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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애국가 작사자 안창호와 윤치호
문화·신학·목회 (2019년 4월호)

 

  이병도와 국사편찬위원회가 주도한 공식적 논의(1955)의 문제점
  

본문

 

<애국가>가 만들어진 지 100년이 지났고 해방 후 나라를 되찾은 지도 70년이 지났다. <애국가>의 작사자를 모르게 된 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당혹스러운 일이다. <애국가> 작사자를 미궁에 빠트리고 한국의 정신문화와 학술연구를 천박하게 만든 것은 친일 사학자 이병도와 1950년년대의 국사편찬위원회였다. 이병도는 친일 식민사학의 본산인 조선사편수회에서 뼈가 굵은 실증주의 사학자였다. 그는 해방 후 서울대 역사학과 창설 교수, 학술원 회장, 문교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역사학계의 최고 권위자가 되었다. 1955년 문교부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애국가> 작사자를 규명하는 위원회를 만들었으나 안창호를 제쳐 놓고 윤치호 작사설이 힘을 얻었던 것은 이병도와 함께 친일파였던 백낙준, 서정주, 윤치영이 규명 작업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 이병도와 친일파가 주도한 <애국가> 작사자 진상규명 활동

1955년 4월 2일 미국 출판사와 주한 미대사관으로부터 <애국가> 작사를 알려달라는 요청을 받은 문교부는 처음에 ‘안창호 작 안익태 작곡’으로 통지하려고 했다.(「서울신문」 1955년 4월 4일) 이미 안창호 작사설이 널리 퍼져 있었고 안익태를 비롯하여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충실한 추종자였던 신흥우는 1903년에서 1911년까지 8년을 미국에서 지냈는데, 미국에서는 현행 <애국가>를 안창호 작으로 들었고 귀국 후에는 윤치호 작으로 들었다고 하였다.1 그러나 안창호 작사설에 대한 윤치호 유족의 반론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문교부는 국사편찬위원회를 중심으로 <애국가> 작사자 규명 작업을 벌이게 되었다.
<애국가> 작사자 규명 작업은 2단계로 진행되었다. 먼저 국사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문리대(역사학과), 인문학과 국학의 권위자 최남선, 서지학의 권위자 황의돈에게 이 문제를 맡겨서 몇 차례 조사활동과 토론회를 가졌다. 조사위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자 5월 9일 19명으로 이루어진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세 차례 공식 회의를 가졌다.

| 1단계–안창호설(최남선·황의돈) VS 윤치호·최병헌 합작설(이병도·국사편찬위)

조사의 처음 단계부터 최남선의 ‘안창호 작사설’과 국사편찬위원회의 ‘윤치호·최병헌 합작설’이 완강하게 대립하였다.2 사학자 황의돈이 안창호설을 주장하고 서울대 역사학과의 이병도가 윤치호·최병헌 합작설을 주장했으므로 최남선·황의돈의 안창호설과 이병도·국사편찬위의 윤치호·최병헌 합작설이 맞선 것이다.3
이병도를 추종하는 국사편찬위원회 측이 처음부터 ‘윤치호·최병헌 합작설’이라는 근거도 없고 모호한 주장을 내세워 안창호설을 거부한 것은 매우 작위적이고 의도적이다. 윤치호・최병헌 합작설은 윤치호의 사촌동생이자 이병도의 매제인 윤치영에게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1984년에 윤치영은 가까이 지내던 재미교포 김병섭에게 최병헌·윤치호 합작설을 말했다. 최병헌의 후손들도 윤치영의 증언에 근거하여 현재까지도 최병헌 작사설을 주장하고 있다. 하와이 시절부터 이승만의 비서였던 윤치영은 해방 후 비서실장과 초대 내무부장관을 지낸 이승만의 가장 충실한 추종자였다. 안창호에 대한 경쟁심과 적대감을 가졌던 이승만은,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임이 분명하지만 친일의 흠이 있는 윤치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확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4 이승만의 복심이었던 윤치영이 1955년에 이병도에게 윤치호·최병헌 합작설을 제시했을 것이다. 이병도는 윤치영 집안과 겹사돈을 맺고 있었다. 실증사학을 내세우는 국사편찬위원회 측이 맨 처음부터 역사적으로나 문헌적으로 아무 근거가 없는 ‘윤치호·최병헌 합작설’을 내세운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안창호설을 배척하기 위해서 윤치호·최병헌 합작설을 날조한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윤치호와 가까웠던 윤치영은 을사늑약 이후 윤치호의 심정과 행적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을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윤치호는 을사늑약 이후 애국계몽 가요를 하나도 짓지 않았다. 다만 윤치호가 <무궁화가>를 지었고 그 후렴이
<애국가>의 후렴이 되었으므로 윤치영은 윤치호와 가까운 사람이 <애국가> 가사를 지었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그리고 윤치호는 정동교회 목사 최병헌과 형제처럼 가까이 지냈고, 최병헌은 학문이 높고 문장력이 뛰어났으므로 그가 <애국가> 가사를 지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최병헌과 윤치호는 사상 및 시국관이 일치했으므로 일제에 대한 정치적 견해와 행적도 비슷했다. 독립협회 동지인 윤치호와 최병헌은 을사늑약 이후에는 권력에 맞서 싸울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이 1907년에 국민을 일깨워 독립을 쟁취하려는 <애국가> 가사를 지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윤치호·최병헌 합작설은 이처럼 막연한 추정에 의해 허구적으로 구성된 이론이다. 최병헌의 후손들은 이승만을 비롯한 명사들이 최병헌의 집에 정기적으로 모였을 때 <애국가> 가사와 같은 <불변가>를 불렀고, 최병헌이 외국으로 떠나는 사람들에게 <불변가>를 써 주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불변가>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았고 아무도 그 내용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만일 최병헌이 미국으로 떠나는 이승만에게 <불변가>를 써 주었다면 이승만이 그 내용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이승만은 <불변가>에 대해서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실증적인 문헌자료와 증거에 집착하는 이병도 같은 실증주의 사학자가 아무런 실증적 증거도 없이 윤치호·최병헌 합작설을 내세우면서 안창호설을 배척한 것은 학술적인 이유가 아니라 친일파로서 애국독립운동가 안창호에 대한 열등감과 반감이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연합신문」 1955년 4월 14일 기사 “애국가는 과연 누가 지었나?”에 따르면, 최남선의 안창호설과 국사편찬위원회의 윤치호・최병헌 합작설이 대립하기도 전에 문교부 당국자는 “안창호 씨가 아닌 것만은 명백히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애초에 안창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알았던 문교부가 갑자기 며칠 사이에 견해를 180도 바꾼 까닭은 이해하기 어렵다.
틀림없이 안창호설을 배척하는 배후세력의 작용이 있었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조사활동이 시작되자마자 문교부와 역사편찬위원회 역사학자들 사이에 안창호 작사설을 배제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윤치호 작사설에 반대하는 조사위원들은 조사위원회 첫 회합에서 윤치호가 작사자로 판명날 경우 <애국가>를 새로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5 처음부터 위원들 사이에 날선 대립이 있었다. 학문적 연구와 논의보다 서로 다른 파벌과 진영의 입장과 관점의 차이가 두드러졌다. <애국가> 작사자 문제를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차원에서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토론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입장과 관점을 대립시키면서 피상적이고 감정적인 논쟁을 벌인 것이다. 친일 실증사학자 이병도가 역사학계의 중심과 정점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편협하고 도착된 관점과 뒤틀린 감정이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갔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실사구시의 입장에서 <애국가> 작사자 문제를 공정하게 연구하고 논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주요한은 윤치호의 <무궁화가>를 안창호가 개작하여 현행 <애국가>를 만들었다는 김동원의 증언을 제시하였다.6 안창호설이나 윤치호설과 관련된 여러 가지 엇갈린 증언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거나, <애국가>를 작사했던 시기에 안창호와 윤치호의 긴밀하고 특수한 관계, 당시의 애국독립운동과 정치사회적 정황을 두루 헤아려볼 때 주요한의 제안은 매우 합리적이고 역사 현실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병도를 비롯한 국사편찬위 역사학자들은 주요한의 이러한 주장을 철저히 무시하고 외면하였다. 안창호는 윤치호와 함께 대성학교와 청년학우회를 운영하면서 가장 깊은 관계를 형성했고 을사늑약 이후 수많은 애국계몽 가요들을 지었다. 서울대 명예교수 신용하는 안창호의 애국계몽 가요들과 <애국가>의 시상(詩想)과 표현을 비교하여 서로 일치함을 확인한 후 안창호가 <애국가>를 지었다고 결론내렸다.7 아무 근거도 없고 역사적 정황에 맞지도 않는 윤치호・최병헌 합작설을 주장한 국사편찬위원회 측이 안창호와 윤치호의 긴밀한 관계와 역사의 정황에 적합한 주요한의 ‘안창호・윤치호 합작설’을 외면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상하게도 “애국가 작사자 조사자료”에서도, 그리고 5월 13일 1차 회의, 6월 17일 2차 회의에서도 윤치호설과 최병헌(윤치호 합작)설은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안창호·윤치호 합작설’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이병도를 비롯한 국사편찬위원회 역사학자들은 윤치호의 ‘친필 가사지’, ‘역술 찬미가’와 같은 신뢰하기 어려운 문헌자료 몇 개를 바탕으로 안창호설을 배제하고 윤치호설을 주장했다. 「중앙일보」 5월 2일 기사에 따르면 국사편찬위원회 측은 “윤 씨가 작사자라는 것은 거의 확정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같은 신문 5월 5일 기사는 “2차 조사위원회에서는 의견 백출(百出)로 그 결말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측 학자들이 집요하게 윤치호설로 몰아갔으나 증거자료가 불충분하다는 여론이 많았고, 안창호설을 주장하는 최남선과 황의돈과 주요한, 최병헌설을 주장하는 최병헌의 가족들, 김인식설이 있었기 때문에 의견의 일치를 보기 어려웠다.

| 2단계–국사편찬위원회가 안창호설을 배제하고 윤치호설을 확립하다

문교부는 처음에 국사편찬위원회, 서울대 역사학과, 최남선, 황의돈에게 <애국가> 작사자 규명 작업을 맡겼으나, 안창호설을 주장한 최남선·황의돈과 안창호설을 배척하는 국사편찬위·이병도의 의견이 갈라지자 공식적으로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5월 9일에 발표된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들은 최남선, 이병도, 김상기, 황의돈, 김도태, 장도빈, 권상로, 백낙준, 김양선, 이상협, 주요한, 서정주, 신흥우, 김동선, 최규남, 현제명, 성경린, 김영한, 현철(19명)이었다.8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조사위원 19인 가운데 최남선, 이병도, 김도태, 권상로, 백낙준, 이상협, 주요한, 서정주, 현제명 9인은 비중 있는 친일파 인사로 분류된다.9
두 번째 단계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 작사자 진상규명 활동을 주관하였다. 5월 13일 첫 회의에 앞서 국사편찬위는 첫 번째 단계에서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54쪽 분량의 “애국가 작사자 조사자료”를 펴냈다. 문교부와 국사편찬위원회의 <애국가> 작사자 조사 활동을 주도한 것은 이병도, 백낙준, 서정주, 배후의 윤치영과 같은 친일파들이었다. 윤치영은 이병도를 통해 허구적인 윤치호·최병헌 합작설을 주입하였고, 백낙준과 서정주는 윤치호설을 강력하게 증언하였다.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집요하고 주도면밀하게 안창호설을 배제하고 윤치호설을 내세웠다.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는 5월 13일, 6월 17일, 7월 28일 세 차례 모임을 가졌다. 5월 13일 조사위원회는 첫 모임으로서 작사자 규명을 위한 보고회를 개최하였다. 12명이 참여한 이 보고회에서는 그간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작사자 5인에 대한 각종 자료와 주장, 그리고 단독 작사설, 합작설, 개작설 등을 논의하였으나, 자료 불충분으로 작사자를 확정하지 못하였다.10 자료가 불충분하고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은 당시 문교부 장관 이선근도 확인한 사실이었다.11 이병도는 충분한 자료가 수집되었다고 주장했으나 안창호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 첫 번째 회의를 통해 안창호는 배제되었고 윤치호와 김인식이 작사자로 유력하게 거론되었다.12 안창호설을 배제하려는 국사편찬위원회의 노력이 집요하게 이루어졌고 그 결과 안창호를 배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김인식설은 역사적으로나 문헌적으로 근거가 없어 <애국가> 작사자로 확정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으므로, 실제로는 안창호설을 배제하고 윤치호설을 앞세운 것이다. 이에 대해 언론에서는 윤치호가 작사자로 귀결될 경우, 윤치호의 친일 행적에 비추어 ‘애국가 개조’라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될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였다.13
첫 단계에서는 윤치호·최병헌 합작설을 내세워 안창호설에 맞섰다면, 둘째 단계의 첫 회의에서는 김인식설을 끌어들여 안창호설을 배제하였다. 최병헌설 못지않게 김인식설도 근거가 없고 허황된 주장이었다. 김인식이 <애국가> 작사자로 자처할 수 있었던 것은 안창호와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로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윤치호 작사설을 부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융희 3년[1909년-필자 주] 여름 한영서원 주최의 하기강습이 있었을 때 강습생들에게 전기 노래를 가르쳤는데, 그때 윤 씨[윤치호-필자 주]가 들은 바 있었고 그날 오후 자하동에 있었던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저녁을 같이하면서도 후렴은 자기 작이라는 말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아 무궁화가마저 윤 씨작은 아닐 것이다.”14 김인식의 <애국가>는 윤치호의 <무궁화가>에서 문구 한두 개를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이처럼 대담하게 <무궁화가>와 <애국가>를 자기가 지었다고 나선 것은 두 노래 다 주인이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윤치호가 <무궁화가>와 <애국가> 작사자라면 틀림없이 자기가 작사자라고 밝혔을 것이라고 확신했으며 윤치호가 자기가 작사자라고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작사자가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안창호와 윤치호의 깊은 침묵을 오해한 김인식은 엉뚱하게 자기가 작사자라고 나서는 기행을 저지른다. 또한 안창호설을 배제하고 김인식설과 윤치호설에 집중한 것은 친일 사학자들의 악의적이고 교활한 작전이거나 무능하고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6월 17일 문교부 회의실에서 두 번째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관계자 4명으로부터 증언을 청취하고, 그때까지 수집한 자료를 검토하였다. 이날 참석한 증언자는 윤치호설의 윤영선, 김인식설의 정소군, 안창호설의 선우훈, 최병헌설의 최억일이었다. 그밖에도 이상준 작사설의 확인, 인천에 있는 유두환의 증언을 청취하였다. 유두환은 안창호·윤치호가 동석한 자리에서 안창호가 작사하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하였다. 5월 13일 첫 회의에서 안창호설이 배제되고 윤치호설과 김인식설로 몰렸으나 6월 17일 회의에서는 여러 증언들을 청취하였고 다시 논쟁만 거듭하게 되었다.15 ‘이상준 작 윤치호 후렴 작’으로 기록된 창가집이 있었다는 것은 윤치호설을 부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었으나 무시되었다. 안창호가 <애국가>를 지었다는 유두환의 증언도 주목받지 못했다.
7월 28일 문교부 회의실에서 개최된 제3차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에서는 100여 일간의 자료조사 결과, 수집된 자료 중 입증자료로는 윤치호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른 작사자설을 입증할 자료가 수집되지 않았으므로 조사를 마무리하고 위원회를 해체할 것을 발표하였다. 새로운 증거가 나타날 경우, 심사위원회를 다시 소집할 것이라고 하였다.16 이날 표결 회의에 참석한 13인은 이병도, 백낙준, 김상기, 권상로, 현철, 김영환, 서정주, 이상협, 김동성, 주요한, 성결린, 김양선, 김도태였다.17 안창호설을 주장한 최남선과 황의돈은 이 회의에 빠졌다. 안창호설을 배제하려는 이병도, 백낙준과 국사편찬위원회의 의도를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13명이 모인 3차 회합에서 11명은 윤치호설의 물적 증거가 충분히 판정 가능하다며 윤치호설을 주장했고, 다른 2명은 각각 안창호설과 김인식설을 내세우면서 작사자 미상으로 하자고 주장했다.18 논의 과정에서 윤치호설을 주장하는 국사편찬위원회 측에 대한 격렬한 논쟁과 반대가 있었고, 따라서 윤치호가 작사한 것으로 확정하지 못하고 작사자 문제를 ‘미결’ 상태로 남겨둔 것으로 보인다.19
조사위원회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증언들과 신뢰할 수 없는 문서 몇 개를 가지고 논쟁만 벌이다가 <애국가> 작사자 문제를 미궁에 빠트렸다. 문교부, 국사편찬위원회, 친일 사학자들이 주도한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는 이 문제에 얽힌 역사 속의 진실에 한 걸음도 다가서지 못하고 역사의 거죽만 핥고 말았던 것이다. 더 나아가 친일파 세력이 단합해서 애국독립운동가 안창호를 배척하고 친일파 윤치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내세운 것은 우리 역사와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친 것이다.

1 오동춘・안용환, 『애국가와 안창호』(청미디어, 2013), 106-107.
2 “두 개의 주장이 대립, 안창호론은 최남선씨파, 윤·최 합작론은 역사편위(歷史編委)파”,
「중앙일보」 1955년 4월 19일; 신동립, 『애국가 작사자의 비밀』(지상사, 2015), 182.
3 “三論擡頭로 混線, 애국가 작사자는 과연 누구?”, 「동아일보」 1955년 4월 18일.
4 ‘이승만 전기’를 썼던 서정주에 따르면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임이 분명하지만 친일의 흠이 있는 윤치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할 수 없으므로 ‘미상’으로 하라는 이승만의 뜻에 따라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 작사자를 미상으로 처리하였다. 서정주, “청년 이승만”, 「기자협회 협보」 제3호(1957); 신동립, 『애국가 작사자의 비밀』(지상사 2015), 101.
5 박정하, “애국가 작사자 판정의 시비”, 「연합신문」 1955년 7월 15, 16일; 신동립, 위의 책, 208.
6 주요한, “애국자 작사자는 누구?: 하나의 자료로서”, 「경향신문」 1955년 4월 19일; 김도훈, “애국가 작사자 관련 논쟁에 대한 검토”, 「한국독립운동사연구」 64호(2018): 263.
7 신용하, “애국가 作詞는 누구의 作品인가”, 「대한민국학술원통신」 297호(2018년 4월).
8 「경향신문」 1955년 5월 11일; 오동춘・안용환, 위의 책, 80, 209.
9 오동춘・안용환, 위의 책, 80.
10 “여적(餘滴)”, 「경향신문」 1955년 5월 14일; “애국가 작사자 미상으로 낙착시” 및 “문헌자료 불충분, 논의에 오른 5씨도 확증없다”, 「동아일보」 1955년 5월 14일.
11 “애국가 작사자 문제 해부”, 「중앙일보」 1955년 5월 17, 19, 21일.
12 「동아일보」 1955년 5월 15일.
13 “점차 드러나는 애국가 문제, 개작은 불가피?: 작사자가 윤치호씨인 경우”, 「동아일보」 1955년 5월 14일(김연갑, 『애국가 작사자 연구』, 235에서 재인용).
14 “애국가 작사자 새로운 파문”, 「동아일보」 1955년 5월 21일.
15 “결론 또 다시 보류, 애국가 작사자”, 「동아일보」 1955년 6월 18일; 신낙현,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管見”, 「동아일보」 1955년 6월 28일; 김도훈, 위의 글, 268.
16 “윤씨설이 유력, 애국가 작사자”, 「동아일보」 1955년 7월 30일.
17 신동립, 위의 책, 91.
18 「연합신문」 1955년 7월 30일; 신동립, 위의 책, 210-211.
19 1955년 7월 30일 「경향신문」에 따르면 “(7월 28일) 최종회합에서 격론 끝에” 표결하였다. 신동립, 위의 책, 89-90.

박재순 |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신대학교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장,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 씨사상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씨사상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삼일운동의 정신과 철학』, 『씨사상』,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다석 유영모』 등이 있다.

 
 
 

2019년 4월호(통권 7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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