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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기독교와 한국 전통문화의 화해를 위하여 02
문화·신학·목회 (2019년 11월호)

 

  제사는 무엇으로 완성되는가
  

본문

 

| 제사란 무엇인가
제사를 굳이 설명하거나 해명할 필요는 없지만 간략하게 그 본래적 의미를 추적해본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좀 더 명료하게 해두려는 취지이다. 주지하듯이 제사(祭祀)는 신령이나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바쳐 정성을 나타내는 일 또는 그런 의식을 말한다. ‘제’(祭)는 다른 명사 뒤에 붙어서 의식(儀式)이나 제전(祭典)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조상이 돌아가신 날을 기념하여 망인의 기일에 지내는 제사, 즉 기제사(忌祭祀)만을 제사로 이해하는 것은 협의의 풀이에 속한다. 기제사는 극히 일부분만을 가리킨다. 우리말로 ‘잔치’라 호명하는 대부분이 제사에 해당한다. 제사의 본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광의의 풀이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축제로 통칭되기는 하지만 경축하여 벌이는 큰 잔치를 ‘축전’(祝典)이라 한다. 일본에서 축제를 마쯔리(祭り)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자 그대로 제사라는 뜻이다. 순우리말로 표현하면 ‘잔치’이다. 축하하여 지내는 제사라는 의미, 의식(ritual)의 통칭이다. 영어로 바꾸면 ritual, service, ceremony, rite 등의 용어에 해당한다. 종교적인 의식, 식전, 제사의 의례, 전례, 예배식, 성찬식 등으로 번역되는 용어들이다. 이 또한 통칭하여 제사이다. 관혼상제의 제례도 포함하므로 장례식뿐만 아니라 결혼식도 제사에 속한다.
한자 ‘제’(祭)를 파자(破字)해보면 흥미롭다. 고기 육(肉, 月)+오른손 우(又)+보일 시(示)를 합해 만들어진 이 글자는 오른손으로 고기 음식을 받들어 제사상(示)에 올린다는 뜻이다. 시(示)는 ‘보이다’ 혹은 ‘알리다’의 뜻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본래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던 제단 모양을 본떠 만든 상형문자이다. 한자사전을 찾아보면, 신에게 제사를 지내 길흉을 알 수 있다는 뜻에서 ‘보이다’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고 풀이하고 있다. 구약시대 신의 제단에 양을 바치는 광경을 연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겨울제사는 ‘증’(蒸)이라 하고, 가을제사는 ‘상’(嘗)이라 한다. 천자문에서도 ‘적후사속(嫡後嗣續) 제사증상(祭祀蒸嘗)’이라 했다. 맏아들로 대를 잇고 증제(蒸祭)와 상제(嘗祭)로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다. 적후(嫡後)는 정실부인 곧 본부인의 맏아들, 사속(嗣續)은 대를 잇는 것이니, 맏아들을 중심으로 한 상속과 제사 승계의 시스템을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후처나 첩실의 자식이라면 상속의 권한이 없고, 제사의 권리 또한 없는 셈이다. 『홍길동전』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라는 대사가 떠오른다. 그렇다면 남자 중심, 장손 중심의 제사만 정통성을 인정받는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기제사를 포함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장자 중심의 제사법 체계는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해안, 섬 지역까지 파급되었을 뿐이다. 예컨대 제주도와 진도 등지에서는 근대까지 말자상속이 잔존해 있었다. 내가 태어난 집안도 말자상속 집안이다. 큰아들이 혼인하면 집을 따로 짓고, 재산을 분할하거나 새로 장만하여 분가시킨다. 이를 ‘제금낸다’라고 표현한다. ‘따로 나다’의 경상도, 전라도 지역 방언이다. 이어서 둘째 아들이 혼인하여 분가한다. 이런 과정을 모두 마치면 부모 곁에 남는 자식은 막내이다. 이 막내아들이 제사권과 상속권의 전부 혹은 주요 부분을 갖게 되는 풍습을 ‘말자상속’이라고 한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가장 오래된 상속 형태의 하나로, 성서의 창세기나 그리스 신화 따위에서 볼 수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미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가 견고해진 터라 여성의 제사권이나 상속권을 논하려면 훨씬 이전의 역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함을 말해준다. 하지만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제사법과는 상반된 경우가 있었음을 이들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셈이다.
안동 김이익(1743-1830)이 전라도 진도에 유배되었을 때 쓴 『순칭록』(循稱錄)이라는 책이 있다. 진도 지역의 풍속을 개화하기 위해 집필한 책이다. 박진원(朴晋遠, 1860-1932)이 교정하고 떨어져 나간 곳을 보완하여 1928년 『가정절검』(家庭節儉)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간행한 것이 현재 전해지는 『순칭록』이다. 제례와 관련된 한 부분만 인용해본다.

아! 진실로 이런 폐단의 근본을 헤아려보면 요망한 무당과 교활한 박수가 활과 화살을 만들어 선인을 수천 백 년간 더러운 구덩이로 빠뜨린 짓이 아님이 없다. 이 같은 요망하고 교활한 말은 부녀자가 혹 질병과 우환에 걸렸을 때 믿고 감동하면, 가장이 당연히 냉정하게 꾸짖고 엄하게 배척하여 감히 근접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믿고 스스로 현혹되어 오히려 그들이 감히 신주를 옮기는 여부, 제사의 여부를 관여하게 한다. 그리고 머리를 숙여 그들의 명령을 따르고 신을 핑계로 축수(祝手)하게 하는데, 이런 짓을 한다면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진도의 풍속을 강한 어조로 힐난하며 비판하고 있다. 제사나 질병, 우환에 여성들이 깊이 관여했고, 묘를 이장하는 등 죽은 자의 법도를 세우는 일도 무당이나 여성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바꾸어 말하면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제사 법도가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고정되어 내려온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김이익이 이 글을 남긴 지 불과 200여 년밖에 지나지 않는다.

| 제사의 기본 절차
넋은 사람의 몸에 있으면서 몸을 거느리고 정신을 다스리는 비물질적인 것이라 설명된다. 유교식으로 말하면 혼(魂)과 백(魄)으로 구성된다. 혼은 마음에 해당하고, 백은 형체에 해당한다. 유교적 관념에서는 혼과 백이 결합되어 있는 것을 ‘생명’이라 하며, 혼백이 분리되는 사건을 ‘죽음’이라 한다.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에 오르고 백은 땅으로 스며든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사를 지낼 때 향을 피우는 까닭은 무엇일까? ‘분향강신’(焚香降神)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향을 피우게 되면 자연으로 회귀했던 혼이 내려온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촛불을 켜거나 향을 사르는 것은 제사의 시작에 속한다.
또 모삿그릇을 두어 술을 바치고 땅에 붓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땅으로 회귀한 영령 곧 백(魄)에게 드리는 의례이다. 기제사나 종교적 의례, 혹은 무속의례를 망라하여 기본적인 얼개는 유사해 보인다. 가톨릭의 예배의식을 연상해보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제사를 마치면 어떻게 할까? 지상에 강림한 신은 향이나 연기 등 무형의 것으로 치환된다. 왔던 신에게 자초지종을 고하는 ‘축문’(祝文)을 낭독하고 이를 소지(燒紙)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찬가지로 잔을 땅에 부어 백(魄)을 회귀시킨다. 장례 때 망자의 옷을 태우는 일, 무속의례에서 마지막 절차로 종천(終天)하는 일, 전통적인 마을제의에서 마을 사람들의 소원을 적은 종이를 소지(燒紙)하는 일, 제사 후 헌식하는 행위들이 모두 같은 맥락이다.
우리나라에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지켜온 기제사의 절차를 예로 들어보자. 절차가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대강의 구성은 유사하다. (1) 분향재배(焚香再拜), 향을 피워 두 번 절하고 조상을 모셔온다. 향을 피우는 행위는 제사의 기본 구성 중 하나로, 자연으로 회귀한 조상신을 모셔온다는 의미이다. 신이 내려온다고 해서 ‘강신’(降神)이라고 하며, 산 사람에게는 절을 한 번, 죽은 사람에는 절을 두 번 한다는 뜻에서 재배(再拜)한다. (2) 참신(參神), 초청한 신이 오셨다는 뜻이다. 조상을 상징하는 신주(神主, 밤나무로 만든 위패) 혹은 지방(紙榜, 종이에 쓴 위패) 앞에 나가 참여한 모두가 두 번 절한다. (3) 진찬(進饌), 차린 음식을 확인하는 절차이다. (4) 초헌(初獻), 제사권을 가졌거나 대표되는 이가 나서서 첫 번째 잔을 올린다. 처음 바친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5) 독축(讀祝), 제사를 지내게 된 연유와 대상이 되는 신격에 대한 찬양, 과정의 자초지종 등을 고하여 아뢰는 과정이다. 축문을 읽는다는 뜻이다. (6) 아헌(亞獻), 제사권의 두 번째 서열자가 나와 잔을 올린다. 아(亞)는 두 번째 바친다는 의미다. (7) 종헌(終獻), 서열상 마지막 제사권자가 나와 잔을 따른다. 마지막이기 때문에 종(終)자를 붙인다. (8) 첨작(添酌), 첨부해서 더 올린다는 의미이다. (9) 계반삽시(啓飯揷匙), 밥그릇을 열어 수저를 꼽는다는 뜻으로, 조상신이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한다는 의미이다. (10) 유식(侑食), 첨작(添酌)이라고도 한다. 종헌에서 다 채우지 않은 잔에 술을 가득 채운다. 모두 드시도록 엎드려서 기다린다. 임금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임금에게 음식을 권할 때 쓰는 용어이기도 하다. (11) 합문(闔門), 조상이 음식을 드시도록 기다리는 절차이다. (12) 계문헌다(啓門獻茶), 문을 열고 들어가 차를 올린다는 뜻이다. 조상신이 강림하는 거처는 신분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구성되는데, 가장 일반적인 것은 마루의 한편에 만들어놓은 감실(龕室)이다. 사당 안에 신주를 모셔놓는 공간을 말하며, 가톨릭에서는 성당 안에 성체를 모셔둔 곳을 말한다. 조상신 흠향의 마지막 절차이다. 일반적인 가정에서는 국을 숭늉으로 갈아놓는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조상신이 음식을 다 드셨기 때문에 차를 한 잔 내놓는 식이다. (13) 철시(撤匙), 수저를 내리고 다시 두 번 절한다. 강림한 신이 차린 음식 흠향을 모두 끝냈다는 의미이다. (14) 축문과 지방 소지, 축문(祝文)은 자초지종을 고한 글을 적은 종이이고, 지방(紙榜)은 종이에 조상의 이름이나 상징하는 글을 써놓은 종이, 즉 강림한 조상을 대신하는 상징이다. 이를 태우는 이유는 앞서 말한 바와 같다. (15) 음복(飮福), 마지막으로 제사 음식을 참가자들이 나누어 먹는 행위이다. (16) 철상(撤床), 차린 음식을 모두 치우면 모든 기제사의 절차가 끝난다. 시간을 주기로 삼는 명절제사 또한 기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상의 절차들은 일부가 생략되거나 순서를 약간 바꾸어 진행되기도 한다.

| 진도씻김굿의 ‘이슬털이’에 비추어
제사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은 ‘청신–오신–송신’이다. 청신(請神)은 신을 초청하는 의례에 해당하고, 오신(娛神)은 신을 기쁘게 해드리는 의례이며, 송신(送神)은 신을 보내는 의례에 해당한다. 이 절차는 어떤 종교의 절차든, 어떤 제사의 형식이든 동일하다. 약간씩 달리 나타나거나 다르다고 느끼는 것은 어떤 부분이 생략되거나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하나의 이야기 구성이라고 보면, 서사의 ‘발단-전개-절정-결말’의 구성을 취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사람이 죽어서 행하는 상례를 총체극으로 보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서사 구성을 몇 가지 단계로 분석한 바 있다.(『산자와 죽은자를 위한 축제』, 민속원, 2008) 위에서 살펴본 기제사의 기본 구조는 이 순서가 확장된 것이라 보면 된다.
자세한 사항을 여기에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제사의 수단을 술, 예컨대 기독교의 포도주와 같은 맥락으로 설명해왔고, 그 목적을 음복(飮福)으로 풀이하였다. 모든 제사에서 술을 바치는 것으로 의례의 기본을 삼는 이유가 무엇일까? 심지어 기독교의 성찬식에서도 포도주를 사용하는 이유 말이다.
다음 호에서는 진도씻김굿의 ‘이슬털이’(영혼을 말아둔 ‘돗자리’라는 뜻에서 ‘영돈마리’라 한다)를 설명할 예정인데, 우선 간단한 내용을 추려 소개해둔다. ‘영돈마리’는 통상적으로 망자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으로 이해된다. 설명하자면, 이승에서 깔던 네모 모양의 자리를 거두고 말아서 솥뚜껑 모양(원형)의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이 적용된 개념이다.
또 하나의 현상적 해석은 소주와 관련되어 있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이지만 소주나 고량주는 발효 증류주에 해당된다. 홍주를 비롯한 진도 지역의 소주는 고려시대에 제조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가장 원시적인 방법은 쌀과 누룩으로 빚어서 익힌 술이나 술지게미를 솥에 넣고 그 위에 시루를 놓은 다음 솥뚜껑을 뒤집어 덮는다. 뒤집은 솥뚜껑의 손잡이 밑에는 주발을 놓아둔다. 솥에 불을 땐다. 증발된 알코올의 증기는 솥뚜껑에 미리 부어둔 냉각수로 인해 응축된 다음 솥뚜껑의 경사를 따라 손잡이를 타고 뚝뚝 떨어져 주발에 고이게 된다. 이보다 조금 발전한 것이 고리(古里)라는 증류장치를 만들어 쓰는 경우이다. 지금의 방식은 후자의 것이다. 모두 이슬처럼 방울이 맺히므로, 한 방울씩 받아낸다. 곧 이슬을 털어내는 방식이다.
이슬털이에서 반드시 누룩을 사용하는 이유나 굳이 이슬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가 바로 술 만들기(삭히기, 익히기)와 관련이 있다고 나는 해석해왔다. 씻김굿 의례의 이슬털이를 굳이 표현하자면 사용하는 솥뚜껑은 소줏고리의 뚜껑이며 그 안에 망자의 넋이 발효되는 과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나는 또한 이 분석을 근거로 씻김굿 혹은 제사의 경계넘기 기술을 프랑스의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Levi Strauss)가 말한 ‘변칙 범주’의 맥락으로 해석한 바 있다. 이승에서 저승을 넘기 위한 전이지대, 그 교접점이라는 뜻이다. 이슬털이가 경계를 넘는 방식이라면, 여기에서 술은 경계를 넘기 위해 필요한 장치 혹은 기술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기술을 이용하지 않으면 경계를 넘을 수 없고, 경계를 넘지 않으면 저승에 이를 수 없으므로 조상신의 자격을 획득하지 못하게 된다. 조상이 신이 되는 문화적 장치라는 뜻이다.

| 음복(飮福), 제사가 완성되기 위한 화룡점정(畵龍點睛)
술이 신(조상)의 은유라는 점을 주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음복의 다양한 사례를 들어 이를 설명해보고자 노력해왔다. 진도씻김굿의 제사상에 올랐던 술은 망자가 조상의 단계에 진입했다는 경계의 표식이다. 따라서 제사가 끝난 후 이를 후손들이 나누어 마시는 것은 조상과 합일하는 행위이다. 마치 교회에서 성찬식을 할 때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셔 신성을 획득하는 것, 예수의 피와 살을 먹고 거듭나고 부활하는 이치에 비유할 수 있다.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메타포인 것처럼 제사상의 술과 떡은 자연으로 회귀했던 조상의 피와 살이라는 뜻이다. 진도씻김굿의 이슬털이에서 술을 만드는 것은 망자가 술이 발효되는 과정을 통해서 조상(신)의 단계에 진입할 권위를 획득하는 과정, 변칙 범주의 이행이라 할 수 있다. ‘음복’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를 반영한다. 제사의 마지막, 마치 어떤 연극의 결론처럼 왜 사람들은 복(福)을 음(飮, 마신다)하는 것일까를 상고해보면 답이 보인다. 여기서의 복(福)은 무엇인가? 혹은 누구인가? 조상이다. 성찬식의 포도주가 예수를 표상하는 것과 같이, 조상은 ‘술’로 표상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껏 제사의 목적 혹은 완성을 음복이라고 주장해왔다. 신을 초청하는 행위, 그리고 신과 더불어 오신(娛神), 즉 찬송하고 찬미하는 일도 그 최종 목적은 음복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음복은 발효된 조상을 먹고 마셔 합일되는, 그래서 재생하고 부활하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단순히 피와 살을 나눠먹는 것이 아니라 제사의 대상인 그가 제사의 주체인 각 사람에게 스며들어 비로소 신성한 몸으로 합일되는 것이다.
이론은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들의 유기적 망(網)’이라고 정의된다. 현장이나 현실을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가장 기본적인 물음일 것이다. 나는 진도의 상장례 절차를 통해 죽음에 대한 전통적인 대응방식을 고구해보고자 했다. 좀 더 작게 말하면 진도의 씻김굿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맥락과 상징의 훼손이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점들에 대한 것이었다. 맥락(context)은 ‘사물 따위가 서로 이어져 있는 관계나 연관’이라고 해석된다. 따라서 본디 ‘서로 이어져 있는 것’들이 훼손되었다는, 굿의 종합적 기능이 훼절되었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종합성이나 메타텍스트가 무너졌는가. 그 원인 또한 훼손된 것만큼이나 복합적일 것이다. 시각에 따라 관심사가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학자는 음악의 경직성을 문제 삼고, 민속학자는 굿판 환경의 훼절을 안타까워하며, 국어학자는 사설의 무변개 등을 문제 삼을 것이다. 종교적인 문제로 치환해보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근본주의로 돌아가 이를 해석하면 매우 불경해진다. 진도씻김굿의 의례 중 하나인 이슬털이를 감히 기독교의 성찬식과 비교했으니 이런 신성모독이 없다. 원리주의자들은 노발대발 삿대질하며 달려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 내가 주목한 것은 보편적 원리이다.
재생과 거듭남 혹은 부활에 대한 보편적인 원리는 무엇일까? 진도씻김굿에 함의된 재생과 거듭남의 보편성을 주목한다면 내가 말한 것들이 설령 문학적 휴머니즘으로 치부되거나 해석될지라도 그간 악마화하고 적대시해왔던 한국 전통문화와의 관계를 재고하는 데 일말의 단서는 제공해줄 수 있다. 내가 의례와 제사의 절차들을 재생의 코드로 읽어낸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제사의 제(祭)와 가장 깊은 연관을 갖는 글자는 찰(察)이다. ‘살피다’, ‘자세하다’ 등의 의미로 풀이된다. 문자 그대로 집(宀)에서 제사(祭) 지낸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절차와 방식, 마음가짐을 살피는 일이라고 해석한다. 그럴까? 광의의 제사를 이해하는 입장이라면 이 뜻 또한 광의로 풀이하는 것이 옳다. 집(宀)에서 제사 지낸다 함은 무엇을 살피는 일일까? 찰(察) 곧 살피는 일의 근본은 성찰(省察)이다. 자신의 허물이나 저지른 일들을 반성(反省)하여 살핀다는 뜻이다. 저지른 죄를 자세히 생각해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명절에 고향에 돌아오는 것을 귀성(歸省)이라 한다. 내가 태어난 집(宀)에 돌아와 스스로를 살피는 일, 자신을 이루는 시간의 씨줄과 공간의 날줄을 자세하게 살피는 일이 귀성이다. 그래서 조상의 산소를 찾아 인사를 드리고 살피는 일을 성묘(省墓)라고 한다. 모두 나를 이루고 있는 상하좌우를 살피는(省) 일이다.
성(省)은 깨닫는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전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거듭난다는 뜻이다. 고등종교의 외피를 썼을지라도 인권을 심각하게 유린하거나 민족을 압제하거나, 내가 토대한 땅의 유구한 전통들마저 배제하고 부정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방식이라면, 그것은 이미 내가 말하는 보편성을 떠난 것이다. 나의 경우라면 종교적 성찰은 무엇일까? 지난 호에서 마무리했듯이 평생 사찰에 가셔서 나를 위해 촛불을 켜셨던 어머니와 기독교인인 나의 보편성을 찾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성찰이 아닐까.


이윤선 | 민속예술을 전공하였다. 『남도민속음악의 세계』 등의 저서가 있다. 남도민속학회 회장,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9년 11월호(통권 7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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