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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한국의 종교건축물 01
문화·신학·목회 (202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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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서언
대한기독교서회는 올 6월이면 창립 130주년을 맞는다. 대한기독교서회(이하 ‘서회’로 표기) 역사에 대한 문헌으로는 1960년에 서회 관련 자료사진들을 편집하여 출간한 138쪽 분량의 『대한기독교서회 약사』가 있다. 이후 1984년에는 교회사가인 이장식 박사가 496쪽 부피의 『대한기독교서회 백년사』를 집필하여 서회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서회의 출판경영에 관한 기록과 회의록 일지는 물론 이사, 위원들의 명록까지 세세하게 실려 있는 이 책은 서회 100년 역사를 총정리한, 명실 공히 특수교회사라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서회의 집무 공간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는데, 서회가 새로운 건물을 마련하게 된 동기와 건축기금 마련에 관한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서회 건물의 역사에 국한되어 발간된 서적이 아직 없으니, 이장식 박사의 책은 서회 건물 역사에 대한 가장 긴요하고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서회 건물에 국한하여 손에 닿는 자료들을 모아 다시 정리해보려고 한다. 이 글은 『대한기독교서회 약사』와 이장식 박사의 『대한기독교서회 백년사』, 그리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대한기독교서회 편을 참고하려고 한다. 특히 1911년 서회 건물에 관한 세부적인 부분은 미 북장로교 선교사이며 경신학교 교장을 지낸 쿤스(Edwin W. Koons)가 Korea Mission Field(Vol. 36, Jan. 1940, 14-16)에 게재한 “Early Years of the Christian Literature Society 1890-1911”와 1911년 8월 서회 보고서(Annual Report; Korean Religious Tract Society, Aug. 31st, 1911)를 참고한다. 그리고 1931년 서회 건물에 관한 내용은 미국 장로교의 한국선교 역사를 책으로 펴낸 바 있는 미 북장로교 선교사 로드(Harry A. Rhodes)가 위의 선교잡지(Korea Mission Field, July 1931)에 게재한 “The Chairman’s at the Opening of the C.L.S. Building”과 같은 호에 실린 Choi, C. H.의 “Captain M. L. Swinehart”의 글을 참고하여 전개하려고 한다.

| 1890년 6월 25일, 기독교서회의 설립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미국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입국하여 선교를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은 1884년 중국에서 의료선교를 하던 미국인 의사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이다. 미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amuel Maclay 1824-1907)는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1882년 일본에 갔다가 1884년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는 이화학당을 설립한 미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턴(Mary Fletcher Scranton, 1832-1909)과 배재학당을 설립한 미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를 한국에 불러들이고 바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1885년 아펜젤러가 입국할 때 미 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도 함께 입국하였다. 이들은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할 수 없었는데, 당시 서구 열강으로 인해 안정된 조정을 유지하기 어려웠던 한국 정부의 쇄국정책 때문이었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도 미국과 영국의 선교사들이 연이어 입국하였고, 1887년 장안에는 최초의 장로교회(새문안)와 최초의 감리교회(정동제일)가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듬해, 한국 조정은 서양 선교사들의 포교활동을 금지하였다. 전통적인 불교 및 유교 문화 때문이기도 했고, 불안정한 정국으로 인해 조정과 국민이 서구 열강의 앞잡이로 인식되는 기독교 자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군대와 같은 무력을 사용하여 피선교지를 정복하기보다는 가난한 피선교지에 물질적인 구호와 함께 의료, 교육 시설을 설립하는 등의 방법으로 선교를 진행하였다. 이는 서방의 강대국들이 오랫동안 사용해온 선교 방법이었다. 이에 따라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입국 즉시 각자가 소속된 미국 교단의 지원을 받아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병원, 학교 선교와 더불어 피선교지 국민에게 한층 거부감 없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문서 발행이었다. 선교사들은 교회에서 사용할 주보와 간단한 교리문답집, 교단 소식지를 발행하다가 점차 복음서 일부를 번역하여 대중에게 보급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인력, 인쇄기와 인쇄소, 수집과 편집을 위한 업무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서선교에는 상당한 운영 경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병원이나 학교와 마찬가지로 개인이 운영할 수 없었다.
서회 설립의 동기는 이러하다. 장로교 선교사였던 의사 헤론(John W. Heron, 1856-90)은 평소 북장로교 선교회장 모펫(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에게 복음 전도와 문화발전을 위해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의 연합사업으로 서회를 세우자고 의견을 피력한 바 있었다. 1889년 10월 언더우드 사택에서는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의 친교 모임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헤론은 한국에 기독교 문서 출판사를 설립하자고 공식적으로 제안했다.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선교사들은 한국의 선교를 위해 병원, 학교와 더불어 문서발행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던 터였다.
1890년 6월 24일 수요일 오후 4시에 서회 창립을 위한 회의가 잡히자, 이 회의에 장로교 선교부가 다른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초대장을 보낼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해 언더우드 사택에서 모펫의 인도로 사전 모임을 가졌다. 6월 24일에 열린 서회 창립을 위한 회의는 언더우드의 기도로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모펫이 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북장로교 선교사 기포드(Daniel Lyman Gifford, 1861-1900)가 총무로 선출되어 서회 창립의 첫걸음을 떼었다.
1890년 6월 25일, ‘The Korean Religious Tract Society’를 창설하고 헌장을 제정하였으며, 1891년 1월 15일에는 한국어 명칭을 ‘죠션셩교셔회’라고 정했다. 1919년부터 영어 표기를 ‘The Christian Literature Society of Korea’로 개칭하였는데, 이렇게 명명한 이유는 영국성서공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 BFBS) 한국지부 초대 총무로 성서 번역과 반포에 정성을 쏟은 켄무어(Alexander Gordon Kenmure, 1856-1910)의 제안 때문이었다. 그는 “기독교 문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희생을 통해 개인의 영성, 사회와 국가 생활을 고양하며 정화하는 문학의 온전한 몸이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서회의 창립위원은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를 중심으로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였던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 미 감리교 선교사 허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 미 남장로교 선교사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 1867-1951), 북장로교 선교사 기포드, 미 북감리교 선교사 올링거(Franklin Ohlinger, 1845–1919), 한국 정부가 최초로 설립한 육영공원(Royal College)에서 교수직을 맡았다가 후에 배재학당장이 된 벙커(Dalzell Aldelbert Bunker, 1853-1932)이다.
이렇듯 서회는 서로 다른 교단의 연합과 협력으로 세워진 최초의 문서선교 기관이다. 서회 설립 전에 아펜젤러는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올링거를 초청하여 1887년 배재학당 안에 삼문출판사를 설립하였다. 올링거는 상하이와 일본에서 인쇄기 및 활자 주조기를 도입하여 한글, 영어, 한자로 각종 서적을 인쇄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누가복음서를 비롯한 전도 문서를 발간하였다. 당시 삼문출판사는 ‘정동예수교출판소’, ‘미이미활판소’로도 불렸으며 한국어, 영어, 중국어를 출판한다고 해서 ‘한미화출판소’(韓美華出版所)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삼문출판사는 당시 한국 정부가 설립한 인쇄소 ‘박문국’(博文局)과 민간인이 설립한 인쇄소 ‘광인사인쇄공소’(廣印社印刷公所)와 함께 한국의 출판문화와 문서선교를 이끈 유일한 기독교 출판사였다.
서회의 초기 사업자금은 언더우드가 주선한 영국과 미국의 소책자협회(The Tract Society)의 원조,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의 원조, 또 주한 선교사들의 회비와 개인들의 기부금 등으로 충당하였고, 출판경영은 여러 교단 선교사들의 무보수 봉사로 이루어졌다.

| 1907년, 처음으로 독자적인 건물을 마련하다
설립 초기, 서회는 원조와 기부금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사옥을 마련할 형편이 아니었다. 설립된 이후 10년이 지난 1900년에서야 ‘성서공회’ 건물 안에 사무실을 빌려 둥지를 틀게 되었다. 하지만 성서공회와 서회는 모두 몇몇 교단과 서양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세워진 연합기관이었기 때문에, 이런 상태로 서회가 사업을 확장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서회는 조만간 독자적인 사옥을 마련하기 위해 서회 실행위원회를 중심으로 사옥 마련을 위한 모금계획을 세우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1903년 3월에는 기금조달위원회를 구성하여 건물터를 물색하는 등의 모든 일을 이 위원회에 위임하였다. 당시 서회의 한 해 매출은 400달러(800엔)였는데, 1903년 10월에는 선교사들과 외국인 거주자들의 도움으로 건물 터를 매입할 수 있는 600달러(1,200엔)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여 모금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미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로, 제중원 3대 원장을 지낸 빈턴(Charles Cadwallader Vinton, 1856-1936)은 ‘성서공회’의 창립회원으로, 서회의 총무를 맡았다. 빈턴은 서적 출판비를 모금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1905년 4월에는 국내에 있던 외국 선교사 150여 명이 터를 매입하기 위해 무려 3,000달러(6,000엔)에 이르는 서약을 하였고, 영국과 미국에서는 서회 건축을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노력했다.
이로 인해 1906년에는 종로2가의 대지와 낡은 건물을 1,586엔에 매입할 수 있었다. 이것이 서회가 설립된 이후 16년 만에 매입한 첫 사옥이다. 이듬해인 1907년에는 매입한 목조 기와집을 수리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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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년, 새로운 건물을 세우며 발전의 토대를 이룩하다
그러나 수리한 목조 기와집은 문서 출판 선교사업체로서 본격적인 업무를 하기에는 너무 협소했다. 1907년 총무 빈턴이 미국으로 돌아가자, 서회는 건물 신축과 사업 발전을 위해 신임 총무를 물색하기 시작했고, 1910년 영국 출신의 구세군 본위크(Gerald Bonwick, 1872-1954) 사관에게 총무직을 맡겼다.
1910년 10월 12일에 서회의 첫 유급 전임 총무로 취임한 본위크는 1937년까지 무려 27년 동안 총무로 재임하면서 서회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졌다. 서회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당시 월급 20엔을 받고 서회 서적 판매책임을 맡았던 이용균(이모세) 씨 역시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빈턴이 귀국한 이후 본위크가 총무로 부임하기까지 모든 선교사가 칭찬해 마지않았던 이용균 씨가 공석인 총무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그는 낮에는 판매 일에 헌신하고, 퇴근 후에는 총무 일에 집중했다.
새로 취임한 본위크 총무는 외국에서 최선을 다해 서회의 발전을 위한 후원금을 모았고, 서적 판매를 위한 서점을 건축할 계획도 세웠다. 본위크 총무의 모금에 힘입어 미국 기독교서회가 3년 동안 매년 금으로 450달러를, 런던 기독교서회가 3년 동안 매년 100파운드를 약속했고, 1910년 가을에는 서회 이사장인 언더우드를 통하여 익명의 두 미국인 후원자가 금 600달러를 기부하였다.
건축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던 서회는 1910년 11월 초 지역 건축업자와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서둘러 건축을 시작하려고 겨울에 착공을 하는 바람에 공사가 진척되지 못했고,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드디어 종로2가에 기와집을 헐고 2층 벽돌 양옥으로 신축하기에 이르렀다.
서회는 1911년 6월 28일 수요일에 사옥 개관식을 하였다. 신축 건물의 개관식 날짜를 서회 설립일인 6월 25일에 맞추지 못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경비 문제로 인해 원래 계획대로 건축하지 못한 탓에 새 건물의 공간은 넉넉하지 않았으나, 건물을 건축했다는 것 자체에 큰 의미가 있었다. 이는 또한 서회가 다양한 사업을 기획하며 진일보하는 새로운 시작점이기도 했다. 이날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이사회의 한 사람으로 언더우드가 신사옥 개관 축사를 하였고, 뒤이어 당시 미국에서 성서학의 대가로 알려진 화이트(Wilbert Webster White, 1863-1944) 박사, 친일 편향이 매우 심했던 미 감리교 선교사 메리맨 콜버트 해리스(Merriman Colbert Harris, 1846-1921) 감독 외에 몇 사람이 더 축사하였다. 서회의 주체가 한국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인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 시기였다.
건축 기금에서 250.60엔의 잔액이 남았으나 임시로 다른 계좌에서 404.60엔을 급히 지급했기 때문에 남은 금액을 채워 넣어야만 했다. 또 건축업자에게 177.10엔을 지급해야 했기에 323.10엔이 부족했다. 가구와 비품은 불가피하게 빌리거나 있던 것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실행위원회는 부족한 건축비와 새 공간에 필요한 책상, 서가, 의자 등의 비품 구입을 위해 1,500엔을 목표로 모금을 진행하였다.
붉은 벽돌로 지은 서양식 건물은 4.9m×19m(약 28평) 규모의 작은 직사각형 공간이었다. 벽돌은 서양 선교사들에게 익숙한 건축 재료였고, 2층으로 축조하기에도 적합하며, 도심에서도 어울리는 재료였다. 1890년에 지어진 명동성당과 1898년에 지어진 정동감리교회가 이미 벽돌 조적조로 건축된 바 있으며, 신축된 선교사들의 집들도 대부분 붉은 벽돌집이었던 것으로 보아 벽돌을 구입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회의 신축 건물은 훗날(1930) 미국인 건축 전문가에 의해 지어진 4층 사옥(15.8m×28m)에 비하면 턱없이 검박한 건물이었으나 서회 번영의 시작을 알리는 분명한 표지가 되었다.
신축 건물은 직무 공간으로도 부족했기 때문에 뒤편에 있던 집을 허물지 않고 서고로 사용하였다. 신축 건물 1층은 총무실과 일반 사무실을 포함하여 서점으로까지 공간을 분할하여 사용하였고, 2층은 편집과 교정, 그리고 회의와 전시를 위한 다용도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총무실과 사무실을 2층에 배치하지 않은 것은 방문객들을 위한 총무의 배려였다. 또한 집중이 필요한 편집과 교정 작업을 하는 직원들을 위해 외부의 장애 요소를 최소화하려고 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독자적인 서회 건물을 확보해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에 넉넉하지 못한 재정에서 급하게 신축을 감행하였으나, 당시 서회의 영업 규모에 견주어보면 매우 협소하게 건축된 건물이었다. 이즈음 한국인으로는 이승만과 신흥우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서회 창립 이래 21년은 그야말로 선교사들과 직원들의 헌신과 봉사로 이끌어온 서회 초석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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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에 서회 이사회는 점점 증가하는 업무량을 소화해내기에 턱없이 부족한 업무 공간을 확장하기 위해 새로운 건축을 위한 모금을 논의한 바 있지만 별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이후 재차 적극적인 모금 활동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는데, 1923년 보고서에는 각 선교회에서 작정한 건축기금이 3,000엔에 이르렀고, 외부 기부금을 포함하여 서약금이 5,030엔에 달했다고 적혀 있다. 여기에 그동안 비축해 온 건축비를 포함시키자 총 7,000엔 정도가 되었다.
서회 이사회의 처음 계획은 신문로에 있던 피어선 성경학교 터를 매입하여 신축하기로 하였으나 곧 이를 취소하고, 종로2가에 있는 기존 터에 새 건물을 짓기로 하였다. 서회 이사회는 미국 남장로교 건축 선교사로 1911년 입국한 스와인하트(Martin Luther Swinehart, 대령)를 서회 건축의 책임자로 선정했고, 그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였다. 스와인하트는 광주에서 활동하면서 이화여전 건축을 위해 100만 달러 모금운동을 펼치며 모금에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다. (다음 호에 계속)


이정구 | 한신대학교에서 교회사를 전공하고, 영국 버밍엄대학에서 건축과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한국교회건축 탐사』, 『교회건축의 이해』 등이 있다. 성공회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며, 현재 동 대학 명예교수이다.

 
 
 

2020년 4월호(통권 7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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