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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한국 근대소설 속의 기독교 조명 01
문화·신학·목회 (2020년 2월호)

 

  최병헌과 신채호의 소설, 그리고 개화기 기독교 인식의 두 양상
  

본문

 

최병헌의 성취론적 기독교 인식
기독교 담론이 한국 문학 속에 적극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개화기 이후의 일이다. 그사이 수많은 희생을 강요한 천주교 금압이 해제되고 개신교 선교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1800년대 말에 많이 쓰인 소설 형식의 짧은 글들 속에 기독교의 편린들이 보이고, 우리 문학사에서 최초의 기독교 소설로 평가되고 있으나 아직도 지은이나 간행 시기 등이 확정되지 않은 채 시비가 그치지 않고 있는 <이벽전>도 이 시기에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본격적인 신소설 시대가 열리면서 기독교는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소재나 제재가 되었다.
이 같은 변화는 물론 한국교회의 성장과 출판문화의 발달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1월 16일 자 논설에서 당시 한국 기독교의 교세가 벌써 “반도천지를 횡절(橫絶)하여 수십만 교도가 유하며 교당이 칠팔백 처요 학교가 삼사백 처”라고 기록하였다. 개신교 선교 25년 만의 일이니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비슷한 시기에 출판사업은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만으로 생계가 가능한 전업 작가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해조(李海朝)이다. 이해조는 대표작인 <자유종>을 비롯하여 <고목화>, <몽조>, <월하가인> 등의 작품을 통해 기독교 인식의 단면을 활발하게 드러내보인 작가이기도 하다. 출판사업의 발달로 인해 자연히 다양한 계층의 많은 필진이 필요했고, 매체와 필진의 증가는 기독교 담론의 확산을 견인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 우리 문학사에서 서사 형식을 통해 기독교 담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구현해낸 사람은 탁사 최병헌(濯斯 崔炳憲, 1858-1927)이다. 한국교회 초기 감리교 목사이자 신학자이며, 평생을 애국 계몽운동에 투신한 지사로서의 생애는 활발하게 조명되었으나, 소설가로서의 자취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이다. 신학자나 지사로서의 행적이 뚜렷한 만큼 문학가로서 남긴 작품 자체가 많지 않은 까닭이겠으나, 사실은 그가 남긴 『성산명경』 하나만으로도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인물이다.
『성산명경』은 1907년 「신학월보」 ‘문원’란에 연재된 작품이다. 「신학월보」는 최병헌이 돕고 선교사 존스(G. H. Jones, 조원시)가 발행한 잡지였다. 발표 당시 이 작품의 제목은 <성산유람기>였으나 1909년 단행본으로 묶어 내면서 『성산명경』으로 바뀌었다.
이 작품은 액자 구조의 몽유록계 소설이다. 겉 액자의 화자는 성서를 공부하며 유・불・도 신자들을 상대로 전도에 헌신하고자 한 기독교인 ‘탁사자’(濯斯者)이다. 그가 어느 가을날 성서를 읽는 중 심혼이 표탕(飄蕩)하여 성산에 올랐다가 네 사람이 서로 수작하는 것을 듣고 기뻐하였으나 꿈이었다. 탁사자는 이상하게 여겨 스스로 해몽하고 그 꿈 이야기를 기록했다고 말한다. 속 액자를 이루는 꿈속 이야기는 기독교인 신천옹이 유・불・도 3교의 신자들을 만나 각 종교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세 차례의 토론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1차 만남은 서로 통성명만 나누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두 번째 만남에서는 각각 기독교를 대변하는 신천옹과 유교도인 진도, 불교도인 원각 사이에 치열한 종교 논쟁이 벌어진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남에서는 신천옹과 도교 신자인 백운과의 논쟁에 이어 신천옹과 진도 사이의 재논쟁이 뒤를 잇는다. 결국 다른 종교를 신봉하던 사람들이 모두 개종하여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대강의 줄거리이다.
비교종교학 논문에 어울릴 법한 주제이지만, 소설 형식을 취한 것은 선교적 효과를 감안했기 때문이다. 소설을 쓸모없는 이야기(稗說)라거나 저잣거리에 떠도는 이야기(街談巷語)쯤으로나 여기는 부정적 인식이 여전하던 시절, 정통 유학자 출신인 최병헌이 직접 소설을 쓴다는 것은 분명한 의도나 용기가 없으면 실행하기 어려운 ‘감행’(敢行)이었다. 한문보다는 한글 중심의 ‘국주한종’(國主漢從)체 문장에 미진하나마 띄어쓰기까지 시도하며 이 같은 소설 양식에 가탁한 것은 제한된 소수의 지식인이 아닌 보다 많은 대중들을 독자로 상정한 글쓰기 전략이었다.
어려운 비교종교학적 주제를 다룬 <삼인문답> 같은 논문을 문답 또는 대화 형식의 문체로 풀어 쓴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 의도는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을 고래의 전통 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주제의식은 마땅히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기독교는 1910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사대회 이후, 기독교가 다른 모든 종교의 열망을 성취하고 완성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김영명, “한국감리교회의 토대를 놓은 선교사 존스”) 최병헌을 기독교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존스가 바로 이 같은 성취론 혹은 완성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존스는 미국 감리교회가 한국에 파송한 세 번째 선교사로, 1888년 처음 한국에 들어온 이후 대단히 열정적인 선교활동을 펼쳤다. 유교, 불교 샤머니즘과 같은 한국의 전통적 종교들을 연구하고, 이들 종교 사상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게 어떻게 기독교를 안착시킬 수 있을지 궁구한 것도 그중 하나였다.
결국 그는 이들 전통 종교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갖추고, 한국 내에서 전통 종교들을 대신할 기독교의 종교적 성취가 가능하다고 믿기에 이르렀다. 최병헌이 유학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기까지 존스와 맺었던 일련의 관계를 염두에 둘 때, 『성산명경』의 주제는 그 원천이 바로 존스에게 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최병헌은 세 번씩이나 과거에 응시한 경험을 가진 정통 유학자 출신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기독교에 귀의하여 그 시대를 대표할 만한 목사가 되고 신학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유학자 특유의 진지한 탐구의 결과였다. 그가 기독교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스물두 살 된 해인 1880년, 친구로부터 얻은 『영환지략』(瀛環志略)을 통해서였다. 『영환지략』은 1850년 청나라에서 간행된 세계지리서이다. 그러나 그가 이 책을 읽고 곧바로 기독교를 적극 궁구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이후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8년 동안이나 과거시험에 집착한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그가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세 번째 고배를 마신 1888년 5월, 그때 막 입국해 있던 존스 선교사와의 만남이었다. 윤치호의 소개로 만나 존스의 한국어 교사가 된 최병헌은 자연스럽게 아펜젤러와도 만나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배재학당의 한문교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은 모든 게 생활의 한 방편일 뿐 기독교 신앙과 곧바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그가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결단하고 세례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무려 5년이나 더 지난 후인 1893년 2월의 일이다. 이미 밝히 드러나 있는 이후의 행적을 다시 들추는 일은 사족일 것이다. 다만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기독교 입신이 5년이나 되는 시간을 두고 깊이 고민하며 따져 묻는 진지하고 치열한 탐구의 결과였다는 점이다.
『성산명경』은 그가 쓴 <삼인문답>(1900)이나 <사교고략>(四敎考略, 1909), <종교변증설>(1916-20)과 마찬가지로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을 일관된 주제로 삼고 있으며, 대중들에게 이를 조금이라도 더 일깨워주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한 작품들이다. 『성산명경』은 “<천로역정>을 방불케 하는 문학작품”(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이라는 평가가 있었고, “기독교 신소설의 대표적 사례”(양진오, “근대성으로서의 기독교와 기독교담론의 소설화”)라는 견해도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 선교라는 작가의 의도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작품 표면에 드러내 보임으로써 문학의 자율적 기능과 미학적 가치를 구현하는 데 소홀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산명경』은 이후 우리 문학사에 중요한 한 축을 이루게 될 ‘기독교 문학’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분명한 지표가 될 만한 작품이다. 『성산명경』은 우리 근대 문학사에서 기독교 담론을 형상화한 최초의 작품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작품이 기독교의 본질적 명제들을 적극적으로 주제화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역설적이지만, 신소설과 근대소설기를 지나오면서 우리 소설의 외연은 크게 확장되었으나 이 작품만한 수준의 기독교 소설을 찾아보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기독교 교리나 신학적 주제들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성찰이나 고민도 없이, 다만 앞선 개화 문명에 대한 호기심 혹은 맹목적 추수(追隨) 현상을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기독교를 실천적 신앙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의 매혹적인 문명적 장식으로 받아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에 비해 오래도록 우리의 의식과 생활을 지배해온 전통 종교들에 대한 과학적 성찰과 분석을 바탕으로 이것들을 대신할 기독교의 가능성을 최병헌만큼 진지하게 모색한 경우는 지금까지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신채호의 국가주의 기독교 인식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탁사 최병헌보다 22년 뒤인 1880년생이다. 신채호는 최병헌과 마찬가지로 몰락한 사대부 가문의 후예로 태어나 한학으로 세계 인식 방법을 익히고, 자기 실현의 길을 모색했다. 과거제가 폐지되는 바람에 과장에 나갈 기회는 없었으나, 대신 성균관에 들어가 7년 가까이 유학을 익히고 박사가 되었다.
정통 유학자 출신인 두 사람은 날로 기울어가는 국운을 걱정하는 마음이 남다른 인물들이었으며,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국권 회복 운동을 통해 구현하고자 한 인물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은 도학이나 예학과 같은 낡은 유교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유 체계를 가진, 이른바 ‘개신유학자’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새로 들어온 기독교가 국권망실의 난국에 처한 현실을 타개하는 방편이 될 수 있을지 궁구했다. 이 점에서 단재는 탁사보다 더욱 적극적이었다.
단재는 1906년 베델(E. T. Bethell)이 발행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일하는 동안 애국심 많은 주변의 기독교인들과 자주 접촉했을 것으로 보인다. 베델은 그에게 미국 유학을 권유하며 주선한 적이 있고, 선교사들을 통해 아들 관일에게 먹일 분유를 구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누군가로부터 예수를 믿으라는 권유를 받은 적도 있다.
단재는 기독교에 대해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기독교가 국권 회복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기대한 것이다.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발표한 글에서 기독교에 대한 단재의 생각이 잘 드러나 보인다. 주인과 객 사이의 문답 형식으로 된 이 글에서 기독교를 믿는 것이 가하냐는 객의 물음에 주인의 대답이 아주 명쾌하다. 하나님의 아들,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사하여 세상을 구하시려고 만민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 그러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의무를 다하지 않아 죄가 하늘에 닿았다는 것, 허다한 죄 가운데 특히 나라를 망치고 국권을 빼앗긴 죄가 커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옥과 같은 참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모든 동포가 열심히 예수를 믿어 죄를 씻고 은혜에 감복해야 살신성인도 하고 구제창생도 가능하니, 그게 바로 동포사랑의 길이 된다는 것이었다.(“서호문답”) 기독교를 믿으면 나라가 가히 강해지겠느냐고 객이 다시 물었다. 주인의 대답을 직접 인용해 보이면 이렇다.

上帝(상제)로 大主宰(대주재)를 삼고 基督(기독)으로 大元帥(대원수)를 삼고 聖神(성신)으로 劍(검)을 삼고 信(신)으로 盾(순)을 삼아 勇往直前(용왕직전) 誰(수)가 服罪(복죄)치 아니며 順命(순명)치 아니리오. 現今(현금) 英.美.法.德(영.미.법.덕)이 耶蘇敎(야소교)로 宗敎(종교)를 삼는 者(자) 其(기) 國步(국보)와 國光(국광)이 果如何哉(과여하재)아. 吾同胞(오동포)도 此(차)를 羨(선)커든 其(기) 諸國(제국)의 崇奉(숭봉)하는 바 宗敎(종교)를 從(종)할지니라.

한마디로 말해 예수 잘 믿으면 서구 열강들과 같은 강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믿음이 1910년 무렵에는 더욱 견고해졌다. 기독교가 20세기의 신국민적 가치가 있다고 단언하면서 한국 제일의 종교로 성장한 것을 반기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야소교는 각방면으로 한국 종교계의 제일위를 점령하여 과연 이십세기 신국민적 종교의 가치가 유하나니, 차를 확장하는 동시에 그 교도중 무정신자(無精神者)를 경기(警起)하며, 우(又) 외래의 침력(侵力)을 구제(驅除)하면 가히 국민 전도(前途) 대복음을 작할 줄로 사(思)하는 고니라.(“이십세기신국민”)

기독교에 대한 이런 인식은 1916년, 그의 대표적인 성과작으로 평가받는 <꿈하늘>을 집필할 무렵부터 크게 달라진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가 안창호, 이갑 등과 함께 고국을 등지고 망명길에 오른 것은 1910년 4월의 일이었다.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북만주 밀산, 서간도 환인현 등지를 전전하다 1915년 이후 북경에 머물렀다. 그사이 나라는 끝내 망해버리고, 국경을 넘는 유이민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후일 한설야는 이들 유이민 행렬을 ‘인조폭포’에 빗대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광복회’ 조직에 참여하고 상해에서는 최초의 교민 조직인 ‘동제사’에 힘을 보태기도 했으나, 단재가 본 독립운동의 실상은 암담했고 망국 유이민들의 생활상은 참담했다. 이 같은 일련의 망명 체험은 단재의 현실 인식과 그 대응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지지해온 것보다 한결 더 강경한 적극적 항일 투쟁 방식이었다.

토끼가 범을 잡고 개구리가 뱀을 먹고 독수리나 소리개가 병아리에 채여, 일반 동물계의 현상이 변동됨을 보았으면… 하는 환상이 항상 나의 뇌리에 배회하였다. 어느 때에 어느 예수교인이 나더러 「예수를 믿으라」하기에, 나는 「우리의 소원을 성취할 수만 있다면 예수만 못한 목석이라도 믿겠노라」하였었다.(“인도주의 가애(可哀)”)

북경 시절에 쓴 것이니 1910년대 중반의 글일 것이다. 그가 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 사상에 깊이 젖어 있으면서, 국권회복에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기독교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애국계몽 운동기 지식인들 가운데는 소설의 역능에 대한 신뢰가 깊었다. 청나라 양계초(梁啓超, 1873-1929)의 영향이었다. 변법자강 운동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양계초는 소설이 사회변혁에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청나라 정치개혁 운동의 한 방편으로 직접 많은 소설을 쓰고 「신소설」이라는 잡지도 냈다. 그가 애국계몽 운동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대단히 크다. 신채호, 박은식, 장지연 등이 특히 그랬다. 단재가 쓴 “천희당시화”나 “근금 국문소설자의 주의” 같은 문학론은 양계초의 글을 그대로 옮겨 적다시피 할 정도였다.(표언복, “단재의 문학관 형성에 미친 양계초의 영향”) 그리고 그는 양계초의 작품을 번역해 내기도 하고, 그를 본받아 직접 많은 소설을 쓰기도 했다.
최병헌 목사가 기독교 선교의 방편으로 소설을 썼듯이, 단재는 애국계몽 운동의 방편으로 소설을 썼다. 대표적인 것이 <꿈하늘>(夢天, 1916)과 <용과 용의 대격전>(1928)이다. <꿈하늘>은 인간의 역사는 이기면 살고 지면 죽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싸움의 역사라는 진화론적 역사관을 바탕으로, 망국의 변고를 당한 나라를 위해 싸움에 나서야 한다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이때 이미 단재는 국권회복을 위한 기독교의 역능을 불신하고 있었다. “나라야 망하엿건 말엇건 야소나 잘 미드면 천당에 간다 하며… 죠상의 역사가 결단남도 몰으며 부모나 처자가 모다 남의 죵 된지는 생각도”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거친 비속어를 동원해 증오심을 드러내기까지 한다. 단재 최후의 작품인 <용과 용의 대격전>
은 1920년대 이후 그가 매몰되어 있던 무정부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혁명 사상을 보여준다. 지국의 영웅 드래곤과 천국의 영웅 미리의 싸움에서 민중의 지원을 얻은 드래곤이 승리하여 천국을 정벌한다는 내용인데, 이 소설에서 기독교는 회의나 부정의 정도가 아니라 능멸과 저주의 대상이 되어 도무지 절제되지 않은 폭력적 언사들로 매도되고 있다.

불의에 동지방 농민들이 “이놈, 제 아비 이름을 팔아 일천구백 년 동안이나 협잡하여 먹었으면 무던할 것이지, 오늘까지 무슨 개소리를 치고 다니느냐?”고, “일천구백 년 동안 빨아간 우리 인민의 피를 어디다 두었느냐?”고, “당일 예루살렘의 십자가 맛을 좀 보겠느냐?”고,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며 미급(未及)에 호미 날로 퍽퍽 찍어 야소 기독의 전신이 곤죽이 되어, 인제는 아주 부활할 수도 없이 참사하고 말았다.

단재의 이 같은 증오심은 기독교가 제국 침략의 첨병이라거나, 불의한 지배자들의 이익을 대변해 억압받는 민중의 저항정신을 약화시킨다는 인식에서 야기된 것이다. 결국 신채호는 기독교를 완전히 등지고 무정부주의라는 새로운 종교에 귀의하고 말았다.

자율적 존재로서의 기독교 인식
탁사 최병헌과 단재 신채호는 애국계몽 운동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국운이 쇠퇴하여 끝내 망국에 이른 역사를 고통스럽게 견디면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 진지하게 고민한 대자적 지식인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리고 이들은 정통 유학자이면서 새로 받아들인 기독교를 통해 국권 회복의 가능성을 모색한 지식인들이라는 점도 닮았다. 그러나 결말은 완전히 달랐다. 최병헌은 그 가능성을 찾아 기독교에 귀의했으나, 신채호는 반대로 이에 실패하고 지독한 ‘적그리스도’가 되었다.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상반된 길로 인도한 것일까?
최병헌의 기독교 인식은 진지한 탐구의 결과였다. 다른 기독교 담론 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것과 같이 신진 문물의 표상으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맹목적 추수가 아니고, 현실적 이해관계에 따른 자의적 선택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남다른 종교적 신비체험이 있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분명한 것은 그가 기독교를 알게 된 이후 성서를 통해 그 정수를 깨닫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개방적 자세이다. ‘뼛속까지 빨간’ 정통 유학자였다지만, 낯선 이방 종교에 대해 맹목적으로 배타적 자세를 취하기보다는 열린 마음으로 궁구해온 구도자다운 태도가 그를 올바른 기독교 인식으로 이끌었다.
이에 반해 신채호는 그만의 공고한 폐쇄성과 배타성이 건강한 기독교 이해의 길을 방해했다. 그는 처음부터 완고한 국가주의에 매몰돼 한 치도 벗어날 줄 몰랐다. 모든 이해와 가치 판단의 준거가 오로지 국가였으며, 국권 회복이었다. 나쁘지 않고 틀린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국가도, 민족도 각기 다른 이해와 욕망 구조로 이루어진 개인과 집단의 총체이다. 이들을 모두 국가주의의 틀 안에 가두어 일체화할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하지만 단재는 누구나를 막론하고 모든 국민이 국가주의에 복무할 것을 요구했다. 그것도 오로지 직접적인 무장투쟁, 민중혁명 방식만을 고집했다. 외교론, 준비론, 실력양성론 등의 독립운동 노선을 부정하고, 그래서 상해의 독립운동가들과는 일찍부터 등지고 살았다.
이처럼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현실인식 태도는 종교인식 방법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 자체로 자율적 존재인 종교를 국가주의의 틀 안에서만 이해하려 한 것이다. 자연히 모든 종교는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는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이 되는 것이지, 결코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한 세기 전 두 지식인의 기독교 인식 방법의 차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표언복 |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다 퇴직했다. “해방 전 중국 유이민 소설 연구”로 학위를 받았으며 일본, 러시아, 미국 유이민 소설 연구로 관심을 확장해 후속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2020년 3월호(통권 7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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