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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초기 선교사의 한국어 교사 11
문화·신학·목회 (2019년 10월호)

 

  한국어 교사로 활동한 양시영과 양기탁 부자
  

본문

 

| 게일의 『한영뎐』 편찬에 부자가 함께 참여하다
게일이 1892년 원산으로 갈 때 선비 출신의 한국어 교사 이창직을 데려가서 사전을 비롯한 한국 관련 책들을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1,200페이지 분량의 『한영뎐』 초판 편찬은 워낙 방대한 작업이었기에, 여러 명의 도움이 필요했다. 게일은 1897년에 출판된 『한영뎐』의 머리말에서 “그동안 나와 함께하였던 한국인들의 이름을 여기에 밝힌다: 정동명(鄭東鳴), 양시영(梁時英), 이창직(李昌稙), 이득수(李得秀), 이겸래(李謙來), 양의종(梁宜鍾), 조종갑(趙鐘甲), 신면휴(申冕休). 이들은 극동의 매력과 황당한 일들을 내가 모두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너무도 믿음직스럽고 존경해마지 않는 나의 친밀한 친구들이다. 이제 이들과 헤어지게 됨이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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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운데 양시영과 양의종은 부자 관계이다. 일찍부터 선교사들과 접촉한 선비 양시영은 아들 양의종을 15세에 제중원에 입학시켜 영어를 배우게 하였다. 게일의 『한영뎐』 서문에 양시영의 이름이 이창직 앞에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나이 순서로 기록된 듯한데, 앞부분은 한자로 도와준 인물들이고, 뒷부분은 영어로 도와준 인물들인 듯하다. 이들의 이름이 관립외국어학교 졸업생 명단에 없는 것을 보면,1 아마도 사립학교에서 영어를 배웠을 것이다.
제중원에서 6개월 동안 영어를 배운 양의종은 당시 26세 청년이었다. 그는 일본에 다녀온 뒤에 양기탁이라는 이름으로 벼슬을 하였다. 신면휴는 『한영뎐』이 나온 1897년에 진사 장지연(張志淵)과 함께 사례소(史禮所) 직원으로 임명되어 내부 참서관 현은(玄檃)과 함께 활동한 개화파 인물이고, 이겸래는 이듬해에 외부 교섭국장(주임관 5등)에 임명되어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조종갑은 일본에서 유학하였다.

| 양시영이 게일에게 세례를 받고 한국어 교사로 활동하다
양기탁의 호적에 의하면 이들의 원적은 평안남도 강서군 쌍령면 신경리 143번지인데, 평양으로 나와서 살았다. 양시영은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였으므로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이름이 보이지 않고, 게일이 1892년 4월 20일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엘린우드 총무에게 보낸 편지에 처음 나타난다.

세례를 받을 자 중에 양씨(Mr. Yang)라는 사람이 있는데, 평양에서 온 소박한 자로 나이는 마흔세 살입니다. 그는 훌륭한 한학자(Chinese scholar)이며, 그 덕분에 성경을 쉽게 접하였고, 그리고 작년 9월부터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가 성령이 충만한 사람으로, 주님이 여기에 쓰실 만한 그런 사람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마펫 씨와 기포드 씨도 그렇게 기대하고 있을 것입니다.)

당시 양시영이 43세라면 아마도 1849년 생으로, 게일보다 13세 위이다. 게일은 6월에 원산으로 거처를 옮겼으니, 4월에 세례를 받았다면 이들은 서울에서 만났을 것이다. 학습을 거쳐 세례를 받으려면 최소한 1년이 걸리므로, 양시영은 그 이전부터 게일을 알았을 것이다.
양시영은 아들 의종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양부 양시욱이 서울에 살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들 의종이 1886년에 제중원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양시영의 이름은 게일이 1896년 2월 18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시 나타난다.

백성들 가운데 천주교인 대부분이 머리를 잘랐고, 기독교인들 가운데 황해도에서 온 송씨(스왈론 선교사의 조사), 천씨(스왈론의 선생), 양씨(저의 이전 선생), 감용기(우리의 요리사)와 그 외 7명이 상투머리를 포기했습니다. 원산에 있는 사람들은 천주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상투머리를 잘랐다고 말합니다.

게일은 이때 이창직과 함께 『한영뎐』 교정을 보러 요코하마에 와 있었으므로, 양시영을 “저의 이전 선생”이라고 소개하였다. 여전히 원산에서 선교부 일을 돕던 양시영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상투를 자르고, 기독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맥켄지는 캐나다에서 선교비를 모금해 1893년에 독립선교사로 한국에 도착한 후 황해도 소래에 파견되었는데, 1895년에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한국어 교사 서경조가 이 소식을 편지로 써서 캐나다 선교부에 보내자, 선교부에서 선교사 3명을 공식적으로 파견하였다. 이들의 선교 구역은 함경도로 조정되었는데, 그때까지 원산에서 활동하던 게일이 1898년 11월 30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 그러한 사연이 실려 있다.

우리 선교회는 선교 본부의 승인을 기다리며 함경도를 캐나다 선교사들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캐나다 선교사들 중에 다섯 명이 이미 이곳 선교 현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맥켄지가 그의 일생을 보낸 황해도에 들어가기를 기대하면서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황해도는 우리의 가장 큰 사역지인데, 그것을 넘겨준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곳에서 사역을 그대로 유지하려면 그들이 □□하지 못하도록 실질적으로 막아야 합니다.

대장장이 출신의 던칸 맥레(Duncan MacRae, 1868-1949)는 처음 서울에 머무는 동안 차을경에게 한국어를 배웠다. “차씨는 체격과 성격에서 독특한 사람이었다. 6피트 2인치인 던칸2보다 더 크기 때문에, 그의 학생들 머리 위로 키가 솟았다. 그럼에도 학자와 양반의 인상적인 위엄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 게다가 차씨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공부 시간 전에 언제나 기도하도록 한 것도 그였다. 풀리지 않는 어려운 언어의 문제들을 다룰 때마다, 차씨는 고개를 숙이고는 기도와 깊은 명상 속에서 잠시 동안 앉아 있었다. 마침내 침착하게 차씨는 그들을 위해 문제를 해결하여 그들의 길을 수월하게 안내해 주었다. 그는 던칸(마목사)과 그리어슨(구목사)에게서 경탄과 애정을 얻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함께 원산으로 가자고 차씨를 재촉할 정도였다.”3
맥레가 원산으로 내려온 뒤에도 게일은 후배 캐나다 선교사들을 가르치기 위해 양시영과 함께 몇 달 더 원산에 남아 있었다.

| 던칸 맥레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함께 선교여행을 하다
1899년 봄에 맥레는 함흥을 답사하기 위해 신청한 물품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한국어 공부를 계속하였다. “던칸은 자신의 선생님인 양씨(Mr. Yang)와 캐나다 선교사들이 조선어를 유창하게 할 때까지 그들과 함께 사역하기 위해 소래에서 온 서경조씨와 함께 가도록 이 여행을 조정하였다.”4라는 기록을 보면 맥레의 한국어 교사가 차을경에서 양시영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차을경은 선교 사역의 조사로 계속 참여하고, 서경조는 캐나다 선교사들과 양시영의 한국어 회화가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도와주었다. “5월 3일 저녁, 던칸은 그의 선생님인 무서운 양씨와 소래의 서경조씨와 함께 북으로 향하는 해안 증기선에 올랐다”5라고 한 것을 보면 양시영은 근엄한 선비의 풍모를 지닌 엄격한 한국어 교사였음을 알 수 있다.
함흥 선교지를 답사하는 동안, 맥레의 가장 큰 고민은 자신이 아직 한국어에 익숙치 않다는 점이었다. 신자의 집에 들러서 불신자들과 토론하는 중에 “나는 조선말을 많이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예수께서 조선의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라고 설교하였다. “나는 이 언어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였으나, 언어의 고비를 넘기는 그날을 속히 오게 해 주기를 주님께 기도”하자고 약혼녀 에디스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가 혼자서 길을 걷다 보니 ‘영국인’이라느니, ‘예수쟁이’라느니,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누군가 그의 등에 돌을 던졌다. 그가 돌아서서 군중 앞으로 걸어가 “누가 돌을 던졌느냐?”라고 한국어로 물었다. 군중들은 그가 한국어를 모를 거라고 생각하였으므로 당황하고, 곧바로 잠잠해졌다. 맥레가 한국어 습득의 효험을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여름이 다가오자, 서경조와 양시영은 함흥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음을 깨달았다.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나타났다. 6월 15일에 황소 수레에 짐을 싣고, 맥레와 한국어 교사들은 땀에 젖고 먼지에 덮힌 몸으로 수레 뒤를 따라 원산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

| 엄격한 한국어 교사이자 선교 조사로 활동한 양시영
그해 여름 양시영은 맥레의 함경도 북청(北靑) 지역 선교여행에 따라가지 않고 원산 본부를 지켰다. 맥레가 원산에 돌아오자 양시영은 한국어 공부 진도부터 확인하고, 자기와 떨어져 있는 동안 진도가 뒤처진 것을 신랄하게 훈계하였다. 맥레는 동생 샌디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의 게으름을 이렇게 인정하였다. “나는 이제 무거운 압박 아래에 있다. 부끄러움의 짐이 나를 내리누르고, 밤낮으로 나의 마음은 나의 공부에 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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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시영에게 타박을 받고 비록 낙심하였지만, 맥레는 한국어 말하기와 쓰기 시험을 치르기 위해 9월에 그리어슨과 함께 서울로 갔다. “마침내 나는 용기를 내었고, 겁쟁이로 행동하기보다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이 더 영예롭다고 느꼈다.”라고 에디스에게 편지를 보내더니, 시험을 친 뒤에 너무 흥분하여 날짜도 쓰지 않고 에디스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다. “내가 시험 결과를 잘 받아서 기뻐요. 그리어슨 박사는 말하기에서 100점과 쓰기에서 95점을 받았고, 맥레는 말하기 98과 1/3점, 쓰기 90점을 받았소. …이 일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에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오.”7
1899년 12월 30일에 맥레는 양시영과 함께 함흥 선교를 시작하기 위해 정기선을 타고 소호로 향하였다. 대장장이 출신인 맥레는 시골 대장간에 들러서 활활 타오르는 석탄 속의 붉고 뜨거운 쇠막대기를 꺼내어 편자 모양으로 두드려서 나귀 발굽에 두드려 박고 선교지를 돌아다녔다. 맥레가 다른 서양 선교사와 다른 모습을 보고, 대장장이 안 씨도 예수를 믿어 성경공부에 열심히 참여하는 교인이 되었다. 함경도에서는 북청에서 가장 많은 선교책자들이 팔렸다.

| 에디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여학교 일을 돕다
에디스가 맥레와 결혼하여 원산에 도착하자, 봉수동 벽돌집에 모여서 환영하던 남자들이 “공손하면서도 진심으로 에디스에게, ‘조선말을 빨리 배워서 조선의 여자들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에디스가 한국어를 잘 배우려고 하지 않자, “던칸은 그녀가 도망칠 수 없는 위치로 그녀를 이끌었다. 던칸은 에디스의 선생님으로, 불굴의 남자이고 훌륭한 선생님이며 주목되는 학자인 양선생을 고용하였다.”8 에디스는 어쩔 수 없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양선생은 던칸과 게일 박사를 가르친 것처럼 에디스를 대했다.”9 공부에 진전이 없으면 따끔하게 훈계하였고, 에디스가 지쳐 있을 때에는 부드럽게 가르쳤다. “공부 준비를 해오지 않는 날에는 호되게 꾸짖어 에디스는 양선생에게 ‘이집트의 감독자’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는데, 그것은 게일의 책에 나온 인물로 양선생에 대한 게일의 필명(pseudonym)에서 빌려온 말이다. 그러나 세 학생 모두 그 선생님에게서 언어 이상의 것을 배웠다.”10 그들은 조선의 문화를 배울 수 있었는데, 이는 그들의 삶과 한국 선교에 영향을 끼쳤다.
에디스는 한국어를 완전히 정복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여성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각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석하여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그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려고 애썼다. 맥레는 양시영에게 봉수동 선교기지와 에디스를 맡기고, 개마고원 쪽으로 6주간 선교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곳에서 함경도 사람들과 생활 양상이나 종교 의식이 다른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에디스는 원산에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려고 계획했으며, 선교회의 승인을 얻고 나서 맥레와 양시영과 함께 이 일을 의논하였다. “그 결과 에디스가 맥레의 집에서 일주일에 네 번 소녀들을 가르치고, 양씨가 에디스의 학교 운영을 돕기로 결정하였다.”11 함흥에는 이미 신씨 부인이 몇몇 소녀들을 위해 무보수로 가르치는 기독교 학교가 있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채마리아가, 그리고 더 후에는 에디스와 양시영이 신씨 부인의 일을 맡게 되었다. 양시영은 맥레 부부에게 더 이상 한국어를 가르칠 필요가 없게 되자, 이들이 세운 원산과 함흥의 여학교 운영을 맡아 봉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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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 구문과 고유한 표현들이 영어에서의 그것들의 대응어들보다 던칸과 에디스의 마음에 더 쉽게 다가왔다.”12 여러 해 동안 양시영에게 한국어를 배우며 한국 문화를 이해하게 되자, 맥레 부부는 한국어가 영어만큼이나 편해지고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1910년에 태어난 둘째 딸 “진주가 말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조선어는 그녀의 언어가 되었다.”13 부부가 집에서 한국어로 대화하자, 둘째 딸 진주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배운 것이다. 진주는 캐나다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은퇴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서, 맥레 부부와 다른 캐나다 선교사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A Tiger on Dragon Mountain(『팔룡산 호랑이』)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맥레는 ‘마구례’(馬求禮) 또는 ‘마목사’라는 이름으로 일제에 추방당한 1937년까지 40년 동안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며 학교 설립, 농업기술 전파, 의료지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고국으로 돌아간 후 세상을 떠날 때에도 3・1만세운동 시절의 애국자가 비단으로 만들어준 태극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 태극기는 맥레와 함께 아름다운 브레튼곶 언덕에 묻혔다.

| 아들 양기탁도 한국어 교사로 일본에 파견되다
양기탁은 1871년 4월 2일 평안남도 평양군 소천에서 양시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의종이었다. 양기탁은 서당에 들어가 한문을 배우며 자랐는데, 15세에는 그 지방에서 소년 문장가로 손꼽혔다. 마침 1885년 4월에 제중원(濟衆院)을 개원한 선교사 알렌이 의사를 돕는 조수를 양성하기 위해 외아문(外衙門)에 학생 선발을 의뢰하자, 외아문에서는 1886년 2월 13일 팔도 감영에 “문벌에 구애받지 말고, 총명하고 근면한 젊은이를 선발해 보내달라.”라고 공문을 내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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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도에서 2명씩 16명이 선발되었으며, 평안도에서는 양의종과 김영진을 추천하였다.14 양의종은 알렌과 언더우드에게서 영어와 제약・의술 등을 6개월 배우다가 자퇴하고, 독학으로 영어를 계속 공부했다. 한학의 토대 위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선교사들과 가까워진 것이다.
양기탁의 이름은 아버지 양시영의 이름과 함께 게일의 글에서 두 번 나타난다. 앞서 언급했듯 1897년에 출판한 『한영뎐』 머리말에 처음 등장하고, 조선야소교서회에서 간행한 계간지 The Korean Bookman 3권 2호(1922년 6월)에 한국의 옛 시조를 영어로 번역하여 발표하면서 자신이 원전으로 삼았던 가집(歌集)을 소개하는 글에서 두 번째로 등장한다.

30년도 더 전에, 한때 유명했던 양기탁의 아버지가 가집을 하나 갖고 있었는데, 그의 친구가 소유했던 목판으로 찍어낸 책이었다. 그는 나에게 최고의 찬사를 하며 그 책을 주었다. 오늘 나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매우 낡아버린 이 책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려고 한다. 이 책의 이름은 『남훈태평가』이다. ‘남훈’은 아브라함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살았던 순임금의 궁전을 말한다.15

『한영뎐』이 나올 때에는 ‘양의종’이라는 청년이었지만, 이제는 유명인사가 되었으므로 게일은 영어 독자들에게 자신의 오랜 친구 양시영을 ‘유명했던 양기탁의 아버지’라고 소개하였다. 대부분의 가집은 가객들이 가창을 위해 필사본으로 유통했지만, 『남훈태평가』는 독서물로 판매하기 위해 방각본(坊刻本)으로 간행하였다. ‘계해석동신간’(癸亥石洞新刊)이라는 간기(刊記)를 보면 1863년에 간행된 것이 분명하니, 양시영의 친구가 이때 목판을 새겨 판매했을 수도 있고, 나중에 목판을 인수하여 계속 찍었을 수도 있다.
게일이 『남훈태평가』를 소개하면서 “양시영에게서 30년 전에 이 책을 받았다.”라고 했는데, 1922년으로부터 30년 전이라면 『한영뎐』을 편찬하기 시작할 무렵이다. 양시영이 사전 편찬에 합류하면서 『남훈태평가』를 선물한 셈인데, 『한영뎐』은 1897년 6월에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후쿠인 인쇄합자회사’에서 인쇄하여 ‘서울 야소교서회’에서 발행하였다.
게일은 『한영뎐』을 교정하기 위해 이창직과 함께 1895년 12월에 요코하마로 왔고, 양시영과 양기탁은 원산에 남아 있었다. 양기탁이 1912년 12월 20일 신민회 사건 공판 때에 “원산 영사관원의 소개로 나가사키상업학교에 한국어 교사로 가서 2년 정도 체류하였다.”라고 진술하여, 양시영은 계속 원산에 남고 양기탁은 일본에 간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 기자 호소이 하지메(細井肇)가 편찬한 인물지 『현대 한성의 풍운과 명사』에도 양기탁이 일본에 간 시기를 1897년으로 기록하고 있다.16 게일이 요코하마에서 교정을 하던 시기와 비슷하다.
맥레가 처음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올 때 일본 요코하마에 9일 동안 머물렀는데, 그 사이에 캐나다 선배 선교사 게일을 만났다. 게일은 맥레에게 『한영뎐』 원고를 검토해달라고 부탁했으며, 맥레는 이 사전을 가지고 한국어를 배울 독자의 입장에서 몇 가지 제안을 하였다. 게일은 양시영의 첫 번째 한국어 제자이고 맥레는 두 번째 제자인데, 이 시기에 게일이 맥레에게 양시영을 한국어 교사로 소개하거나, 맥레가 양기탁을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
나가사키상업학교 동창회 명부 직원명단에는 ‘양선종(梁宣鐘)’17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18 귀국한 뒤에는 양기탁(梁起鐸)이라는 이름으로 박문원 주사(博文院主事), 예식원 번역관(禮式院繙譯官), 예식원 주사(禮式院主事), 한미전기회사 검찰관(韓美電氣會社檢察官) 등의 직책을 맡아 영어와 일본어 실력을 활용하였다. 그 중간에 이승만의 옥중학교에서 죄수들을 가르치다가, 「대한매일신보」 창간에 합류하면서 항일 민족 언론인으로 나섰다.


1 박창남, “개화기 관립외국어학교 출신자 연구”(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2).
2 던칸 맥레의 딸 헬렌 맥레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서, 아버지는 던칸, 어머니는 에디스라는 이름으로 표기하다가, 필요에 따라 맥레라는 성으로도 표기했다. 맥레와 던칸이라는 두 가지 표기가 뒤섞여서 혼란스럽긴 하지만, 번역 원문 그대로 인용하였다.
3 헬렌 F. 맥레, 연규홍 옮김, 『팔룡산 호랑이: 던칸 M. 맥레 목사의 삶』(한신대학교출판부, 2010), 114.
4 헬렌 F. 맥레, 위의 책, 123.
5 헬렌 F. 맥레, 위의 책, 126.
6 헬렌 F. 맥레, 위의 책, 154.
7 헬렌 F. 맥레, 위의 책, 154.
8 헬렌 F. 맥레, 위의 책, 180.
9 헬렌 F. 맥레, 위의 책, 180.
10 헬렌 F. 맥레, 위의 책, 180.
11 헬렌 F. 맥레, 위의 책, 204.
12 헬렌 F. 맥레, 위의 책, 219.
13 헬렌 F. 맥레, 위의 책, 278.
14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편, 『舊韓國外交關係附屬文書』 제3권(1886. 1. 10); 『우강 양기탁전집』 제1권(동방미디어, 2002), 207.
15 강혜정, “20세기 전반기 고시조 영역의 전개양상”(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4), 65.
16 정진석, 『양기탁』(기파랑, 2015), 31.
17 여기에서 ‘선’(宣)은 당연히 ‘의’(宜)의 오자(誤字)이다.
18 『우강 양기탁전집』 제1권(동방미디어, 2002), 210.



이 숙 | 연세대학교를 졸업하였고, 하버드대학교 언어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한국어학당 강사와 하버드대 동아시아학과 전임강사로 일했다. 저서로 『한국어 이해교육론』(공저), Practical Korean(공저) 등이 있다. 현재 전주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9년 10월호(통권 7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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