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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초기 선교사의 한국어 교사
문화·신학·목회 (2019년 4월호)

 

  로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함께 성서를 번역한 이응찬
  

본문

 

| 고려문, 연행사가 출입국 수속을 하던 책문

한국 기독교 사상 첫 번째로 선교사가 한국어 교사를 만나 성서를 번역하던 고려문은 예전에 책문(柵門)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던 옛 마을이다. 연암 박지원은 팔촌 형인 박준원이 1780년에 건륭제의 70세 진하사절 정사로 청나라에 가게 되자 개인 수행원인 자제군관으로 따라갔다. 그는 압록강 건너 첫 마을 책문에 도착한 후 첫인상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말을 빨리 몰아 7-8리를 더 가서 책문 바깥에 닿았다. 양과 돼지가 산에 가득하고, 아침 짓는 연기가 푸른빛으로 둘러져 있었다. 나무쪽으로 목책을 세워서 우리나라와 중국의 경계를 간단히 밝혔으니, “버들을 찍어서 울타리를 삼는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책문에는 이엉이 덮였고, 널판자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목책에서 수십 보 떨어져서 사신들이 천막을 치고 조금 쉬려니까 방물이 다 도착했으므로 책문 밖에 쌓아 두었다. 여러 되놈이 목책 안에 늘어서서 구경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또 급하게 물었다.
“한 상공과 안 상공도 오시오?”
이들은 모두 의주에 사는 장사꾼이다. 해마다 연경으로 장사를 다녀서 이름이 높고 수단도 매우 뛰어난데다, 저쪽 사정도 잘 아는 자들이라고 한다. ‘상공’(相公)이란 장사꾼끼리 서로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1


사신들이 갈 때는 으레 정관(正官)에게 팔포(八包)를 내렸다. 정관은 비장과 역관까지 모두 30명이다. 예전엔 나라에서 정관에게 출장비를 주지 않고 인삼을 몇 근씩 중국에서 팔아 쓰게 했는데, 이 짐 보따리를 팔포라고 한다. 박지원 당시에는 나라에서 주지 않고 각자 은을 가지고 가게 하는데, 다만 액수를 제한하여 당상관은 3,000냥, 당하관은 2,000냥을 허락하였다. 이 은을 가지고 북경에 가서 여러 물건으로 바꿔 이익을 남기는 것이다.
가난해서 제 돈으로 은을 가지고 갈 수 없으면 그 포의 권리를 파는데 송도, 평양, 안주의 장사꾼이 포의 권리를 사서 그 사람 대신 은을 넣어 가지고 간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 북경에 들어가지 못하므로, 다시 포의 권리를 의주 장사꾼에게 넘겨주어서 물건을 바꿔 오는 것이다.

책문 밖에서 다시 책문 안을 바라보니, 수많은 민가가 다섯 들보 정도 높이 솟아 있고, 띠와 이엉을 덮었다. 등성마루가 훤칠하고 문호가 가지런하며 네거리가 직선이어서, 양쪽 가가 마치 먹줄을 친 것 같았다. 담은 모두 벽돌로 쌓았고, 사람 탄 수레와 화물 실은 차들이 길에 즐비하며, 벌여 놓은 그릇은 모두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였다. 어디를 보아도 시골티라고는 조금도 없다.(39쪽)


당시 풍경을 그려보자면, 압록강부터 책문까지는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벌판이다가, 갑자기 장사꾼들로 북적대는 시장바닥이 들어선다. 책문은 청나라의 봉금정책에 따라 설치된 버드나무로 만든 울타리, 즉 유조변(柳條邊)의 출입문이다. 유조변은 청나라 황실의 발상지인 용흥지지(龍興之地)를 보호하는 한편, 흑룡강 유역으로 남하하는 러시아에 대비하는 목적으로 만들었다. 버드나무를 꽂아 담장을 만든 형태로, 높은 것은 서너 자이고 낮은 것은 한두 자였다. 조선 후기 관방지도인 ‘조선여진분계도’(朝鮮女眞分界圖)에는 봉황성에서 개원의 위원보까지 6개의 책문이 그려져 있는데, 우리에게는 연행사가 드나들던 책문이 잘 알려졌다.
의주 장사꾼들은 청나라의 국경도시 책문에 자주 드나들며 거래를 하였으므로 중국어도 잘했고, 중국인들과도 친숙했다. 현종 초부터 사절단을 따라가는 상인들뿐만 아니라 책문후시(柵門後市)라는 이름으로 사상(私商)이 묵인되다가 세금을 부과하는 형식으로 공인되었다.
19세기 후반까지도 중국인을 포함한 외국인은 조선에 들어올 수 없었고 조선에서도 의주 장사꾼들만 책문에 들어갈 수 있었으므로,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는 조선어로 성서를 번역하고 선교하기 위해 책문에서 의주의 장사꾼들과 접촉하였다.

| 만주족, 한족, 조선족이 뒤섞여 살게 된 봉금 지역 서간도

남경조약과 천진조약 이후 청나라가 28개 처에 조계지를 제공하자, 수많은 개항장들이 기독교 선교의 거점이 되었다. 산동반도 지부(芝罘)를 거점으로 선교하던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중국지부 총무 윌리엄슨은 1865년에 토마스(R. J. Thomas)에게 한문 성서를 주며 우리나라 서해안을 방문하게 했는데, 1866년에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평양까지 들어간 토마스는 주민들에게 성서를 전하다가 대동 강가에서 순교하였다.
흉년이 계속되자 산동 주민들이 대거 만주로 이민왔으므로, 윌리엄슨도 1867년 봄에 책문으로 와서 한국 선교의 문을 두드렸다. 책문은 병자호란 때에 잡혀간 고려인의 후예들이 산다고 해서 당시 고려문(高麗門)으로도 불렸다. 연행사가 청나라에 가거나 돌아올 때에 책문이 열렸는데, 천주교 선교사들도 이때 몰래 한국으로 들어왔다.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신문 과정에서 이러한 사실을 자백하였다.

추국 죄인 주문모가 우리말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글을 써서 아뢰겠다고 청하였는데, 그 글이 이러하였다.
“이 몸은 대대로 소주(蘇州) 땅에서 살다가 장년이 되어 북경의 천주당(天主堂)에 와서 머물러 살았습니다. 갑인년(1794) 봄에 조선인 지황(池璜)을 만나 동지사(冬至使)의 행차 때에 변문(邊門)이 통하였으므로 비로소 책문(柵門)을 나와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서양인 양동재(梁棟材)가 소개하였습니다.” - 『순조실록』 1801년 3월 16일


주문모는 역관 지황을 따라 책문을 통해 조선에 들어왔는데, 역관들은 책문을 거쳐갈 뿐이지만 상인들은 물건을 사고팔기 위해 책문에 머물렀으므로 접근할 기회가 더 많았다. 19세기 후반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게 했던 책문 바깥의 봉금(封禁) 지역에 이미 만주족과 조선족이 상당수 숨어 들어와 여러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압록강 건너편에 정착한 조선족의 수가 수천 명을 넘어서자, 평안도 후창군 아전 최종범・김태흥・임석근은 1872년 5월 30일부터 7월 11일까지 42일 동안 압록강 건너편 청나라의 봉금 지역을 돌아다니며 월강(越江)한 조선족의 실태를 조사하여 일기를 쓰고, 자신들이 답사한 산야와 강줄기, 마을들을 채색지도로 그려서 『강북일기』를 편집하였다.
평안도에 흉년이 거듭되는 데다가 무산부사가 착취를 일삼자 많은 백성이 별세계 유언비어에 혹해 압록강을 건너오게 된다. 이 지역은 봉금 지역이라 청나라의 행정조직도 없었으므로 만주족들이 자체적으로 ‘회상’(會上)이라는 조직을 결성했는데, 삼수군 건너편에서 후창군 건너편까지 400리에 걸쳐 18개 부락을 하나의 회상으로 만들었다. 이 회상에는 우리나라 사람(조선족)이 193호에 1,673명이나 되어 만주족보다 더 많았다.2 선교사들에게는 책문 일대 서간도가 조선으로 들어가기 위한 통로였을 뿐만 아니라 주변 여러 개의 회상에 흩어져 사는 조선족들 또한 선교의 대상이었다.

| ‘교사 월급’에 대한 이야기로 한국어 회화책을 시작하다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 해외선교부에서 중국에 파견한 로스(John Ross, 1842-1915)는 1872년 8월 23일 상해에 도착했는데, 윌리엄슨은 선교본부에 “로스를 만주의 우장으로 파송하자.”라고 건의하였다. 우장(牛庄)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예배를 인도할 목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구(營口)에서 중국어와 사서삼경을 공부하며 첫 겨울을 보낸 로스는 이듬해 5월 11일에 설교를 할 정도로 중국어에 익숙해졌다. 그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스코틀랜드 시골 마을에서는 19세기 중엽까지도 영어가 아니라 게일어를 썼으며, 로스는 학교에 가서야 정식으로 영어를 배웠다. 어린 시절에 이미 외국어를 배워 일상생활을 했던 로스는 중국어도 빨리 배웠으며, 한국어에도 손쉽게 도전했다.
로스는 1874년 9월(음력)에 고려문이 열릴 때를 맞춰서 고려문에 도착해 한국 상인들을 접촉했는데, 그들은 기독교보다 로스가 입은 옷에 관심이 많았다. 그 가운데 50대 남자 상인이 여관으로 로스를 찾아와 만주어로 대화를 나누다가, 한문 성서를 얻어갔다. 의주로 돌아온 상인이 그 성서를 아들에게 주어 읽게 하였는데, 그 아들과 아들의 친구들이 뒷날 한국 개신교 제1세대 수세자가 되었다. 이 상인이 바로 백홍준의 아버지였다.3
로스는 여동생 캐서린이 1875년에 자신의 동료 선교사 매킨타이어와 결혼하자, 로스는 개항장 영구를 그들에게 맡기고 선교 기지를 심양으로 옮겼다. 1876년 3월(양력)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며 한국의 문호가 개방되자, 로스는 4월 말에 다시 고려문을 방문하였다. 그는 우장에서 데리고 온 하인의 소개로 의주에서 온 소가죽 상인을 만나 두 달치 강사료를 선불하고 한국어를 배우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국경에 주둔하던 병사들로부터 괴로움을 당하자, 서양인을 도와주면 사형에 처해지는 국법이 두려워 그 상인은 사흘째 되던 날 밤에 달아났다.4
그 뒤에도 로스는 여러 사람과 접촉하다가, 드디어 몇 달간 머물며 한국어를 가르쳐줄 이응찬(李應贊)이라는 상인을 만났다. 로스는 월급을 네 냥씩 주기로 하고 봉천에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한문과 중국어를 통해서 배웠다. 그는 한국어를 배우는 속도도 빨라서 이듬해에 한국어 회화 교재인 Corean Primer를 간행했는데, 제1과 내용은 아마도 로스와 이응찬이 처음 주고받은 대화였을 것이다.

Gisang_201904.jpg
ㆍ니 되션 말 보이고쟈 한다
네 나를 션ㆍ싱 ㆍ디졉 하갓너니
ㆍ니 ㆍ디졉 히[하]올리
얼나 주갓슴마
힌[한] 달에 넉냥
됴운 션ㆍ싱은 맛망[당]이 구[국]말 암머니
되션말 보이기 쉽다
ㆍ디국말 보이기 얼엽다5


대국은 중국이다, 언어학습 능력이 뛰어난 로스에게도 한국어는 배우기 쉽고 중국어는 배우기 어려웠던 듯하다. 상해 출판사의 식자공 수준이 낮고 로스 자신도 교정할 능력이 안 되어 틀린 글자가 많지만, 그가 배운 한국어는 평안도 방언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로스는 “머지않아 한국에 나갈 외국 관리 및 상인, 특히 선교사들을 위해” 이응찬과 함께 이 책을 만들었는데, 그는 제1과 첫 문장을 한국어 교사와 강사료를 흥정하는 내용으로 시작했다. 이는 공식적인 한국어 학교가 없는 상황에서 서양인 개인이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가장 먼저 부딪치는 문제가 바로 한국어 교사를 구하고 강사료를 협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로스 자신이 첫 번째 한국인 교사에게 두 달치 강사료를 선불로 지불했다가 뜯기고,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사람을 구하다가 돈만 잃었던 쓰라린 경험이 있었다.
로스가 중국 상해에서 1877년에 간행한 한국어 교재 Corean Primer는 “BEING LESSONS IN COREAN ON ALL ORDINARY SUBJECTS, TRANSLITERATED ON THE PRINCIPLES OF THE ‘MANDARIN PRIMER,’ BY THE SAME AUTHOR.”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로스는 1876년에 이미 중국어 학습 교재인 Mandarin Primer를 저술했는데, 여기에서 사용했던 로마자 음역(transliteration) 원리와 일상생활의 주제를 그대로 적용하여 Corean Primer를 저술한 것이다. 따라서 Corean Primer에 수록된 단원의 주제와 순서는 거의 대부분 Mandarin Primer과 일치하고 대화 문장의 내용도 유사하다.6 Mandarin Primer는 43개의 단원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중에서 우리나라 상황과 맞지 않는 중국의 계절이나 문화 및 관습 관련에 관련된 11개 단원이 삭제되고, 우리나라 서당을 대화 배경으로 삼은 ‘School’ 단원이 추가되어 Corean Primer는 33개의 단원이 되었다. 이는 Mandarin Primer에 사용된 중국어를 이응찬의 도움으로 우리말로 번역하여 저술한 형태이다.
이 책의 본문은 의주 방언으로 된 한국어 대화를 한글로 크게 쓰고, 그 다음 줄에 어절 단위로 로마자 음역을 달았다. 그다음 줄에는 영어로 어휘 설명을 제시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어 최초로 가로쓰기와 어절 단위의 띄어쓰기가 실현되었다. 하지만 본문에 실린 한국어 대화 예문은 평안도 방언이고 오탈자도 빈번해서, 서양인에 의한 최초의 한국어 교재라는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에서 한국어 교재로 사용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후 평안도 방언으로 쓴 교재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개선책을 찾아낸 로스는 1882년 6월 6일 영국성서공회 라이트 박사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앞으로 제 모든 번역은 한국의 모든 곳에서 이해되는 서울말로 하려고 합니다. 제 우편주소인 우장을 떠나 이곳[심양]으로 오기 직전 주일날 서울 출신의 한 사람[서상륜]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의 선조들은 관리였고, 친척 중 몇 사람이 지금 서울에서 관리로 있습니다. 그는 궁중 언어를 완벽하게 말하고 씁니다. 저는 될 수 있는 대로 오랫동안 그를 데리고 있으면서 개정비평과, 필요할 때 제 두 번역인의 번역을 수정하게 하려고 합니다.7


처음에는 우장에서 한국인을 만나기 힘들었으므로 고려문에 와서 중국어를 아는 국경 변방의 상인을 만나 한국어를 배우고 성서를 번역했지만,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6년이 지나면서 한국의 문호가 열리기 시작하자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서울말로 성서를 번역해야 하며, 학식이 높은 지식인에게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식했던 것이다.

| 성서를 번역하고 권서로 활동하다 세상을 떠나다

이응찬이 처음 한국어를 가르치고 로스와 함께 성서를 번역하던 1877년은 대원군의 쇄국정치가 막을 내린 직후였기에, 일반인들은 서양인에게 급료를 받고 취직하는 것을 꺼렸다. 이응찬도 로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1878년 봄까지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하다가, 그를 알아본 사람이 관청에 고발하겠다고 하자 의주로 돌아갔다.
1879년 4월에 그는 영구에 돌아왔는데, 로스가 안식년 휴가를 얻어 본국으로 떠난 뒤였다. 로스의 매부 매킨타이어는 로스의 후임으로 선교하고 있다가 그를 자신의 한국어 교사로 채용하였고, 문법을 배우며 어휘 편찬과 수집을 맡겼다. 이 무렵 영구에는 여러 명의 한국어 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매킨타이어가 이응찬에게 로마서・히브리서 번역을 맡겨 중국어 성서를 한국어로 번역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신앙을 얻은 이응찬은 세례를 받겠다고 청원하였다. 그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솜씨나 성서를 번역하는 솜씨가 남들보다 뛰어났지만, 식사 때마다 고량주(배갈)를 마시는 데다가 아편쟁이처럼 보였기에 매킨타이어는 뜻밖이라고 생각하였다. 몇 달 두고 보는 사이에 고향으로 갔던 이응찬이 친척까지 데려오자 모든 교인이 그에게 세례를 주자고 추천하였다. 한국인 세 번째 수세자(受洗者)가 된 것이다.
로스는 이응찬과 함께 한문 성서를 번역했던 과정을 1883년 1월 24일 라이트 박사에게 이렇게 보고하였다. “번역 진행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 학교에서는 한문 고전 책만 가르치므로, 한국 학자들은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한문 고전에 익숙합니다. …이런 학자의 손에 고전 한문역[문리역본] 복음서 한 권과 구어체 역본 한 부를 줍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한글로 번역하여 제게 탁월한 초고를 제공합니다. 이것을 놓고 저는 다른 한국인 학자와 우리의 누가복음 번역본을 오랫동안 검토합니다.”8
한국어의 우수성에 자신을 얻은 로스는 이 편지에서 좀더 나은 한문 성서 역본을 만들기 위해 오히려 한국어 성서의 한문 번역을 영국성서공회에 요청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이응찬을 비롯한 한국어 교사와 번역자들을 신뢰했다.
이응찬이 로스와 함께 1882년에 처음 번역한 쪽성경 『누가복음』에는 ‘하느님’이라 번역하였고, 예전 표기법처럼 띄어쓰기 없이 붙여 썼지만 ‘하느님’이나 ‘쥬’(주) 다음에는 한 칸을 띄었다. 전통적인 표기법에서는 왕 앞에 한 글자를 비워 경의를 나타냈는데, 이응찬은 하느님이나 주 뒤에 한 글자를 비워서 경의를 나타냈다.
로스가 1883년 4월 2일 라이트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심양에 있는 번역인[이응찬]은 며칠 후 북경을 출발하여 심양을 경유하는 한국 사절단[동지사]에게 줄 200권의 복음서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한 것처럼, 이응찬은 한국어 교사, 성서 번역자를 넘어서서 자신이 번역한 첫 번째 성서를 국내에 전하는 권서(勸書)로도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응찬의 활동은 여기에서 그쳤다. 로스는 같은 해 9월 29일 라이트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의 한국인 수석 필경사[이응찬]가 콜레라로 사망하여 가슴이 아픕니다. 그는 고용된 두 명의 중국인과 한 명의 한국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써 이때까지 제가 만나 본 사람 가운데 가장 명석한 자였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이응찬이 콜레라에 걸려 세상을 떠난 뒤, 1887년 셩경(심양) 문광셔원에서 간행된 『예수셩교젼셔』 누가복음에는 ‘하느님’이 ‘하나님’으로 바뀌고, ‘하나님’이나 ‘쥬’ 뒤에도 한 글자를 비우지 않아 로스가 그만큼 한국어에 자신이 생겼음을 보여준다. 이응찬보다 몇 년 늦게 로스 번역팀에 들어온 서상륜은 78세까지 살면서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인물로 활동하였는데, 첫 번째 한국어 교사 이응찬은 사진 한 장도 남기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 너무나도 아쉽다.

1 허경진 역, 『열하일기』(현암사, 2009), 36-37.
2 허경진, “중국조선족문학 최초의 작품과 그 창작배경에 대하여”, 「한문학보」 제18집(2008).
3 이덕주, “초기 한글성경번역에 관한 연구”, 『한글성경과 겨레문화』(기독교문사, 1985), 466-470.
4 이만열, 『대한성서공회사 Ⅰ』(대한성서공회, 1993), 36.
5 J. Ross, Corean Primer(Shanghai: American Presbyterian Mission Press, 1877), 6.
6 김주필・홍성지, “한국어 교재 『Corean Primer(1877)』의 특성과 텍스트 형성 배경”, 「언어학」 78호(2017): 99-129.
7 옥성득・이만열 편역, 『대한성서공회사 자료집 제1권-로스 서신과 루미스 서신』(대한성서공회, 2004), 40.
8 옥성득・이만열 편역, 위의 책, 64.


이숙 | 연세대학교를 졸업하였고, 하버드대학교 언어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 강사와 하버드대학교 동아시아학과 전임강사로 일했다. 저서로 『한국어 이해교육론』(공저), Practical Korean(공저) 등이 있다. 현재 전주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9년 4월호(통권 7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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