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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중세 사람들의 삶과 죽음
문화·신학·목회 (2019년 4월호)

 

  중세인의 사순절, 단식과 금육의 현장을 들추다
  

본문

 

사순절은 속죄와 회개로 예수의 부활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4세기부터 시작된 40일간의 사순절 단식과 금육은 그대로 정착되었고, 가톨릭에서 거의 유사한 모습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숫자 40과 성서적 결합은 잘 알려져 있으니 생략하고, 이 글에서는 사순절 기간에 중세인들이 어떻게 단식과 금육을 지켜나갔는지 살펴보려 한다.

| 거룩한 사순절을 위하여

사순절 기간 동안 육식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이는 590년 교황 그레고리 1세가 피가 섞인 고기는 더 이상 식탁에 올려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것에서 처음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사람들이 평소에 즐겨 먹던 음식인 계란, 치즈 등이 금지식품에 추가되었는데, 이를 얼마나 엄격하게 통제했는지 독일 바이에른 지방의 선제후 막시밀리안의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사순절 금육 기간에 약간의 육식을 한 사람을 죄인으로 취급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다행히도 몇 시간 정도의 짧은 감옥 생활을 시킬 뿐이었지만, 이런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사순절 기간의 단식과 금육은 종교적인 행사로서 철저하게 지켜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나침에는 항상 문제가 따르기 마련이다. 엄격하게 정해진 금식 목록 때문에 중세인들의 삶이 생기를 잃어감을 관찰한 교황 율리우스 3세는 16세기 중반부터 우유제품과 생선은 허락하되, 육류만을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지난번 글에서도 언급했듯, 중세인들은 죄를 지으면 경중에 따라 일주일, 석 달, 일 년 등으로 기간을 정해 놓고 빵과 물만을 먹는 죄 보속 기간을 가졌다. 하지만 죄 보속과 관련된 이러한 규정은 사실 수도원과 상류층 사람들을 중심으로 정해진 것이지, 하층민들과는 상관이 없었다고 마이어 교수는 말한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수도승과 상층민들이 평소 많은 양의 육류를 섭취했고, 따라서 죄의 보속 기간에는 죗값으로 빵과 물만 먹으라는 규정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알고 다음 내용들을 읽으면 좀 더 빠른 이해가 될 듯하다.

| 육식, 참신하거나 교묘하거나

평소에도 고기를 많이 먹던 수도승들이 사순절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에서 육식을 했다는 자료들이 남아있으니! 독일 바이에른 지방에 있는 한 수도원의 이야기이다. 이 수도원의 수도승들은 사순절 기간에 금지식품에 속해 있던 오리고기를 먹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은 오리가 물에 살기 때문에 어류에 아주 가깝다는 참신한(?) 해석을 내리고는 신나게 고기를 먹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독일 풀다 지방의 베네딕도 수도원에서도 아주 교활하고 능청스러운 해석을 내걸고 육식을 했는데, 이들은 생선과 새들이 같은 종류라고 주장하며 성서 해석을 인용했다. 태초에 천지가 창조될 때 “바다에는 고기가 생겨 우글거리고 땅 위 하늘 창공 아래에는 새들이 생겨 날아다녀라”(창 1:20)라고 했기에, 같은 날 창조된 물고기와 새들은 같은 종족이라는 것이다!
금육기간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일부 수도승들은 아주 비상하게 머리를 굴려서 사슴, 닭, 비버 등을 의도적으로 수도원 우물에 던져 넣었다.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신학자이자 전통연구가인기도 한 만프레드 베커-후베리티 교수에 의하면, 이들은 물 밑에 있는 것들을 모두 ‘어류’로 분류했다고 한다. 그래서 각종 동물을 우물에 던진 후 물 밑으로 가라앉으면 이를 ‘어류’에 속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울타쉔(Maultaschen, 만두와 비슷한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찾아볼 수 있다. 마울타쉔은 독일 마울브론에 있는 치스터치엔저 수도승들에 의해 고안된 음식으로 고기를 잘게 다져 시금치와 다른 채소와 함께 버무려 얇은 밀가루 피에 감싼 것이다. 이들은 가지고 있는 고기가 상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이러한 음식을 만들어 먹었는데, 중세 수도원에서 눈속임용으로 만들어진 마울타쉔은 현재 독일의 국민음식으로 자리잡았다.
육류와 생선에 대한 수도원의 해석이 도를 넘어서는 수준에 이르자 콘스탄츠 공의회(1414-18)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 생선은 금육기간에 먹을 수 있는 것이 맞지만, 이번에는 물 속에 사는 것들만을 ‘진짜 생선’으로 규정한 것이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비버와 수달을 어류로 분류하는데, 덕분에 앞의 수도승들은 이제 더 이상 비버를 우물에 던져 넣지 않고도 먹을 수 있게 된 셈이다.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일까? 1754년의 『산림과 수렵업』 사전은 비버를 반은 생선이고, 반은 동물이라 기록하고 있다고!
지금까지의 내용이 신학자이자 전통 연구가인 베커-후베리티 교수의 연구에서 나온 이야기들이었다면, 어느 수도원에서는 새끼 돼지를 구워서 십자가에 매단 뒤 “나는 너를 잉어로 명명하노라.”라고 축성을 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역시 사순절 기간에 육류를 먹지 못한 수도승들의 속임수로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늘 이런 속임수가 통했던 것은 아니다. 바로크 시대의 한 수도원에는 ‘사순절 기간 동안 육류를 (생선이라 여기고) 먹기 위해서 새끼 돼지를 수도원 우물에 던지는 행위를 더 이상 허용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적힌 자료가 남아 있다. 사실 바로크 시대는 중세에서 긴 시간이 흐른 뒤인데도, 여전히 이런 속임수가 유행했던 것 같다. 그리고 바깥으로는 경건한 모습을 내보인 수도원에서 여전히 비밀리에 고기를 먹었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겠다.

| 기름진 죽, 초콜릿과 카카오

초콜릿과 그 원료인 카카오 역시 사순절 기간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인지에 대한 논란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임바흐 교수는 당시 카카오가 매우 비쌌기 때문에 이를 돈처럼 사용했다고 말한다. 카카오 10개면 집토끼 한 마리를 살 수 있었고, 카카오 100개로는 노예 한 사람을 살 수 있었다고! 카카오 10개, 카카오 100개 등의 단위에 대한 정확한 묘사를 찾을 수 없어 유감스럽지만,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카카오의 가격이 상당히 비쌌다는 사실이다.
임바흐 교수는, 교황 베네딕도 13세가 1727년 3월 22일 아침 미사를 마친 후 따뜻한 음료를 원했을 때 손에 받아든 것이 초콜릿 음료 한 잔이었다고 말한다. 커피가 유럽에 당도하기 전 이 초콜릿 음료는 교황들이 특히 선호하는 음식이었다고! 하지만 많은 교회 장상들이 초콜릿(카카오)을 성적인 쾌락을 자극하는 식품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사순절 기간에는 초콜릿 음료를 마시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적도 있었다. 심지어 이탈리아 사람인 프란체스코 펠리니는 ‘초콜릿은 음식이 아닌 최음제’라고 말했다. 하지만 펠리니와 같은 고향 사람인 기오바니 바티스타 구덴프리디는 성녀 로자 폰 리마(1586-1617)의 예를 들면서 펠라니의 견해에 반박했다. 성녀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쇠약해졌을 때 한 천사로부터 초콜릿 음료 한 잔을 받아 먹고는 기운을 차렸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베네딕도 13세가 미사 후에 초콜릿 음료를 받아 마실 수 있었던 것은 전임 교황들의 허락 덕분이었다. 1569년 멕시코에 거주하던 주교들은 기로라모 디 산 빈첸초 수사의 손에 초콜릿 음료를 들려 교황 피우스 5세에게 보냈다. 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수도원의 단식과 금식에 관한 엄격한 규정을 정했는데, 주교들은 인디언들의 음료인 초콜릿을 사순절 기간에 먹어도 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드디어 피우스 5세가 초콜릿 음료 한 잔을 마셨고, “이것은 기름진 죽 같으니, 이 음료는 단식이나 금육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라며 사순절 기간에 초콜릿 음료를 마시는 것을 허락했단다. 그 이후로 초콜릿이 수도원의 단식과 금육 기간에 아주 사랑받는 식품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17세기 초에 이르러 초콜릿은 초콜릿 음료를 마시기 원했던 예수회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도미니카 수도원 사이의 크나큰 논쟁거리가 되었고, 이 논쟁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고 베커-후베리티 교수는 말한다.

| 사순절에 맥주를 마시기 위하여

베커-후베리티 교수는 사순절 기간 수도원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술책을 이야기했는데, 이는 다름 아닌 맥주와 관련된 것이었다. 사순절 기간에 맥주를 마셔도 되는지에 대한 결정권 역시 교황의 손에 달려 있었다.
교묘한 수도승들은 교황이 직접 맥주를 마셔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들이 만든 ‘독한 맥주’를 알프스 산맥을 통과해 로마로 보냈다. 당시 마르틴 루터가 남긴 기록에는 하루 28km씩을 걸어 독일 비텐베르크에서 로마까지 가는 데에 두 달이 걸렸다고 되어 있다. 아무리 맥주를 마차에 싣고 간다고 해도, 알프스 산맥을 넘어야 했기에 그리 빠르게 로마에 도달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로마에 도착한 ‘독한 맥주’는 어떤 상태였을까? 맥주의 고유의 맛이 그대로 남아 있을 리도 만무했고, ‘독한 맥주’는 김이 다 빠진 ‘연한 맥주’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연유에서인지, 변질된 ‘독한 맥주’를 음미하던 교황은 ‘지독히도 맛이 없는 이런 밋밋한 음료를 마신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참회’라고 말하며, 사순절 기간에 맥주 마시는 것을 허락했다고! 당연히 그 이후 수도원에서는 사순절 기간에도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 논란의 중심에 선 계란과 토끼

지금부터는 신학자 게오르크 스텐겔이 라틴어로 쓴 부활절 계란에 대한 책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6세기 말경, 사순절 기간에 우유와 버터, 계란 등을 먹는 것이 금지되었다가 16세기 중반부터 다시 허락되었다. 사순절 기간에 계란을 먹지 못하다 보니, 부활절에 다다를 즈음에는 집집마다 계란이 넘쳐났다. 사람들은 넘치도록 쌓인 계란을 처치하기 위해 아주 실리적인 방법을 모색해냈는데, 바로 수도원이나 교회의 장상들에게 계란으로 소작료를 지불하거나 기부하는 것이었다고!
사람들은 부활절 즈음 남아도는 계란에 다양한 의미를 가진 색을 입히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빨간색으로 물들인 계란은 고통을 받는 예수를 상징했다. 한편에서는 계란에 색을 입히는 것이 축성하지 않은 계란과 축성된 계란을 구별하기 위해서라는 설도 들린다. 당시 사람들은 축성된 계란을 지붕 아래 숨겨두면 재해나 병, 화, 벼락 등에서 보호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후 사람들은 계란에 단순히 색을 입히는 것을 넘어서 계란에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당시 신교와 구교는 이 부활절 계란을 사이에 두고 갈등을 겪었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계란 축성을 미신으로 치부하고, 교황의 부활절 계란 축성을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더 나아가 1553년 토마스 키르히마는 부활절에 붉은색으로 물들인 계란에 축성하는 것은 ‘가톨릭의 오류’라는 취지의 글을 썼고, 1682년 하이델베르크 출신의 요하네스 리히터는 신교 지역의 어린이들에게 부활절 계란을 선물로 주고받으면 큰 벌을 내리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부활절 계란 선물을 금지시켰다. 당시 가톨릭에는 부활절에 대부/대모가 축성된 계란을 아이들에게 선물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신교가 이것을 거부한 것이다.
중세의 가톨릭이 계란을 축성하는 것 등에 취해 있을 때, 신교는 실질적으로 예수의 정신에 가깝게 행동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취리히의 츠빙글리는 따뜻한 스프를 만들어 가난한 이들의 배를 채워주었고, 칼뱅은 병든 이들을 부양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가난한 사람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자선 병원과 외국인 숙박소 등을 짓자고 호소했다고 한다. 가톨릭이 초콜릿과 맥주에 교황의 허락을 얻기 위해 씨름하는 사이, 개혁자들이 들고 나온 이런 제안들은 실제로 하느님 보시기에 신선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행히 19세기에 진행된 산업화로 신교와 구교 사이에 벌어졌던 부활절 계란 논쟁은 끝을 맺는다. 종교적인 의미를 담고 시작했던 부활절 계란에서 종교적 색채가 옅어지고, 아름다운 색상의 계란들이 상점에서 더 떠들썩한 모습으로 부활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활절 계란과 비슷하게, 부활절 토끼에 관해서도 다양한 설이 전해진다. 토끼는 눈꺼풀이 없어 잠을 자지 않는다는 설을 성서의 예수와 연결시킨 것인데, 죽음에서도 영면하지 않은 예수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부활절 토끼는 빵을 굽다가 생긴 재미난 일화일 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부활절에 양 모양의 빵을 구우려 했으나 구워져 나온 빵이 귀가 무척 크고 꽁지가 짧은 모양새였고, 이것을 토끼로 본 것이다. 이 부활절 토끼는 신교 지역에서 먼저 시작된 것이라고 임바흐 교수는 말한다. 부활절 토끼는 신교 지역에서 일반화되어 퍼져나갔는데, 신교가 가톨릭의 부활절 계란을 거부한 것처럼 가톨릭에서도 이런 신교의 경향을 아주 비판적인 시선으로 주시했다. 그리고 부활절 계란과 마찬가지로 19세기 산업화가 진행되며 부활절 토끼 논쟁도 사라졌는데, 과자 산업이 돈벌이를 위한 장사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 버터와 돈의 관계

중세 시대에는 ‘부터부리프’(Butterbrief)라고 불리는 사순절 기간의 ‘버터 식용 허가증’이 있었다. 독일 드레스덴 지방에서 나온 ‘드레스드너 부터브리프’(Dresdner Butterbrief)를 통해서 그 의미를 알아보자.
14세기부터 중세인들과 수도승들은 사순절 기간에 버터가 들어가지 않은 빵을 먹었다. 단식빵의 일종인 ‘슈톨렌쿠헨’(Stollen Kuchen)이 그것인데, 밀가루와 이스트, 물로만 만든 단순한 빵이었다. 버터를 먹을 수 없으니 귀리나 채종유 등을 넣어 빵을 만들기도 했지만 그 맛이 영 시들했던 모양이다.
이 지방의 한 귀족이 사순절 기간에 버터가 들어간 빵을 먹게 해달라고 선제후에게 청했다. 당시 선제후인 에르네트와 그의 동생 말브레히트는 1491년 교황 이노센트 8세에게 이 청을 편지로 보냈고, 교황은 이를 허락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증서가 바로 ‘드레스드너 부터브리프’로, 현재 스위스 아카이브(SIK-ISEA)에 보관되어 있다. 부터브리프는 20년 동안 그 효력이 인정되었기 때문에, 1509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다시 20년을 연장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교황이 하늘로부터 막대한 권한을 받은 것일까? 빵 반죽에 버터를 넣는 것조차도 교황만이 허락할 수 있었다니 말이다. 면죄부 판매뿐만 아니라, 이런 다양한 증서의 남발도 루터의 종교개혁에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드레스덴을 예로 들었을 뿐이지, 임바흐 교수는 교황뿐 아니라 주교에게도 돈을 지불하고 이런 ‘증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때 증서를 얻기 위해 주교에게 지불한 금액은 라인지방 굴덴의 20분의 1이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의 금액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교황이나 주요에게 헌납한 돈’이라는 전제를 놓고 보면 그리 적은 금액은 아니었을 듯하다. 임바흐 교수는 우유도 이런 품목 중 하나라고 이야기하는데, 좌우지간 이런 증서를 움켜쥐고 사순절 기간에도 버터나 우유를 마음껏 먹었을 부자들과 중세 교황청의 아이디어가 그저 놀랍기만 하다.

| 마치면서

사순절 기간이라도 돈을 지불하면 버터든, 우유든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씁쓸한 웃음이 나올 뿐이다. 교황은 사순절 기간에 누가 어떤 음식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선별하고 결정했는데, 그 판단의 근거는 무엇일까? 하늘에서 내려온 지시가 아닌 교황의 개인적 판단으로 내린 결정은, 아마 다른 교황의 기호에 따라 틀린 것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현대 물리학에서 말하는 ‘관찰자의 정신 구조가 관찰의 결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 대입시켜본다.
어쨌든 사순절 기간에 어떻게든 금지된 음식을 먹으려고 중세의 수도승들이 고안해 낸 기발한 아이디어에서는 부활을 준비하는 거룩한 마음과 종교적 진지함을 찾을 수 없다. 교묘한 술수로 규칙을 깨고 금지된 음식을 먹기 위해 발버둥치던 수도승들의 모습, 그리고 자신의 취향을 반영하여 수많은 결정을 내린 교황들의 모습이 마치 한 편의 코미디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양태자 | 독일 마르부르크 필립스대학교에서 비교문화학과 비교종교학 석사학위를, 예나 프리드리히 쉴러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중세의 뒷골목 풍경』, 『중세의 뒷골목 사랑』, 『중세의 길거리의 문화사』, 『중세의 잔혹사 마녀사냥』 등을 집필하였고, 영성 번역서로 『파도가 바다다』가 있다.

 
 
 

2019년 6월호(통권 7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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