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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기독교와 한국 전통문화의 화해를 위하여 08
문화·신학·목회 (2020년 6월호)

 

  고래의 은유, 생태와 신화를 넘어
  

본문

 

| 깊디깊은 고래 배 속, 넓디넓은 고래 등
울진 둔산진에 사는 한 백성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전복을 작살로 찔러 잡다가 고래를 만나 배와 함께 고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고래 배 속에 들어가 보니 작살을 휘두를 만큼 넓었으므로 온 힘을 다해 사방을 찌르자 고래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그를 토해냈다. 그가 밖으로 나와보니 온몸은 흰 소처럼 흐물흐물해졌고 수염과 머리털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구십이 넘도록 살다가 죽었으니, 천명이 다하지 않았기에 고래 배 속에 들어가서도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성대중(1732-1809)이 쓴 『청성잡기』(靑城雜記)에 나오는 내용이다. 성대중은 서얼 출신으로 박지원, 박제가, 남공철 등과 교유하던 인물이다. 『청성잡기』는 100여 편의 국내외 야담을 모아놓은 것으로 취언, 질언, 성언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이병도가 소장하던 이 책은 1964년에 김화진이 잡지 「도서」 제6호에 전문을 소개하였고, 을유문화사에서 간행하였다.
고래 배 속에 들어갔다 살아 돌아온 이 이야기에서 살이 흐물흐물해지고 수염과 머리털이 하나도 없었다는 대목이 흥미롭다. 다시 태어났다는 비유일까? 마치 갓 태어난 아이를 설명하는 듯하다. 이보다 앞선 기록이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 제6권 만물문(萬物門)이다. 한 어부가 고래 배 속으로 삼켜졌고, 그 속에서 칼로 창자를 그어 고래가 토해낸 덕분에 살아 나왔으며, 이후로 머리가 벗겨져 다시는 털이 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탄주어’(呑舟魚), 즉 ‘배를 삼킨 물고기’라는 별칭이 그래서 나왔다.
고래의 배 속에서 살아 돌아온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일까? 고래 배 속에 들어갔다 살아 돌아온 이야기는 또 있다. 손진태가 조선 각지의 민담을 모은 『조선민담집』(1930)의 한 대목이다.

어떤 사람이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고래에게 잡아먹혔다. 배 속을 들어가 보니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도박판을 벌이고 있었다. 곁에서는 옹기장수가 옹기 지게를 세워두고 도박 구경을 하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도박을 하던 사람이 옹기 짐을 잘못 쳐서 박살이 났다. 옹기 파편에 찔린 고래가 날뛰다가 죽고 말았다. 고래 배 속에 있던 사람들이 옹기 파편으로 고래의 배를 째고 탈출하였다.

고래가 생명을 구해준 이야기도 있다. 흑산도 사리에 살았던 박유석 씨의 이야기이다. 한번은 혼자 물고기를 잡으러 먼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난 바람에 배가 망가져 표류하게 되었다. 그때 고래 한 마리가 다가와 박유석 씨 배를 등에 태우고 왔다. 박 씨를 해안에 안전하게 내려준 고래는 유유히 풍랑 속으로 되돌아갔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 것이다. 그 이후부터일 것이다. 박 씨 집안은 고래 고기를 먹지 않는다. 혹시 지어낸 이야기는 아닐까? 필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이가 깜짝 놀라는 눈으로 손사래를 친다. “실제라니까 그러네.” 하면서 박 씨네 아들과 손자들의 이름을 줄줄이 댄다.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생명의 은인인 고래를 먹을 수 없어서였으리라.
고래 하면 누구나 장생포를 떠올린다. 울주 반구대가 있고 고래축제까지 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조선의 문인 백호 임제(林悌)는 <풍악록>(楓岳錄)에서 “큰 새처럼 생긴 몸집이 새까맣고 물을 뿜어대며 눈발 같고 소 울음소리를 내는” 고래를 언급했다. 강원도 간성을 여행하며 남긴 기록이다.
동해 외에 남도에서 고래가 거론되는 지역은 어디일까? 대표적인 곳이 흑산도이다. 사람을 살린 고래 이야기 때문만이 아니다. 20세기 초반 흑산도는 참고래, 대왕고래, 귀신고래, 혹등고래 등 대형 고래들을 포획하는 기지였다. 이주빈이 쓴 학위논문을 보면 일제가 설치한 대흑산도 포경 근거지에서 1926년부터 1944년까지 한반도 근해 전체 포획량의 4분의 1이 넘는 27.4%의 고래를 포획했다.1 주강현의 논의를 빌려 독도의 강치 멸종사와 흑산도 고래 집단학살 사건을 동일한 의미로 독해하고 있다. 관련 근거가 많다. 고래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흑산도 예리 뒷산은 지금도 ‘곤삐라산’(金比羅, 비를 오게 하고 항해의 안전을 수호하는 신)이라 불리는데, 이곳에 신사를 세우고 도리이(鳥居)의 좌우 양 기둥을 고래 턱뼈로 세우기도 했다. 흑산도를 다시 고래의 섬으로 부르게 하자는 이 씨의 제안은 단지 마을역사 추적이나 마을 가꾸기의 차원을 넘어서는 이야기이다. 지금의 황폐해진 어로환경과 해양환경을 보면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 풍랑 속에서 사람을 살려낸 베트남의 고래들
베트남은 고래를 신으로 모시는 신당들이 해안을 따라 즐비하다. 가히 경신(鯨神)의 나라이다. 칸호아(Khanh Hoa) 지방에는 고래 신당이 50여 개나 있다. 남쪽 메콩 델타의 벤째(Ben Tre)에는 12개의 고래 신당이 있다. 당연히 관련 고사 등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이를 연구한 레티응옥깜에 의하면, 고래신은 베트남의 비엣족(越族)이 남진(참족을 밀어내며 남쪽으로 국토를 확장해갔음)하는 과정에서 생겨났으며, 이 때문에 중부나 남부의 동해안 지역에만 사당이 있고 북부 지역에는 드물다고 한다. 베트남의 긴 해안을 따라 중부 후에(Hue) 지역에서 남쪽 호치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분포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여러 형태의 전설과 의례도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응우엔 왕조 설화와 관음신앙 설화이다.2
응우엔(Nguyen) 왕조를 건국한 자롱(Gia Long, 1762-1820)이 왕자였을 때의 일이다. 그는 떠이선(Tay Son)의 추격을 피해 남쪽으로 도망을 갔다. 떠이선의 배가 강 어귀에 도착할 즈음 하필 태풍이 불어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자롱은 하늘에 기도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생겼다. 고래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배 밑으로 들어가 밤랑(Vam Lang) 해변까지 안전하게 피신시켜 준 것이다. 그렇게 자롱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고, 이후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관음보살에 관한 설화도 여러 버전이 있다. 어부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던 관음은 법의(法衣)를 작은 조각으로 찢어 바다에 던져주었다. 옷 조각은 각기 고래로 변해 태풍 속의 어부들을 구해주었다. 하지만 고래가 작아서 강한 태풍에서는 사람을 구할 수 없었다. 관음은 코끼리의 뼈를 빌려 큰 체격의 고래로 변하게 했다. 베트남에서 고래를 ‘코끼리 물고기’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엣족뿐만 아니라 참족들을 포함해 봉황이나 상인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들도 허다하다.

| 경신(鯨神)과 포경(捕鯨), 베트남의 고래 의례와 페로어의 고래사냥
베트남 해안에서는 고래가 죽어서 떠밀려 오면 해안 모래사장에 장사를 지낸다. 사람이 아닌 고래의 장례식을 치른다는 말이다. 마치 사람처럼 매장 후 3일, 21일, 49일, 100일, 1년, 3년 의식을 치른다. 마을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개는 약 3년여 매장해두면 탈골이 된다. 탈골이 확인되면 뼈만 추려서 신당 안의 항아리에 모신다. 필자가 3년 남짓 조사한 다낭 지역 남오 마을의 고래 사당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고래의 2차 장례라고나 할까? 필자가 준비하고 있는 자료가 보완되면 동아시아 전반을 관통하는 2차 장례의 맥락을 고래를 매개로 이야기하려 한다. 고래 뼈를 항아리에 모시는 과정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어촌 마을의 동제(洞祭) 같은 축제이다. 제사가 있고, 배 경기가 있으며, 춤과 노래와 향연이 있기 때문이다. 울산 고래축제가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하지만 세계에는 극단적인 축제도 있다. 차마 ‘축제’라는 용어를 붙일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덴마크령 페로어(Faroe)의 고래사냥 축제는 그 잔인함만으로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스물한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이 군도에서 무려 1,200년이나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 축제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이 살육하는 고래들이 선원들의 길잡이 노릇을 한다고 알려진 들쇠고래(Pilot Whale)라는 점이다. 더군다나 이 주변의 섬들은 2007년 「내셔널 지오그래피」에서 선정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다. 뭔가 뒤틀려 보인다. 바이킹의 후예들답게 그들의 전통적 방식을 고수하는 것이니 존중되어야 할까?
위 두 사례를 포섭하는 견해가 있다. 우리나라를 포경문화권과 경신문화권으로 나누자는 주장이다. 송화섭이 주장하는 경신문화권은 동아시아 남태평양에서 서식하는 돌고래(dolphin)의 분포 권역에 한반도 서남해안을 포함시키고 있다. 돌고래의 분포 지역이 동아시아 쿠로시오 난류권의 돌고래의 이동과 좌초(stranding)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인도차이나반도 베트남 남해안에 고래 사당과 고래 무덤이 집중 분포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남태평양 경신문화권에 전승하는 돌고래의 해난 구제 설화가 흑산도에 등장하고, 사람이 돌고래를 탄 그림이 전북 부안의 위도 대리마을 원당(願堂, 소원을 비는 집, 마을 앞에 펼쳐진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산봉우리 정상에 세워놓음)의 당신도(堂神圖)에도 표현된다. 경신문화권에서는 돌고래가 바다에서 풍랑으로 전복 위기에 처한 선박과 표류하는 어부들을 구출한다는 이야기가 핵심으로 등장한다. 송화섭은 동아시아 경신문화권의 범주를 인도차이나반도 남해에서 한반도 서남해안까지 설정할 수 있으며 이는 돌고래 서식권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3

| 경해(鯨海), 연오랑 세오녀가 건너던 고래 바다
고사에서 엿볼 수 있듯이, 우리 또한 고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나라이다. 대표적으로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야기를 꼽을 수 있다. 신라의 8대 왕 아달라 즉위 4년(丁酉年, 157년), 동해안에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가 바다에 나가 해조(海藻)를 캐던 중 갑자기 바위 하나가 그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이 보고 말하기를, “이는 비상한 사람이다.” 하고 곧 그를 왕으로 삼았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괴이히 여겨 나가 찾다가,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발견하고 그 바위에 올라가니, 바위가 또한 전처럼 싣고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놀랍고 의아하여 왕께 아뢰니,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세오녀는 귀비(貴妃)가 되었다. 이때 신라의 해와 달이 광채를 잃게 되자, 일자(日者)가 아뢰기를, “일월(日月)의 정기가 일본으로 가버렸으므로 이러한 괴변이 일어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사자를 보내 두 사람을 찾았더니,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이른 것은 하늘이 그렇게 시킨 것이니, 이제 어찌 돌아갈 수 있으랴. 그러나 짐의 비가 손수 짠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잘 될 것이다.” 하고, 그 비단을 주었다. 사자가 돌아와 아뢰어 그 말을 좇아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전과 같아졌다. 그 비단을 어고(御庫)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였다.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 하였는데 한일 간 교류의 증거, 즉 일본으로 건너간 세력으로 해석하며, 여기 등장하는 바위를 고래로 해석한다.
그래서일까? 동해가 고래의 바다, 즉 경해(鯨海) 혹은 경천해로 불리던 때가 있었다. 중국에서도 요금 시대 이후 원나라 시대에 잠시 이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이때의 바다 범위는 지금의 사할린과 일본 북해도 북부의 서쪽 바다를 뜻하는 것이며 그 남쪽 해역은 포함하지 않는다고도 한다.4
하지만 『승정원일기』 고종 14년(丁丑年, 1877년) 기사 중,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의 공적을 다하라는 내용으로 통제사 이규석에게 내린 교서에는 고래 바다, 즉 경해(鯨海)라는 용어가 동해의 별칭으로 나온다. “왕이 이르기를, 서루(西壘)는 한 방면에서 왕의 명을 받듦에 전제(專制)의 책임을 맡으며, 남기(南紀)는 삼도(三道)를 지탱함에 도통(都統)의 권한을 준다. 광채가 조장(鳥章)을 변화시키고, 파도가 경해(鯨海)를 고요하게 한다.” 또한 조선 중기의 학자 강항(姜沆)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체험을 기록한 『간양록』의 “적중봉소” 중에도 ‘경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만리(萬里) 경해(鯨海)의 밖이고 구중궁궐의 안인지라, 혹은 이 왜노들의 간위(奸僞)를 자세히 살피지 못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고전번역원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보면 우리의 고문헌 중 ‘경해’(鯨海)라는 용어는 총 458건 나온다. 모두 동해를 고래의 바다로 부른 기록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동해를 고래의 바다로 부른 결정적인 맥락은 무엇보다 울주 반구대 암각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고래의 기원과 재생의 은유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 암각화이다. 이 암각화는 태화강 상류의 지류인 대곡천 중류부 절벽에 있으며, 국보 제285호로 지정되었다. 형상을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 237점인데 육지동물 97점, 해양동물 92점 등 다양하다. 이 중 고래 그림만 62점으로 전체 그림의 26%에 해당한다. 그만큼 고래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익히 알려진 문화재이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딱히 알려진 고래의 어원은 없는 듯하다. ‘골짜기[谷]에서 물을 뿜는 입구’라고도 한다. 도교 관련 설화가 있는데, 용왕의 아홉 아들 중 셋째인 ‘포뢰’(蒲牢)와 관련된다는 이야기이다. 그 아들은 바다에 사는 어떤 큰 생물을 무서워해서 그것만 나타나면 큰 소리로 울어대는 캐릭터이다. 소리 지르는 것을 좋아하여 종의 윗부분에 장식된다. 그래야 종소리가 멀리 울려 퍼진다고 한다. 이 호명이 와전되어 ‘포뢰’가 ‘고뢰’로 변해 ‘고래’가 되었다는 것이다.5
고래는 포유강 고래목의 동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본래 포유류이나, 수중생활에 적응하여 뒷다리는 퇴화했으며, 앞지느러미가 앞다리이다. 털은 퇴화하였고 피부에는 두꺼운 지방층이 있다. 대개 4-5m를 기준으로 작은 고래는 돌고래, 큰 것은 고래라 한다. 강거두고래, 가두고래, 귀신고래, 대왕고래(흰수염고래), 돌고래, 밍크고래, 범고래, 부리고래, 상괭이, 일각고래, 참고래, 큰돌고래, 향유고래, 혹등고래, 흰돌고래 등 전 세계에 100여 종이 있으나, 대부분 멸종 위기에 처해 있어 국제적으로 보호받고 있다.
고래 혹은 숫고래를 경(鯨)이라 하고, 암고래를 예(鯢)라 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등 옛 기록을 보면 고래는 이빨, 수염, 힘줄, 뼈, 가죽, 고기 등 엄청난 양의 이익을 주는 동물로 묘사되어 있으며, 특히 고래 기름의 사용에 대한 언급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래를 흉악하고 의롭지 못한 존재로 인식한 예가 많고 왜적을 지칭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 반대로 간사한 무리에게 수난을 받는 존재로 여겨지기도 하고 탐욕스러운 동물, 신선이 타는 동물, 이용후생의 동물 등으로 인식되기도 했다.6
불교의 경어(鯨魚)나 목어(木魚)도 고래의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경어는 고래 모양을 새겨서 절에서 종을 치는 공이를 말한다. 고래를 새겨야 일과를 알리는 종소리가 멀리 퍼진다는 믿음 때문이다. 고래에 투사된 인류의 마음은 어떤 한 종교나 문화 혹은 문명권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감상하고 싶은 시가 있다. 김현승의 <이 어둠이 내게 와서>의 전문이다.

이 어둠이 내게 와서 / 요나의 고기 속에 / 나를 가둔다.
새 아침 낯선 눈부신 땅에 / 나를 배앝으려고.

이 어둠이 내게 와서 / 나의 눈을 가리운다.
지금껏 보이지 않던 곳을 / 더 멀리 보게 하려고,
들리지 않던 소리를 / 더 멀리 듣게 하려고.

이 어둠이 내게 와서 / 더 깊고 부드러운 품안으로 / 나를 안아준다.
이 품속에서 나의 말은 / 더 달콤한 숨소리로 변하고
나의 사랑은 더 두근거리는 / 허파가 된다.
이 어둠이 내게 와서 / 밝음으론 밝음으론 볼 수 없던
나의 눈을 비로소 뜨게 한다!

마치 까아만 비로도 방석 안에서 / 차갑게 반짝이는 이국의 보석처럼,
마치 고요한 바닷 진흙 속에서 / 아름답게 빛나는 진주처럼….


상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이, 요나의 물고기와 부활을 노래하는 시이다. 시인의 죽음 체험이 반영되어 있으며, 요나의 상징적인 죽음과 고래의 의미를 매우 적절하게 읊었다고 생각한다. 고래는 이미 문학적으로나 설화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일종의 은유가 되어 있다. 포경수술을 고래잡이에 빗대는 이유는 따로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실제로 ‘고래 경’(鯨) 글자에는 고래의 수컷, 들다, 쳐들다 등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여름만 되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며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불렀던 것일까?
베트남의 사례와 페로어의 사례를 단순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 울주반구대 암각화가 있고 동해를 경해로 불렀다고 해서 우리가 고래의 종주국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저마다 처한 환경과 역사가 다르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또 문화권마다 내면화된 고래들이 있다. 신화와 문학으로 고래를 노래한 지 오래이다. 저마다의 가슴 속에 고래 한 마리씩 키우고 있는 셈이다. 필자가 여기서 성서의 요나를 염두에 두고 고래를 톺아본 까닭은 고래에 투사된 이름이 다름 아닌 ‘재생’임을 강조해두기 위함이다. 여러 가지 신화와 의례, 종교적 상관물을 관통하는 고래의 속성은 재생과 부활의 은유이다.


1 이주빈, “일제강점기 대흑산도 포경근거지 연구”, 목포대학교 석사학위 논문(2017. 2).
2 레티응옥깜, “베트남 동해안 고래신앙의 유래와 특징”, 「비교민속학」 50집(2013).
3 송화섭, “동아시아 태평양의 두 고래이야기: 捕鯨과 鯨神-한반도 남해안을 중심으로”, 「도서문화」 50호(2017).
4 이명희, “‘동해’ 명칭의 중국어 표기방안 고찰”, 「한국고지도연구」 제9권 제2호(2017): 63.
5 참고로 용이 낳은 아홉 명의 자식, 즉 용생구자(龍生九子)를 살펴보면, 첫째는 비석 아래 장식으로 쓰이는 거북을 닮은 용 비희(贔屭), 둘째는 건물의 용마루에 장식되어 재앙을 막는 이문(螭吻), 셋째는 포뢰(蒲牢), 넷째는 정의를 지키는 것을 좋아하여 감옥이나 법정으로 들어가는 문에 새겨지는 폐안(狴犴), 다섯째는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하여 악수(惡獸)로 불리며 정이나 종에 새겨 넣어 식욕과 탐욕을 경계하는 도철(饕餮), 여섯째는 물을 좋아하고 강을 따라 들어오는 악귀들을 막아주기 때문에 다리의 기둥이나 아치 부분에 새겨 넣는 공복(蚣蝮), 일곱째는 죽이는 것을 좋아하여 칼의 코등이나 자루 혹은 창날에 많이 새기는 애자(睚眦), 여덟째는 불과 연기를 좋아하고 사자를 닮아 향로에 새기며 사찰의 불좌에 앉아 있는 사자 산예(狻猊), 아홉째는 개구리와 소라를 닮아 숨기거나 닫기를 좋아하여 주로 문고리에 새기는 초도(椒圖)이다.
6 조창록, “한문학에 나타난 고래에 대한 인식과 그 문학적 형상”, 「동방한문학」 62호 (2015).



이윤선 | 민속예술을 전공하였다. 『남도민속음악의 세계』 등의 저서가 있다. 남도민속학회 회장,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년 6월호(통권 7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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