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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문익환 목사 헌정음반 <뜨거운 마음>을 기록하다 08
문화·신학·목회 (2020년 1월호)

 

  시를 써보니 알아지는 것들- <서시>(序詩)
  

본문

 

늦봄이 이 지상에 머물다 간 연보의 처음과 끝은 1918년과 1994년이다. 20세기 100년의 시간을 일흔일곱 해로 채워 살았으니, 그는 생애 전부를 20세기 괴물과 마주하며 살아야 했다.
아버지 문재린 목사는 일제와의 항쟁에 자신을 번제한 여린 영혼들의 주검을 붙들고 무수한 장례식을 치렀다. 아들 늦봄은 민주화와 통일의 노정에서 자신의 목숨을 번제로 바친 수많은 영혼들의 죽음 곁을 지켰다.
만인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번제한 주검 곁에 제사장 직분으로 서 있는 일은 대를 이어 거듭해 봐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분노는 깊어졌고 깊어진 만큼 살아 수행해야 하는 삶의 보폭은 넓어졌다. 넓어진 보폭을 감당하려면 일상은 태산처럼 진중(鎭重)해야 했을 것인데, 그때마다 늦봄은 아버지 문재린 목사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많았을 것이다.
그 질문을 늦봄은 시로 썼다. 시를 써 보니 ‘쨋쨋이’ 알아지는 것들이 있음을 익히 잘 아는 그였다.
스물일곱에 떠난보낸 벗 윤동주를 죽인 이들이 쉰여덟에 떠나보낸 벗 장준하를 죽였다. 일제와 군사독재는 한 치의 어김 없이 같은 뿌리에서 돋아난 가지였다. 장준하를 대신해달라는 주변의 요청에 더 물러설 자리도, 더 머뭇거릴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야만의 20세기와 본격적인 분투(奮鬪)를 시작한 것이 1976년 3・1구국선언, 늦봄의 나이 쉰아홉의 일이었다. 1994년 1월 18일, 일흔일곱의 나이로 별세하기까지 18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11년 2개월을 그는 감옥에 있었다. 한 치의 물러섬이 없는, 그야말로 악·전·고·투(惡戰苦鬪)였다.
그 생의 기념비는 1989년 3월 25일 평양 방문이지만, 나의 뇌리에 저장되어 있는 정점의 기억은 1987년 이한열 추모식에서 스물일곱 열사들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는 장면이었다.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온몸에 배어 있는 것을 다 토해낼 듯, 아무리 애써 불러도 대답 없는 이들의 이름이 늦봄의 절규로 낱낱이 더해질 때마다, 구름 떼처럼 모인 청중의 흐느낌도 밀도와 깊이를 더해갔다.
시(詩)가 굳이 활자의 형태를 고집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면, 내가 만난 늦봄의 시 중에서 이것을 넘어선 절창을 만나보지 못했다. 늦봄의 시는 이렇듯, 삶의 행보로 이미 다 쓰여진 무엇인가를 거침없이 토해내는 방식이었다. 삶으로 먼저 쓴 시를 활자로 쓴 시가 앞서갈 방법은 없어 보였다.

다 내려놓고, 호젓하게
늦봄 문익환 목사 헌정음반 <뜨거운 마음>에 수록할 작품을 쓰려고 안간힘을 쓰던 2000년 1월 초, 나는 몇 개의 다른 위촉 작품까지 숙제로 품고 작품여행을 떠났다. 다 내려놓고 호젓하게 가는 게 여행일 것인데, 다 짊어지고 전쟁하듯 가는 길이었다. 모란묘지에 들러 잠시 눈인사를 맞추고, 목적지 없는 길을 눈먼 차로 다녔다.
우연히 평창으로 가는 길을 잡았는데, 눈발 날리는 56번 도로 운두령을 힘겹게 넘었더니 고개 끝 마루에 ‘이승복 기념관’이 나타났다.
속사초등학교 계방분교 2학년 이승복! 겨우 아홉 살 아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한마디 하자 울진삼척으로 침투한 무장공비들이 입을 찢어 죽였다고, 1968년에 일어난 그 사건을 당시 언론은 그리 보도했다. 이후로 ‘반공투사’라는 호칭이 훈장처럼 달라붙은 겨우 아홉 살 이승복을 교과서나 궐기대회, 혹은 반공 영화에서 거듭 만나야 했던 초등학교 시절을 나도 보냈다.
시인 서홍관의 <눈이 내리고……승복이에게>, 이승복에 대한 연민 가득한 이 시가 눈발 날리는 기념관을 뒤로하고 나서는 허허로운 내 심경을 대변했다.

바람이 높아가며
눈발 속에 네가 고단해 보인다
용감하고 의로운 반공소년이
아홉 살의 너의 어깨에는
너무 무거워 보이는구나

선유도국민학교도 겨울방학인데
너도 너희 집으로 돌아가야지
어깨의 눈을 털어주마

태백의 눈길 꼬득꼬득 밟으며
팽이도 치고 연도 날리던
아홉 살의 어린 나이로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겨울 한복판의 운두령 고갯마루, 나 말고 찾는 이 단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아 적이 스산한 이승복 기념관을 나서면서, 멸공투사 훈장 따위 내려놓고 겨우 아홉 살 어린아이로 되돌려 주고픈 시인의 심경 그대로,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은 문익환 헌정음반 <뜨거운 마음>을 잘 만들어야 했다. 잘 만들기 위해 우선은 이 고즈넉한 여행이 거절할 수 없는 유혹 같은 노래 하나를 내게 안겨주어야 했다.
운전대를 거머쥐고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는데, 무심코 뿌리 옅은 생각 하나가 왼쪽 옆구리로 돋았다. 야만의 20세기와 악전고투하는 늦봄 말고, 통일지사나 애국지사나 예언자 같은 무거운 명패 말고, 3・1구국선언으로 출사하기 이전의 늦봄이 궁금했다. 상서로울 것 하나 없이 흔하고 하찮고 욕망과 나약함이 남들만큼 적당히 눌러 붙어 있어서 더없이 좋을, 널브러진 일상의 늦봄이 몹시도 궁금했다. 우주가 자신을 중심으로 도는 것으로 알고 살아가는, 이 지상에 그리 머물다 가는 허다한 생명체 중 한 개체에 불과한 그저 그런 중년 남자 늦봄의 일상, 그 흔적을 소박하게 담은 시에 곡을 붙여서 애틋하거나 쓸쓸하거나 까닭 없이 외롭거나 고즈넉하거나 여린 감수성의 노래 하나 만들어서 이 음반에 담아보는 건 어떨까?
승복이는 멸공투사 훈장을 벗은 아홉 살의 어린 나이로 되돌려 보내고, 늦봄은 통일지사와 애국지사와 예언자와 제사장 같은 짐 덩어리를 다 내려놓은 호젓한 쉰여덟 살로 되돌려 보내는, 왠지 흥미로운 이 합(合)이 장구의 채편과 궁편처럼 잘 맞아 이 음반에 꼭 필요한 트랙일 것 같았다.

시를 써보니 알아지는 것들
평범한 한 개체로 더없이 호젓한 늦봄의 궤적은 그의 첫 시집 『새삼스런 하루』에서 만날 수 있었다.
주지하듯이 늦봄은 쉰한 살에 신구교 성서 공동번역 작업에서 구약의 책임자 일을 맡았다. 1968년부터 1976년까지의 일인데, 대단히 영광스러운 프로젝트여서 그의 인생 전부를 걸어도 좋을 일이었다. 그를 곤혹스럽게 한 것은 구약의 40%가량을 차지하는 히브리어 시를 우리말의 어감과 수사(修辭)와 음운과 라임이 오롯이 살아 있는 시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도무지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구약학자의 안목에 의지해서 히브리어로 쓰여진 시의 속내를 보려니 도무지 다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숭숭 보이고, 그 구멍으로 황소바람 곁들인 한기 같은 것이 엄습하였다.
늦봄은 직접 시를 읽기 시작했다. 직접 부딪쳐보는 게 최상이었다. 하지만 알 듯 모를 듯, 잡힐 듯 말 듯, 시는 자신의 속내를 쉬이 보여주지 않았다. 직접 써보면 어떨까, 시를 써보면 시의 속내가 읽힐까? 그래서 시를 썼다. 1971년, 쉰 넷에 시작한 늦봄의 첫 시행(詩行)이다.
그렇게 딱 2년을 쓰고 1973년 6월 1일, 쉰여섯의 생일을 기하여 출간한 늦봄의 첫 시집이 『새삼스런 하루』이다. 습작을 엮은 것에 불과하다는 겸어를 작가 후기에 남겼지만, 첫 시집을 바라보는 수많은 얼굴들이 떠올라 그리 표현한 것으로 읽힌다. ‘그게 시냐?’, 죽마고우 관계의 어휘로 어린 윤동주에게 핀잔을 받은 이후로 평생 시와는 벽을 두고 지냈다는, 그 한마디의 아슴푸레한 기억이 까닭모를 되새김으로 와 닿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막상 시를 써보니 비로소 알아지는 것들이 있었다. 『새삼스런 하루』 후기에 늦봄은 그것을 두 가지로 기록해두었다. 첫째는 다른 사람이 쓴 시에 비로소 눈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작곡을 직접 해봐야 다른 사람이 만든 곡의 속내가 귀로 들리는 것과는 달리 읽히는 일과 비슷한 것이리라. 둘째는 자신의 모습을 밝히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표현 그대로 ‘구리거울에 비춰 보던 흐릿한 나의 모습을 바람 한 점 없는 숲속 호수에서 쨋쨋이 보는 느낌’이었다.
오늘 소개할 <서시>(序詩)는 그의 첫 시행의 궤적이 담긴 『새삼스런 하루』의 첫 장에 실린 시이다.

서 시
흙 내음 / 조촐한 시행(詩行)
두어 줄에 / 얼비치는 / 무지개
또 / 하나 다른 무지개
아슴푸레 / 겹으로 걸치는 / 여백
난초 / 이파리 흔들리는 / 실바람에
서걱이는 대숲의 / 여운
떡 벌어진 / 가슴 하나로 서 있는 / 바위
언제나 / 목이 열리나
시름없이 오가며 기다리는
흰구름 구름의 무한 / 공간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에서 쨋쨋이’ 자신의 첫 시행을 반추해보는 늦봄의 호젓한 일상이 더없이 그윽한 평온의 정서로 와 닿은 덕분에 곡은 시의 결을 따라 한나절이 안 되어 쓰여졌다.
프로듀서 몫으로 주어진 일이 버거워 이지상에게 맡긴 편곡이었지만, 시와 곡의 속내를 감각적 이미지로 참 잘 빚은 편곡이다. 내가 직접 편곡했으면 무겁고 규격화된 옷을 입혔을 것인데, 여백을 잘 살려주었다. 지금도 이 트랙을 자주 찾아 듣는 이유는 그의 편곡 덕분일 것이다.

202001_rhs1.jpg

첼로를 연주한 이의 이름을 재킷에 기록해두지 않아, 수소문하다가 포기했다. 미안하다. 짧은 시간에 악보를 보고 연주한 것인데, ‘음악의 진짜 실체는 악보 바깥에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보이는 연주이다.
노래를 부른 윤정희는 작곡가 겸 시인 백창우가 이끌어온 ‘노래마을’ 멤버인데, 이 음반을 공식 논평한 대중음악 평론가 강헌의 칭찬을 아낌없이 받았다.

<마지막 시>
내 기억 속의 늦봄은, 스무 살에 종로5가 2층 기독교회관에서 한 편의 서사시 같은 그의 강연을 처음 들은 날로부터 시작해서 내내 야만의 20세기와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전부였다. 통일지사·애국지사, 나라의 제사장, 예레미아 같은 예언자…, 늦봄 문익환의 것이어야 마땅한 모든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내 안에 가시로 돋고, 겹겹의 샛바람으로 엄습하고, 눈물로 번지고, 삶의 지렛대로 아리디 아리게 저며 오는, 그 모든 흔적을 꾹꾹 눌러 담아둔 상태에서, 더구나 그를 소낙비처럼 떠나 보낸 6년의 시간을 더하고 난 후에야 ‘늦봄’이기 전의 <서시>를 나는 읽었다.
그의 ‘조촐한 시행(詩行)’은 수줍었고, 다 알 수 없는 설렘으로 가득했다. 무엇보다 여백의 호젓함으로 그윽했다. 그러니 얼마나 좋은가. 늦봄의 일상이 그런 것이어서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남들만큼 적당히 욕망하고, 숨기도 도망치기도 하고, 살짝 비겁하여 내 것을 앞세울 줄도 알고…. 어딘 그런 늦봄의 흔적은 없을까? 찾을 수 있다면, 내 오래된 죽마고우처럼 찰싹 달라붙어서, 마치 내가 쓴 시처럼 움켜쥐고 곡을 붙여보려 또 안달이 났을지 모를 일이다.
늦봄의 두 번째 시집 제목은 『꿈을 비는 마음』이다. 거기 <마지막 시>가 있는데, 3・1구국선언으로 처음 투옥된 전주교도소에서 25일간의 옥중단식을 감행하면서 쓴 시이다.(1977) <서시>를 발표하고 4년 뒤, 20세기 야만과의 악전고투를 시작한 직후에 쓴 시이다.

마지막 시
나는 죽는다
나는 이 겨레의 허기진 역사에 묻혀야 한다
두 동강 난 이 땅에 묻히기 전에
나의 스승은 죽어서 산다고 그러셨지
아–
그 말만 생각하자
그 말만 믿자 그리고
동주와 같이 별을 노래하면서
이 밤에도
죽음을 살자


<서시>를 읽고 <마지막 시>를 읽으니 속내 깊숙한 곳이 통증으로 아렸다. <마지막 시>를 읽고 <서시>를 다시 읽으니 아프지 않은 곳 없이 아팠다.


류형선 | 한양대학교 작곡과 및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예술전문사과정을 졸업했다. 국립국악원 예술감독을 역임하였으며, KBS 국악대상(2008) 및 기독문화대상(1995)을 수상하였다. 작곡가로서 4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고, 음반 프로듀서로서 50종의 음반을 제작하였다. 현재 숨엔터테인먼트 예술감독, 정동극장 이사, 국악TV 준비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북시디 『전래자장가 자미잠이』, 음악에세이 『음악에게 차 한 잔을』 등이 있다.

 
 
 

2019년 1월호(통권 7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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