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평양 기독교 역사 12(마지막회)
문화·신학·목회 (2020년 1월호)

 

  1919년 3월, 평양의 3·1독립운동과 「독닙신보」
  

본문

 

1919년 3월 1일 평양의 3・1운동 선언식1과 그날 서울에서 체포된 길선주 목사의 행적2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19년 서울에서 독립신문이 발간된 후 평양에서도 지하에서 독립신문이 발행되어 운동을 추진한 사실은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새로 발굴한 평양의 독립신문 1호, 5호, 6호의 원문을 소개하고, 평양의 3・1운동과 숭실 학생과 선교사 모우리와 마페트의 역할을 재조명하려고 한다.

7종의 독립신문
‘독립’이라는 말은 1905년 이전에는 중국으로부터 독립된 근대 국가의 건설을 뜻했으나, 1910년 이후에는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했고, 1919년부터는 민주공화국으로서의 의미가 추가되었다. 해방 이전 독립신문은 일곱 가지 이상 발행되었다.
첫째, 1896년 4월 7일 창간된 첫 한글판 신문인 「독닙신문」(독립신문, 서재필 편집)과 영어판 The Independent(헐버트 편집)가 효시였다.
둘째, 1911년 7월에 하와이 노재호(신한국보 주필)가 발행한 「독립신문」인데, 두 호를 내고 중단했다.3
셋째, 1919년 3월 2일 서울의 만세운동 시위 때 보성전문학교 교장 윤영익은 독립선언문과 전날의 소식을 담은 「조선독립신문」을 시위 군중에게 배포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1년간 징역형을 살고 1920년 9월 초에 석방되었다. 석방 기사에 따르면 그는 1919년 3월 2일부터 며칠 동안 매일 신문을 발행했다.4 이 독립신문의 일부분이 3월 5일 자 경찰 보고서 극비 문서에 실려 있다.5
넷째, 서울 경성서적조합 서기 장종건(주필), 경성전수학교 학생 임승옥, 최치환, 경성전기회사 전차 운전수 남정우 등이 서적조합 사무실 등사기로 매일 「독립신문」을 만들고, 경고문, 24개 학교 휴학 선언서를 인쇄하여 시내 각처에 배포했다.6 그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섯째, 1919년 3월 20일경 평양(숭실대학)에서 창간, 최소한 26일 제6호까지 발간된 독립신문으로 오늘의 주제이다. 창간호는 순한글판 1쪽의 「독립신문」이었으나, 5호와 6호는 「독닙신보」로 제호를 바꾸고 판형도 두 쪽으로 하고 국한문으로 발행하였다.
여섯째, 1919년 4월 함흥에서 발간된 등사판 「독립신문」으로 발행인은 최순탁이었다. 4월 15일에 자수하면서 체포되었다.7 함흥은 3월 1일 밤에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시위를 준비한 후 2일에 시위를 한 곳으로, 함경도에서는 원산에 이어 일찍 시위한 곳이다. 신문의 내용이나 원본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일곱째, 1919년 8월 21일 상해임시정부가 창간한 「獨立」으로 주 3회(화, 목, 토) 발행하였고, 사장 겸 주필 이광수(李光洙), 출판부장 주요한(朱耀翰), 필진으로는 안창호, 김규식, 신채호, 기자 조동호(趙東祜), 이광수 등이 활동했다. 창간 당시 제호는 「獨立」이었는데 1919년 10월 25일 제22호부터 「獨立新聞」이라 고쳤고, 다시 1924년 1월 1일 자 제169호부터 한글로 「독립신문」이라 바꿨다. 발행 장소는 프랑스 조계 패륵로(貝勒路) 동익리(同益里) 5호였다. 조동호는 성서에서 한글 자모를 따서 제조, 사용하였다. 박은식이 1925년부터 사장으로 일했다.
이처럼 독립의 열망이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신문 발행으로 표현되는데, 가장 현장성이 높은 신문은 평양의 「독닙신보」였다.

평양의 「독립신문」 창간호, 1919년 3월 20일
2019년 3월 8일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 양화진문화원은 3・1운동 100주년 기념의 일환으로 1919년 3월 평양에 뿌려진 등사판 「독립신문」 원본을 양화진 선교사 전시실에서 일반인에게 최초로 공개했다.8 아래 사진이 그것이다.
이 자료는 1919년 헨리 웰본(Henry Welbon, 당시 15세, 평양 주재 Arthur Welbon 목사의 아들)이 평양 외국인학교 부근 언덕에서 주워서 보관한 것으로, 조선독립단의 이름으로 나왔으나, 실제로는 숭실대학 학생들이 등사판으로 등사하여 3월 20일경 학교 주변과 평양 시내에 뿌린 신문이었다. 신문에 날짜가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다음에 살펴볼 5호와 6호로 짐작하면 3월 20일에 발행된 듯하다. 전문을 현대어로 옮겨보자.

202001_osd1.jpg

- 오늘이 어느 날이뇨. 공중에 가득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을 양식으로 삼고, 4,300년의 장구한 역사, 2,000만의 피 같은 동족을 통해 세계 평화를 함께 도모한 우리 조선독립단이여. 오늘이 어느 때인가. 임금의 자손인 우리 민족에게 자유 활동과 태평복락을 전해주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 전염병이 생길 모양이니 주의하여 없이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평소 품고 있는 뜻을 발표한다는 것은 말씨요, 인민의 갖가지 감정현상을 표현하고 공적으로 고함은 세계 문명을 지배하는 작으면서도 새로운 문장이 아닌가. 지금 이때에 조선에 많이 유행하는 매일신문9은 다 거짓되고 조작된 말이요, 거짓되고 허무한 글과 말, 혹은 인민을 어둠의 구렁텅이로 인도하는 글과 말, 패역한 말뿐이니, 그 하는 일이 어찌 그리 무례하며 어찌 그리 잔악하고 사리에 어긋나 일을 그르치는 것인가. 신용할 만한 이가 누구인가. 매일신문아, 네 병은 그저 잠깐 동안일 뿐이다.
- 경성시보: 3월 1일부터 지금까지 서울에 있는 우리 동포 각 상점에서는 일절 문을 닫고 영업하지 않고 있으며, 우리 독립의 선도자들을 위하여 단결하며, 일본인 측과 일절 거래하지 않고 멈추고 있는데, 저 간사한 관리 측에서는 강제적으로 위협하고 화를 냄으로 영업을 하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 동포들은 여기에 저항하고 강경한 태도에 굳건한 마음이라 하니 평양의 우리 동족은 어떠한가.
- 총칼이 정신을 뺏을 수 있는가. 개성(開城) 근방에서는 저 간악한 자들이 백지에다가 나명(羅名)하여 날인(捺印)을 하여달라고 한다지. 무슨 흉계일까. 우리 기성(箕城, 평양성)에도 있던 걸 거기에 날인한 자 있다 하니, 그런 무당과 고자는 당사무석(當死無惜, 마땅히 죽어도 애석하지 않다)이라.
- 상해 확보: 중화민국 상해시보 3월 15일 호에 조선독립운동과 저자들의 폭행을 세세히 기재하였으니 중화민국 유력자와 각 공사관의 공사들은 물론 우리를 찬송하고 있다.
- 북경에서 옴. 북경 영자신보 3월호에 우리 조선독립운동은 과연 일다 한 글의 제목으로 우리의 진실된 마음 및 정성과 외국인의 비판을 하나도 빠뜨림 없이 보도하였는데 [여기에 더하여] 파리의 소식도 또 있구나. (미완)
- 조선혼: 평양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 전체는 공중에 가득한 열성으로 조국을 생각하고 자기 동창에게 본보기가 되고자 생각하고 있는데, 교장인 작자는 자기의 정신을 팔겠다고 야단하다가 도리어 학생에게 말총을 맞고 물러갔으며, 학생은 일반휴학을 하였다. 경성 어떤 OO학교 10세 미만 생도들은 일절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고, 동맹하여 시험을 보지 않으니 교장은 눈물을 흘림이라. 사랑하는 내 동포여, 나는 이미 갔소이다. 내 피는 줄줄이 흘렀소이다. 나는 방년 10세라. 좌우로 움직이기 어려우나 내 동족 내 나라 내 주권 내 자유 내 강토 생각하니 저 폭탄이 내 머리를 깨뜨리고 내 몸은 저승으로 가게 되나, 내 영혼은 애국혼이라. 내 동포여, 내 동포여. 독립 자유 억만세 길이길이 뜨거운 피 애국혼.


「독립신문」은 비록 등사판 1면에 불과했으나, 「매일신보」, 「경성시보」 등 총독부나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의 거짓 정보에 대항하는 지하 신문이었다. 「독립신문」의 정보는 「상해시보」, 북경의 영자 신문 등과 평양 지역 소식이었다. 3월 15일 자 「상해시보」를 언급하므로, 제1호는 3월 20일이나 21일에 발행되었고, 이후 매일 1면씩 발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독닙신보」 제5호, 1919년 3월 25일
5호와 6호를 마페트 자료에서 발굴하여 처음으로 공개한다.

202001_osd2.jpg

202001_osd3.jpg

(1) 제호 변경: 1호 「독립신문」을 사고로 인해 5호부터 「독닙신보」으로 바꾸었다고 5호 마지막에 급히 공고했다. 따라서 공개하는 5-6호는 평양에서 발행한 1호의 연속 호였다.
(2) 양식 변경: 5-6호는 제1호와 달리 두 페이지 등사본으로 발행하였다. 간단한 신문 양태의 형식을 갖추었고, 제호도 따로 크게 표시했다. 한 면을 3등분하여 읽기 쉽게 했다. 사설이나 특전을 1면에 게재하고, 2면에는 주요 외신과 내신을 싣고, 마지막 항에 평양 지역 소식을 실었다. 우리는 평양 소식에서 숭실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사업가들과 상인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은 순한글에서 한글을 주로 사용한 국한문으로 변경했다.
(3) 발행일 표시: 1호와 달리 발행일은 한자로 “대한건국 4252년 3월 ○○일 (○요일) 제○호”로 표시했다. 한국의 건국이 단군에서 시작되었으며, 3・1운동은 ‘대한’제국의 정통을 잇고 되살리는 것으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3월에 발간된 선언문이나 신문 형태의 글에 공통된 사항이었다.[1919년 상해임시정부도 두 개의 국경일만 기념했는데, 건국 기원절은 10월 3일, 3・1절은 ‘독립 선언일’로 의결하고 기념했다.] 6호에서는 제하에 한국 지도를 그려 넣고 평양을 표시하여 발행처가 평양임을 분명히 했다. 사설에서 민족자결론을 다루었다.
(4) 소장지: 위 두 자료는 프린스턴신학교 도서관 Moffett Collection에서 찾았다.
(5) 내용: 한 면씩 내용을 살펴보자. 제5호는 기독교 정신을 강조하고, 예수교인 중 친일파 해리스(Merriman C. Harris, 1846-1921) 감독과 각계의 친일파 대표와 대동군수를 비판하고 있다. 첫 기사만 전문을 싣고 나머지는 요약한다.

• 특전(샌프란시스코 전): 일본 정부의 명을 받은 해리스 박사의 망신. 상해 영자보에 의한즉 친일주의자로 십년간 일본 예수교 감독으로 재직시 조선청년회와 일본청년회를 합병시킨 특훈이 있는 해리스 감독은 오조약 칠조약에 가입한 매국적 무리의 나인한[날인한] 것을 강화회의에 제출코저 미국 상항에 도착한 해리스는 조선 독립에 동정을 표하는 미국 유력한 인사들에게 망신을 당하는 동시에 서류까지 몰수를 당하였다더라. 미국인 다수는 조선 독립에 대하여 만공의 혈성으로 동정을 표함에 대하여는 아 조선 민족이 감복하는 바나, 조선인 중에 일본인과 같은 것같이 미국인 중에도 스티븐스[Durham W. Stevens, 1851-1908]와 해리스 같은 놈도 있다.
나인한 매국적의 개이름: 귀족대표 이완용, 사회대표 송병준・조중흥, 친족대표 윤덕영・윤택영, 유림대표 김윤식, 종교대표 신흥우, 실업대표 한상룡.
• 로국[러시아]에 있는 아 동포의 결사단 조직.
• 사랑하는 형제자매에게: 우리 조선은 독립국이요 우리 민족은 자주민임을 우리의 견실한 자신으로 주장함에 대하여 어느 누가 우리 주장을 부족하다 하며 대적하리오. 독립국 자주민에게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듯이 부활의 생명의 때가 왔다. 이 기회를 놓치면 개돼지처럼 죽음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 감옥에 있는 형제의 몸이 찢어지는 아픈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하나님이 감시하니 우리의 주장을 철저히 실현하기까지 일심 동구로 앙천 절두하자.
- 학생제군과 유지신사에게: 장하도다. 비록 속국이나 반드시 독립하나니 오등 제군은 애국심을 분발하라.(계속)
• 고통은 지나가고 화평의 시대 왔다.
• 시사편언: 평양 대동문 재목상 하는 안국보는 10원 기부; 대동군수 박시석 비판; 중국 지푸 신문에 유대인은 망한 지 2,000년간 외국에서 표류하나 조선은 합방된 지 10년 만에 독립은 의심 없이 되겠다. 상인 여러분에게 앙고함. 신문을 보시고 시장에서 철수하여 주시니 감사. 급고: 부득이 사고로 본 신문은 신보로 개정하였습나이다.


「독닙신보」 제6호, 1919년 3월 26일
「독닙신보」 제6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02001_osd4.jpg

202001_osd5.jpg

• 민족자결론: 반성하라 일본 당국자들이여! 강포와 전쟁의 시대가 가고 민족자결 독립과 정의인도의 평화의 시대가 왔다. 시대정신에 반하는 일제 당국자는 반성하라. 유대국, 아일랜드, 인도, 베트남은 독립해도 일본과 조선은 분립할 수 없다는 편협한 일본인은 반성하라.
• 특전(파리 전):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대표가 참석하여 제국의 동정을 받는다 함.
• 해리스의 낙심: 미국에서 낯을 들고 다니지 못한다.
• 철전[가게 문을 닫고 철수]하지 아니한 상인들에게: 영업보다 자주독립이 중요하다.
• [전호 연속: 학생제군과 유지신사에게] (계속) 비록 마귀의 자식과 마귀의 도당이 일시 분란하더라도 마침내 애국자의 눈앞에서 백기를 들 것이다. 그러므로 애국심을 발하라.
• 시사 편언: 이달 28일은 완전 독립이 발표되는 날이라 하나 이는 허설이니 자세한 사항은 이후 이 신문을 보시오.
- 평양 종로에 있는 작은 서점이 아직 철시하지 않았는데 본회가 제조한 폭탄을 맛볼 것이다. 독립하기를 원하면서 상점을 열어 더불어 즐기는 자는 같은 앙화를 받을 것이다.
기부금을 모집합니다.


평양 「독닙신보」의 중요성
KBS가 2019년 3・1절 100주년에 발굴 보도한 “삼일운동 계보도”를 보면 초기 3・1운동은 서북 지역 기독교인들과 서울의 인사들이 주도하고 학생들이 적극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계보도는 3월 24일경에 작성했기 때문에, 선교사는 세브란스병원의 이갑성과 연관된 대구의 미국 선교사 브루엔(Henry M. Bruen, 1874-1959) 목사와 세브란스병원의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1889-1970) 의사만 기록했다. 그러나 만일 4월 말에 다시 작성했다면, 평양 시위 배후에 있던 모우리(Eli M. Mowry)와 마페트(Samuel A. Moffett)를 지목해서 넣었을 것이다.
평양에서 정보를 수집한 경찰은 1919년 4월 4일 숭실대 모우리 선교사와 마페트 사택에 대한 수색을 실시했다. 그때 마페트의 집에서 발각된 중요한 자료가 바로 이 「독닙신보」였다. 4월 10일 모우리가 학생 은닉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4월 12일 자 「매일신보」는 그동안의 경과를 보도했다. 마페트와 연관하여 압수한 증거물은 숭실여학교 기숙사에서 발견한 등사판 1대, 마페트 부인의 집[서재겸 도서관]에서 발견한 휴교 선언서 여러 통, 등사판 1대, 「독닙신보」 1통, 정주에서 마페트에게 보낸 소요 사건 정보 1통 등이었다. 모우리는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마페트는 이러한 증거물에도 불구하고 부인의 집 열쇠를 한국인이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무혐의로 4월 5일 아침 경찰서에서 풀려났다.10
「매일신보」는 「독립신문」이 평양에서 발행되었다고 했다가 압수물 부분에서는 경성에서 발행한 것으로 쓰고 있다. 평양 발행이 맞다. 이보식 등이 마페트 부인의 집에 있는 등사기로 인쇄했다. 참고로 모우리는 4월 4일 체포, 4월 10일 1심, 19일 2심에서 6개월 징역형 선고 등 판결을 받았으나, 19일에 석방되었다. 흔히 알려진 벙거지(방갓)를 쓴 모우리의 모습은 4일 체포될 때의 사진이 아니라, 4월 10일 평양 법원에서
1심 재판 후 유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4월 10일 평양 법원의 판결문(영문 번역문)을 보면 이보식, 김태술, 기균호, 길진형, 이인선 등 5명의 숭실대 학생이 3월 1일 만세 시위에 참여했고, 이들은 모우리에게 부탁하여 그의 사택에 일주일 가까이 차례로 은신해 있었다. 4월 12일 자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베어드 집에는 박형룡이 은신해 있었다. 독립신문 발행을 주도한 이보식은 마페트 가에 은신해 있다가 도주했다.
평양 기자단은 3・1운동 배후에 선교사가 있다고 보고, 이런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서 선교사들과 5개 신문사 기자단과 회견 담화를 하자고 제안했다.11
사실 이미 3월 3일 평양 주재 일본인 목회자 9인은 선교사 대표자 마페트와 무어에게 서신을 보내어 조선인의 지도를 촉구했다. 즉 조선인들이 세상사를 오해하고 3・1운동에 참여했다. 이로써 전도와 교육, 의료 사업에 차질을 가져왔다. 특별히 유감인 일은 전국의 기독교인들이 시위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타인도 참여하도록 선동한 일이다. 이는 기독교 원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는 선교사들과 교인들은 일본 교인들과 함께 전부 회개운동에 나서고, 이후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도록 지도해야 한다.12
평양의 3・1운동과 관련해 4월 19일 마페트가 남긴 메모를 보면, 3월 만세 사건 이후 주동자인 기독교인들 검거 과정에서 거의 모든 선교사를 도와주던 서기들과 집사들이나 식모들이 구금되고 매질을 당했다. 교인들과 선교사 가택을 수색하면서 한국인들을 구타했다. 4월 4일, 16일, 18일 세 차례나 경찰과 헌병들이 와서 협박했다. 이때 일본인 순사와 헌병은 주민을 모아놓고 ‘양귀’인 미국 선교사에게 속아서 성경에도 없는 ‘독립’이나 ‘만세’를 했다고 설득하는 한편, 3,000명 기병과 3,000명의 군인을 동원해서 모든 기독교인을 죽이겠으며, 만일 주민이 이틀 안에 기독교인을 도시에서 쫓아내지 않으면 주민도 몰살하겠다고 협박했다.
1919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발행된 일간지 The Consti-tution 4월 9일 자는 시위 참여자와 신학생에 대한 태형을 보도했다. “한국인을 나무 십자가에 묶고 일본인들이 잔인하게 태형을 가했다.” 평양에서는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고 장로회신학교에서 지내고 있는 학생들을 마구 잡아가 옷을 벗기고 십자가 형틀에 매단 후 태형을 가했다. 이어 형틀을 매고 시내를 걸어 다니도록 했는데, 시민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였다. 순사들은 신학생들에게 “너희가 믿는 예수도 십자가를 매고 걸었으니, 너희도 너희 아버지를 따라 그런 특권을 누려보아라”라며 능욕했다.13 숭실대 학생들과 장로회신학교 학생들에 대한 태형에 마페트 등이 항의하자, 33보병연대 연대장 고지마는 기독교 십자가를 능욕할 의도가 없었다고만 변명했다.
이상에서 우리는 마페트 집에서 숭실 대학생들이 모여 3월 1일 시위를 계획하고, 이후 그곳에 모여서 추가 시위를 주동해나갔으며, 몰래 등사기로 3월 20일 「독립신문」(25일 5호부터 「독닙신보」로 제호 변경)을 인쇄해서 반포하면서 철시를 주도하고 응하지 않는 상인들에게 폭탄 맛까지 보여주겠다고 경고한 점을 중시하게 된다. 학교의 동맹 휴교 투쟁, 철시 투쟁, 언론 투쟁, 친일파 비판과 응징까지 추진한 숭실대 학생들이 마페트와 모우리 집을 중심으로 모여 연락을 취하고, 해외 신문을 읽고 정보를 공유했다.
비록 마페트와 모우리가 직접 관여한 것을 끝까지 부인하고 결국 무죄로 판결을 받았으나, 정황상 한 달 이상 그들의 집에서 학생들이 모여 그런 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몰랐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마페트와 모우리는 학생들의 독립 투쟁을 지지하고 방조했다. 그들의 집에서 발견된 「독닙신보」가 그 증거이다. 어떤 경로로 현재 프린스턴신학교 마페트 자료에 이 신문 5호와 6호가 들어가 있는지 알 수 없으나, 1919년 3월 말에 발행된 그 신문을 마페트(마포삼열)가 어딘가에 몰래 숨겨두었고, 나중에 아들 마삼락(Samuel H. Moffett) 박사가 보관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4월 이후 1936년 한국을 떠날 때까지 마페트는 20년 가까이 이 독립신문을 몰래 한 번씩 꺼내 보면서 한국의 독립을 빌었을 것이다. 알려진 것보다 장로회 선교사들(마페트, 모우리), 숭실대 학생들, 장로회신학교 학생들이 3・1운동에 깊이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시위 학생들을 숨겨준 죄로 1919년 감옥 생활을 한 모우리, 독립신문을 등사하도록 서재를 빌려준 마페트, 학생을 숨겨준 죄로 1921년 추방된 선천의 매큔, 독립신문 창간호를 간직하며 일본의 만행을 기억하고 해방 후에 그것을 증언한 헨리 웰번 등 선교사나 그 가족들의 한국 사랑과 독립 지지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연재를 마치며] 지난 12회에 걸쳐 소개한 해방 이전 평양과 기독교의 역사는 이 글로 마감한다. 앞으로 해방 전후 평양 기독교의 박해와 서북청년회의 활동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여, 기회가 되면 소개할 예정이다. 그동안 이 주제에 관심을 갖고 글을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 옥성득 교수님의 연재 ‘평양 기독교 역사’를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좋은 글 보내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부


1 김승태, “평양에서의 3・1운동과 김선두 목사”, 「기독교사상」(2018년 5월): 91-100.
2 옥성득, “ 길선주 목사와 삼일 운동”, 「좋은나무」, 2019년 2월 27일.
3 「신한민보」, 1911년 7월 5일, 26일.
4 “九月 二日 滿期出獄될 獨立新聞 社長 尹益善”, 「每日申報」, 1920년 8월 28일.
5 극비 대정 8년(1919) 3월 1일 총독부 경무국 고제5410호 “독립 운동에 관한 건”(제2보).
6 “獨立新聞을 印刷頒布ㅎㆍㄴ 學生 검사국으로 갓다”, 「每日申報」, 1919년 3월 26일.
7 「每日申報」, 1919년 4월 21일.
8 “1919년 3월 뿌려졌던 ‘독립신문’ 원본 공개”, 「기독교한국신문」, 2019년 3월 15일.
9 당시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의 오기.
10 “米國宣敎師 家宅搜索을 當ㅎㆍㅁ”, 「每日申報」, 1919년 4월 12일.
11 “宣敎師에 통첩”, 「每日申報」, 1919년 4월 13일.
12 조합교회 타카조 타카하시 목사 외 8인이 무어와 마페트에게 보낸 편지, 1919년 3월 3일.
13 “Koreans Bound to Wooden Crosses”, The Constitution, April 9, 1919.



옥성득 |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하였다. 저서로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 등이 있다. 현재 UCLA 인문대 아시아언어문화학과 한국기독교학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9년 1월호(통권 733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