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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평양 기독교 역사 07
문화·신학·목회 (2019년 8월호)

 

  평양 조합교회의 성장과 쇠퇴
  

본문

 

1911년 7월 23일 평양 경창리에 일본조합교회 조선전도 주임 와타세 쓰네요시(渡瀨常吉, 1867-1944) 목사의 노력으로 기성기독교회(箕城基督敎會)가 설립되었다. 이 교회는 1911년 7월 첫 조합교회인 한양교회가 서울 박동에 세워질 때 평양에도 전략적으로 같이 설립된 것이며, 이후 타카하시(高橋應藏, 1864-1923) 담임목사가 맡아 성장시켰다. 기성교회의 성장과 3・1운동 이후 1920년대의 분열과 쇠퇴, 1930년대까지의 존속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정치와 종교의 관계, 조합교회를 통한 자유주의 신학의 유입, 소수 교단의 성쇠를 살펴보자.

| 조합교회의 연구사와 식민지 근대성의 문제
일본조합교회는 자유주의 신학과 회중주의와 민족주의를 융합하여 일본적 기독교를 수립하고자 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사는 조합교회를 민족교회론 입장에서 일제의 조선 통치를 도운 친일 종교로 이해해왔다. 복음화, 문명화, 일본화라는 3대 목표 중 세 번째, 국민적 운동 문제에서 일본화(동화)가 최종 목적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1910년 “동양 정신계의 태두”요 잡지 「新人」의 주필이자 도쿄의 도고(東鄕) 조합교회 목사인 에비나 단조(海老名弾正)는 평양 방문 때 ‘신국은 국경을 초월하므로 한일 기독교인이 형제자매와 동포로서 기독교의 사랑으로 화합하여 지상 천국을 건설하자.’고 권면했다. 일본 제국을 통해 지상 천국 건설이 가능하며, 조선의 식민지화는 신국의 확대라는 제국적 신국론을 선전했다. 1917년 와타세는 동경 유학생들이 발간한 「半島時報」에서 총독부의 정치를 통한 문명화를 넘어 유교나 불교가 아닌 진보적인 일본조합교회의 기독교로 “충량 건전한 국민을 양성”하고 도덕적・영적 쇄신을 이루어 지상 천국을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일본 제국은 곧 지상 천국이었다.
1918년에 발간된 조합교회 소개 책자인 『반도 동포를 위함』(53면)에는 다음 필자들이 글을 썼다. 1장 와타세, 2장 내무부장관 우사미(宇佐美勝夫), 3장 농상공부장관 오하라(小原新三), 4장 이완용 백작, 5장 조중응 자작, 6장 Seoul Press 사장 야마가타, 7장 마츠모토 변호사. 이들은 와타세를 한일 협력과 교회 발전의 인물로 칭송했다. 정미 7적과 총독부 고관들이 추천하는 친일 교회 성격을 잘 보여주었다.
따라서 상해임시정부와 「독립신문」은 조합교회를 총독부의 앞잡이로 규정했다. 합병 후 “독수를 종교에 뻗쳐 대외의 세력이 많은 예수교에 대하야 일본조합교회를 수입하야 교권을 박탈하고 포교규칙을 공포하야 포교에 제재를 가”했다고 이해했다. 그들은 와타세 목사는 “총독부의 주구”로 “한국 인사의 사상과 내정을 정탐”하는 “일본 정부의 괴뢰”이며, “선우순, 유일선 등은 실로 종교라는 가면을 쓴 고등형사로 적의 창귀가 된 자”로 이해했다.(“日本虐政史”, 「독립신문」 1919년 8월 29일; “同胞여 敵의 虛言에 속지 말라”, 「독립신문」, 1920년 2월 3일)
해방 이후의 연구도 동일한 입장이었다. 1967년 일본기독교회가 태평양전쟁 협력을 반성하는 상황에서 출간된 마쓰오 타카요시(松尾尊悤)의 논문 “日本組合基督敎の朝鮮傳道”와 “三一運動と日本プロテスタント”가 이정표를 세웠다. 그는 일제의 조선 통치를 지지하고 조선의 ‘영적 정복’에 나선 조합교회의 선교 동기(한국인의 동화와 일본화론), 총독부 지원으로 인한 발전, 문화통치 기간 조합교회의 활동과 몰락 등을 다루었다. 이후 여러 논문과 책은 마쓰오의 논지를 발전시켰다. 조합교회의 식민성 비판은 민경배의 민족교회론과 상통했다.
한국 민족주의 대 일본 제국주의라는 이분법적 관점에서 조합교회의 식민성을 강조하면 다음 세 가지 성격이 부각된다. (1) 정치: 조합교회는 친정부적 태도를 견지하며 그 후원을 이용해 교세를 확장했다.
(2) 헤게모니: 총독부는 조합교회를 미국 선교사가 지배하는 한국 교계에 대항마로 양육했다. (3) 이데올로기: 조합교회는 백인 선교사의 교권 통제에 불만을 품은 한인 지도자들을 동아주의(Pan-Asianism)와 인종주의로 포섭하여 친일화했다.
그러나 식민성만 강조하면 조합교회의 식민지 ‘근대성’은 보지 못하게 된다. 해방 이전 개신교 신학은 주류(主流)인 미국의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학, 저류(底流)인 중국의 복합적이고 다양한 개신교 신학,
1910년 이후의 신류(新流)인 일본의 자유주의 신학 등 3대 흐름이 있었다. 1910년대는 이 세 조류가 합류하면서 갈등했다. 부흥운동으로 선교운동을 낳은 미국의 복음주의 대신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성서고등비평, 역사적 예수 연구, 타종교와 기독교의 연속성)을 수용한 조합교회의 신학은 진보적이었다.
그 결과 교육 받은 유학자와 청년 다수가 교회에 가입했다. 즉 ‘영미 기독교’와 ‘일본 기독교’, ‘한국 기독교’의 삼각구도 속에서 새로운 제4요소인 ‘근대성’이 문제가 되면서, 미국 선교사를 떠나 일본조합교회와 제휴하는 새 노선이 발생했다. 그러나 서구 선교사로부터의 독립은 친일의 길로 빠지는 위험이 있었다. 1912-13년 ‘105인 사건’으로 기독교인들이 투옥되자, 다수의 지식인과 유학계 기독교인들은 안전한 조합교회에 포섭되었다.
따라서 조합교회의 근대성은 한국인이 신학적 진보와 독립을 추구하면 정치적으로는 식민성을 강화하는 ‘모순적 근대성’이었다. 그것은 의료나 건축 등 타 분야와 달리 개신교에서 헤게모니를 잡지 못한 ‘비주류 근대성’이었고, 1920년대 문화와 정치하에서 대중성 확보에 실패하고 친일 ‘엘리트 근대성’으로 머물렀다.

| 평양 기성교회 설립: 타카하시 목사와 선우순 전도사
1910년 4월 5일 평양에서 에비나 목사가 일본인을 위한 조합교회 헌당식을 거행했다. 이어서 1911년 7월 와타세 목사가 약 25명의 교인으로 한국인을 위한 기성기독교회를 창립했다.(사진 참조)1 대성학교 교사 나일봉(羅一峰)2과 장응진(張膺震) 등 일본 유학 경험이 있는 지식인이 핵심이었다. 1912년 8월 서울에 파송된 다카하시 타카조(高橋應藏)가 10월 평양에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10대에 개종하고 도시샤대학을 졸업한 후 목회한 경력자였다. 그는 순회 전도로 교회 확장에 힘을 쓰고, 한복을 입고 설교하는 등 한국 문화와 풍습을 존중했다. 거주지는 하수구리 170번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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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세와 타카하시, 나일봉, 장응진은 경무부의 협조를 받아 안창호가 떠난 대성학교를 친일 기관으로 만들려고 공작했다. 사진에서 보듯이 1914년 평양 서기통(瑞氣通)에 새 교회당과 목사관을 마련했다. 선우순(1891-1933)은 1912년 6월 「매일신보」 평양지국 주임이 되었다가, 1915년 4월 도시샤대학을 졸업하고 기성교회 전도사로 일하면서 대성학교와 기성학교 친일화에 적극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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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종교인 통계, 1912-16
1912년의 통계를 보면, 기독교 2,310인, 신도(新道, 모두 일본인) 220인, 천도교(모두 한국인) 1,375인, 불교와 기타 3,550인, 계 7,455인이었다. 불교인의 대부분은 일본인이었으나, 정토종 화정사에서 운영하는 일본어학교에 한국인 다수가 통학하고 있었다. 합방 후 개신교인이 줄고 천도교인이 증가했다.(“각파 종교”, 「매일신보」 1912년 10월 9일) 종교인의 31%가 기독교인이었으며 조합교인은 1% 수준이었다. 평양은 장로교와 감리교 세력이 강해서 조합교회 세력은 미미한 상태로 지속되었다.
3년 후인 1915년 통계를 보면 감리교회는 남산현(1,158), 전구리(238), 염점리(160), 이문리(85) 4개 교회에 신도가 1,631명이었고, 장로교회는 장대현(1,157), 신학교(770), 창전리(408), 산정현(385), 남문외(348) 5개 교회에 신도 3,068명이 있었다.(“평양과 기독교”, 「기독신보」 1915년 2월 19일) 합계 4,699명으로, 약 500명의 천주교인과 약 50명의 조합교인을 합하면 평양에 약 5,250명의 기독교인이 있었다. 105인 사건의 충격이 지나가고 매일 18명의 세례, 매주 3,000명의 개종이 일어날 정도로 기독교가 성장했는데, 특히 조합교회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1916년에는 전체 기독교인이 더 증가했다. 평양시 기독교회 현황을 교파별로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이 약 7,000명의 기독교인이 존재했으며, 이 중 장로교인이 67%를 차지했다. 가장 큰 교회는 장대현장로교회와 남산현감리교회로, 신도 1,500명이 넘는 대형교회 시대가 열렸다. 기성교회는 94명으로 1915-16년에 급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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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주의 신학의 도입
유일선과 홍병선이 서울의 조합교회에서 진화론과 신(新)신학을 보급하기 시작했으나, 자유주의 신학은 1915년 4월 5일부터 2주간 기성교회에서 진행된 타카하시 목사의 예수전 강연에서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그는 일본어판 등사본 『耶穌傳之硏究』(평양, 기성교회, 1915년 4월, 134면)로 강의했다. 이 책 10, 15, 18장 끝에 있는 한시(漢詩)는 대성학교 한문 교사인 나일봉이 썼다. 부록에는 에비나의 강의 “역사적 예수”가 실렸다. 한국에 소개된 첫 자유주의 신학서요, 역사적 예수 소개서였다.
타카하시의 강의록은 10월에 국한문판 『耶穌傳硏究』(경성, 기독월보사, 1915년 10월, 69면)로 출판되었다. 번역은 선우순, 교정은 나일봉이 맡았다. 와타세의 지원으로 출판한 이 인쇄본은 한시와 부록이 생략되고 문장도 쉽게 다듬어졌다. 르낭(Ernest Renan)의 Vie de Jésus(1863)의 일본어판 『耶穌傳』(綱島梁川 역, 東京: 三省社, 1908)이 책의 기초였다. 공관복음서는 독일 신학자 홀츠만(H. J. Holtzmann, 1832-1910)의 두 문서 편집설을 수용하여 ‘원시 마가복음’과 예수의 교화집(敎化集)인 ‘로기아’를 기초로 편집되었다고 설명했다. 공관복음보다 요한복음을 더 중시했는데 영적인 예수를 복음의 진수로 이해했다. 또한 독일 신학자 노이만(Arno Neumann)을 따라 동정녀 수태를 부정했다. 오병이어와 부활 등의 기적을 부인하고, 인본주의에서 바라본 인간 예수, 그의 메시아 각성과 가르침을 강조하며 좋은 스승 상을 부각시켰다. 책의 제19장 ‘동적 종교’는 에비나의 사상을 요약한 것으로, 양심, 죄, 개인적 수양과 구원을 위한 정적 종교(예-불교)와 문명화, 국민성 개조와 민족 발전, 신국 건설 등에 헌신하는 동적 종교(예-기독교)를 구분했다. 제20장 “예수의 복음”은 에비나의 ‘愛의 神, 天父’ 사상을 소개했다.
다카하시의 예수전은 문서비평 방법을 수용하여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에 대한 문자적 이해를 비판하고, 이적적 기독론 대신 요한복음의 영적 기독론을 강조했다. 예수의 메시아 자의식을 강조하는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주장하고 예수의 신성과 삼위일체설을 부정했다. 이는 미국 선교사들의 문자적 성서 이해와 보수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언더우드 부인이 편집하던 The Korea Mission Field는 1917년부터 성서고등비평을 강력하게 비판했는데, 자치교회와 조합교회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대응이었다. 다카하시의 『야소전연구』는 성서의 무오성, 예수의 동정녀 탄생, 복음서의 이적들, 예수의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 재림을 거부함으로써 1917년 미국에서 발행된 근본주의의 5대 강령을 모두 부정했다.
따라서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은 1910년대 조합교회에 의해 유입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동안 한국 신학사는 장로회의 경우 황해도 재령에서 사역하던 윌리엄 커(William C. Kerr, 孔偉良)와 그의 조사였던 김장호(金庄鎬, 1881-?) 목사가 1916년 성서무오설을 부인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이 시작되었고, 1924년 근본주의 5개 교리에 반대한 어번(Obern) 선언의 영향으로 논쟁이 시작됐으며, 1920년대 캐나다장로교회-청산학원 계보가 유입한 신학이 1930년대에 논쟁을 촉발한 것으로 본다. 또한 감리회의 경우 1916년에 창간된 「신학세계」에서 양주삼 목사의 “구신약전서 총론”이 모세 오경에 대한 편집설, 곧 고등비평을 처음 소개했다고 본다. 그러나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은 1910년대에 도시샤대학 출신인 에비나단조–와타세–타카하시–선우순을 통해 유입되었다. 이들은 미국 선교사와 영미신학을 고루한 보수주의 제국주의 신학으로 비판하고 근대적, 토착적, 민족적 신학을 제창했다. 문제는 그들의 진보성이 식민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 1920년대의 쇠락
이러한 상황에서 각성한 한국의 민중과 기독교인들이 적극 참여한 1919년 3・1독립운동은 성장하던 조합교회에 찬물을 끼얹었다. 상해임시정부는 매국 친일파로 살해 대상자를 일곱 가지로 구분했는데(1. 적의 수괴, 2. 매국노, 3. 친일 앞잡이(倀鬼), 4. 친일 부호, 5. 정부 관리, 6. 불량배, 7. 모반자), 조합교인 중에는 서울의 유일선과 평양의 선우순을 지목했다.(「독립신문」, 1920년 2월 5일)
조합교회를 통한 기독교의 일본화가 실패하자, 1921년 6월 26일 와타세 목사는 모든 업무를 조선회중교회에 인계하고 서울을 떠났다. 그 대표는 유일선이었고, 평양 대표는 선우순이었다. 선우순은 친일 대동동지회 회장으로 유력 인사가 되었고, 시의원이 되어 교회 사무에서 떠났다. 그의 후임 신명균 목사는 1923년 독단적으로 교회 건물을 세로 빌려주는 등 부정행위를 하였고, 교인들과의 분규로 사임했다. 내부 분쟁은 교회를 더 약하게 만들었다. 이후 기성교회는 존속하였으나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


1 1911년에 설립된 23개의 조합교회 중 21개는 기존 한국인의 자유 교회에서 가입(associate)한 것이었다. “교권을 장악한” 미국 장로회 선교사들의 ‘독선적인 교회 운영’에 반대한 반선교사 운동인 자유기독교 운동의 한국인 지도자들–강계의 차학연, 평양의 임기반, 강근명, 김영조, 전북 태인의 최중진, 충청도의 김상배, 원산의 신명균, 강원 인제의 최봉환, 서울의 고희준, 김인권, 김린, 권규현 등–이 독립 교단을 조직하는 대신 조합교회로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2 나일봉은 감리교 신자로 1909년 대성학교 한문 교사가 되었는데, 14세인 아들을 결혼시킨 일로 교회법에 따라 치리를 받자 조합교회로 옮겼다.



옥성득 |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하였다. 저서로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 등이 있다. 현재 UCLA 인문대 아시아언어문화학과 한국기독교학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9년 9월호(통권 7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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