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기독교와 한국 전통문화의 화해를 위하여 01
문화·신학·목회 (2019년 10월호)

 

  기독교인이 된 무당
  

본문

 

| 시작의 변
가지가지는 슬픔이요 굽이굽이는 눈물인디 / 첩첩산중 고드름은 봄바람이라 십오일 날 해방이 올 줄을 누가 알까 / 하늘에는 서기가 돌고 문전 문전에 태극기라 / 대한민국 만세소리 삼천만 동포가 춤을 춘다 / 해당화야 해당화야 명사십리 해당화야 니 꽃 진다고 설워마라 / 니 꽃은 졌다가도 춘하추동 사시절이 오면 / 백세 같은 금잔대기 파릿파릿 속잎 나고 꽃도 피고도 잎도 난디 / 우리 인생은 한 번 가면 두 번 다시는 못 오는디 / 얼씨구나 좀도 좋다 지화자자가 좋네~

고상하고 수려한 시인가? 아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아온 무명씨들이 지어서 부른 노래이다. 다시마섬(가명)의 시마 어머니(가명)가 지어서 부른, 어떤 이름난 시인이 쓴 시보다 절절하고 속 깊은 노래이다. 해방이 좋아서 지어 불렀다 한다. 내가 지방 일간지에 다년간 연재하고 있는 코너에서 소개한 분이다.
왜 그녀가 지어 부른 노래로 연재를 시작하려 하는가. 전남 신안군에서는 토속 민요를 빌려 사도신경을 노래하거나 찬송을 대신한 사례들이 있다. 어디 신안군뿐이겠는가. 북과 장구를 치며 예배드리는 모습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하지만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꽹과리 소리만 들려도 무당 푸닥거리인양 가슴을 졸이고 배타시한다. 왜일까? 두렵기 때문 아닐까? 개신교가 전래된 지 13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꽹과리와 징소리의 파장만 접하면 고개를 돌려버리는 이들이 많다. 겉으로는 신앙심이 강하다고 주장하지만 속으로는 매우 약하다는 뜻이리라. 외부에서 약간의 충격만 주어도 금방 부서져버릴 듯 벼랑 위에 서 있는 위태로움 말이다. 그래서다.
나는 몇 번의 연재를 통해 기독교와 한국 전통문화의 화해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에게는 불편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이 화해의 제기를 통해 오히려 본질적 신앙심을 더 강하게 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논쟁을 환영하는 이유다.
첫 번째 글은 목포대학교 나승만 교수가 현지답사하고 채록한 다시마섬의 당골 구술담을 토대로 작성한다. ‘무당’ 혹은 ‘샤먼’을 남도에서는 ‘당골’이라 통칭한다. 당골은 ‘당골판’이라는 향촌 사회의 공동체를 소유해왔다. 당골들끼리 이 판을 사고팔 수 있기 때문에 소유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 줄거리는 나의 칼럼 ‘이윤선의 남도인문학’에서 소개했던 내용이다. 나 교수가 그녀의 생애담을 담은 단행본을 준비 중이기 때문에 스토리는 그의 글에서 보완되고 수정될 것으로 본다. 이 자리를 빌려 구술 당사자와 나승만 교수께 감사드린다. 구술자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실명이나 기타 주변부의 상황은 여기 공개하지 않는다.
무당이 되었다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해서 신앙심 깊은 종교인으로 변화하기까지 하고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여기 다 풀어놓기 어렵다. 아마 몇 편의 소설로도 부족할 것이다. 반대로 기독교인이었다가 무당이 되거나 타 종교로 개종한 이들도 있다. 왜 이런 넘나듦이 가능할까.
그간 기독교가 한국 전통문화, 특히 한국 무속을 사탄 보듯 대했던 이면이 궁금해진다. 배타와 격리 혹은 변별이나 차별을 통해 기독교의 존재를 주장하고 강화해왔던 속내를 톺아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수준 낮음과 촌스러움으로 대변되는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근대정신으로 대변되는 개신교는 정녕 한국의 전통문화와 화해할 수 없는가? 이 연재가 끝날 때까지 내가 한국 기독교계를 향해 던질 질문이다.

| 죽어가는 아들 앞에서 드린 무당의 기도
어떤 소도시 신학교에 다니던 둘째 아들이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목사가 된다고 학교 다니기 시작한 지 1년인가 2년인가 되던 해였다.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 다시마섬 뒷산에 기도처를 마련해놓고 기도하던 아들이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내려온 이유부터 수상했다. 어머니에게 연락이 닿아 달려가보니 눈알이 뒤집히고 게거품을 뿜어냈다. 가루 농약을 물에 타 한입에 털어 넣었다고 했다. 죽으려면 곱게 죽지 이런 황당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뭣이고 예수는 또 뭣이당가?” 어머니는 죽어가는 아들을 앞에 두고도 불끈불끈 부아가 치밀었다. 굿을 하는 어미더러 예수를 믿으라는 것 아닌가. 눈 흰 창이 돌고 사지를 비트는 것을 보니 끝났다 싶었다. 그래도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리어카에 싣고 인근 소읍에 있는 병원으로 달렸다. 연육교가 출렁였든가 파도가 출렁였든가 달리는 내내 땅들이 일어서고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둘째 아들은 사지를 비틀며 보리뜨물 같은 것을 연신 뿜어냈다. 사지는 뻣뻣해지고 눈조차 뜨지 못했다. 어머니는 혼잣말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분명히 하나님이 있어서 당신의 종으로 맹글라믄, 이렇게 연단을 받고 훈련을 받었응께 살려만 주시쇼. 내가 자석이 살어서 주의 종으로 나간다믄, 나도 굿 완전히 치어뿔고 당신 앞으로 갈랍니다.”
되뇌던 자신을 들여다보고 흠칫 놀랐다. 이것이 주문인가 기도인가? 그렇구나. 어머니는 죽어가는 아들 앞에서 기도를 올린 것이다. “죄는 내 죈디 당신 종으로 쓸라면 살려주셔야 안 쓰겄소?”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면 어쩌고 칠성님에게 비는 소리면 어쩌리오. 어머니의 기도가 통했는지 아들의 뻗은 삭신이 풀어지는 듯했다. 링거를 꼽고 시간이 지나니 피부색이 돌아왔다. 다행히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녹두 풀어 죽 쑤고 인근 오일장에서 명태 사다 폭폭 고아서 먹였다. 아들은 여러 날 후에야 비로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 열일곱에 시집 와서 묏등(산소) 잔디에서 만든 아이들
둘째 아들 시마(가명)의 어머니가 다시마섬으로 시집온 것은 열일곱 살 때였다. 1940년 일본의 침략전쟁이 막바지를 달리던 무렵, 온 나라가 뒤숭숭하고 민심 또한 흉흉했다. 친정에서는 손 하나 까닥 하지 않아 베틀일도 해보지 못했다. 시집 와서야 남편에게 베 짜는 일을 배웠다. 노래 부르며 베틀질 하다가 시아버지며 남편과 베틀을 사이에 두고 잠을 잤다. 구십이 가까운 할머니와 한방을 썼다. 신혼이라고 하지만 남편을 만져볼 수도 없었다. 방 한 칸의 생활이니 원망할 수도 없었다.
하루는 남편이 손을 잡아끌었다. 궁여지책으로 뒷산 묏등(산소)으로 갔다. 주검들이 수도 없이 묻혀 있는 그곳 잔디에서 신혼 잠자리를 했다. 바스락거리는 풀들이 등을 찔러댔다. 바람이 잔솔들을 스칠 때마다 누가 보는 것 같았다. 놀란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면 무심한 부엉이들만 부엉부엉 울어댔다. 어떤 날의 하늘에는 어찌나 별이 많던지, 남편을 받아들이던 그 자리, 자미원의 별들이 어머니 품으로 무리지어 쏟아져 들어오곤 했다. 그렇게 해서 아이 셋을 낳았다.
하지만 먼저 낳은 아이가 죽고 말았다. 먹을 것이 없어 배곯고 한시도 쉬지 않고 노동일을 해서였을까? 죽은 아이를 가슴에 묻었다. 남편과 잠자리하던 묏등의 잔디로 쏟아지던 그 무수한 별 밭 속에 묻었다. 아이는 북두칠성을 운회하는 칠성의 나라로 갔으리라. 남편이 징용 갔다가(한국전쟁 참여를 구술자는 이렇게 표현함) 돌아왔다.
머잖아 동네에 도깨비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났다. 길 건너 안산 방죽에 밤마다 헛것이 나와 목욕을 한다는 것이었다. 동지섣달 어느 밤이었다. 사람들이 방죽으로 모여들었다. 도깨비를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방죽에 돌을 던지면 얼음장 속의 시커먼 물체가 물속에 들어갔다가 조금 있으면 나타나곤 했다. 그런 날들이 연속되었다.
뒤로 알고 보니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그 도깨비가 다름 아닌 시마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견딜 수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살아온 얘기를 어찌 다 할 수 있을 것인가. 남편은 군대에 가버리고 홀로 살림을 맡았다. 먹을 것이 부족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래도 역부족이었다. 아이들을 제대로 먹일 수조차 없었다.
혼자 미쳐가기 시작했다.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밤마다 길 건너 안산 방죽으로 올라가서 목욕을 했다. 천불이 나서 몸을 가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차디찬 얼음물 속에 들어가 몸을 씻도록 강요했을까? 무엇이 시마의 어머니를 불덩이 같은 것으로 칭칭 휘감아 몽유병 환자처럼 동네를 돌아다니게 했을까.

| 스물아홉에 귀신 들고 무당 되었다가 아들 따라 나간 교회
귀신이 들었다. 그것도 친정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죽은 아이가 들었다. 그녀의 나이 스물아홉, 넘기지 못할 것 같은 인생의 고비였을지도 모른다. 무당 일을 시작했다. 누구에게 사들인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당골판이 형성되었다. 굿을 잘한다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다시마섬이며 인근 소읍도시 등 남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굿을 했다. 영험하다고 했다. 병원에 가서 고칠 병들을 굿을 해서 고쳤다. 돈도 많이 벌었다. 그간의 빚도 차근차근 갚아나가기 시작했다. 남편이 마흔 여덟에 죽었지만, 어쨌든 가세가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굿해서 번 돈으로 아들 신학교를 보냈다. 작은 아들이 자살 기도에서 살아나 복학을 했기 때문이었다. 복학하고 나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모 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되었다. 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번은 어머니가 제주도로 굿을 하러 갔다. 한 달 가량, 큰 판이었다. 어느 날 밤이던가, 상여 나가는 꿈을 꾸고 벌떡 일어났다. 상여가 삼층인데 만사(輓詞)가 수십 백 척이 뜨고 수천 명이 몰려들어 상여소리를 하는 꿈이었다. 고향이었다. 굿을 하다 말고 고향 다시마섬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목사가 된 아들이 와 있었다. 부흥회를 하는데 마치 꿈속의 상여처럼 사람들이 몰려든 모양이다. 아들은 다짜고짜 교회 나가자고 했다. 밥 먹던 상판을 엎어버렸다. 어머니가 굿을 하지 않았으면 어찌 목사가 되었을까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었다. 그렇게 갈등의 세월이 흘렀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아들이 목회하는 교회에 나갔다. 부흥회를 하고 있었다. 통성으로 울면서 기도했다. “죽어도 좋고 살어도 존께 아조 처분해서 당신 맘대로 하시쇼.” 목숨을 걸고 드린 기도였다. 성령이었을까? 몸을 오랏줄로 칭칭 동여맨 듯 꼼짝할 수 없었다. 굿 하던 풍경이며 교회의 풍경들이 뒤섞여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친정아버지가 꿈결처럼 와서 말했다. “삼십살도 못 되얐을 니 명(생명) 잇을라고(이을라고) 인간적선을 해서 밍(생명)을 얻었응께 고생 많았다. 인자는 하나님 앞에 옳은 질로(길로) 갔응께 거그서도 인간적선 많이 해라.” 하며 천도복숭아 세 개를 던져주었다. 천도복숭아라니.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내가 가기는 간다마는 니 눈깔은 빼갖고 갈란다. 대신에 세 가지 기술을 주고 가마.” 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워매 워매 내 눈깔” 하며 소리를 지르다 기도인지 꿈결인지 모를 잠에서 깨어났다. 그 후로 시마 어머니는 체 내리는 기술, 민간 침 놓는 기술, 뼈 맞추는 기술을 얻게 되어 또 한 번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 그간의 신당을 폐하고 삼년 반 동안 새벽기도를 했다. 백일기도를 쉬지 않고 열 번을 한 셈이다.
시마 어머니는 열일곱에 시집 와서 스물아홉에 신이 들렸다. 신을 받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나이 불혹이 되어 무당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업을 해서 번 돈으로 아들 신학교를 보냈다. 아들은 자살을 기도하면서까지 어머니의 무업에 대해 항의하였다. 다행히 장성해서 목사가 되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녀도 이후 기독교인이 되었다. 개종하면서 얻은 꿈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다. 꿈속의 세 개 천도복숭아는 무업의 신격(神格) 친정아버지가 주신 것이다. 눈을 빼앗아가고 세 가지의 기술을 다시 주셨다고 했다. 그 세 가지의 기술로 많은 사람들을 고치는 영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 지어서 부른 민요 찬송가를 보는 눈
하나님이~ 사람을 빚을 적에~ 별로 구별이~ 없었건만~ / 이녀린 신세는 무산 일이~ 신세던고~ / 날고새면은~ 지게갈~ 길~ 짊어지고~ 심산~골~ 부엌이~ 왠 말이요~ / 여그봐라 친구들아~ 너는 저 골을 비고 나는 이 골을 비어다가~ / 부러진 참목 부러진 낙엽을 끗고 어메고~ 어인 끝에로~ / 흰끝에로 뭉쳐다가~ 집의~ 처자식을~ 걱정끈게~ 허여 볼라네~ / 어~ 하이~ 요 갈거나 누가 누구 웃나~

하나님을 울아버지로 부르는자는 좋은 일이 있으리라 많이 있으리라 / 우리 서루 손잡고 사랑하면은 좋은 일이 있으리라 크게 있으리라 / 예수님에 구주로 부르는자는 좋은 일이 있으리라 많이 있으리라 / 우리 서루 즐겁게 사랑하면은 좋은 일이 있으리라 크게 있으리라 / 성령님에 인도로 부르는자는 좋은 일이 있으리라 크게 있으리라


신안군 몇 섬의 창작민요 사례를 소개해본다. 첫 번째 곡은 <하나님이 사람을 빚을 적에>이고, 두 번째 곡은 <하나님을 부르는 자는>이다. 모두 무명의 마을사람들이 지어 부른 노래이다. <아버지로 부르는 자는>, <사도신경>, <주기도문>, <예수님이 좋은 것은> 등 성서나 찬송가의 내용을 민요가락에 넣어 부르는 예가 다수 보고된다. 아쉽게도 시마 어머니가 지어 부른 노래 중 찬송가에 해당하는 구절을 얻지는 못했다. 다만 즉흥적으로 찬송가를 지어 부르실 수 있는 분이니 맥락은 유사하다.
흔히 민요꾼이라고 호명하는 이들은 전문가적 소양이 다분하다.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을 민요풍으로 부르는 사례는, 내가 확인한 바로는 신안군에서 신의도가 유일하다. 이외에 <예수님이 좋은 것은> 등의 찬송가를 민요로 부르는 사례도 발견된다. 제보자 장순단은 이들 찬송가가 민요로 되는 것(민요가락에 넣어 부를 수 있는 곡)도 있고 되지 않는 것(민요가락에 넣어 부르기 어려운 곡)도 있다고 한다. 찬송가를 민요로 재창조해 부르는 것과 유사하게, 유행가를 크게 구분하지 않고 민요의 큰 범주에 넣어 향유한다. 사실상 주민들에게 남도육자배기 등의 전통적인 민요나 유행가 등의 가요, 혹은 찬송가까지도 민요풍에 넣어 부르는 개변이 큰 무리 없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또한 전통 민요만이 아니라, 찬송가민요 및 가요들과 구분 없이 향유하고 있다. 주목할 부분이다.
이쯤에서 북장구를 무당의 푸닥거리 도구로만 인식하는 이들이 떠오른다. 이들이 위의 사례를 접하게 되면 어떤 생각이 일어날까. 민요니까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북장구 치지 않으니 맥락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 질문의 향방은 여기에 있다.
시마 어머니의 구술담을 풀어쓰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이 있다. 이 경우와는 반대로 기독교인이었다가 무업에 종사하는 사례까지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논리적 정당성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구술은 각종 에피소드를 담고 있고 현몽의 경험들을 이야기한다. 귀신 이야기며 도깨비 이야기, 성령 이야기들이 혼재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시마 어머니는 아들을 신학교 보내기 위해 굿을 했다고 말한다. 이 관계들을 어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할까?
잘 모르겠으면 과거의 사례를 들어 나를 비추어볼 필요가 있다. 유사한 사례에 지금의 내 처지를 대입해보면 답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무당이었던 시마 어머니, 그리고 민요조로 지어 부른 찬송가가 그 한 대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시마 어머니가 열일곱에 시집와서 한방살이를 하던 신혼기를 떠올린다. 하는 수 없이 안산 묏등에서 풀잎 소리 들으며 아이들 만들던 그때를 말이다. 시마 어머니 가슴으로 쏟아지던 칠성의 별들이 지금도 쏟아지고 있을까?
불현듯 어머니가 떠오른다.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어머니는 마흔에 낳은 나를 위해 매 절기마다 절에 가서 촛불을 켜셨다. 불교 신자인 어머니에게 북장구치는 모습이야 익숙한 풍경이다. 기독교인인 내게도 울리는 꽹과리와 징소리가 익숙한 풍경일 뿐이다. 어머니와 나 사이에 구분 지어야 하는 그 무엇들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일까. 하지만 내 어머니는 시마 어머니처럼 기독교로 개종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불교도였던 어머니는 내게 어떤 의미일까? 어머니를 감싸고 있는 전통이라는 이름과 근대라는 이름의 기독교는 상호 어떤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가? 나는 이 갈급한 질문을 도대체 누구를 향하여 해야만 한단 말인가.


이윤선 | 민속예술을 전공하였다. 『남도민속음악의 세계』 등의 저서가 있다. 남도민속학회 회장,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9년 10월호(통권 730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