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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기독교와 한국 전통문화의 화해를 위하여 03
문화·신학·목회 (2020년 1월호)

 

  씻김굿과 정화수, 경계 넘기의 술(酒)
  

본문

 

씻김굿이란 무엇인가

나오서사 나오서사 불쌍헌 망제 싯금받어 나오실쩍 초제왕전 말미타고 십제왕전 말미타고 불쌍한 금일망제 넋이되야 오시고 혼이되 오셨으니 넋방에 모시고 혼방에 모시고 씻겨서나 천도를 허옵시면 염불하신 공덕으로 망제님이 옥경연화 몰근 넋이되야 십왕전에 가실적에 상탕에 향물로 모욕하고 중탕에서 쑥물로 모욕하고 하탕에 청계수로 모욕하고 진옷 벗고 모른옷 입고 비린내 가시고 단내 가시고 십왕전에 가옵소사. 분향길로 스기를 삼으시고 용천감로(龍泉甘露) 정화수(井華水)로 저의도량에 감응내림 하옵소사. 씻김마당에 강림하야 해원경에 원을 풀고 육갑해원에 길을 찾아 인도환생 화류경에 건원득심 원을 풀어 십왕세계 문을 열고 극락세계 들어가서 인도환생 하옵소사

진도씻김굿 당골이었던 이완순이 즐겨 부르던 무가(巫歌)이다. 씻김굿은 남도 지역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무당이 행하는 여러 절차 중 하나이다. 굿의 각 절차들은 ‘거리’라 일컫는다. 탈놀음이나 굿 따위에서 장(場, 마당)을 세는 단위가 되기도 한다. 예컨대 ‘초혼굿’, ‘제석굿’, ‘오구굿’ 따위가 있다. 이 중 ‘씻김’이라는 절차가 가장 중요한 거리이므로, 통칭하여 ‘씻김굿’이라고 한다. ‘씻김굿’이나 ‘씻김’으로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씨끔’, ‘식힘’ 등으로 표기하는 사례도 있다. 모두 망자가 이승에서 풀지 못한 한을 깨끗이 씻는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당골’ 혹은 ‘당골네’는 한강 이남 지역의 세습무를 가리키는 호칭이다. 씻김굿은 대개 죽음의 절리(切離, divorce) 의례, 즉 죽은 자와 산 자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의식으로 해석된다. 필자는 이 단절 의식이 사실상 망자의 재생 혹은 부활의 염원이라고 해석한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이 절리 의례를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집단의식과 집단무의식의 보상 관계로 해석한다. 어느 사회를 지배하는 합리적 행동 규범은 반드시 이를 대상(代償)하고자 하는 비합리적 원천의 힘을 통해 보완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비합리적 원천의 힘은 씻김굿뿐만 아니라, 상장례 전반에 걸쳐서 일어나는 반의례적인 연희, 노래, 놀이 등에서 발휘된다. 이러한 힘은 망자의 천도를 유도하고 생자에게 안위를 주는 것으로, 심리치료의 과정에 비유되기도 한다.
씻김굿의 여러 현상 속에는 인류가 공통으로 소유한 집단무의식의 원형뿐 아니라 인간의 무의식을 순화시켜 나가는 원형의 상징적 해결 양상이 있다. 죽음의 과정에서 ‘씻김’은 정화력을 가지고 거듭남이라는 인격 전환의 기제로 나타난다. 왜 거듭남인지는 후술한다. 망자를 의례적으로 소환하는 것은 생자들이 그들과의 생전 기억을 다시 펼쳐 정화의 계기로 삼기 위함이다. 씻김굿은 상장례를 완성시키기 위한 액자극(額子劇)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래기, 만가, 윷놀이 등 총체극에 대해서 언급할 예정이다.
씻김굿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죽은 이의 영혼을 깨끗이 씻어주어 이승에서 맺힌 원한을 풀고 극락왕생하기를 비는 굿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된다. 죽은 자는 모두 이승에서 원한이 맺혔다는 뜻으로 읽힌다. 과연 그러한가? 표면적으로는 현실 부정의 논리 같다. 여기에는 이승의 삶이 더렵혀졌다는 혹은 더럽다는 전제가 작용한다. 생시의 죄를 씻는 것 곧 부정을 없애는 것으로 풀이하는 용례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이승의 삶이 고달팠으니 저승에 가서는 좋은 곳으로 가라는 무가의 사설을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씻김굿을 받은 망자들은 어떤 저승으로 갔으며 또 어떤 복락을 누리고 있을까? 이승을 부정적으로만 해석한다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민중들의 언설과는 어떤 심리적 괴리가 있는 것인가? 절리 행위를 통해서 망자를 단절시키기보다는 새롭고 귀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의례가 아닐까? 의문이 꼬리를 문다.
절리 의례의 대표적인 막(幕, 거리)은 길닦음굿이다. 무명천 베를 길게 늘어뜨리고 반야용선(般若龍船) 혹은 넋당삭(넋을 담은 바구니라는 뜻)이라는 배를 만들어 닦는다. 여기서의 무명천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넘어가는 강(바다)을 상징한다. 이 베를 ‘질베’(길베)라고 부른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배가 지나는 길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질베’는 영원에 이르는 길의 메타포로 사용되며, 이미지의 형상적 재현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기호이다. 기독교에 비유해 말하면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라고나 할까. 반야용선은 불교 유입 이후에 형성된 의례로 추정할 수 있다. 진도씻김굿뿐만이 아니라 한국 무속 전반에 걸쳐 기호화된 길 관념의 ‘아이콘’이다. 이승과 저승, 삶과 죽음의 절리(切離)만이 아니라 있음과 없음을 매개하는 점이지대(漸移地帶)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길을 닦는 행위는 정화의 기능을 포함한다. 더럽혀진 것을 씻는다는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에 ‘이슬털이’와 상호 보완된다. 그래서 개별 거리(幕)들을 모아 만든 굿 전체를 ‘씻김굿’이라 호명하는 것이다. 저승길을 닦는 행위는 굿의 의뢰자(상을 당한 가족)뿐만 아니라 참여한 마을 사람들 즉 다중의 의식까지 정화하는 기능을 한다. 망자의 천도(遷度, 불교에서 죽은 자를 저승으로 이끄는 행위)는 표면적인 것이지만 상장례에 참여한 다중의 염원(욕망)들이 중층적으로 추동해내는 주체적인 정화 의식이기도 하다. 굿 자체는 무당이 연행하지만, 이 의례극은 무당이나 마을사람들이 주연이나 조연으로 등장하여 공동으로 완성해나가기 때문이다.

남도의 씻김굿, ‘영돈마리’의 절차들
남도 씻김굿에는 대개 열두 거리가 있다고 한다. 대표적 절리 의례인 ‘질닦음’ 외에 전형을 가지고 있는 거리는 ‘이슬털이’이다.(‘영돈말이’ 혹은 ‘씻긴다’라고도 한다.) 씻는 대목을 전형으로 삼기 때문에 전체 굿의 이름을 씻김굿으로 호명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서 연행되는 일종의 ‘씻기기’ 행위에 비유할 수 있다.
보이는 요소와 보이지 않는 요소가 있다. 필자가 ‘이슬털이’의 내면과 외면을 말해온 이유이다. 더러워졌으니 씻는다는 행위, 오염된 것을 정화하는 개념, 예컨대 영혼을 닦아낸다는 현상의 이면에는 영혼의 거듭남 같은, 보다 내밀한 의미들이 숨어 있다. 내면화의 정도는 지역권, 문화권, 더 크게는 문명권마다 다른 양상으로 포착되지만, 물로 씻는 행위는 유사해 보인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 세수나 샤워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고, 민간에서의 전통적인 제사 때 사제자 혹은 제사 담당자가 목욕재계를 하거나 여러 불순한 일들을 금기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지난 번의 글 “제사는 무엇으로 완성되는가”에서 언급하였지만, 씻김굿 또한 ‘청신-오신-송신’의 기본 구조를 벗어나지 않는다. 굿의 대상이 되는 신격을 모시는 절차, 그를 위무하는 절차, 마지막으로 보내는 절차이다. 대략 열두 거리로 표현되는 마당(場)들이 이 기본 구조 속에 적절하게 배치된다. 필자는 ‘이슬털이’가 오신과 송신의 경계를 넘게 하는 의례라고 해석해왔다. 그 이유를 다시 밝힌다. 씻김굿의 여러 절차가 끝나고 이슬털이 순서가 되면 고인을 상징하는 ‘영돈마리’를 한다. ‘영돈’은 ‘영혼(靈魂)을 말아 넣은 돗자리’라는 뜻이다. 영돈마리는 망자를 형상화한 대상물을 가리키는 명칭이고, 이슬털이나 씻김은 그를 씻기는 의례 행위를 말한다. 망자의 옷을 돗자리에 말아 세우기 때문에 이 이름의 출처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슬털이’라는 말 자체가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영돈마리는 어떻게 만드는가? 먼저 원통형의 돗자리를 세우고 그 위에 누룩을 놓는다. 누룩 위에 복개 혹은 주발(뚜껑이 있는 밥그릇)에 넋[한지로 오린 신체(神體)-제사에서의 지방(紙榜)이나 위패(位牌)로 해석할 수 있다]을 오려 넣어 올린다. 그 위에 또아리(똬리)를 놓고 맨 꼭대기에는 솥뚜껑을 놓는다. 솥뚜껑 아래에는 다음 절차인 ‘길닦음’에 쓸 ‘질베’의 끝을 연결해둔다. 망자가 미혼일 경우 솥뚜껑이 바가지로 대체된다는 증언이 있기도 하지만, 용례가 정확해 보이지는 않는다. 어떤 경우이든 영돈마리가 망자를 상징한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왜 이런 형식을 갖게 되었을까? 필자는 본래 이를 남근(男根) 메타포로 이해하여 생산과 재생의 의미로 읽어내곤 했다. 마치 마을굿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입석(立石, 흔히 남근석으로 해석된다)에 감아두는 의례에 빗대어 해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시기, 이 이론을 수정했다.
굿의 연행에는 맑은 물, 향물, 쑥물이 사용된다. 맑은 물은 청계수이다. 향물은 향불과 같은 이치이다. 쑥물 또한 살균과 같은 정화 기능, 단군신화와 같은 이야기 기능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세 가지 물을 각각 작은 그릇에 담고 솔가지 혹은 빗자루에 찍은 후 망자의 상징 ‘영돈’을 쓸어내려 씻는다. 묶어둔 ‘질베’로 삼합(三合)의 물기를 닦아낸다. 신칼로 연신 솥뚜껑을 두드리며 무가를 연창한다. 무가가 진행되는 동안 ‘영돈’으로 은유된 영혼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깨끗하게 씻겨진다.

‘영돈마리’에 사용되는 누룩의 비밀
저승으로 가는 길을 닦는 의례인 ‘질닦음굿’에서 ‘흰질베’가 보이지 않는 저승의 길을 상징한다는 점은 비교적 선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슬털이에 사용되는 누룩의 의미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대개 솥뚜껑은 ‘갓’(모자)을 형상한다고 알려져 있다. 사람의 형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일까? ‘영돈마리’라는 망자를 상징하는 소품들을 만들었던 본래 의미가 있을 법하다.
이 절차에서 사용되는 쑥물, 향물, 맑은 물에 관해서도 비슷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쑥은 살균이라는 특성도 있지만, 단군신화에서 곰이 사람으로 환생하는 데에 필수 식물로 등장하기도 한다. 단군신화의 쑥이 의례에 인용되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향은 신을 부르는 필수요소 중 하나이다. 제사 때 향을 피워 혼령을 부르는 절차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전국의 모든 굿에서 물로 씻는 행위는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맑은 물로 망자의 상징물을 씻기 때문에 정화의 의미가 있다는 점은 비교적 선명하다. 문제는 누룩이다.
‘영돈마리’를 하는 문화권에서는 모두 누룩을 사용한다. 남도의 씻김굿만이 아니다. 지역에 따라 ‘온누룩’(통누룩)을 사용하는지, ‘누룩가루’를 사용하는지가 다를 뿐이다. 하고많은 것들 중 왜 누룩을 사용했을까? 더 근사한 방식으로 망자의 상징물을 표현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누룩의 효능이나 기능을 추적해본다.
누룩(효모)은 발효의 대명사이다. 과거에는 심지어 간장이나 된장을 담글 때도 전통적으로 누룩을 사용한 적이 있으며, 일부 농가는 지금도 그렇게 한다. 기본적으로 누룩은 술을 만들 때 사용된다. 술은 마시기 위한 것이지만 신을 경배할 때도 사용된다. 집안에서 특히 종갓집의 며느리가 감당해야 할 가장 큰 일 중 하나가 술을 만드는 일이었다. 연간 줄줄이 제사를 지내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하나의 단서를 발견한다. 이슬털이에서 누룩을 사용하는 것은 단순히 망자의 신체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아닐까?
누룩은 술을 발효시켜 빚어내기 위한 필수 요소이며, 술은 발효를 통해 또 다른 콘텐츠로 변화한다. 제사에서 반드시 술을 올리는 이유와도 연관된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술을 바치고 마시면서 죽음의 의례에 참여하였을까?

경계넘기와 변칙범주의 증류주
이슬털이는 ‘길닦음’으로 갈 수 있는 핵심적인 의례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는 일종의 이항대립이며 변칙범주이다. 죽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상징으로 만들지 않으면 다음 과정으로 넘어갈 수 없는,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 1908-2009)의 언술대로라면 삶과 죽음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범주에 속한다. 이슬털이에 사용되는 누룩이 이항대립, 즉 이슬털이의 이전과 이후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주목해본다.
이를 위해 레비스트로스의 변칙범주 곧 이항대립 이론을 설명한다. 그는 신화의 이항대립 구조를 설명하면서 위험하고 모순적인 이항대립적인 관계를 잠정적으로 해소시키는 존재가 신화, 나아가 영웅들이라고 말한다. 기호나 상징은 고립된 상태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대립하는 다른 기호나 상징과 구분될 때 의미를 획득하는데, 그 관계는 일차적으로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으로 맺어진다.(말/무언, 소음/침묵, 색/무색 등) 여기에서 두 개의 대립된 범주를 아우르는 하나의 체계가 형성된다.
그렇다면 영혼을 말아 세웠다는 ‘영돈말이’, 즉 ‘이슬털이’가 술과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인가? 우선 증류주를 내리는 소줏고리 모양과 과정 혹은 방식이 같다. 이슬털이의 과정을 다시 그려본다. 망자의 옷을 넣어 말아둔 원통형의 돗자리를 세운다. 그 위에 원반 모양의 온누룩을 놓는다. 그 위에 종이 넋을 담은 밥그릇을 올려놓는다. 똬리를 놓고 솥뚜껑을 덮는다. 형상이 그려지는가? 영락없이 갓을 쓴 사람의 모양이다. 이것을 쑥물, 향물, 맑은 물로 깨끗하게 하는 것이 씻김굿이라는 점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이슬털이라는 이름의 씻김굿을 필자는 왜 소줏고리에 비유해 해석하는지 진도 홍주를 예로 설명한다. 소주나 고량주는 복발효 증류주에 해당된다. 가장 원시적인 방법은 이러하다. 먼저 쌀과 누룩으로 빚어서 익힌 술이나 술지게미를 솥에 넣고, 그 위에 시루를 놓은 다음 솥뚜껑을 뒤집어 덮는다. 그리고 뒤집은 솥뚜껑의 손잡이 밑에 주발을 놓아둔다. 솥에 불을 때면 증발된 알코올이 솥뚜껑에 미리 부어둔 냉각수에 의해 응축된다. 이것이 솥뚜껑의 경사를 따라 손잡이를 타고 떨어져 주발에 고이게 되는데, 이를 소주라고 한다. 이보다 조금 발전한 것이 소줏고리(古里)라는 증류장치를 만들어 쓰는 경우이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방식은 후자의 것이다. 두 방식 모두 이슬처럼 맺혀 있는 것을 한 방울씩 받는 방식, 즉 이슬을 털어내는 방식이다. 이슬털이에서 반드시 누룩을 사용하는 이유나 굳이 이슬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가 바로 술 만들기(삭히기, 익히기)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비유하자면 영돈마리의 솥뚜껑은 소줏고리의 뚜껑이며, 그 안에서 망자의 넋이 발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승에서 저승으로 넘어가는 경계 넘기에서 발효 기능과 술은 왜 필요할까? 이슬털이가 경계를 넘는 방식이라면, 여기서의 술은 경계를 넘기 위해 필요한 장치이거나 기술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경계를 넘기 위해 발효라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발효(醱酵)는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미생물이 자신의 효소로 유기물을 분해 또는 변화시켜 특유한 최종 산물을 만들어내는 현상’을 말한다. 우리말로는 삭힌다, 띄운다, 익힌다 등의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발효 자체에 의미가 있다면 간장을 만들어내는 메주를 사용했을 수도 있다. 망자의 신체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 목적이라면 오히려 얼굴 형태의 메주가 적당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발효 자체보다는 ‘술’이라는 키워드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지면이 짧으니 소략한다. 술은 신(씻김굿에서는 조상)의 은유이기도 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엉뚱한 이야기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글에서 다룬 음복(飮福)의 예를 통해 이를 설명할 수 있다. 제사상에 올랐던 술은 조상의 단계에 진입한 망자를 상징하는 은유이며, 제사의 말미에 후손들이 이를 나누어 마시는 행위는 조상과의 합일을 위해서이다. 마치 교회에서 성찬식을 할 때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셔 예수의 신성을 획득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메타포인 것처럼, 술은 조상의 메타포이다. 필자의 방식대로 이 ‘거듭남’의 의미를 해석하자면, 이슬털이 의례에서 술 만드는 행위를 모사하는 것은 망자가 조상(神)의 단계에 진입할 수 있는 권위를 획득하는 과정을 연극화한 것이다. 증류주를 만드는 방식과 씻김굿의 이슬털이를 비유하여 설명하는 이 방법 외에는 아직 어떤 것으로도 이 현상을 제대로 해석해내지 못했다.

이항대립을 넘어, 접신(接神)의 발효론까지
일찍이 레비스트로스는 익힌 것과 날것을 이항대립으로 이해하여 인류의 세계관을 정리한 바 있다. 그가 ‘구조주의 인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는 이 대칭성이라는 구조를 밝혔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명예교수 전경수는 발효식품을 매개로 또 다른 모색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익힌 것과 날것의 사이에 있는, 아니 그것과는 전혀 다른 발효식품을 문화적으로 정리해보자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는 발효식품을 보존의 과학, 접신의 미학으로 연결시키는 탁견을 보여주었다. 필자가 조사한 미크로네시아의 갖가지 술도, 한국의 청주(막걸리 웃국)도 모두 알코올 성분이 만든 발효 음료이다. 모두 신을 부르거나 만나는 문화와 연결되어 있다. 한마디로 접신(接神) 기능이다.
섣불리 기독교의 성찬 방식이나 세례를 대입해 습합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여기서는 심형준의 설명을 빌리는 게 적절할 듯하다.1 심형준은 한국 전통문화의 고유성이나 지역성을 밝히는 데에 초점을 둔다기보다는 인류가 공유하는 인간의 여러 인지체계(직관적 지식체계, 인과추론, 위험예방, 사회적 상호작용 등)의 제약에 의해 나타나는 민속신앙(folk belief)이 한국 기독교 맥락과 어떻게 상호 비교될 수 있는지 성글게 추적하고 있다. 최래옥이 “한국민속과 기독교의 습합양상”(「비교민속학」 24호, 2003)에서 기복, 새벽기도, 식사기도, 십일조, 기도원, 심방제도 등을 민속적 요소와 개신교적 요소가 결합된 습합 양태로 다룬 것과는 사뭇 성격이 다르다. 최래옥의 논의는 이미 심형준에게 비판받은 바 있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지체계의 유사 혹은 같음이다.
이론은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고안된 개념들의 유기적 그물(網)”이라고 정의된다. 현장 혹은 현실에 관한 설명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기독교의 현장이 있는 것처럼 한국 전통문화로서의 씻김굿이 현장에 있다. 기독교는 한국의 전통문화, 특히 굿을 악마화하고 배제하거나 금기한다. 필자는 이에 대한 일종의 목마름이 있었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 폴 엘뤼아르(Paul Eluard)가 ‘타는 목마름으로’ 자유를 노래했듯, 필자는 타는 목마름으로 한국의 전통문화를 추적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공명(共鳴)을 기독교에서 구하지 못했으며, 반대로 기독교에 대한 공명을 전통문화 속에서 구하지 못했다. 기독교가 우리의 전통문화를 말살한 주범 정도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 연재의 제목처럼, 기독교와 한국 전통문화의 화해를 위하여 필자가 일련의 행간을 톺아나가는 취지는 인지체계의 유사 혹은 같음을 인정하는 공존에 있다.


1 심형준, “한국 기독교 민속신앙론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지종교학의 관점이 말해주는 것”, 「종교문화비평」 33호(2018).


이윤선 | 민속예술을 전공하였다. 『남도민속음악의 세계』 등의 저서가 있다. 남도민속학회 회장,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9년 1월호(통권 7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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