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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애국가 작사자 안창호와 윤치호 11
문화·신학·목회 (2019년 8월호)

 

  안창호의 애국계몽 가요들과 <애국가>의 비교
  

본문

 

「대한민국학술원통신」 제297호(2018년 4월)에 실린 글 “애국가 작사는 누구의 작품인가”에서 신용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안창호가 남긴 글과 <애국가> 가사의 연관성을 바탕으로 안창호설을 지지했다. 신 교수는 도산이 남긴 20여 편의 애국계몽 노래(<한양가>, <조국의 영광>, <대한청년 학도들아>, <거국가> 등)와 <애국가> 가사를 비교하고 시상과 표현의 일치를 확인함으로써 <애국가>가 도산의 작품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 연구는 <애국가> 작사자를 확정하는 데 중요한 근거를 마련하였다.
도산이 남긴 애국계몽 가사들은 대체로 <애국가>와 마찬가지로 도산이 귀국한 1907년 2월 20일 이후부터 도산이 망명한 1910년 4월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에 도산은 신민회, 대성학교, 청년학우회를 통해 청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애국독립운동을 일으키기 위해서 대중연설을 하였다. 이때 그는 무궁화와 태극기를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 내세우며, <애국가>와 계몽가요들을 부르고 보급했다. 특히 한양, 모란봉, 한반도와 관련이 있는 노래와 청년 학생들에 관한 가요들은 이때 지은 것이 분명하다. 도산은 1907년 2월에 귀국할 때 애국가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꼈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애국가를 지었을 것이다.

| <국권회복가>(國權回復歌), <수절가>(守節歌)와 <애국가>의 비교
신용하 교수가 <애국가>와 비교한 도산의 애국계몽 노래들은 『안도산전서』에 수록된 것들이며 그동안 널리 알려진 것들이다. 신 교수가 분석한 것처럼 도산이 지은 애국계몽 노래들의 시상과 표현은 <애국가>와 비슷하며 상당 부분 일치한다. 따라서 도산이 <애국가>를 지었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만으로는 도산이 <애국가>를 지었다고 확실하게 결론을 내리는 데 부족함을 느낀다. 시상과 표현의 일치를 넘어서 <애국가>에 담긴 절실한 심정과 사무친 염원, 높은 기상과 굳은 절개를 표현하는 도산의 애국계몽 노래들이 있다면 도산의 작사설을 입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최근에 <무궁화가 2>(현행 <애국가>), <국권회복가>, <수절가>가 나란히 수록된 자료가 발견되었다. 세 노래가 나란히 이어져 나오는 것은 내용과 정신에서 친근하고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국권회복가>와 <수절가>는 신 교수가 다루지 않은 것인데, 도산의 절실한 심정과 사무친 염원, 높은 기상과 굳은 절개를 잘 표현하는 노래들이다. 뒤늦게 발견된 이 자료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자.
오랫동안 <애국가> 작사자를 연구한 안용환 교수가 최근에 도산의 ‘친필 노트’1라며 세 노래를 담은 2쪽짜리 문건을 제시했다. 이 문건은 <애국가> 작사자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주는 것 같다. 아쉬운 점은 안용환에게 이 문건을 제공한 임채승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 문건을 얻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안용환은 이 문건을 받은 지 3개월 후에 자세히 검토하고 매우 중요한 자료임을 확인하였는데, 이 문건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려고 임채승을 찾았으나 그사이 임채승은 교통사고를 당하여 의사표현을 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문건의 자세한 출처를 알기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22쪽 이상으로 보이는 ‘친필노트’ 가운데 21-22쪽의 2쪽만 제공된 것이 더욱 아쉽다. 출처와 작성 시기를 확정할 수 없는 것이 이 문건의 가치와 증거 능력을 제약한다.
그러나 이 문건에 수록된 세 곡의 노래는 그 안에 담긴 사상과 시상, 정신과 기개에서 일맥상통하며 안창호의 생각과 신념, 성격과 지향을 잘 나타내고 있다. <무궁화가 2>는 현행 <애국가>와 거의 같은데 1절 둘째 줄의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가 “하님이 보호하샤 우리 대한만세”로, 2절의 “바람서리”가 “바람 이슬”로, 4절의 “충성을 다하여”가 “님군을 섬기며”로 되어 있다. 이런 표기는 여기서 제시된 <무궁화가 2>가 변경이나 수정되기 전 최초의 <애국가>임을 시사한다.
이 노래의 제목을 ‘제14 무궁화가 2’(第十四 無窮花歌 二)라고 한 것은 의미가 깊다. 윤치호 역술 『찬미가』에는 <무궁화가>가 “제 十 승자신손 천만년은 우리 황실이오”로, <애국가>는 “제 十四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으로 되어 있다. 도산의 친필노트는 윤치호의 『찬미가』와 같이 <애국가>를 ‘제14’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우연인지 의도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윤치호의 『찬미가』에는 14장 애국가 앞뒤에 찬송가가 나오지만, 안창호의 친필노트에서 애국가 다음에는 ‘15 국권회복가’, ‘16 수절가’가 나온다. 안창호가 의도적으로 윤치호의 『찬미가』에 맞추어 ‘第十四’라는 표기를 했다면 윤치호의 『찬미가』(1908년 6월)가 나온 이후의 어느 시점에 안창호가 자신이 지은 애국계몽 가요들을 모아서 친필로 써놓은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제목을 ‘제14 무궁화가 2’라고 한 것이 특이하다. <애국가> 가사는 윤치호가 지은 <무궁화가>의 가사를 개작한 것이고 <애국가>의 후렴은 <무궁화가>의 후렴을 가져온 것이다. <무궁화가>와 <애국가>의 형식적・내용적 연속성을 생각해서 도산은
<애국가>를 <무궁화가 2>로 제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도산은 자신의 <애국가>를 윤치호가 『찬미가』 14장에 수록해준 것을 고맙게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안창호는 자신의 <애국가>가 윤치호의 <무궁화가>
를 계승할 뿐 아니라 자신과 신민회가 윤치호와 독립협회를 계승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윤치호가 『찬미가』에서 <무궁화가>와 <애국가>를 영어로 ‘Patriotic Hymn’(애국가)으로 표기한 것과 달리, 안창호는 <애국가>를 ‘무궁화가 2’로 표기했다. 그에게 ‘무궁화’라는 말이 매우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는 무궁화를 민족의 꽃으로 생각하고 끈질긴 생명력과 강인한 정신을 상징하는 말로 강조하였다. 그는 <애국가>와 함께 무궁화를 민족을 깨워 일으키는 말로 중요하게 사용했다. 무궁화는 ‘영원무한’, ‘영원무궁’을 뜻하는 말로 초자연적 의지와 신념을 담은 말이다. 이것은 <애국가>의 정신과 사상을 압축할 뿐 아니라 안창호의 정신과 신념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노랫말을 지은 사람은 윤치호이다. 그러나 무궁화를 민족의 꽃으로, 조국에 대한 영원한 사랑의 상징으로 민족의 가슴에 심어준 사람은 안창호였다. “‘안창호(安昌浩) 등이 맹렬히 민족주의를 고취할 때 연단에 설 때마다, 가두에서 부르짖을 때마다 주먹으로 책상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무궁화 동산을 절규함에, 여기에 자극을 받은 민중은 귀에 젖고 입에 익어서 무궁화를 인식하고 사랑하게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후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말은 우리 한민족의 가슴 속에 조국에 대한 영원한 사랑의 뜻으로 남게 되었다.”2
도산의 친필노트는 다른 애국계몽 노래들과 마찬가지로 1907년부터 1910년 망명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국권회복가>에서 ‘대한’, ‘대한제국’이라는 말이 쓰이고 <수절가>에서 ‘우리 학생들’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1907년 귀국하여 신민회를 조직하고 학생교육운동을 준비 혹은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 가사들을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같은 노트에 수록된 <국권회복가>와 <수절가>의 내용은 <애국가>와 전적으로 일치한다. 그리고 도산의 친필노트에 있는 <무궁화가 2>는 아래아(ㆍ)를 많이 쓰고 ‘ㅑ, ㅕ, ㅖ’와 같은 복합중모음을 쓰기 때문에 매우 복잡하게 표기되어 있다.
이에 반해 윤치호의 『찬미가』에 수록된 “동해물과 백두산이”는 아래아나 중모음을 쓰지 않아서 매우 단순하고 간결하게 표기되어 있다. 윤치호는 간결하고 단순한 한글표기를 주장했다. 안창호가 윤치호의 『찬미가』에 수록된 <애국가> 표기를 옮겨 쓴 것이 아니라, 윤치호가 안창호의 복잡한 <애국가> 표기를 자신의 방식으로 옮겨 쓴 것으로 여겨진다. 만일 <애국가>가 윤치호의 작품이라면 안창호는 윤치호가 표기한 대로 그 곡을 옮겨 썼을 것이다. 남의 작품을 임의로 복잡하게 표기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친필노트에 수록된 <애국가>, <국권회복가>, <수절가>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정신과 의지, 기상과 절개, 절실함과 간절함, 살고 죽음을 넘어서 ‘힘쓰고 힘쓰자’는 불굴의 의지와 혼이 하나로 통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이 세 곡이 같은 저자의 작품이며, 안창호가 현행 <애국가>의 작사자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친필노트에는 ‘제14 무궁화가 2’ 다음에 ‘제15 국권회복가’(第十五 國權回復歌), ‘제16 수절가’(第十六 守節歌)가 나온다.

<국권회복가>
1. 회복셰 독립국권, 대한독립국권 / 어셔 밧비 어셔 밧비 회복겠네
(후렴) 곤 것과 어려움 견듸고도 아라 / 내 나라 독립국권 회복셰다
2. 밧부도다 우리 동포 내 나라 위해 / 힘을 쓰고 힘을 쎠셔 독립셔다
3. 졍신찾셰 졍신찾셰 대한뎨국졍신 / 개개인의 노슈(뇌수?, 腦髓) 즁에 관쳘세다
4. 단결셰 단결셰 우리나라 동포 / 국권회복 단결셰다
5. 쥭더라도 나라 위해 쥭고 만셰고 / 사더라도 나라 위해 사자 셰다
6. 위국 우리들이 자국졍신 / 나의 나라 나의 일 내가 셰다


1907-10년은 대한제국이 기울어가는 시기였으나, 그렇기 때문에 국민 대다수는 더욱 대한제국(조선왕조)과 황제에 대한 존경심과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국권회복가>에서 “대한제국 정신”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과 <애국가>에서 “님군을 섬기며”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은 이런 시대상황을 반영한다.

<수절가>
1. 뒤 동산 져 숑쥭 그 졀개 직히랴고
찬셔리 쌰힌 눈 견디여 홀노 푸르렀네
중 책임 맛흔 쳥년 우리 학생들


<국권회복가>와 <수절가>는 주요한의 『안도산전서』에는 나오지 않는 노래들이다. 도산의 가사들 가운데 아직도 묻혀 있거나 분실된 것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먼저 <국권회복가>와 <수절가>에서 도산의 사상적 정신적 특징과 성격을 나타내는 문구를 살펴보자. <국권회복가> 1절에서 “어셔 밧비 어셔 밧비 회복겠네.”라고 한 것은 절박함과 부지런함을 강조한 도산의 심리를 드러낸다. 도산은 늘 시국의 위중함을 느끼고 절박한 심정으로 앞장서서 부지런하게 행동하였다. 2절 “밧부도다 우리 동포 내 나라 위해 / 힘을 쓰고 힘을 쎠셔 독립셔다.”는 바쁘게 움직이고 일해야 함을 강조하며 “우리 동포”와 “내 나라”를 말한다. 도산에게 한민족은 우리 동포이고 대한은 내 나라다. ‘우리’라는 민족적 공동의식과 ‘나’라는 주체의식과 책임의식이 결합된 것은 도산의 사상적 특징이다. “힘을 쓰고 힘을 쎠셔”는 공리공론을 버리고 무실역행을 강조한 도산의 정신과 사상을 잘 드러낸다. 국권회복가 1-2절에 나오는 절박한 심정, 나와 나라를 일치시키고 힘써 독립하자는 간절한 생각은 <애국가> 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의 간절하고 사무친 염원과 잘 통하는 심정과 생각이다.
3절에서 “대한제국 정신을 개개인의 뇌수 속에 관철합시다”라는 문구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과 정신을 사무치게 일깨워 바로 세우자는 도산의 정신을 잘 나타낸다. ‘뇌수’라는 말은 1906년 말에 쓴 ‘대한신민회 취지서’에도 나오고 1907년 5월 12일과 12월 7일의 연설에서도 나타난다. “우리 국민의 뇌수가 홀연히 열리고”3 “백두산과 구월산의 기운을 받고 얼을 기른 우리가 어찌 저런 무리들로 타락할 수 있겠는가? 흉금뇌수를 깨끗이 씻고 침략국과 개전하여 국권을 회복하자.”4 “미세한 행위나 작은 항목이라도 그 낡은 껍질을 힘써 제거하고 그 새로움을 시도하여 오직 신사상과 신지식을 뇌수에 흘러들어가게 하여 신선하고 완전한 인재가 되어 신세계에 신문화를 발달하기로 힘쓰기 바란다.”5
도산이 ‘뇌수’라는 단어를 이렇게 자주 쓰는 것은 그의 생각과 염원이 관념적이거나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에 체화된 절실하고 절박한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대한제국 정신을 개개인의 뇌수 속에 관철합시다”라는 문구는 몸과 마음에 완전하게 체화된 신념과 흔들림 없는 정신을 나타내며, 이것은 <애국가> 3절의 ‘가을 하늘’, ‘밝은 달’ 같이 이지러지거나 깨지지 않고 흔들림 없는 “우리 가슴 일편단심”과 일치한다.
‘단결’을 세 차례나 반복하여 강조하는 4절도 민족의 대동단결과 통일, 흥사단의 신성단결을 강조한 도산 철학의 핵심을 드러낸다. 죽어도 나라를 위해, 살아도 나라를 위해 살자는 5절의 가사는 죽을 각오로, 목숨과 정성을 다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살자는 도산의 신념과 실천을 반영한다. 6절에서 “나의 나라 나의 할 일 내가 합시다”라고 한 것은 나라를 위하는 우리가 우리나라 정신을 찾아서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나’와 ‘나라’를 일치시키는 도산 철학의 핵심 원리를 나타낸다. 도산처럼 ‘나’를 중심에 놓고 나의 책임을 강조하고 무슨 일이든 내가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사람은 없다.
후렴 “곤 것과 어려움 견듸고도 아라 / 내 나라 독립국권 회복셰다”도 독립운동을 하는 도산의 치열하며 강인한 정신을 잘 나타낸다. 도산은 늘 곤경과 시련을 견디면서 즐거이 나라를 위해 일하자고 역설하였다. 나라를 잃은 사람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울 때 곤경과 시련을 겪는 것은 당연하다. 임시정부 시절에도 도산은 곤경과 시련 속에서 즐거이 일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자고 하였다. 도산의 이런 사상과 정신은 그의 일기, 연설문, 편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마음 한뜻으로 단결하고 단합하여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자는 정신이
<애국가>의 근본 정신이다. 5절 “쥭더라도 나라 위해 쥭고 만셰고 / 사더라도 나라 위해 사자 셰다”는 도산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애국연설을 한 후 모인 청중들이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게 한 것과 일치한다. 또, 죽거나 살거나 나라를 위해 살자는 것은 <애국가> 4절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와 일치한다.
이 문건에서 <수절가>는 아쉽게 1절만 남았다. 이 가사를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자면 이렇다. “뒷동산의 소나무와 대나무는 그 절개를 지키려고 / 찬 서리 쌓인 눈을 견디고 홀로 푸르렀네 / 중한 책임 맡은 청년 우리 학생들.” 찬 서리와 쌓인 눈을 견딘 송죽의 절개는 <애국가> 2절 바람과 서리에도 변함 없는, 철갑을 두른 소나무의 기상과 일치한다.
이렇듯 <애국가>와 <국권회복가>, <수절가>는 시상과 용어, 표현의 외적 일치를 보일 뿐 아니라 정신과 신념의 내적 일치를 드러낸다. <국권회복가>와 <수절가>는 마치 <애국가>의 속살을 드러내듯 <애국가>의 심정과 정신을 보다 깊고 명확하게 드러낸다. 따라서 <국권회복가>와 <수절가>를 지은 도산이 <애국가>를 지었다고 결론을 지을 수 있다. 도산이 <애국가>를 지은 후 이를 부르고 보급하는 과정에서 <국권회복가>와 <수절가>를 지었을 것이다.
청년 학생들에게 ‘찬 서리와 쌓인 눈을 견디고 홀로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의 절개’를 지키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분명히 스스로도 그런 절개를 지키는 사람일 것이다. 도산은 평생 소나무와 대나무보다 더 푸르고 깨끗하게 절개를 지켰다. <국권회복가>와 <수절가>에 나타나는 높고 굳은 절개는 <애국가>와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절을 거듭한 윤치호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1 ‘친필노트’는 안용환이 애국가 연구자 임채승에게서 받은 2쪽의 문건이다. 안용환은 이 문건의 필체를 감정 전문가에게 의뢰했고, 도산의 친필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안용환, 『독립과 건국을 이룩한 안창호 애국가 작사–도산 친필 ‘제 14 무궁화가 2’를 중심으로』(청미디어, 2016), 속표지, 66쪽 이하.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의 ‘무궁화’에 대한 설명 중 일부 인용.
(https://encykorea.aks.ac.kr)
3 “대한신민회 취지서”, 주요한 편저, 『안도산전서』(흥사단, 2018), 1068.
4 안창호, “삼선평연설”, 주요한 편저, 위의 책, 583.
5 안창호, “서북학생친목회 연설”, 주요한 편저, 위의 책, 588.



박재순 |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신대학교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장,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 씨사상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씨사상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삼일운동의 정신과 철학』, 『씨사상』,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다석 유영모』 등이 있다.

 
 
 

2019년 9월호(통권 7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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