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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문익환 목사 헌정음반 <뜨거운 마음>을 기록하다 05
문화·신학·목회 (2019년 10월호)

 

  벼락 같은 위무, <우리는 호수랍니다>
  

본문

 

| 음악의 시간
그림 그리는 이가 붓을 들어 무엇인가를 그리기 전까지의 화폭은 ‘평면의 여백’에 불과하다. 텅 비어 있다. 머릿속에 이미 시뮬레이션 된 이미지를 조형하기 위해 조각가가 거머쥔 끌, 망치, 연마기 따위가 닿기 전까지의 흙, 돌, 나무, 쇠붙이 역시 평면의 여백에 불과하다. 텅 비어 있다.
그 평면의 여백이 작곡가에게는 ‘시간’이다. 작곡가가 개입하기 전까지의 시간은 텅 비어 있다. 표정도, 굴곡도, 윤곽도, 시작과 끝도 없이 그저 하나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입체적인 ‘음악의 시간’으로 바꾸기 위해 작곡가는 여러 가지의 전술을 구사한다. 도막·반복·대비가 그것이다.

1) 도막–음악의 시간은 ‘도막’으로 존재한다. 매듭과 윤곽이 있는 도막의 형태로 시간을 가공해서 사용한다. 비근한 예로 군인들이 행군하는 모습을 들 수 있다.

하나 둘 셋 넷 | 둘 둘 셋 넷 | 셋 둘 셋 넷 | 넷 둘 셋 넷
□ - □ - | □□□ - | □ - □ - | □□□ -


이것을 구령(口令)이라고 하는데, 아래 줄은 구령을 큰북으로 칠 때의 기보이다. 구령은 음악이 시간을 도막으로 가공하여 사용하는 가장 초보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위 구령은 4박자의 주기성(週期性)을 갖춘 네 개의 도막이다. 위의 예시는 4개의 작은 도막으로 끝나지만, 실제 음악은 훨씬 많은 도막으로 이루어진다.
음악에는 수많은 도막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나란히 병렬하는 법이 없다. 작은 도막 여럿이 모여 큰 도막을 이루고, 큰 도막 여럿이 모여 더 큰 도막을 이루며, 더 큰 도막 여럿이 모여 더더 큰 도막을 이루어가는 입체적 구성이다. 따라서 음악에는 도막을 지칭하는 용어가 많다. 마디, 박자, 리듬, 악구, 악절, 악장 등이 그것이다. 이 지면으로 다 설명하자면 다소 버거운 글이 될 것 같으니 공식만 간단하게 요약하겠다.

마디+마디=악구, 악구+악구=악절, 악절+악절=악장, 악장+악장=작품.

그 음악에 말이나 글을 붙인 것이 ‘노랫말’이니, 노랫말은 음악의 도막이 형성하는 질서에 적합한 것으로 재구성된 시(詩)라 할 수 있다. 활자로 된 시와는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2) 반복–음악은 크고 작은 도막을 무수히 반복한다. 앞에서 한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고 또 한다. 똑같은 반복이기도 하고, 부분적인 변형을 가미한 반복이기도 하며, 작은 도막의 촘촘한 반복이거나, 큰 도막의 통째 반복이거나, 조(調, key)를 바꾸고 화성을 달리 하고 리듬을 쪼개고 악기를 바꾸는 방식으로 큰 도막이든 작은 도막이든 무수히 반복한다. 작곡가의 반복 전술을 가장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있는 음악이 베토벤의 5번 교향곡(운명) 1악장이다. 7분 정도 지속되는 이 음악을 ‘반복’이라는 단어 하나를 머릿속에 쏙 집어넣고 진중하게 들어보시라. 새롭고 흥미로운 감상이 될 것이다.
반복한다는 것은 작곡가가 강조하려는 메시지가 그 선율에 함축되어 있다는 뜻이다. 무수히 반복해도 지루함이 없을 만큼 매력적인 선율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제(theme)라고 부른다. 능숙한 작곡가가 반복 전술을 치밀하게 설계한 작품을 듣다 보면, 반복되는 소리가 빚어내는 이미지가 차곡차곡 쌓이면서 처음엔 흐릿하던 이미지가 점차 생생하게 구체화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급기야 가슴에 뭔가 콕 박히는 순간이 오는데, 이미지의 반복을 거쳐 긴장의 밀도가 정점을 이루는 바로 그 순간, 콧잔등은 시큰해지고 가슴은 먹먹해진다. 감동이 들이닥치는 순간이다. 능숙한 작곡가는 그 정점의 엑스터시(ecstasy)를 잘 다룰 줄 안다.
그 음악에 말과 글을 붙인 것이 노랫말이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노랫말은 음악과 한 몸이기 위해 자신 또한 무수히 반복되는 운명을 피할 도리가 없다. 흔한 예가 ‘후렴구’이다. 후렴구는 절이 여러 번 바뀌어도 흔들림 없이 동일하게 반복되는 부분이다. 만약 활자로 펼쳐진 시(詩)였다면 긴장의 밀도를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단 한 번의 반복을 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인데, 신기하게도 노랫말의 후렴구는 반복을 거듭할수록 긴장의 밀도가 더해진다. 그 노랫말의 이미지가 점차 생생한 실체로 구체화되는 경험을 음악의 반복 전술을 통해 체현하게 되는 것이다.

3) 대비–음악은 또한 크고 작은 도막의 무수한 대비(對比)로 존재한다. 음악의 대비 전술을 설명하기 가장 좋은 용어는 ‘문-답 형식’, 즉 ‘메기고 받는 형식’이다.
가령 “장이야!” 하고 앞 도막의 선율이 메기면, 뒤 도막의 선율이 “멍이야” 하고 응수한다. “안녕하세요?” 하고 메기면, “반갑습니다”라고 대꾸한다. “장이야! -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 멍이야!”, 이런 식의 뜬금없는 문답을 대비 전술이랍시고 구사하다가 스승에게 된통 혼난 실패의 경험을 나도 무수히 거쳤다. 이를테면 음악이 허락하는 대비는 두 도막의 선율이 상호 조응(照應)하는 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음악의 대비 전술을 유효적절하게 활용하여 오랫동안 구비전승된 노래가 ‘민요’이다. 흑인들의 노동요(work song), 캐롤의 모체인 프랑스 농민들의 까롤레(carole),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노래 형식을 빌려온 중세 기독교의 교창(antiphonal), 한국 민중들의 일노래 등은 모두 문답 형식의 질서로 가락과 노랫말이 짜여 있다. 일노래가 문답 형식을 취하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현상인데, 여럿이 함께 일하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럿의 호흡에 적합한 리듬이 도막의 주기를 형성하게 되고, 그에 최적화된 ‘문-답’의 대비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렇듯 음악의 시간은 표정 없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작은 도막이 모여 큰 도막을, 큰 도막이 모여 더 큰 도막을 이루어가며 일정한 정점을 향해 치달을 수 있도록, 거듭된 반복과 적절한 대비의 전술이 밀도를 높여가는 형태이다. 마치 개울과 개울이 모여 시냇물이 되고, 시냇물과 시냇물이 모여 강물이 되며, 강물과 강물이 모여 마침내 바다에 이르게 되는 이치와 비슷하다. 그 입체감의 역동성을 연주자들이 잘 구현할 수 있도록 꼼꼼하게 설계하는 사람이 작곡가이다.
노랫말은 글의 고유한 밀도로 쓰여진 것이 아니다. ‘음악의 시간’에 초대되어 음악과 더불어 한 몸을 이룬 시(詩)이다. 음악 없이 스스로 고유한 이미지를 갖지 못한다. 따라서 노래로 불릴 때는 옆구리에 쿡 와서 박히는 노랫말이었는데, 시집 안의 시처럼 활자로 펼쳐놓으면 노래로 불렀을 때의 감동은 오간데 없이 뻘쭘하고 밋밋하고 유치한 느낌으로 읽히는 경우가 많다. 음악이 주도하는 도막의 주기를 부여받아 귀로 읽히는 데 적합하게 짜여진 노랫말이어서 그렇다. 도막과 도막의 무수한 반복과 대비의 구성에 적합하게 맞추어진 노랫말이어서 그렇다. 선율과 한 몸을 이루는 말과 글이기 위해 정교하게 다룬 노랫말이어서 그렇다. 박자와 리듬의 질서가 이끄는 음수율로 절(節)과 구(句)와 연(聯)의 질서가 형성된 것이어서, 음악을 떼어내고 활자로 읽으면 그리 어색한 것이다. 도대체 가락을 뺀 그 노랫말을 어디에 쓰겠는가.

| 시를 음악의 시간으로 초대할 때
시는 활자 고유의 독자적 질서로 읽힌다. 활자로 펼쳐진 시는 시간의 간섭 없이 시인의 여유로운 호흡이 섬세하게 깃들어 있는 공간이다. 시인이 설정한 라임(rhyme)이 오롯하게 지배한다. 조사 하나를 빼는 게 좋을지, 운율감을 부여할 것인지 말 것인지, 어디서 행을 바꾸고 연을 어떻게 묶을 것이며, 보편적 구성에 준하되 어떤 창의적인 형식을 취할 것인지, 이 모든 결정은 시인의 몫이다.
잘 쓰여진 시가 노랫말로는 썩 적합하지 않음을, 시를 노래로 만드는 작곡가들은 종종 경험한다. 함축적 의미로 선택된 시어(詩語)나 사유(思惟)의 밀도가 높은 수사(修辭)일수록, 시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노랫말로는 적합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 시들의 대부분은 7·5조, 3·4조 등의 규범화된 음수율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형식으로 쓰인 것이어서, 활자로 쓴 무정형의 구와 절과 연을 충실하게 반영하면서 곡을 만들다 보면, 난해하고 산만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선율’이 되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무정형의 시에 일정한 리듬과 음수율의 질서를 부여해서 노랫말답게 재구성하는 것은 능숙한 작곡가의 첨삭 과정을 거쳐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 그보다 어려운 난제는 시 자체가 자기 완결성이 뚜렷해서 음악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경우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내가 20년 가까이 가락을 붙여보려고 안간힘을 써왔으나, 아직도 써내지 못해 자존심 팍팍 구기고 있는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이 시가 내게 엄습해와서 뒤통수를 후려갈긴 그날 이후로, 그 충격에 값하는 수준의 노래를 어떻게든 만들어보려 했으나 거듭 실패했다. 그때마다 ‘그냥 놔두어도 좋을 시를 굳이 노래로 만들려는 이유가 무엇이냐?’, 이런 자문이 상흔처럼 남았다. 이 시에 대한 반응은 독자마다 다를 것이나, 좋든 싫든 자기 완결성의 밀도가 높은 시일수록 음악이 끼어들 공간은 별로 없다.
서툰 말이 장황하기까지 했지만, 지금까지 설명한 것처럼 시와 노랫말은 생각보다 많이 다르다. 둘 사이의 간극은 제법 넓다. 시는 노랫말을 대체할 수 없고, 노랫말은 시를 대체할 수 없다. 둘의 영역은 각각 고유하다. 그 간격을 좁히는 역할을 창의적으로 감당하는 것이 시를 노래로 만드는 작곡가의 몫이다. 작곡가는 둘의 고유성을 최대한 존중할 수 있어야 ‘시노래’를 만들 수 있다. 그것은 시를 자신의 음악의 시간으로 초대해서 시 아닌 노랫말을, 음악이 아닌 노래를 단단하게 빚어내는 일이다. 그 무거운 몫을 감당할 작심을 지고지순하게 해낸 뒤에야 늦봄의 시를 내 음악의 시간으로 초대할 수 있었다.

| 늦봄의 시를 음악의 시간으로 초대할 때
늦봄 문익환 목사 헌정앨범 <뜨거운 마음>에 실린 노래 중에서 늦봄의 옥중 시집 안에 실린 시에 붙여진 노래는 총 5곡이다.1 먼저, 시의 구성을 음악이 따라갈 것인지, 아니면 음악의 틀에 맞추어 시를 재구성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전자를 선택한다면 예술가곡이나 아카데믹한 성악곡으로 완결될 가능성이 높다. 후자를 선택한다면 널리 불리기에 적합한 민요나 대중적 공감대를 건드리는 간결한 스타일의 노래로 귀결될 것이다.
나는 둘이 교집합을 이루는 지점에서 모든 작품을 써내기로 작심했다. 간결한 구성이어서 따라 부르기 좋은 노래가 되든지, 밀도가 높아서 따라 부르기 쉽지 않은 복합적 구성의 노래가 되든지, 최종 결정은 늦봄이 남긴 시의 속내를 낱낱이 어루만지면서 내려야 했다. 이 연재글의 어디쯤에서 늦봄의 시에 대한 나의 소회를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시집 안의 늦봄의 시는 내가 목도한 늦봄의 삶만큼 뜨겁지 않았다. 시가 위약한 것이 아니라 늦봄의 삶이 시를 앞서간 까닭이다. 그래서일까? 내게 각별한 울림으로 와 닿은 늦봄의 시들은 시적 긴장과 밀도보다는 흡사 수상록(隨想錄) 같은, 번민한 상념과 통증의 토로였다. 이를테면 일상의 행보로 이미 다 쓰여진 무엇인가를 거침없이 토해낸 시들에게서 늦봄의 향내가 물씬 풍겼다.2

아래는 ‘일상의 행보로 이미 다 쓰여진 무엇인가를 거침없이 토해낸’ 늦봄의 시 <우리는 호수랍니다>를 도막・반복・대비의 전술로 재구성한 노랫말을 나란히 비교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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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노래를 만든 2000년 초봄의 시점을 기준으로, 갓 서른이 된 젊은 늦봄이 쓴 시로 가정하고 <우리는 호수랍니다>를 마주했다. 순전히 상상에 불과하지만, 그리해야 이 시가 내 ‘음악의 시간’에 뜻밖의 손님처럼 깃들어, 허다한 수다와 토론과 논쟁과 격려가 우리 사이를 오갈 것 같았다.
갓 서른이면 이 곡을 쓴 시점의 나보다 다섯 살 아래 터울이니, 우린 같은 꿈을 꾸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느끼는 것과 공감하는 것과 반응하는 것의 교집합이 두터운 동시대 청춘이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내 음악의 시간에 초대된 다섯 살 아래 후배가 늦봄이라니. ‘영감’이라는 것이 내 속내 구석구석을 건드리기에 충분한 상상이었다.
우리는 호수랍니다! 이 한마디는 그야말로 벼락 같은 위무였다. 이미 도착해 있는 선물처럼, 알 수 없는 미래가 설레는 모습으로 우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지나온 시간 속에 겹겹의 상흔으로 스며든 기억들이 거듭된 풀무질을 거쳐 단단히 영글어진 한마디로 와 닿았다. 서른의 영민한 늦봄이 서른다섯의 어리숙한 내게 던지는 이 위무의 한마디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벗들에게도 같은 값어치로 닿을 수 있기를 바랐다. 팝 스타일로 이 시를 담은 것은 그 소망에 걸맞는 선택이었다.
갓 서른의 늦봄에게 나는 말했다. ‘내 음악이 이 시를 오롯하게 품으려면, 음악의 주도적인 틀에 이 시를 이렇게 맞추면 좋을 것 같아. 그래야 간결한 구성의 노래가 빚어질 수 있어. 어떻게 생각해?’ 간결해서 누구나 따라 부르기 좋은 노래를 평소 갈망하던 늦봄은 나의 의견을 대부분 수용했으나, 양보할 수 없는 대목을 만나면 힘겨루기 하듯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특히 시의 어느 구절을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될 후렴구로 쓸 것인지 결정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설왕설래 옥신각신, 다섯 살 후배 늦봄이 쓴 시가 나의 음악이 요청하는 틀에 맞추어 ‘노랫말’이 되기까지, 이 곡은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팝 스타일의 음악에 내가 익숙하지 않은 탓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가 위에 늦봄의 시와 나란히 비교해놓은 노랫말이다.
다섯 살 터울의 청춘으로 늦봄과 긴 시간을 시름하다가, 늦봄의 북간도 친구 동주와 몽규와 준하와 동생 동환을 떠올렸다. 우리는 읊조리듯 내뱉었다. “우리는 호수랍니다.” 늦봄 속내에 들어앉아 둥지를 틀고 있을 전태일·김상진·김종태·박종철·이한열…. 그 여린 청춘들을 떠올릴 때는 비통하게 내뱉었다. “우리는 호수랍니다.” 대학 시절 동아리로 어울렸던 친구들, 노래운동의 길을 함께 걸었던 벗들, 다 알 수 없지만 살갗에 와 닿는 빗방울처럼 선연하게 느낄 수는 있는 승리와 좌절과 패배와 일어섬의 기억을 잇대어, “우리는 호수랍니다.”
그렇게 벼락 같은 위무의 시 <우리는 호수랍니다>가 노래로 만들어졌다.
노래를 완성한 후, 나는 다섯 살 터울 후배 늦봄을 다시 마흔여섯 살 많은 어른으로 되돌려놓아야 했다. 상상의 조우에 불과했지만, 갓 서른이었던 젊은 늦봄과의 동행은 짙고 깊고 푸르렀다. 외롭고 높고 쓸쓸했다. 현실로 되돌아온 나는, 음악의 손길이 닿기 전의 텅 빈 시간처럼, 고요하고 무표정한 시간의 그 허다한 여백처럼, 허허로운 마음과 텅 빈 작업실의 여백을 추스르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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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만든 이들
늦봄 문익환 헌정앨범 <뜨거운 마음>은 2000년에 문익환 기념사업회의 제작으로 만들어졌으나, 새로운 기획과 음악의 보정을 위해 2011년에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총무 배태진)의 도움을 받아 다시 만들었다.
여러 가수의 윤창으로 새롭게 연출한 <우리는 호수랍니다> 리메이킹 버전의 보컬은 CCM 아티스트 조수아, 평화와 생명의 노래꾼 홍순관, ‘노래모임 새하늘새땅’의 방기순과 노은아 등등 늦봄을 품고 살아온 여러 가수들이 함께 불렀다. ‘합창모임 새하늘새땅’이 코러스를 맡았으며, 치기 어린 내 목소리도 살짝 들어가 있다.
기왕 보정판을 만드는 마당이니, 나는 이 곡을 보다 폼나게, 보다 새롭게, 보다 활기차게, 보다 풍성하게 연출하고 싶었다. 내 감수성의 범위에 제한하지 않기 위해, 음악 콘텐츠로서 조금 더 경쟁력 있는 색채를 얻기 위해, 나는 다섯 살 아래 후배 작곡가 신현정에게 편곡을 맡겼다.
‘피터 팬의 여사친’ 같은 신현정의 감성과 능력이라면, 상상 속에서 다섯 살 아래 터울의 늦봄과 힘 겨루듯 써낸 이 곡에 가장 적합한 편곡의 옷을 입힐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신현정은 ‘노래모임 새하늘새땅’에서 피아노와 키보드를 연주했고, 내가 작사만으로는 처음 참여한 작품 <그의 나라 온 땅에>의 작곡가이다. 국악 크로스오버 그룹 ‘그림’(the林)의 멤버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고, 내가 만든 40종이 넘는 음반의 피아노 및 키보드 연주자로 동행했다. 스물둘의 나이에 나를 만나서 20년의 세월 동안 음악의 길을 지근거리에서 함께 걸어온 길동무이다.
늦봄 문익환 헌정앨범 <뜨거운 마음> 리메이킹 음반의 연주자로 참여하면서, 특히 <우리는 호수랍니다>의 편곡자로 참여하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 뛰는 일을 했다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고, 아이처럼 그리 촐랑거리던 그녀는 2년 뒤 201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림(the林) 3집 음반에 담겨 있는 그녀의 작품 <바람 소리 숲>을, 남겨진 이들에게 그녀가 띄우는 위무의 서신으로 느끼며, 나는 그해 내내 들었다.


1 <두 하늘 한 하늘>, <서시>, <비무장지대>, <평행선>, <우리는 호수랍니다>. 여기에 문성근의 시낭송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더하여 총 6트랙이다.
2 류형선, “아버지의 철조망–<두 하늘 한 하늘>”, 「기독교사상」 727호(대한기독교서회, 2019년 7월호): 164.



류형선 | 한양대학교 작곡과 및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예술전문사과정을 졸업했다. 국립국악원 예술감독을 역임하였으며, KBS 국악대상(2008) 및 기독문화대상(1995)을 수상하였다. 작곡가로서 4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고, 음반 프로듀서로서 50종의 음반을 제작하였다. 현재 숨엔터테인먼트 예술감독, 정동극장 이사, 국악TV 준비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북시디 『전래자장가 자미잠이』, 음악에세이 『음악에게 차 한 잔을』 등이 있다.

 
 
 

2019년 10월호(통권 7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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