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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기독교와 한국 전통문화의 화해를 위하여 06
문화·신학·목회 (2020년 4월호)

 

  동굴의 노래, 여울굴에서 부유하는 돌배까지
  

본문

 

| 죽막동 여울굴에서 태어난 개양할미
대막골 아래편 해안에 ‘여울굴’이라 부르는 낭떠러지가 있다. 이곳에서 나온 개양할미는 바다를 열고 그 깊이와 풍랑을 조절하여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풍어를 관장하였다. 부안 죽막동(竹幕洞) 개양할미 설화이다. 다른 버전도 있다. 서해를 다스리는 여해신(女海神)이 여덟 명의 딸을 데리고 와서 전국 각 도에 시집보내고, 자신은 서해 바다를 관장하였다는 내용이다. 앞의 것은 탄생설이고, 뒤의 것은 도래설(渡來說, 물을 건너 왔다는 의미)이다. 필자는 지난 2007년 이 설화를 바탕으로 “해양문화의 프랙탈, 죽막동 수성당 포지셔닝”(「도서문화」 제30집)이라는 논문을 쓴 바 있다.
죽막동은 대막골(대나무가 많은 골짜기), 당골(당산이 있는 골짜기) 등으로 불렸는데, 현재 이 자리에는 수성당(水聖堂)이라는 당(堂)집이 있어 신격(神格)을 ‘수성할미’ 혹은 ‘개양할미’라 하였다. 죽막동에서는 백제의 제사유물뿐 아니라 가야, 일본계, 중국계 유물이 함께 쏟아져 나왔다. 원삼국시대 동아시아 해양문화권의 무대를 추적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개양할미의 영험성은 여러 곳에서 보고되었다. 『부안군지』(1991)에는 격포의 채석강 북쪽 끝에 세워진 거대한 청동사자상 설화가 나온다. 호환(虎患)으로 주민들의 원성이 높아지면 개양할미가 청동사자의 머리를 남쪽의 고창 선운산 쪽으로 돌려서 호랑이를 쫓아내고, 반대쪽이 시끄러우면 다시 청동사자 머리를 변산 쪽으로 돌려 호랑이의 극성을 막았다는 내용이다. 이는 개양할미가 대모신(大母神) 혹은 거인신의 위상을 갖고 있음을 알려준다.
죽막동 수성당은 본래 구랑사(九娘祠)라고 불렸는데, 훗날 수성당으로 고쳐 불렸다. 구랑사와 수성당은 둘 다 개양할미와 여덟 딸에 관한 호칭이다. 부안 격포 주민들은 1960년대 초까지 이 신을 모시고 당제(堂祭, 마을제사)를 지냈다. 구랑사는 ‘아홉 명의 낭자를 모신 사당’이라는 뜻인데, 정작 설화에는 여덟 명 혹은 일곱 명의 딸만 등장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개양할미 본인을 포함해 아홉 명이었거나, 시대에 따라 변형된 이본이지 않을까 추정해본다.
개양할미라는 용어는 어디서 왔을까? 필자는 바다(洋)를 연다(開)는 뜻의 ‘개양’으로 불렀다는 증언들에 덧붙여 개펄의 ‘개’와 해양의 ‘양’(洋)이 습합되었을 가능성 등을 제시하였다. ‘할미’는 익히 알려져 있듯이 ‘한(크다)+어미’로 해석된다. 할미를 대모신 혹은 거인신이라 말하는 이유다. 또한 이는 한해륙(한반도)에 유포된 마고 설화의 유형이기도 하다. 크신 어머니 신격, 즉 대모신으로는 개양할미뿐 아니라, 전남 진도의 영등할미, 제주도의 설문대할망, 강원도 삼척의 서구할미, 경상도 해안의 안가닥할미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중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는 것이 마고설화이다. 마고할미는 창조여신이었지만, 어느 순간 축소되거나 변이되어 마귀할미나 산신 등으로 좌천되었다. 이들 여성거인들은 창조신에서 희화화된 신격으로, 숭배의 대상에서 징치(懲治)의 대상으로,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는 선신(善神)에서 악신(惡神)으로, 여성거인에서 남성거인으로, 비현실적 형상화에서 현실에 가까운 형상으로 변화되어왔다.1 신화학자 조현설도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에서 이러한 변화의 이유를 남성 중심의 신성가족 계보에 편입되면서부터라고 추정한다.
개양할미의 거인적 위상은 설화의 서사구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개양할미가 당굴에서 탄생했다.(탄생설) 혹은 딸 여덟을 데리고 들어왔다.(도래설) 딸 여덟 혹은 일곱을 낳았다. 딸 여덟을 팔도(내륙)에 보냈다. 혹은 딸 일곱을 칠산 바다에 보내서 일곱 섬을 관리하게 하고 막내딸과 살았다. 또는 부안 앞바다에 있는 각지의 섬으로 보내서 관리하게 하였다. 개양할미는 거인여신이자 신이한 능력의 소유자로 칠산 바다를 걸어 다녀도 버선이 젓지 않으며 서해 바다의 풍랑을 잠재우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한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한 것은 ‘당굴’ 혹은 ‘여울굴’이라고 하는 대막골 아래편 낭떠러지이다. 필자는 이를 여음석(女陰石) 혹은 여음굴(女陰窟)과 관련하여 해석했다. 수성당의 북편에 있는 양 갈래의 곶이 마치 가랑이를 벌린 듯한 형국이요, 바닷물이 자궁으로 들어와 거품을 내는 지형이기 때문이다. 전통 풍수학에서도 이런 유형의 땅을 명혈(名穴)이라 한다. 땅에 대한 인격화, 여성의 생산성, 재화와 복락에 대한 욕망들이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나는 관념이자 설화적 장치인 셈이다. 여성의 음부와 자궁을 음란한 요설이라고 폄하하다가도, 풍수를 대입해 말하면 음덕(蔭德)이 충만하다며 칭송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양할미가 당굴에서 나온 것이나, 여덟 딸을 낳았다는 것은 탄생이라는 사건의 중복이다. 여음굴이라는 공간 자체가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장치이다. 이와 비슷한 풍경을 한국 관음신앙의 성지라 불리는 강원도 낙산사 홍련암에서도 찾을 수 있다.

| 다산과 풍요의 은유, 홍련암과 석굴
홍련암(紅蓮庵)은 낙산사 북쪽 300미터 지점에 있다. 672년(문무왕 12)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하고 대나무가 솟은 곳에 지은 불전이다. 의상대사가 이곳을 참배할 때 관음조(觀音鳥, 파랑새의 불교식 이름)를 만났는데, 새가 석굴(石窟) 안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이상하게 생각한 의상이 굴 앞에서 7일 동안 기도하자 비로소 바다에 홍련(紅蓮)이 솟아 그 위로 관음보살이 현신(現身)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석굴은 어디일까?
홍련암 법당 마루 아래를 내려다보면 출렁이는 바다가 보인다. 부안의 죽막동 수성당 여음굴과 같은 골짜기이다. 말하자면 여음굴 위에 암자를 지은 것인데, 의상대사에게 여의주를 바친 용이 불법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하여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리로 일부를 막아두었지만 밖에서는 거대한 파도가 마치 용처럼 꿈틀거리며 여음곡(女陰谷)에 부딪히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홍련암 근처 해안에는 석간수(石間水)가 솟아난다. 석간수는 원효대사가 양양의 영혈사(靈穴寺)에서 석장(錫杖)에 담아 끌어왔다 전해진다. 신령(靈)의 동굴(穴) 영혈사, 이름만 들어도 짐작되지 않는가.
여음굴(女陰窟)은 각종 설화뿐 아니라 기성 종교, 특히 불교에서 널리 관념되거나 활용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불국사 석굴암(石窟庵)이다. 문자 그대로 돌 동굴에 앉힌 암자라는 뜻이다. 『삼국유사』는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불사(石佛寺)를 세웠다고 전한다. 석굴, 조가절 등의 이름을 거쳐 일제강점기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는 석굴암 옆에는 문무왕릉과 연결된다는 굴이 있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경주 양북면의 감은사(感恩寺) 법당도 죽어서 용이 된 문무왕이 출입할 수 있도록 바다 위에 지었다. 홍련암과 같은 구성이다. 충주 수안보면의 충주미륵대원지도 유사하다. 석굴을 주불전(主佛殿)으로 삼은 절터라는 점에서 여음굴 설화의 이본(異本)이라고나 할까. 창건 연대나 사찰의 명칭은 알 수 없지만, 출토된 ‘미륵당초’라는 기와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 혹은 고려 전기의 사찰로 추정하고 있다.
인공석굴이나 석실만 있는 게 아니다. 지금은 북한 땅인 개성 산성리 관음굴도 주목할 만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佛宇)조에는 개성의 박연폭포 상류에 두 석상이 안치된 관음굴이 있는데 광종 대에 창건되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자세한 형태를 알 수는 없지만, 관음굴이라는 호칭만으로도 그 풍경을 짐작할 수 있다. 황해북도 곡산군 고달산의 고달굴에 전해지는 아름다운 전설도 있다. 745년(경덕왕 4) 사냥꾼 고달(高達)이 사슴 한 마리를 쐈으나 잡지 못하였고, 떨어진 핏자국을 따라가 보니 굴 안의 불상에 그 화살이 꽂혀 있었다. 고달은 살생을 많이 한 자신을 훈계하기 위해 부처님이 사슴으로 변했음을 깨닫고 수도하여 고승이 되었다. 고달굴이라 이름을 지은 내력이다. 예로부터 굴 안에는 관음조가 많이 서식했다고 전해진다. 전북 부안 내소사의 대웅보전이 파랑새 설화로 유명하다. 관음조 한 마리가 날아다니며 대웅보전 단청을 칠했다는 내용이다. 전남 강진군 도암면 석문리 용혈암은 고려청자와 관련되어 입소문을 탄 곳으로, 강진 백련사를 중심으로 고려 후기 종교 민중운동인 백련결사를 주도했던 유적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용이 된 이무기 전설이 전해져 온다. 삼척의 환선굴은 촛대바위 아래서 멱을 감던 선녀가 사람들을 보고 놀라 굴 속으로 숨었다가 바위가 무너지자 돌아갔다(還仙)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쌀굴 전설은 매일 한 사람 몫의 쌀이 나오다가 욕심 많은 스님이 부지깽이로 쑤신 후 나오지 않았다는 내용이고, 이무기굴은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숨어 있다는 내용이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오버랩되는 흥미로운 키워드들이 보인다. 설화적으로 보면 마치 심청이 연꽃으로 재생하기 위해 구성해둔 장치들 같다.
중국 절강성 주산군도의 보타도(普陀島)에도 홍련암과 동일한 형태의 관음굴이 있다. 일본 시조신이라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 신화도 흥미롭다. 술에 취한 남동생 스사노오의 행패를 보다 못해 동굴 안에 은둔해 세상이 어둠에 휩싸였는데, 다른 신들이 춤을 추어 동굴에서 나왔고 세상이 다시 밝아졌다는 내용이다. 지면상 중국 보타도의 관음신앙이나 일본의 시조신에 대한 설명은 차후를 기약하지만, 전국에 산재한 여음굴, 여음곡, 여음순풍수와 신화, 전설, 민담들과 관련하여 주목할 필요를 제기해둔다. 관련 이야기를 망실한 경우도 있지만, 변이되고 재구성되었을지라도 맥락은 죽막동의 여울굴이나 홍련암의 석굴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 출산, 탄생, 재생, 그리고 부활을 은닉하거나 품고 있으며, 이는 장차 다산(多産)과 풍요의 은유들로 확장된다.

| 동굴에서 탄생한 웅녀
동굴 관련 설화의 역사는 깊고도 넓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무래도 단군신화이다. 이들 설화소는 남근바위와 대칭을 이루며 음양론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동굴 자체, 즉 음기(陰氣)만으로 출산 혹은 생산의 의미를 완성하기도 한다. 양기(陽氣)만으로 생산이나 풍요를 은유하는 남근(男根) 신앙에 대해서는 따로 지면을 할애할 예정이다. 필자가 단군신화의 동굴을 여음굴로 해석하는 것은 차후 겟세마네 동산의 동굴 은유를 위한 논쟁적이고도 지난한 여정이기도 하다. 『삼국유사』 권1 <기이>편 고조선(古朝鮮)조를 인용한다.

이때에 한 마리의 곰과 한 마리의 호랑이가 같은 굴에서 살면서 항상 신웅(神雄)에게 빌되 “원컨대 변하여 사람이 되게 해주소서” 하였다. 한번은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자래와 마늘 20개를 주고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일광을 보지 아니하면 곧 사람이 되리라” 하였다. 곰과 호랑이가 이것을 받아먹고 기(忌)하기 삼칠일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고 호랑이는 능히 기(忌)하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그와 혼인해주는 이가 없으므로 항상 단수(壇樹) 아래서 축원하기를 “아이를 갖게 해 주소서” 하였다. 웅(雄)이 이에 잠깐 변해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하였다.

추가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만큼 잘 알려져 있는 신화이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하늘 아래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천부인 세 개를 받아 세 개의 큰 봉우리가 있는 태백산 정상에 내려왔으며,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정상의 신단수 아래 ‘신시’(神市)를 열어 환웅천왕이 된 이후의 이야기이다. 곰은 우직하게 명령을 수행했기 때문에 정해진 100일보다 더 빠른 삼칠일 만에 여자의 몸을 얻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를 곰족과 호랑이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해 왔다. 곰이 인간이 되었으므로 두 토템의 대결에서 곰족이 승리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해석은 한해륙(한반도) 전반에 걸쳐 호랑이 관련 구비 전승이 압도적으로 많은 점을 해명하지 못한다. 나아가 곰 토템신화가 에벵키족을 포함한 북방 몽골이나 시베리아 계통의 신화라는 점에서 한국인의 기원 신화를 북방 계열로 한정하는 한계를 지닌다. 자세한 이야기는 차후로 미루고 본 논의의 초점인 동굴의 탄생으로 돌아가보자.
곰이 웅녀로 변한 삼칠일에 대해서는 대개 7일이 세 번 거듭된 날짜로 해석해왔다. 현재까지 전승되어온 세이레 습속에 착안한 해석이다. 예컨대 아이가 출생하면 7일째 되는 날은 초이레, 14일째 되는 날은 두이레, 21일이 되는 날을 세이레라 한다. 그 기간에는 출입문에 숯과 한지 등을 끼워 넣은 왼새끼, 즉 금줄을 걸어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 그렇다고 의문이 풀리는 것은 아니다. 이레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면 ‘칠삼일’이라고 하지, 왜 ‘삼칠일’이라고 했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혹시 3이라는 숫자를 기준 삼아 일곱 번을 셈한 것은 아니었겠냐고 말이다. 각설하고, 숫자 3이 동서고금을 통하여 유익한 숫자로 이해되었던 점은 불문가지이다. 특히 동양에서는 3을 세 번 더한 숫자 9를 최정점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숫자 7 또한–3에 미치지는 못하지만–길한 숫자로 여겼던 것은 틀림없다. 불교의 장례기간 사십구재(四十九齋)는 이 숫자 7을 다시 일곱 번 더한 것이다.
또 하나 언급해두어야 할 것은 고구려 시대의 제사유적 국동대혈(國東大穴)이다. 문자 그대로 나라의 동쪽에 있는 큰 동굴이라는 뜻으로 대혈(大穴), 수신(隧神), 수혈(隧穴), 신혈(神穴) 등으로 불린다. 1983년에 발견되었는데 바로 남쪽에 압록강이 있어 북한이 건너다보이는 곳이다. 중국 지안(集安)현에 있는 국내성에서 동쪽으로 17km 거리의 산 중턱이다. 천장이 궁형인 암석동굴이라 하늘과 통한다고 해서 통천동(通天洞)이라 한다. 동남쪽 입구에 제사를 모셨을 만한 넓은 바위가 있다. 통상 이 국동대혈을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을 모셨던 제사유적으로 해석한다. 『삼국지위서동이전』의 기록이다.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데 나라에 큰 대회를 열어 그 이름을 동맹(同盟)이라 했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그것을 수혈(隧穴)이라 한다. 10월에 온 나라에서 크게 모여 수신(隧神)을 맞이하여 나라의 동쪽 강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만든 수신을 신의 좌석에 모신다.” 후한서에도 유사한 내용이 들어 있다.
유화부인은 주몽의 탄생신화에 연결된다. 유화가 어부의 그물에 걸려 동부여의 금와왕에게 갔을 때, 금와왕은 유화가 천자의 아내(妃a)라는 사실을 알고 별궁에 가둔다. 이때 햇빛이 유화의 몸을 비추어 임신하였고 왼쪽 겨드랑이에서 큰 알을 낳았다. 왕이 알을 버렸으나 말과 소들이 알을 피해 다니고 새가 깃으로 알을 품어주었다. 왕은 하는 수 없이 유화에게 알을 돌려주었다. 마침내 한 사내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는데, 한 달이 지나자 말을 하였고 활과 화살을 주자 백발백중이었다. 그래서 이름을 주몽(朱蒙)이라 하였다. 알에서 태어난다는 난생신화는 주몽을 포함해 신라의 박혁거세, 탈해, 가야의 수로 이야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필자는 유화부인의 국동대혈과 금와왕의 별궁(別宮)을 유사 설화소로 파악하고 있다. 햇볕을 받고 임신했다는 것은 하늘과 통하는 통천동 곧 국동대혈의 다른 버전이라는 뜻이다. 호랑이와 곰이 함께 살았다는 단군신화의 동굴과도 맥락이 같다. 이를 범과 곰, 즉 음양론으로 풀어 동굴 안에서의 음양 교접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아예 음양오행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동굴에서 사람으로 거듭난 곰이 여성이 되었기 때문에 다시 단군왕검을 낳을 수 있었다. 필자는 또한 이 동굴을 자궁의 은유로 해석한다. 유화의 방(宮)이나 왼쪽 겨드랑이 또한 여음골, 여음곡 등으로 빈출하는 자궁의 유사 모티프이다. 동굴(窟)은 구멍(穴)이고, 이것이 자궁(子宮)으로 은유되기 때문이다. 한의학에서 남성은 아홉 개의 구멍이 있고 여성은 열 개의 구멍이 있다고 말한다. 남성이 소변과 생식을 요도(尿道)라는 똑같은 통로를 이용하는 반면 여성은 소변과 생식을 구분하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아기집이 주된 역할인 자궁(子宮)은 오묘한 동굴이다.

| 탈해왕 이사금, 유동하는 동굴과 부유하는 돌배
단군의 동굴 신화소는 자연스럽게 석탈해(昔脫解)의 석총(石塚) 이야기와 연결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조를 인용한다.

탈해는 본디 다파나국(多婆那國) 소생이다. 그 나라는 왜국(倭國) 동북쪽 1천 리에 있다. 처음에 다파나 국왕이 여국(女國)의 왕녀를 들여 처를 삼았는데 임신하여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은 것이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버리려고 하였다. 그녀가 참을 수 없어 알을 비단으로 싸서 보물과 함께 함에 넣어 바다에 띄워 그 가는 바에 맡겼다. 처음에 금관국(金官國) 해변에 이르니 금관인들이 괴이히 여겨 취하지 아니하였다. 다시 진한 아진포구에 이르렀는데 이때가 시조 혁거세 재위 39년이다. 해변의 노모가 끈으로 당겨 해안에 매고 함을 열어보니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노모가 데려다 길렀는데 자라서 신장이 9척이나 되었고 풍채가 신이하고 빼어났으며 아는 바가 보통 사람을 능가했다. 혹자가 이르기를 이 아이는 성씨를 모르므로 처음에 함이 왔을 때, 까치 한 마리가 날아 울며 따라왔기에 작(鵲) 자를 생략하여 석(昔)을 씨(氏)로 삼고 또 넣어져 있던 함을 풀고 나왔으므로 그 이름을 탈해(脫解)로 하자고 하였다.

탈해는 박혁거세와 2대왕 남해 및 유리를 이은 신라 제4대 왕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약간 다른 버전들이 실려 있는데, 『삼국유사』 탈해왕조 중 탈해가 거짓 꾀를 내서 호공의 집을 취하는 대목이다. “말을 마치자 어린아이가 지팡이를 끌고 노비 둘을 데리고 토함산에 올라 석총(石塚)을 쌓고 7일간 머물렀다. 성 중에 살 만한 곳을 바라보니 한 봉우리가 초승달 같은 형세로, 오래 살 만한 곳이므로 내려와 찾아보니 호공 댁이었다. 이에 거짓 꾀를 내어 숫돌과 숯을 몰래 그 옆에 묻었다.” 이하 내용은 생략한다. 필자는 석총(石塚)에 흥미를 가졌다. 석총은 돌무지무덤, 고인돌, 돌널무덤 따위를 이르는 말이다. 돌을 쌓아 올려 만든 높은 무덤으로 만주 지안(集安) 일대의 토총이나 고구려 고분 등이 대표적이다.
탈해는 왜 돌무덤을 쌓고 그 안에서 7일을 머물렀을까? 탈해를 낳은 여국의 왕녀도 7년 만에 알을 잉태하지 않았는가. 탈해의 돌무지 쌓기를 제의(祭儀) 행위로 풀이한 윤철중에 의하면,2 탈해는 이 의례를 통해 토함산의 천신 곧 천제자(天帝子)의 아들 천제손(天帝孫)의 자격을 획득하였다 한다. 필자는 주로 김열규의 해석을 인용하는 편이다. 이 의례를 죽음과 재생을 표상하는 상징적인 시현(示顯)으로 봤기 때문이다. 돌무지무덤을 만들고 그 안에서 7일 동안 머물렀다는 상징적인 사건 혹은 의례가 주는 영감은 크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단군신화에서의 삼칠일, 다시 말해 세 번의 칠일과 연결되는 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 돌무덤은 동굴, 즉 자궁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동굴의 은유는 때때로 전혀 다른 요소들을 차용하기도 한다. 건국신화의 경우를 예로 들면, 마을의 기원과 관련된 설화들은 다양한 버전으로 확장되어 나타난다. 전남 영광 안마도의 당신화(堂神話)도 그중 하나이다. 안마도에 사는 신씨 할머니의 꿈에 한 장수가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당나라 장수인데 한 번도 전쟁터에 출전하지 못하여 이곳 북쪽 산 너머 선창까지 왔다. 나를 이곳 산봉우리에 묻고 매년 설날에 매굿을 하여 제사를 지내달라.” 하였다. 실제 당너머라는 바닷가에 가보니 궤짝 하나가 밀려와 있었다. 궤짝에는 1m 이상 되는 긴 머리털과 중국 화폐가 들어 있는 큰 주머니, 철마(쇠로 만든 말) 세 마리, 옷, 당제의 의례 절차가 기록된 책이 들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큰 당에 모시고 항아리를 묻어 내용물을 넣어두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이것은 마을의 기원과도 관련이 있지만 정초의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일종의 생산의례이다. 이러한 설화 유형을 해안표착형 설화라고 한다. 주로 돌배(石船)의 표착이나 궤짝의 표류, 달비(가지런히 모아놓은 머리카락) 등의 생산성(여성성) 화소가 버려진 영웅, 보호하는 동물 등의 역경퇴치 서사와 함께 사용된다. 전남 영암의 왕인박사 탄생 설화나 법성포 마라난타 도착 설화, 해남 미황사 창건 설화 등 해안표착형 설화는 셀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이 논의를 갈무리해보면 변이된 이야기일지라도 결국 여성의 생산성, 자궁의 은유로 수렴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필자가 이를 유동(流動)하는 동굴, 부유(浮游)하는 돌배(石船)라고 말해온 이유이다. 궤짝이 자궁으로 수렴된다는 점을 이해하거나 동의할 수 있어야 앞으로 이어질 탯줄에 대한 이야기 또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전술한 이야기를 통해 겟세마네 동산의 동굴 무덤과 버려진 모세의 이야기 정도를 떠올릴 수 있다면 필자의 글은 절반 정도 성공한 셈이다. 필자는 지금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재로 인류가 공유하는 보편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일반이 배타와 배척 혹은 구분과 격리를 통해 자기정체성을 주장해온 오류를 수정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1 권태효, “여성거인설화의 자료 존재양상과 성격”, 「탐라문화」 제37호(2010): 253-255.
2 윤철중, “탈해전승의 석총에 대한 고찰”, 「상명대학교논문집」 18(1986) 참고.



이윤선 | 민속예술을 전공하였다. 『남도민속음악의 세계』 등의 저서가 있다. 남도민속학회 회장,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년 5월호(통권 7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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