이다. 작가는 한대흥 같은 정치개혁 운동가들을 냉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한대흥처럼 본인만 “공연히 불행한 지경에 빠질 뿐 아니라 그 사람에게 딸려 있는 사람도 모두 그 사람과 같은 지경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제명으로 삼은 ‘몽조’(夢潮)의 의미가 확실해진다. ‘꿈 같은 풍조’,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좇는 사람들 또는 그런 경향’쯤 될 것이다. 일차적으로 정치개혁운동에 나섰다가 부나비처럼 스러지는 사람들을 겨냥했지만, 그 무렵 요원의 불길처럼 일고 있던 기독교 대부흥운동을 의식한 것이기도 하다. 작가의 시각으로는 개화운동이나 기독교 신앙운동이 다 같이 꿈같은 풍조에 휘말려드는 일로 보였던 것이다. 작가가 분류한 바에 따르면, 헛된 꿈을 꾸지 않고 세상의 풍조에 순응해 사는 사람이 제일, 제이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바로 석진형 자신이 그런 현실순응형의 삶을 산 사람이기도 하다.

| 맺는말
1900년대 벽두에 있었던 옥중 선교운동과 대부흥운동은 한국 기독교 역사상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교회사적 사건임은 물론, 민족사적으로도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교회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상당한 논의가 축적되어 온 반면, 민족사적 의미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미온적이었다. 두 사건의 두드러진 성과는 이후 한국교회가 “근세사의 신비”(전택부, 『한국교회발전사』)로 불릴 만큼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만 그뿐이라면 그 의미는 대수로운 게 아닐 수도 있다. 내적이고 질적인 성장이 안받침되지 않은 외적이고 양적인 성장뿐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감당하기 어려운 역기능으로 기능할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두 사건은 교회의 외적 성장을 안받침하기에 충분한 내적 성장을 추동했다. 오히려 내적 성장이 외적 성장을 추동한 것일 수도 있다. 별도의 논의가 필요한 만큼 이쯤에서 마무리하겠거니와, 두 사건의 외연이 방대하고 지니고 있는 의미가 깊은 만큼 당대 지식인들이 그들 인식의 프리즘 속에 포착해내고자 한 반응은 자연스럽다.
당시 지식청년들 사이에 신망이 높던 실존인물 김정식의 인품을 기리고 있는 장응진의 <다정다한>은 1903-04년을 전후한 시기 종로감옥에서 있었던 옥중 선교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한, 소설로는 <다정다한>이 이 방면의 유일한 작품이다. 더불어, 당시 전통 유학에 익숙한 개화 지식인의 개종과 기독교 신앙의 구현 과정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한편 한말의 정치개혁운동과 기독교 대부흥운동을 배경으로 한 반아의 <몽조>는 작가의 현실 순응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작가는 정치개혁 운동가들을,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안위까지 위협받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폄훼하면서, 동시에 대부흥운동을 계기로 기독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냉소하고 있다. 실현될 수 없는 헛된 꿈을 좇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당시 불붙듯 타오르던 대부흥운동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어서 주목할 만하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초기 교회 성장에 큰 몫을 담당한 전도부인의 활약상을 핍진성 있게 재현해낸 것도 <몽조> 고유의 특성이라 할 것이다.


표언복 |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다 퇴직했다. “해방 전 중국 유이민 소설 연구”로 학위를 받았으며 일본, 러시아, 미국 유이민 소설 연구로 관심을 확장해 후속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2020년 6월호(통권 7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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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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