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한국 근대소설 속의 기독교 조명 03
문화·신학·목회 (2020년 4월호)

 

  안국선의 믿음과 좌절
  

본문

 

| 최초의 부자(父子) 소설가
나의 선친께서 기독교 신자이신 시절이 있었다, 소년인 그 때의 나는 매일 조반 전에 아버님과 함께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고 했다. 내 누이동생도 참석을 하고 그 외 식객들도 끼었다, 그렇건만 우리 어머님은 제외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시각에 어머님께서는 식모를 데리고 아침밥을 지으시는 것이다. 나는 어머님이 그 직책 때문으로 하여서 아침 예배에 빠지시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었다.

안회남의 회고기 일부이다. 한 가족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삽상한 아침 공기를 맞으며 세수하고 들어와 함께 둘러앉아 가정예배를 드리는 장면이 아름답게 그려진다. 늘봄 전영택이 가사를 짓고 구두회가 곡을 붙인 찬송가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가 연상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글 속의 선친은 안국선이고, 글을 쓴 사람은 그의 장남 안회남(安懷南, 1910-?)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소설을 쓴,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최초의 부자 소설가이다. 30년 이상 문학 외길을 걸어가며 많은 작품을 남긴 아들 안회남보다 서너 편의 작품을 남겼을 뿐인 아버지 안국선에게 훨씬 많은 조명과 연구가 이루어졌다. 여러 모로 논쟁적인 『금수회의록』 때문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본명이 안필승(安弼承)인 회남은 일제 말기 징용에 끌려가 탄광노동자로 죽을 고비를 넘기다 돌아온, 문인으로서는 흔치 않은 경험을 가진 소설가이다. 『철쇄 끊어지다』, 『농민의 비애』 등이 주목을 받는, 이름 있는 소설가이다. 일제강점기에 카프(KAPF) 맹원도 아니었고, 뚜렷한 사회주의 의식을 가진 것도 아니면서 어영부영 좌파 문인단체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시세가 여의치 않자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
월북 문인 중에는 이런 사람이 여럿 있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천변풍경』 등의 소설로 유명한 박태원(朴泰遠, 1909-86)이 대표적이라 할 것이다. 최근 세계적 인물로 떠오른 영화감독 봉준호의 외할아버지라 하여 자주 입길에 오른 인물이다. 토박이 서울 출신이자 부르주아 집안 태생이며,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운동의 아이콘처럼 자리매김하고 있던 박태원의 월북은 참으로 뜬금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는 처음 열심히 역사소설을 쓰면서 좌익 문학운동에 등지고 살아온 전죄(?)를 씻고 북한 문단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지만, 안회남은 그러하지 못했다.
1950년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작가동맹’원 자격으로 남침 대열에 섞여 서울에 나타나 백철, 최정희, 노천명 등을 만나 호기를 부릴 때만 해도 김일성 체제에 적응해 잘 살고 있는 듯싶었다. 그러나 그뿐,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북한의 「문학신문」, 「조선문학」 등에 간간이 이름이 비치더니, 1963년 이후 그나마 완전히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어떤 자료를 통해서도 그의 생사여부는 물론, 이름 석 자조차 찾아볼 길이 없는 상태이다.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폐인 같은 생활을 하는 동안, 친구인 김 모 시인의 부인을 욕보이려다 봉변을 당한 뒤 작가동맹으로부터 그의 작품에 관한 처리방침이 통보되었다는 확인할 길 없는 사실만 기록으로 남아 전하고 있을 뿐이다.(이철주, 『북의 예술인』) 앞에서 본 가정예배를 드리는 장면과 겹치면서 씁쓸한 뒷맛을 느끼게 된다. 아버지 안국선의 인도로 다소곳이 앉아 예배를 드렸을 어린 안회남의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안국선은 1910년대까지만 해도 매일 아침 가정예배를 드릴 정도로 뜨거운 기독교 신앙인이었다. 그러나 “신자이신 시절이 있었다”와 같이 과거완료형으로 표현된 위 인용문에서 짐작되듯이, 안국선은 점차 신앙적 열정을 잃어버리고 세속에 매몰되어갔다. 1915년 간행된 단편집 『공진회』에서 의식의 심각한 균열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나 일확천금을 노려 미두(米豆), 금광, 주식시장 등을 전전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낙향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가 다시 서울에 올라온 것은 1920년의 일이다. 새문안교회에 적을 두고 집사직을 맡아 1923년 무렵까지 시무한 사실이 확인되지만, 이 시기 그가 기독교 신앙을 통해 구현하고자 한 이념이 무엇이었는지, 더 이상 아무 단서도 남기지 않은 채 1926년 47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기독교 입문
안국선은 1879년 경기도 안성, 죽산 안씨 집안에서 났다. 문명개화기 대표적인 신소설 작가들이 서울 가까운 지역에서 난 사람들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혈의루』를 쓴 이인직은 이천, 『자유종』의 작가 이해조는 포천, 『추월색』을 지은 최찬식은 경기도 광주 사람이다. 수도 가까이 살면서 시세의 변화를 빠르게 읽어내고 한 발 앞서 대응 양식을 고민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 때문일 것이다. 안국선의 집안은 양반이라고는 하지만 오랜 기간 이렇다 할 벼슬에 오른 인물이 없는 ‘잔반(殘班) 가문’이었다. 과거에 실패한 뒤 문명개화의 길로 들어선 최병헌이나 김필수 목사 등과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안국선의 초기 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양아버지인 안경수(安駉壽, 1853-1900)였다. 그는 1896년 7월 독립협회 조직에 참여하여 초대 회장직을 맡을 정도로 개화한 지식인 관료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집권 주체가 바뀔 만큼 급변하는 정치 환경 속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거듭하다 끝내 역모 사건에 연루돼 생을 마감했다. 그는 죽기 전 안국선의 일본 유학을 주선하고 후원했다.
안국선이 일본에 간 것은 청일전쟁이 일본의 완승으로 끝난 직후의 일이다. 1,200여 명의 청군을 일거에 수장시킨 풍도해전과 성환 전투, 전면전 개전 이후의 평양 전투와 황해 교전 등에서 연전연승하여 1년도 채 되지 않아 항복을 얻어낸 일본의 힘을 직접 경험한 직후의 일인 것이다. 제 땅에서 벌어지는 외세의 각축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약소국 조선의 열일곱 살 소년 안국선으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경험이었을 것이다.
‘청운의 꿈’을 안고 유학길에 오른 안국선의 머릿속에서는 일본을 닮은 조선의 장래가 그려지고 있었을 법하다. 그가 아주 일찍 식민주의에 협력의 자세를 취하게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 점은 안국선의 힘 있는 후견인이던 안경수의 행적과도 관계된다. 안경수는 청일전쟁 후 친일 개화관료가 되어 1, 2차 김홍집 내각의 요직을 거치면서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안국선이 경응의숙에서 중등과정을 마친 뒤 동경전문학교 정치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것은 1899년 8월, 만 4년여 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 귀국길에 뜻밖의 사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영효(朴泳孝, 1861-1939)의 역모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박영효의 자금 조달책이던 오성모(吳聖模)와의 동행이 화근이었다.(최기영, “한말 안국선의 기독교 수용”) 박영효는 앞선 글(2020년 3월호)에서 살핀 김필수와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김필수의 일본 망명은 갑신정변에 실패한 박영효와의 친분 관계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필수와 박영효 사이의 친분이 어떠했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마찬가지로 안국선과 박영효가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도 아직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안국선의 양부 안경수가 독립협회를 매개로 박영효 일파와 소통하던 관계라는 사실만 드러나 있을 뿐이다.
어쩌면 안국선의 유학도 박영효의 도움으로 가능했는지 모른다. 박영효는 교육을 문명화 혹은 근대화의 첩경이라고 믿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의 영향을 받은 문명개화론자로서 한인의 일본 유학을 적극 주선했다. 박영효를 자꾸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우연일 수 있지만 김필수와 안국선의 경우에서 보듯 그가 알게 모르게 애국계몽 운동기 지식 청년들에게 기독교를 접할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한 인물이라는 점 때문이다.
안국선은 귀국한 그해 11월 경무청에 체포되어 이후 재판도 없이 4년 이상 종로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안국선은 바로 이 감옥 안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여러 지식인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안국선을 비롯해 이승만, 이원긍, 이상재, 이 준, 유성준, 김정식, 홍재기, 이승인, 신흥우 등을 기독교 신앙으로 이끈 ‘감옥학교’는 이후 교회는 물론 정치 사회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때까지 주로 학식 없는 하층 계급이 중심을 이루던 교회 구성원들의 신분이 크게 바뀌어 지배 계급에 속하는 고위 관료나 식자층의 유입이 두드러졌다.(전택부, 『토박이신앙산맥』) 이 같은 변화는 자연히 선교가 활기를 띠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평등의식을 확산시켰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를 계기로 한국교회의 민족의식과 사회적 책임의식이 더욱 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새롭게 기독교인이 된 이들 지식인이 대부분 민족의 현실을 고민하여 시대와 불화하던 정치범들이었다는 점과 관련된다. 그러고 보면 기미년 만세운동에서 보듯, 이후의 민족주의 항일운동에서 기독교가 그 중심에 설 만큼 성장할 수 있게 한 단초가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 시대정신의 산물–『금수회의록』
『금수회의록』은 1908년 2월 황성서적조합에서 간행된 안국선의 대표작이다. 출판 3개월 만에 재판을 낼 정도로 대중의 반응이 뜨거웠으나, 이듬해 5월 일제 통감부에 의해 압수 및 발매금지 처분을 당했다. 일제의 대한정책과 친일정부의 대신을 비판하여 치안을 방해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한 해 앞서 간행된 안국선의 저술 중 『연설법방』이 있다. 요즘 개념으로 치면 일종의 시사평론집이라 할 만한 것인데, 아주 강경한 현실비판 의식이 돋보인다. 『금수회의록』 논의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으나 사실상 『금수회의록』은 『연설법방』의 주제를 허구화한 것이나 다름없다. 안국선에게는 『금수회의록』 말고도 『공진회』라는 작품집에 실린 세 편의 단편이 더 있지만, 『공진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단편소설집이라는 문학사적 의미만 있을 뿐 수록된 작품들의 수준은 그리 보잘 것이 못 된다.
『금수회의록』은 그동안 적지 않게 연구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행형인 상황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금수회의록』이 난마처럼 얽혀 있는 나라 안팎의 정세와 현실을 분석하면서도 당시로서는 상당히 다양한 스펙트럼을 시험해보인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구운몽』 이래 흥성해진 몽유 구조의 작품이라든가, 우화소설 또는 토론체 소설이라는 양식상의 특성들이 모두 논쟁적 요소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금수회의록』이 다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날카로운 현실비판 의식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점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더불어 개신교 초기의 기독교 인식을 적극 주제화하고 있다는 점도 그중 하나일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진행 중인 주요 논의 중 하나는 작품의 창작성 여부와 관련된 것이다. 이를테면 『금수회의록』은 안국선의 고유 창작물이 아니라 일본 다지마 쇼지(田島象二)의 『인류공격 금수국회』(1885) 혹은 사토 구라타로(佐藤藏太郞)의 『금수회의 인류공격』(1904)의 번안이라는 주장과 관련된 논의가 그것이다. 그러나 번안 여부가 작품에 반영된 작가의 기독교 인식을 살피는 데 변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논의가 어떻게 귀결되든 『금수회의록』이 차지하고 있는 우리 문학사적 의미가 크게 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금수회의록』이 전적으로 안국선 고유의 독창적 창작물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작품 창작에는 작가 본연의 창작욕 외에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의 외부적 요소가 강력한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된다. 하나는 우리 고유의 서사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이나 서양문학의 영향이다. 우리 고유의 서사 전통이란 나라 밖의 중국이나 일본에까지 전해져 널리 읽힌 『구운몽』류의 몽유계 소설과 숱한 우화 전통을 가리킨다. 일본 소설의 영향은 이미 서재길 등의 연구에서 그 실상이 드러났지만, 앞서 언급한 두 작품의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그 가능성이 짐작된다.
그리고 또 하나, 영국소설 『천로역정』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 『천로역정』은 ‘감옥학교’ 시절 안국선이 대출해 읽은 도서목록 속에 포함되어 있다. 1895년 선교사 게일(James Gale, 奇一)에 의해 한글로 번역된 최초의 외국 문학작품 『천로역정』은 이후 한국교회와 기독교 지성사에 실로 대단한 영향을 끼친다. 기독교 대부흥운동기 이후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는 『천로역정』을 텍스트 삼아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부흥사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천로역정』 강해는 김익두 목사의 영향을 받아 부흥사가 된 이성봉 목사에 의해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길선주 목사는 아예 『만사성취』라는 소설을 써 『천로역정』의 영향을 직접 확인해주었거니와, 거의 같은 시기에 발표된 최병헌의 『성산명경』, 김필수의 『경세종』, 안국선의 『금수회의록』 등이 모두 『천로역정』의 우의적(寓意的) 상상력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임에 틀림없다.
『금수회의록』의 창작을 추동한 마지막 또 하나의 영향, 그것은 바로 1907년 전후에 평양을 중심으로 크게 번진 대부흥운동이다. 앞선 글에서 같은 해에 발표된 김필수의 『경세종』이 대부흥운동의 반영물임을 지적한 바 있다. 『경세종』과 거의 흡사한 미학적 구조를 갖추고 있는 『금수회의록』도 작가가 이 부흥운동에 자극을 받았거나 적어도 대부흥운동을 유인한 현실적 조건에 추동된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더 이상 주권 수호가 무망해진 정치적 상황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이 같은 상황에 이르기까지 민족공동체는 온갖 모순과 부조리를 다 노출시키고 말았다. 그 결과 스스로의 힘으로는 무엇 하나 해결해낼 수 없는 존재라는 무력한 주체 인식, 열강들 사이를 넘나드는 무모한 줄타기도 모두 헛된 것이라는 자각은 늦게나마 뼈아픈 자기 성찰을 피할 수 없게 했다. 그리고 국권을 지키는 것도, 되찾는 것도 결국 주체의 몫이라는 때늦은 각성이 호명해낸 것이 ‘자강’이었다. 말하자면, ‘자성’(自省)과 ‘자강’은 1900년대를 특징짓는 시대정신이었다 할 것이다. 그리고 『금수회의록』은 이 같은 시대정신의 산물인 것이다.

| ‘천리정도’(天理正道)의 회복이 대안이라는 생각
『금수회의록』 전편을 관류하는 작품 분위기는 암울한 절망감이다. 한 해 먼저 발표한 『연설법방』에서 안국선은 당시의 사정을 “만 근의 무게로 목이 짓눌리고 천 길의 오랏줄로 몸이 결박되어 머리를 들 수 없고 사지를 꼼짝도 못하게” 된 상황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이 글의 핵심적인 키워드는 ‘독립’이다. 사지를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이란 바로 독립이 필요한, 국권상실의 현실을 말한다. 그런데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이러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내부 동력이 소진된 데 있다. 민족공동체가 온통 부패했기 때문이다. 모두 여덟 종류의 금수가 동원된 회의의 취지는 인간의 죄에 대한 논고라 할 것이다. 이들의 논고에 따르면 당시 조선 사회는 속속들이 부패하여 어느 한 구석 온전한 데가 없는 상황이다. 지배계급이나 피지배계급이나 계층의 차이가 없고, 남녀의 구별도 없으며, 학식의 유무 차이도 없다. 심지어 세상을 바꿔 새로운 세상을 열자는 문명개화론자들조차 유길준이 말하는 ‘허명개화’꾼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서유견문』) 이인직은 같은 해 11월에 출판한 『은세계』에서, 부자 되면 경치는 세상, 돈 푼이나 있는 백성은 죄가 있든지 없든지 다 망할 수밖에 없도록 부패한 지배계층의 수탈 구조가 나라를 망쳤다는 필연적 망국론을 폈다. 안국선도 앞선 『연설법방』에서는 “무능력하고 불신임한 정부를 봉대(奉戴)한 연유로 금일에 여차이 비참한 경우를 조우하였”다고 하여 권력 상층부를 겨냥할 뿐이었으나, 『금수회의록』에 이르러서는 피지배계층인 일반 민중들의 책임론으로까지 크게 확장되어 있다. 바로 대부흥운동의 주조(主潮)에 맞닿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망국의 책임이 무능한 임금이나 부패한 정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도덕적 타락에 기인한 것이라는 자성과 회개가 대부흥운동의 주조였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유교나 불교적 전통 속에 살아온 공동체로 하여금 망국을 피할 수 없게 한 도덕적 타락은 결과적으로 종교적 개혁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안국선이 제시한 대안이 바로 기독교 문명화였다. 작가의 기독교 인식은 ‘개회취지’에 집약되어 있다. 세상 만물은 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귀천이나 높고 낮음이 없다. 무엇이나 각기 조물주의 뜻을 따라 본분을 지켜 살면 제 몸의 행복을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다. 그중에 사람은 특별히 영혼과 도덕심을 부여받아 무엇보다도 더욱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천리정도를 지키고 착한 행실과 아름다운 일”을 힘써야 할 터이나 오히려 은혜를 배반하여 제반악증이 많다는 것이다.
작품에서는 힘을 앞세워 이민족을 압제하려 드는 제국주의 침략 자체도 이 천리정도를 배반했기 때문이며, 힘이 없어 망국의 처지가 된 것도 상하귀천이 모두 이 천리정도를 버리고 타락한 때문이라는 작가의 생각도 읽을 수 있다. 마땅히 회개하고 하나님의 위엄을 빌어야 할 것이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하고 여전히 외세에 기대어 몸을 보존하려 하고, “병장기의 위엄으로 평화를 보전하려” 하고 있을 뿐이다. 작가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로 작품을 끝맺고 있다. “…회개하면 구원 얻는 길이 있다 하였으니 이 세상에 있는 여러 형제자매는 깊이깊이 생각하시오.”

| 맺는말
안국선은 『금수회의록』 발표 이후 7년이나 지난 1915년 『공진회』라는 단편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기생>, <인력거꾼>, <시골 노인 이야기> 등 세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본래 두 편의 작품이 더 있었지만, 검열에 걸려 삭제당했다고 한다. 남아 전하는 세 작품은 미학상 퇴보가 너무 두드러져 읽는 이를 어리둥절케 한다. 『연설법방』이나 『금수회의록』에서 보이던 결기나 작가의식 같은 것이 꼬물도 보이지 않고 의식의 파탄 현상까지 감지되기 때문이다.
안국선이 전문적인 소설가가 아니고, 근대소설이 아직 제대로 터를 잡기 이전의 성과이니 소설 미학상의 퇴보는 그렇다 쳐도 작가의식의 퇴보는 의아할 수밖에 없다. 일제 식민주의에 협력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는 점, 의병이나 동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노출, 유교적 전통에 입각한 윤리의식으로의 회귀, 공리의식의 퇴조 등이 그것이다. 이런 퇴보 현상은 글쓰기뿐만 아니라 안국선의 전기적 행적에서도 나타난다. ‘한일 강제병합’ 직후 한때 청도군수 직을 역임한 뒤 광산, 미두, 주식 등에 투신하였으나 실패를 거듭하다 낙향한 후 1920년 다시 상경한 뒤로는 새문안교회에 적을 두고 있었던 것 외에 더 이상의 사회적 활동이 확인되지 않는다. 끝까지 기독교 신앙을 버리지는 않았으나 내면화한 것으로 보인다. 교회를 주된 활동무대로 삼고 있던 최병헌이나 김필수와는 달리 세속에 등을 대고 있던 안국선은 일찍 현실 조건에서 배제되어 좌절한 셈이다. 그것은 식민지 지식인의 불가피한 숙명이기도 했다.


표언복 |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다 퇴직했다. “해방 전 중국 유이민 소설 연구”로 학위를 받았으며 일본, 러시아, 미국 유이민 소설 연구로 관심을 확장해 후속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2020년 4월호(통권 736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