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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초기 선교사의 한국어 교사 12 (마지막회)
문화·신학·목회 (2019년 11월호)

 

  충청도의 침례교와 남장로교 선교사를 가르친 오긍선
  

본문

 

전통적인 한학자이자 대한제국 관리인 오인묵의 아들 오긍선은 여느 충청도 양반의 자제들처럼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원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서당 공부에 힘썼다. 그러나 그가 혼인하여 가정을 꾸리고 과거시험을 치르러 나갈 17세 무렵에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없어지고 새로운 방식으로 관원을 뽑게 되었다. 그는 과감하게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한국어 교사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였다.

| 대제학 오도일의 7대손, 영의정 오윤겸의 9대손으로 태어나다
오긍선(吳兢善, 1878-1963)은 충청도 공주군 사곡면 운암리 마곡사 아랫마을에서 우석(愚石) 오인묵(吳仁黙, 1850-1933)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해관(海觀)이고, 자는 이름의 가운데 글자인 긍(兢) 자를 풀어써서 중극(重克)이라 하였다. 1617년에 2차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321명의 임란 포로들을 데려오고 영의정까지 오른 충정공(忠貞公) 오윤겸(吳允謙, 1559-1636)이 그의 9대조이고, 병조판서 대제학을 지낸 오도일(吳道一, 1645-1703)이 7대조이며, 1723년 진사시(進士試)에 장원하여 청주목사를 지낸 오수엽(吳遂燁)이 그의 6대조이다. 그의 집안은 충청도의 대표적인 사대부 집안이었다. 오긍선도 당연히 벼슬을 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공부하였다.
아버지 오인묵도 대한제국 시기에 벼슬을 하였지만, 망우리 해주 오씨 묘역에 조성된 오인묵의 묘비에는 관직이 적혀 있지 않다. 아들 오긍선이 한문으로 지은 비문은 평이한 내용이어서 자손들의 이름과 생졸년도나 알리는 정도인데, 오긍선이 어릴 적에 배운 한문 실력을 가늠해볼 수 있다.
묘역 초입에 ‘감찰 오인묵 적선비’가 세워져 있어 오인묵이 사헌부 감찰(정6품) 벼슬을 했음이 확인된다. 전라도에 3년이나 흉년이 들어서 오인묵이 공주에서 배에다 쌀을 싣고 금강을 따라 내려가 굶주린 사람들을 먹여 살렸으므로 옥구군 개정면 사람들이 감사하며 1926년에 만들었는데, 오인묵 생전에 세우지 못하다가 사후에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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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묵의 전체 재산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가 막내 손자 오진영에게 남긴 유산이 300석지기나 된 것을 보면 천석꾼은 훨씬 넘었으리라 짐작된다. 오진영은 아버지를 회고한 글 “가훈 엄하셨던 나의 아버님”에서 경성제국대학 문과를 졸업하던 날 아침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대학졸업식날 아침, 1934년 3월 25일 아버님을 뫼시고 졸업식에 참석하기로 하였는데, 그날 아침에 사랑으로 나오라는 분부가 계셔서 나갔더니 하시는 말씀이 “오늘 네가 최고학부를 나오게 되었으니 나의 책임은 끝나게 되었다. 내일부터는 네가 독립해서 생계를 꾸려 나가야 한다. 네 명의로 있는 전답 3백지기는 너의 할아버님께서 막내손자의 몫으로 장만해 놓으신 것이니 내가 상관하지 않을 것이고, 너는 내 명의로 있는 부동산에 대하여는 추호의 기대도 가져서는 아니 된다. 내 재산은 사회에 환원할 것이다.1

아버지 오긍선이 재산을 자녀들에게 남기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생각을 자신이 대학을 졸업하던 날에 이미 밝혔다는 뜻으로 오진영이 기록한 것이다. 오인묵의 자녀가 4남매이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인 오긍선의 자녀가 또한 5남매나 되었는데 막내 손자에게 300석지기나 상속한 것을 보면 오인묵의 재산이 최소 2,000석은 넘었던 듯하다.
오인묵의 적선비에 ‘감찰’이라는 벼슬이 적혀 있어서 자손들은 그를 ‘감찰’로 부르지만, 오긍선의 생전 회고담을 바탕으로 편찬한 『해관 오긍선』에서는 “구한말에 從五品(종5품)벼슬인 奉訓郞(봉훈랑)과 繕工監(선공감)감역을 역임하였”2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종실록』에는 그런 기록이 없으며, 『승정원일기』에는 1900년 11월 운산전보사(雲山電報司) 주사(主事)를 시작으로 1902년 8월에 의주, 1903년 1월에 성진, 10월에 삼화로 옮겨다니며 주사(판임관 6등) 벼슬을 한 것만 확인된다. 1900년 11월에 전무학당(電務學堂)이 개설되어 전보 업무를 담당하는 전문가를 양성하기 시작했는데, 오인묵은 전무학당을 거쳐서 신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기존의 관원 신분으로 전보사에 발령받은 듯하다. 오인묵의 벼슬에 관한 기록은 더 이상 없다.

| 서당을 옮기고 스승을 찾아다니며 과거시험 공부를 하다
누이동생 오현관(吳玄觀, 1889-1987)의 회고담에 의하면, 부모님은 8남매를 잃은 뒤에 얻은 아들 오긍선을 금지옥엽으로 키워, “10살부터 이강진(李康津) 서재에 가서 동몽선습(童蒙先習)과 통감(通鑑)을 읽으셨고, 글방에서 여러번 장원(壯元)을 하셨고, 그때마다 어머님께서 너무 기쁘셔서 선생님 대접을 극진히 하셨다.”3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기억에는 뒤섞인 부분이 있다. ‘이강진’(李康津)이란 ‘강진 현감을 지낸 이씨 양반’이라는 뜻인데, 『해관 오긍선』 본문에서는 ‘이당진’(李唐津)이라 하였다. ‘당진’이 공주 가까이에 있어 더 설득력이 있을 뿐더러, 오긍선이 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운 뒤에 서당으로 가서 『논어』, 『맹자』 등 사서(四書)를 배웠다는 기록도 믿을 만하다.4
오현관은 오긍선이 서당에서 지은 한시 한 구절을 소개하였다.

당시 글짓기도 오언칠언구(五言七言句)의 서당에서 장원(壯元)으로 여러번 뽑히셨는데, 운(韻) 다는 것까지 하셨는데 13살에 지은 글로 “五更雪上月 不用一錢金”(오경설상월 불용일전금)이란 오언구가 전한다.5

오긍선이 지은 오언구 ‘五更雪上月 不用一錢金’(오경 눈 위의 달빛은 한 푼의 돈도 필요가 없네)는 ‘새벽 달빛은 세상 모든 사람의 공유물이어서 돈 주고 살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재산을 자신만의 소유로 생각하지 않고 사회에 환원한 오긍선의 인생관이 어릴 적부터 싹텄음을 보여준다.
오긍선은 14세에 고향 사람 박현진(朴玄眞)과 결혼한 뒤 공주 읍내 검상동 이후(李, 1828-?) 승지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과거시험 공부를 하였다. 이후는 1858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886년 문과에 급제하여 돈녕부 도정(정3품), 호조참의를 거쳐 1891년 12월 10일 승지(정3품)에 낙점되었다. 승지로 몇 달 근무하다가 다른 벼슬도 역임했지만, 고향에서는 여전히 ‘이 승지’로 불리었다.
이후는 학자로 꼽히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진사와 문과에 급제하고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친 관원이었기에 그는 공주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과거시험 교사였다. 그러나 그가 공주에 내려온 이유가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므로, 갑오개혁이 시작되면서 전통적인 관원 선발 제도였던 과거시험이 폐지되고, 새로운 학문을 배운 청년들이 관직에 오를 기회가 많아졌다.
서당이나 서원에서 한학(漢學)을 하던 청년들 가운데 상당수는 관직과 관계없이 계속 한문이나 유학(儒學)을 공부하였지만, 일부는 배재학당을 비롯하여 신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에 입학하였다. 오긍선도 한학자가 되는 것이 서당 공부의 목표가 아니었기에, 새로운 문물을 배우러 서울로 올라왔다.

| 스테드만의 집에 피신했다가 한국어 교사가 되다
『해관 오긍선』에는 “과거시험의 등용문이 폐지된 것을 안 해관은 1896년 초순 18세 소년으로 상경하자 그의 스승인 이후(李)의 추천으로 내부(內部)의 주사(主事)로 등용되어 관직을 맡기도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이와 관련된 기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경력도 없는 18세 청년이 중앙 관아의 판임관 6등 주사 벼슬에 추천되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어쨌든 1896년에 서울에 올라온 오긍선은 영어를 배워서 새로운 정부의 관원으로 등용될 수 있는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마침 배재학당에서는 그해에 자조부(自助部)에 인쇄소와 제본소를 설치하여 가난한 고학생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했으므로, 부잣집 외아들 오긍선도 고학생이 되어 일하며 공부하였다.
1898년에 학생자치회인 협성회에서 학생 전원이 단발하기로 결정하자, 오긍선도 이때 동곳이 달린 상투를 잘라 고향 부모에게 소포로 보내면서 배재학당에 입학한 사실과 상투를 잘라야 했던 사연을 편지로 써서 보냈다.6 「협성회회보」가 창간되자 그는 이승만・주시경 등과 함께 창간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시사 정책을 주제로 정한 토론에도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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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8월 이후 독립협회가 대중계몽을 위한 토론회를 열면서 문호를 개방하자 오긍선도 독립협회에 가입하였고, 학생 간사로 선임되었다. 1898년 11월에 만민공동회가 올린 개혁안 ‘헌의 6조’를 고종이 받아들이기로 했으나, 수구파 관료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윤치호 대통령설을 빌미로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체포되고 독립협회에 해산 명령이 내려졌다. 독립협회 회원들의 연이은 시위와 상소로 독립협회가 부활되고 중추원에도 의관을 파견하게 되었으나, 독립협회 파견 의관들이 갑신정변의 주동자인 박영효를 의장에 임명해달라고 요구하자 1899년 초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관련자들에게 체포령이 내려졌다.
학생 간사이던 오긍선은 정동 배재학당 뒤쪽 서대문 근방에 살던 침례교 선교사 스테드만(Fredrick W. Steadman)의 집에 피신하여 화를 면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그는 한국어 교사를 구하고 있던 스테드만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개인교사가 되었다.7 이승만에 이어 영어를 잘하는 배재학당 학생으로는 두 번째 한국어 교사가 되었으며, 화이팅이 이승만을 피신시켰던 것처럼 스테드만도 오긍선을 피신시켰다.
스테드만은 보스톤의 클라렌돈교회가 설립한 엘라딩기념선교회에서 파견한 선교사이다. 엘라딩기념선교회는 한성부 서부 인달방 고간동(지금의 내자동 201번지)에 본부를 설치하고 활동하였는데, 이미 장로교나 감리교가 선교활동을 성공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데다 침례(浸禮)를 원칙으로 하는 선교방법 때문에 세례교인이 늘어나지 않자 1895년 가을에 남장로교의 양해를 얻어 충청도를 선교지역으로 정하였다.
스테드만은 남감리교 선교사 캠벨이 1898년 8월 1일에 엘라딩기념선교회의 선교부지를 매입하여 배화학당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공주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남장로교 선교사 해리슨은 1897년 5월 3일에 전주로 내려가다가 5월 6일 공주를 방문하여 그곳에서 한참 주택을 고치고 있던 스테드만을 만났다고 한다.8 『해관 오긍선』의 기록과 달리, 스테드만은 1899년 초에 공주에 와 있었을 것이다.
오긍선과 스테드만의 관계는 『해관 오긍선』의 기억보다 송현강 교수(한남대학교)의 논문이 더 설득력이 있다. 고종이 1898년 12월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면서 관련자들의 체포가 시작되자 오긍선은 낙향했다가, 고향집에서도 불안했는지 다시 공주스테이션 안에 있는 스테드만의 집으로 피신해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는 거기서 스테드만의 한국어 교사로 인연을 맺었고, 그해 상경하여 이듬해 봄 학업을 마친 후 다시 강경으로 내려와 스테드만의 조사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9
오긍선은 1901년 4월 스테드만이 한국을 떠날 때까지 그를 도왔고, 그 이후에는 군산의 남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불의 한국어 교사로 활동하였다. 호남에서 활동한 남장로교 선교사 조지 톰슨 브라운은 “그 해(1900년)에 또한 버지니아주 노포크에서 온 윌리엄 불(William F. Bull) 목사가 군산선교부에 와서 그 후 40년간 일을 분담했다. 음악과 체육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그는 한국말도 능란했고, 전도 설교도 유창했다.”10라고 평가했는데, 그가 한국어로 유창하게 설교할 수 있도록 가르친 교사가 바로 오긍선이다. 한문 공부도 제대로 한 데다가 영어도 잘했기에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이다.

| 알렉산더의 후원으로 미국에 유학하여 의료 선교사로 귀국하다
“1902년 가을 켄터키주의 알렉산더 박사가 드루 박사의 귀국으로 중단된 일을 계속하기 위해 군산에 도착했다. 그러나 알렉산더 박사가 미국에서 오는 동안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알렉산더 박사는 장자로서 많은 재산을 정리하는 문제 때문에 선교사역을 그만둘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군산에 있을 때 알렉산더 박사는 총명한 청년 오긍선을 알게 되었는데, 당시 그는 불 선교사의 어학선생이었다. 알렉산더 박사가 그를 좋게 생각해서 미국으로 데려가 의과대학을 다니도록 재정 후원을 하였다.”11
오긍선이 그의 후원자였던 알렉산더(Alexander John Aitcheson Alexander, 1875-1929)에게 보낸 편지들은 켄터키주의 주도(州都) 프랭크포트에 있는 켄터키역사협회(Kentucky Historical Society)에 보존되어 있다. 오긍선이 보낸 편지는 총 172통이며, 이 중 135통은 유학 시절 알렉산더에게, 1통은 알렉산더의 어머니에게, 나머지 36통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군산과 서울 등에서 알렉산더에게 보낸 편지이다.12
오긍선은 배재학당에서 높은 수준의 영어를 배웠기에 알렉산더에게 정기적으로 영어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그는 학업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소식도 전했는데, 1906년 6월 17일에 보낸 편지에서는 한국어를 배운 미국인 선교사가 한국어로 말을 걸었는데, 정작 한국 사람인 자신은 혀가 뻣뻣해져 한국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영어로 대화를 나눈 체험을 아래와 같이 소개하였다.

미스 스트레퍼(Straeffer)가 루이빌을 방문해서 만났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제게 한국말을 건넸는데 저는 영어로 답했습니다. 그래서 웃었고 우리는 영어로 대화를 나눴습니다. 모국어로 말하려고 할 때 제 혀가 뻣뻣해져 있어 놀랐습니다.13

알렉산더는 오긍선에게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1년간 미국에 더 체류하며 병원 경험을 쌓은 다음 한국에 돌아가라고 조언했고, 오긍선 본인도 켄터키주 렉싱턴에 있는 병원과 펜실베이니아주 맥키스포트 등의 병원에 원서를 제출하기도 했지만, 아버지와 아내 등 군산에 있던 가족이 귀국을 원하고 있다는 이유로 졸업과 동시에 고향으로 돌아왔다.14
오긍선은 한국 국적으로는 최초의 의학박사이자 남장로교 선교사로 귀국했는데, 누이동생 오현관은 오긍선이 군산 선교부로 내려가던 모습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1907년 귀국 후 통감(統監)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의 불음을 받았으나 “나는 남의 은혜를 받아 공부한 사람이다. 그것을 갚아야 한다.” 하시며 대한의원(大韓醫院, 당시 일본인이 경영)의 100원(圓) 월급(月給)도 마다 하시며 선교사가 경영하는 군산야소병원(群山耶蘇病院)에 그 반(半)인 50원 봉급을 받으며 봉사(奉仕)하셨다.15

| 광복 후 대한성서공회에서 새 맞춤법으로 성경전서를 출판케 하다
오긍선은 군산에서 의료선교를 하면서 알렉산더를 기념하여 안락학교(安樂學校)를 세웠으며, 영명학교와 구암교회에 관여하였다. 오인묵이 1910년에 장로로 장립되면서 구암교회는 조직교회가 되었다. 1910년에 그는 광주야소교병원 원장으로 부임하고, 광주애양원에서 나병환자 치료에도 참여하였다. 1911년에는 목포야소교병원 원장으로 취임하여, 정명중학교 교장직도 겸임하였다. 20세기 초 호남 의료선교의 기틀을 한국인 오긍선이 잡아준 것이다. 1912년 5월에는 에비슨의 초청을 받아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파견하는 교수 자격으로 한국인 최초의 세브란스연합의학교 교수가 되었다. 선교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다가, 자신이 선교사 신분으로 귀국하여 봉사한 것이다.
또한 그는 1917년 정규 전문학교로 승격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에 피부과를 신설하고 주임교수가 된 이래 경성보육원, 경성양로원 등을 설립하여 사회사업에 힘쓰는 한편, 한국인 최초의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교장이 되어 세브란스병원을 한국 최고의 병원으로 발전시켰다.
1945년 광복 이후에 민정장관을 비롯한 여러 관직을 권유받았지만 모두 사양하고 사회사업과 기독교 문서사업에 힘썼는데, 대한기독교서회 총무로 오래 근무한 김춘배는 성서번역 철자법의 혼란기를 이렇게 회상하였다.

해방후 바로 구성된 [대한성서공회] 이사회는 그 혼란기에도 성서출판에 있어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데 첫째로 논의된 것이 한글 철자법 문제이었다.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아 인쇄하는 성서는 종래에 쓰던 철자법을 버리고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새로운 철자법을 채용하자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선교사들은 별로 말을 하지 않고 나이가 많은 늙은 축에서는 우리 정부가 새 철자법을 인정하고 채용을 결정하는 것을 기다려서 거기에 따르자는 의견이었다. 그때에 나이가 제일 젊은 내가 새 철자법을 강력히 주장하고, 나이가 많은 이사 중에서는 해관선생이 나의 주장에 동조하여 우리 성서가 일찍이 조선어학회에서 제정한 철자법을 채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로를 밟아 우리 말 성경전서가 새 철자법으로 새로 나와서 그 출판기념식을 할 때 조선어학회에서 새 철자법 제정의 주역의 일인(一人)이요 당시 문교부 편수국장이던 최현배가 참석하여 축사할 때 몹시 기뻐하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된다.16

김춘배는 “새로운 것을 맞기에 주저함이 없고 젊은이의 주장에 호응하기에 인색하지 않았던 선생의 아량”을 칭찬하기 위해 이 글을 썼는데, 오긍선의 주장은 이승만의 방향과 전혀 다르다. 배재학당에 오긍선보다 2년 먼저 입학하여 선교사 화이팅의 한국어 교사가 되었던 이승만은 망명 30여 년만에 귀국하여 대통력직을 수행하다가 현행 한글맞춤법이 불편하니 “신구약(新舊約)과 기타 국문서에 쓰던 방식을 따라 석 달 안에 교정해서 써야 할 것”이라고 1954년 3월 27일 대통령 담화문을 발표하여 한글 파동을 일으켰다. 자신의 편리를 위해 옛 맞춤법을 고수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를 위해 그들에게 맞는 맞춤법으로 성서를 번역해야 다음 세대에도 계속 읽힐 수 있다는 오긍선의 생각은 지금까지도 기독교 문서선교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연재를 마무리한다. 경남 지방의 호주 선교사, 호남 지방의 남장로교 선교사, 평양의 장로교 선교사들을 가르친 한국어 교사들의 자료가 남아 있지만, 한 회에 한 명씩 소개하기에는 이야깃거리가 다소 부족하다. 이들에 대해서는 추후 단행본 집필 과정에서 보완하기로 하고, 아쉬운 마음을 안고 연재를 매듭짓기로 한다.

* 이숙 교수님의 ‘초기 선교사의 한국어 교사’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좋은 글 보내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부


1 해관오긍선선생기념사업회 편, 『해관 오긍선』(연세대학교출판부, 1977), 199.
2 해관오긍선선생기념사업회 편, 위의 책, 6.
3 오현관, “오라버니 해관의 추억”, 위의 책, 298.
4 해관오긍선선생기념사업회 편, 위의 책, 13.
5 해관오긍선선생기념사업회 편, 위의 책, 300.
6 해관오긍선선생기념사업회 편, 위의 책, 19-20.
7 해관오긍선선생기념사업회 편, 위의 책, 26-27.
8 송현강, “강경침례교회 초기 역사(1896-1945)”, 「한국기독교와 역사」 42호(2015): 15-19.
9 송현강, 위의 글, 21.
10 조지 톰슨 브라운, 천사무엘·김균태·오승재 옮김, 『한국 선교 이야기』(동연, 2010), 73.
11 조지 톰슨 브라운, 위의 책, 74-75.
12 한미경・이혜은, “‘My Dear Dr. Alexander’: 편지를 통해 본 오긍선의 미국 유학시절(1903-1907)”, 「신학논단」 97집(2019): 252-253.
13 한미경・이혜은, 위의 글, 272.
14 한미경・이혜은, 위의 글, 271.
15 해관오긍선선생기념사업회 편, 위의 책, 302-303.
16 김춘배, “기독교 출판문화와 해관선생”, 『해관 오긍선』, 189-190.



이 숙 | 연세대학교를 졸업하였고, 하버드대학교 언어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한국어학당 강사와 하버드대 동아시아학과 전임강사로 일했다. 저서로 『한국어 이해교육론』(공저), Practical Korean(공저) 등이 있다. 현재 전주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9년 11월호(통권 7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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