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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신학·목회 (2019년 4월호)

 

  소설 속에 비친 상해 임시정부
  

본문

 

| 문인들의 상해 체험

1910년 한일강제병합을 전후한 시기에 많은 애국지사들이 상해에 망명했다. 일제 식민주의가 갈수록 강고해지면서 지사들의 망명 행렬은 계속되었고, 1919년 3・1운동 뒤에는 아예 봇물을 이루다시피 했다.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나섰다가 쫓기는 처지가 된 애국지사들과 일제 식민주의 현실에 불만을 품은 젊은 지식인층의 망명이 중심을 이루었다.
왜 상해였을까? 먼저 망명한 애국지사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내에서 빼앗겨버린 정부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상해행은 도피가 아니었다. 후일을 도모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조명희의 <낙동강>에서 주인공 로사가 식민주의에 희생된 애인의 뜻을 이어 투쟁하기 위해 북행 열차에 몸을 실은 것이나, 최서해의 소설 〈탈출기〉의 주인공들이 억압과 수탈을 견디다 못해 필사항전을 각오하고 탈출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앞서간 망명지사들을 만나 임시정부에 등을 대고 그들의 지도를 받으며 나라 찾기에 신명을 바치기 위한 것이었다.
같은 시기 문인들의 상해행도 잦았다. 한말의 대표적인 한학자 김택영이 나라가 기울어가는 것을 슬퍼해 합병 전 상해에 망명한 것을 시작으로 신규식과 신채호 등의 발길이 뒤를 이었다. 이광수가 상해로 망명한 것은 1919년의 일, 주요한의 망명도 비슷한 시기였다. 두 사람은 함께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기관지 「독립신문」의 간행을 맡아보는 등 출판 업무에 종사했다. 그해 말에는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옥에서 풀려난 심훈이, 이듬해 초에는 주요한의 아우 주요섭이 상해로 건너갔다. 후에 <황혼>이라는 걸출한 ‘상해 소설’을 남긴 최상덕의 상해행도 이 무렵인데, 그가 1921년 혜령전문학교 중문과를 졸업했다 했으니 그 이전인 1918-19년쯤의 일이 될 것이다. 그는 「상해일일신문」의 기자로 일하면서 임정과 그 요인들의 사정을 비교적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던 것으로 짐작된다. 「개벽」의 상해 특파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는 강노향 외에 유진오・조용만・조벽암・김소엽・백신애 등도 일시적이나마 상해 체험을 했던 문인들이며, 해방 직전에는 백철・김사량・노천명 등의 상해행도 확인된다.
이로써 상해는 우리 문학에 서울, 도쿄와 함께 또 하나의 심상지리(心象地理, imaginary geography)적 도시 공간이 되었다. 이들 문인은 자신의 상해 체험을 작품 속에 적실하게 재현해냈다. 상해 임시정부와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항일 애국지사들을 중심인물로 내세운 작품들을 살펴보자. 그들의 프리즘에 비친 임정 또는 애국지사들의 면면은 어떠했을까?

| 지사들의 고뇌 혹은 파쟁과 탈선

해방 뒤인 1945년 12월 19일, 지금은 헐리고 없는 옛 서울운동장에서 ‘임정 개선 환영대회’가 열렸다. 홍명희와 송진우의 환영사가 있었고, 김구와 이승만의 답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결의문도 채택했다. 신문은 이날 모여든 군중의 수가 무려 10만 명이라고 보도했다. 환영대회는 이후 각 지방에서도 이어졌다. 실로 대단한 열기였다. 당시 임정과 그 요인들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 같은 신뢰에는 하나의 독립정부 수립에 대한 기대가 함께 실려 있다.
그러나 임정에 대한 평가는 그리 단순해 보이지 않는다. 임정의 정통성이나 법통성을 의심 없이 신뢰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이를 회의하고 부정하는 견해들도 만만치 않다. 북한에서는 아예 “인민의 피를 빨아 외교놀음이나 펼친 부르조아 정권”으로 매도하기도 했다. 정치적, 법률적 이해가 충돌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임정 자체의 내부 모순과 역기능에 대한 기억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이현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성 인식”)
임정은 출범 초기부터 만만치 않은 장애에 직면하고 있었다. 쓰레기통을 뒤져 버려진 채소 부스러기를 가려내 먹어야 할 정도의 자금난은 고질이었다.(『백범일지』) 겨우 1-2천 명에 지나지 않는 교민 사회를 토대로 하고 있는 만큼 인력난 또한 심각했다. 만주・연해주・미주 등지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는 교민들을 지도 통할하는 일은 물리적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미주를 제외한 교민사회 어디에나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 파괴 공작에 맞서 싸우는 일도 난제였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적폐 중의 적폐라 할 파쟁이었다. 좌우의 대립과 기호파/서북파의 갈등은 망명지에서도 여전했고, 투쟁 방략을 둘러싼 외교론/준비론/전쟁론 등의 알력, 조직 개편을 둘러싼 창조파/개조파의 각축은 촌보의 양보도 없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상이 우리 소설의 서사 프리즘 안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실망과 분노와 좌절감의 표백이자, 냉엄한 비판이고 혹독한 질책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환국 후 국민들로부터 쏟아진 열렬한 환대는 그래서 아주 엉뚱스럽기까지 한 것이었다. 따라서 상해 소설들에 비친 지사들이란 하나같이 나라를 찾겠다는 처음 뜻을 잃고 방황하는 나약한 룸펜이거나 명예욕이나 지배욕의 화신, 또는 타락한 속물들일 뿐이다.
최상덕의 <황혼>(1927)은 당시 상해의 독립운동가들이 극도의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며 싸워야 했던 현실적 사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은 3・1운동에 앞장섰다가 쫓기는 신세가 되어 처자를 두고 홀로 상해에 온 망명지사라 했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그가 고국의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지만, 교사인 아내의 반응은 냉담하다. “나라 일이고 무엇이고 다 집어치우고” 돌아와 처자식이나 돌보라는 투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낯선 사내’를 동행하고 직접 상해에 나타났다. 전향하고 귀국할 것을 종용하기 위해서였다. 낯선 사내는 밀정이었다. 감옥에 갈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상당한 생활 보장까지도 얻을 수 있다며 끈질기게 설득하려 들었다. 해외에만 나와 있다고 정당한 것은 아니며 국내에서도 얼마든지 나라 위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결국 세상일이란 다 자기 잘살자고 하는 것인 만큼 처자를 사랑하고 위한다면 고국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지사로서의 길을 강경하게 고집하던 주인공도 결국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
말미의 상당 부분이 삭제당한 상태여서 결말은 알 수 없지만 전체적인 맥락이나 주제를 파악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다. 소설은 당시 상해의 임정 요인들이 어떤 조건 속에서 싸우고 있었는지 보여주면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 부임 이후 추진된 친일파 육성과 민족 분열정책의 실상을 정면으로 조명하고 있어 주목을 받았다. 일제는 독립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친일적 정치선전 강화, 친일 세력의 보호・육성과 이의 이용, 한국인들에게 최소한의 참정권과 공직을 보장해주기 위한 지방행정제도의 개편, 계층별 차별 통치 등을 내용으로 하는 ‘4대 정책’을 채택하고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모여 있는 상해에는 많은 밀정들이 직접 임정 내에 침투해 감시, 회유, 테러 등을 감행하는 일도 잦아 요인들의 활동이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심훈의 <동방의 애인>에서는 밀정이 임시정부 외교부에 이름을 걸어놓고 지사들의 이간, 분열을 조장하며 우편국이나 부두, 정거장 등을 무대로 동포들의 동정을 살피기도 한다. 상해의 망명지사 중에서 옥성빈(玉成彬)과 옥관빈(玉觀彬) 형제, 유인발(柳寅發), 김우진(金宇鎭) 등이 이 같은 일제의 분열정책에 의해 친일파로 타락해갔다. <황혼>은 당시 일제가 애국지사들을 회유하면서 동원한 논리가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증언해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큰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은 임정 요인으로 활동하다 1921년 3월 귀국한 이후 식민주의 협력의 길로 들어선 이광수를 모델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최상덕이 임정 초기의 사정에 밝았다면 1930년대 사정에는 김광주만큼 밝은 작가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상해 거주 기간이 16년이나 된다는 점, 임정 가까이에서 김구를 도우며 지사들의 면면을 자주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 형 동주가 임정 요인들과 교분이 두터웠다는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가 상해 지사들의 실상을 가장 적극적으로 호명해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방 이전의 작품 대부분이 상해 배경의 작품이라 할 만한데, 그중에서도 <포도의 우울>, <상해와 그 여자>, <장발노인>, <남경로의 창공> 등은 망명 지사들을 전면에 내세워 당시 상해 독립운동의 실태를 적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들로 돋보인다.
<포도의 우울>(1934)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독립운동가의 내면적 고뇌를 그리고 있다. 아내와 동거하기 전인 2년 전만 해도 일에 대한 “젊은이의 정열”을 가지고 있던 주인공은 지금 일에 대한 정열도 잃고 생활인으로서도 철저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심한 회의와 갈등을 겪는다. 산통을 겪고 있는 아내를 둔 채 돈을 구하러 나왔다가 실패하고 빈손으로 들어간 주인공은 갓 태어난 아기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자괴심에 젖는다. 1920-30년대 룸펜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티프이지만, 주인공이 다름 아닌 망명지사이기에 그 역사적 의의는 각별하다. <황혼>에서도, <포도의 우울>에서도 주인공들은 모두 가난 때문에 고통받는다. 임정의 요인들이 일상의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극도의 가난에 시달리며 싸워야 했던 사정은 여러 자료들을 통해 확인되지만, 소설은 가난이 어떻게 지사들의 신념과 의지를 위협하고 있는지 핍진성 있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상해와 그 여자>(1932)와 <남경로의 창공>(1935)은 투쟁 일선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와 아편쟁이 속물로 전락한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상해와 그 여자>의 김의사, <남경로의 창공>에 나오는 명수의 부친과 교수 A가 그들이다. 모두 “한때에는 XX단이니 XX결사이니 하고 젊은 혈기에 상해 천지를 자기 세상같이 알고 돌아다니던” “지사요 망명객으로 자처하는 사람”(김의사), 남에게 의지를 굽히는 일은 죽기보다도 싫어하던 ‘지사’(명수의 부친), “사회가 어떻고 민족이 어떻다고 떠들며 가장 진실한 인간으로 자처하던” 인물(교수 A)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아편쟁이가 되어 간호부나 농락하며 교민사회와는 인연을 끊다시피 하고 살거나, 아편 밀수업자로 전락하여 “가진 추악한 행동을 떡먹드키 하고 있는 한 뿌록커”가 되고, ‘샹하이안의 생활’ 운운하며 술과 춤과 계집에 빠져 사는 사람으로 전락해 있다.
작품에는 이들이 지사로서의 초지를 잃고 이렇게 전락하게 된 사정은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위선자’, ‘무슨 지사연 하는 꼴’, ‘남을 지배해보겠다는 정치적 야심’, ‘영웅적 야심’ 등의 거친 언사들을 써가며 지사 집단을 매도하고 있는 작중 인물의 진술을 통해 그 의도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제대로 된 역사의식이나 세계관 같은 정신적 무장이 결여된 채 속물적 욕망을 앞세워 지사 집단에 흘러 들어온 이들이 적지 않음을 폭로하고자 한 것이다. 지사들이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조건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지 못하고 제시된 대안도 취약하지만 당시 지사 집단의 실상을 적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할 것이다.
이 같은 비판은 <장발노인>(1933)에 와서 더욱 강화된다.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동료 지사에 대해 테러까지 서슴지 않는 야만성을 폭로해 보이는 것이다. “지사(志士)라는 명예욕에 사로잡혀 모든 아름다운 인간성을 저버린 얼치기 혁명 청년”을 내세운 연극을 통해 지사 집단의 위선을 풍자한 작중 인물은 망명지사들을 욕하고 애국심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집단폭행을 당해 입원한다. 그를 문병한 주인공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해온 지사로서, 지사 집단의 당파싸움에 실망하여 일체의 주의나 파벌에 초연한 입장이다. 그의 눈에 비친 지사 집단은 명예욕과 지배욕에 사로잡힌 자들이며, “더러운 영웅심리에 넋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치열한 당파싸움에 실망하여 기회가 있는 대로 그들의 부정적 행태를 비판하고 폭로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던 그는 오히려 “혁명적 타락자”로 매도되어 암살당하고 만다. 실로 소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사건이지만 우리의 경우 허구를 압도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지사가 지사의 총에 맞아 죽은 경우는 손에 꼽기도 어려울 정도이니 말이다.

| 대안으로서의 사회주의

1930년 「조선일보」에 연재하다 검열에 걸려 중단된 『동방의 애인』은 1920년대 초 심훈의 상해 체험이 모티브가 된 작품이다. 심훈이 중국 망명길에 오른 것은 1919년 말쯤이었다. 3・1운동에 앞장섰다가 옥살이를 하고 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아 나온 뒤였다. 그가 처음 당도한 곳은 북경. 누군가로부터 소개받은 우당 이회영 선생을 찾아갔다. 그의 반연(絆緣)으로 단재 신채호도 만났다. 심훈으로서는 역사적 순간이라 할 만하다. 왜냐하면 앞으로 살아갈 그의 일생의 중심을 민족주의에서 사회주의로 향하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당과 단재가 누구인가? 당시 그들은 모두 임정과는 등을 지다시피 하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승만의 외교론이나 안창호의 준비론 같은 임정의 투쟁 방략에 격하게 저항해 아예 상해를 떠나 북경에 머물며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점차 임정 노선과는 거리가 먼 무정부주의에 깊이 젖어들었다. 심훈은 우당의 집에서 “몇 달”을 묵는 동안 단재의 우거에서 “며칠 저녁 발칫잠을 자”기도 했다.(<필경사 잡기>) 여기서 그는 파쟁으로 조용할 날이 없는 상해 임정과 지사 집단의 실상을 상세히 전해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후 심훈은 북경대학 유학을 단념하고 상해로 갔다. 비슷한 시기 박헌영이 상해에 있었는데, 심훈과는 경성제일고보 동창생, 나이는 박헌영이 한 살 위이다. 박헌영은 3・1운동에 참여했으나 요행히 체포도, 퇴학도 면할 수 있었다. 한발 앞서 상해에 도착한 박헌영은 이미 이르크츠파 공산당원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임원근・김단야・허정숙・주세죽 등의 혁명가들이 있었다. 심훈은 이들과 어울리는 동안 상해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고, 임정의 파쟁과 탈선에 실망하는 대신 이들의 혁명운동에 공명했을 것이다. 박헌영에 대한 그의 신뢰는 ‘신의주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박헌영의 참담한 모습을 보고 분노하여 <박군의 얼굴>이라는 시를 쓴 사실로 미루어 짐작된다.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 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로 시작하는 바로 그 시이다. 이들 혁명가들에 대한 공명은 자연스레 심훈을 사회주의의 길로 인도했다. 1922년 9월, 그가 사회주의 문학단체 ‘염군사’(焰群社) 조직에 참여한 것은 ‘사회주의자 심훈’이라는 선언적 의미가 있다.
상해에서 만난 혁명가들을 불러들인 작중인물들은 모두 3・1운동에 앞장섰다가 옥살이 후 상해에 망명한 지사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임정의 민족주의 노선과는 대립적인 사회주의 계급 해방 노선에 서 있다. 임정에 대한 ‘환멸’이 큰 요인이었다.

- 여기 형편이 그렇도록 한심한 줄은 몰랐어요. 무슨 파 무슨 파를 갈라가지고 싸움질을 하는 심사도 알 수 없지만, 북도 사람이고 남도 사람이고 간에 우리의 목표는 꼭 한 가지가 아니야요? 왜들 그럴까요?
- 모두 각자 위대장이니까 우선 앞장을 나선 사람들의 노루꼬리만한 자존심부터 불살라버려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단체 운동에 아무 훈련도 받지 못한 과도기의 인물들이 함부로 날뛰는 까닭도 있지요.
- 몇 시간 동안 말씀 들은 것만으로는 쉽사리 이해할 수가 없지만 제 생각 같아서는 그네들의 전날의 XX를 망해 놓던 그 버릇을 되풀이하는 것 같구먼요. 적어도 몇만 명이 X린 붉은 X를 짓밟으면서 그 위에서 싸움이 무슨 싸움이야요?”
- 나는 그들이 하는 일은 듣기만 해두 속이 상합니다. 가공적 XX주의! 환멸거리지요. 우리는 다른 길을 밟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다른 길’이 바로 사회주의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지난날의 모든 관념과 ‘삼천리 강토’니 ‘이천만 동포’니 하는 민족에 대한 전통적 애착심까지도 버리고 새로운 문제를 내걸었다.”라고 했다. “‘왜 XX를 받느냐?’ 하는 문제는 ‘왜 굶주리느냐’하는 문제와 비교하면 실로 문제거리도 되지 못할 제삼 제사의 지엽문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근본문제”가 해결되면 “자연히 소멸될 부칙” 같은 조목이라고도 했다. 이 같은 결론은 진지한 과학적 탐구의 결과임이 드러나 있다. 지사에서 밀정으로까지 전락한 경우나, 처음 뜻을 잃고 엽색 행각을 일삼고 있는 인물 등도 임정 인사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수단이다.

| 임정의 반공주의

1936년 8월 상해에서 창간된 「한청」(韓靑)이라는 잡지에 두 편의 소설이 발표되었다. 1937년 2월호에 실린 <눈 오는 국경의 밤>과 같은 해
7월호에 실린 가 그것이다. 지은이는 각각 ‘무지’(無之)와 ‘고죽’(孤竹)이라 되어 있으나 실명은 확인되지 않는다. 두 작품은 모두 1930년대 중반 상해 임정의 노선과 이념을 대변하고 있다. <눈 오는 국경의 밤>은 임정의 항일 무력투쟁 노선을, 는 반사회주의 노선을 선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실기소설이라 할 수 있는 <눈 오는 국경의 밤>은 홍범도가 이끌던 대한독립군 휘하 만주 항일무장투쟁대의 국내 진공작전을 그리고 있다. 대한독립군은 1919년 8월에서 10월 사이 압록강 대안의 혜산진, 갑산군의 금정 주재소, 평북 강계의 만포진, 자성군 등 일제 통치기관을 습격하는 등 국내 진공작전을 펴 70여 명의 일본군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린 바 있다. 당시 임정에서는 두 명의 요원을 파견해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눈 오는 국경의 밤>은 강령에 무장투쟁론을 항일투쟁 방략으로 제시하고 있던 한국국민당의 노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당시 임정은 김구가 이끌던 한국국민당이 주류였다.
는 김구와 임정의 반사회주의 이념을 대변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임정은 출범 초기부터 좌우의 대립과 갈등으로 끊임없는 내홍에 시달려야 했다. 1926년 말부터 임정의 실질적 지도자 역할을 도맡은 김구는 우파의 철저한 민족주의 항일투쟁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조선혁명당을 이끌던 김원봉 등의 좌파 세력에 극력 맞서고 있었다. 는 이 같은 김구의 이념과 지도 노선을 충실하게 대변하고 있는 작품인 셈이다. 작품은 크게 두 개의 서사 단락으로 구분된다. 앞부분은 이제 막 혁명 과업을 위해 만주로 떠나는 젊은 지사에게 들려주는 노 혁명가의 당부의 말로 되어 있으며, 뒷부분에서는 해삼위 일대에서 자행되는 볼셰비키들의 무자비한 만행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에 나타나는 일관된 의도는 소련 공산당에 대한 비판이며, 맹목적으로 이에 부동하고자 하는 국내 공산주의자들을 향한 공격이다. 작품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무조건하고 사회주의를 반대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늘까지의 소위 한국공산당이라는 것은 조국을 「모스코바」에 팔아버리는 임무를 하였을 뿐이다. 그들은 조국의 진정한 독립을 방해한다. 나는 장내에 우리의 건설에 있어서 「볼셰비키」 또는 「파쇼」 식의 강압정권을 반대하고 오직 모든 정치사상의 좋은 것을 취하여 우리 정세에 맞는 인도와 정의에 입각하야 계급적 대립이 없는 자유평화로 된 공화정체를 세워야 되겠다고 본다. 그럼으로 조국의 이익과 민족의식을 독약같이 여기려는 공산당과 우리 독립운동자의 길은 두 갈래로 뚜렷하게 나뉘었다.

노선 대립을 겪고 있던 임정의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듯하다. 작품이 발표된 「한청」은 김구가 이끄는 한국국민당의 전위조직이던 한국청년단의 기관지였다. 모두 37명의 청년들로 구성된 한국청년단은 김구의 장남 김인과 안중근의 조카 안우생이 중심인물이었으며, 김구의 지도 노선을 따르고 있었다.(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연구』) 「한청」은 임정의 기관지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 ‘독립운동’ 구멍가게

김사량이라는 소설가가 있었다. 평양 부잣집 아들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아들이기도 했다. 1940년 그의 소설 <빛 속으로>가 일본 최고의 권위를 지닌 아쿠타가와 상(Akutagawa Prize) 최종 후보에 올라 이름을 날렸으나, 해방 뒤 북쪽에 남아 한국전쟁에 종군하다가 죽었다. 그가 남긴 작품 중에 <노마만리>가 있다. 흔히 장편 기행문이라 일컫지만 실기소설이라 하면 더 좋을 법한 작품이다. 일제 패망 직전 그가 ‘재지(在支)반도출신학도병위문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탈출하여 태항산 조선의용군 근거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기술했다. 작품에는 남경 시절의 임정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어 주목된다.

무엇보다도, 중경이라는 곳에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분명했다. 중경이라는 곳은 구도자(求道者)의 성지(聖地)이기는 커녕, 아시아의 마드리드 같은 곳이다. 국가와 민족의 신성한 이익을 배반하고 투항과 퇴각의 일로(一路)를 걸어 만리의 오지 속에 숨어든, 내전음모를 실현시키는 데에 여념이 없었던 반동정부(反動政府)의 수도, 이런 정부의 배후를 창녀처럼 맴돌면서, 장개석의 테러단으로 유명한 남의사(藍衣社)나 C.C단이 던져주는 푼돈으로 목을 축이고 있는, 셋방살이 임시정부 선생님들의 경영으로 세워진 ‘독립운동’ 구멍가게를 찾아가기에는 산고갯길이 너무나 험했다. 기껏 거기서 배우는 것이 있다고 해봐야 장개석의 매국흥정, 그리고 테러 짓거리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귀에 들려오는 소식들 또한 중경 임시정부 내부의 파벌싸움이나 권력투쟁에 관한 것 등등 비참한 것들 일색이었다.

앞의 작품들이 모두 상해 시절의 임정과 지사들을 조명하고 있는 반면, <노마만리>는 남경 시절의 임정과 그 요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임정은 상해를 떠나 항주, 남경 등지를 떠돌다 1939년 마지막으로 중국 내륙의 중경에 자리잡았다. 북경과 상해에 이어 무한3진까지 함락시킨 일제가 점차 내륙 깊숙이 침공해 들어감에 따라 이리저리 쫓겨다녀야 하는 임정의 사정은 극도로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후원자는 장개석 국민당 정부였다. 임정은 일제와 맞선 채 모택동 공산당 세력과도 싸워야 하는 국민당 정부로부터 물질적 후원과 병력 양성 등을 기대고 있었다. 김사량은 이런 사정 속에 있던 중경 시절의 임정을 거칠게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작품에는 이 밖에도 김사량이 1944년 상해 방문 시 임정에서 보내온 요원을 만나 탈출을 권유받는 장면도 있다. 김사량은 이때 요원의 정체를 확신할 수 없어 태도를 유보하는데, 당시 상해 일원에 얼마나 많은 밀정들이 활동하고 있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 맺는말

일제강점기 임정 또는 임정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 온 지사들을 주요 모티프로 불러들인 소설들을 살펴보았다. 임정이 우리 독립운동사에 새긴 의미나 성과와 무관하게 그에 대한 문학적 평가는 지극히 부정적이고 냉담하다는 사실이 놀랍다. 가장 큰 요인은 파쟁이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임정의 아이콘처럼 각인되어 있고, 해방공간에는 ‘좌우합작’을 명분으로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참석을 강행하는 결기를 보인 백범 김구조차 임정 시절엔 좌파 사회주의자들과의 싸움에 그토록 강경히 맞섰다는 사실 또한 놀랍다. 해방 때까지의 작품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긴 하지만 임정과 그 요인들의 행적에 대한 곱지 않은 인식은 해방 이후의 작품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표언복 |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다 퇴직했다. “해방 전 중국 유이민 소설 연구”로 학위를 받았으며, 일본, 러시아, 미국 유이민 소설 연구로 관심을 확장해 후속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2019년 6월호(통권 7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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