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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문화와 신학] 박충구의 죽음의 윤리 이야기
문화·신학·목회 (2019년 4월호)

 

  삶의 마지막 선택에 관하여
  

본문

 

죽음이 나에게 찾아오는 날은
화려하게 꽃피는 봄날이 아니라
인생을 생각하게 하는
가을이 되게 하소서

병으로 인하여 몸이 너무 쇠하지 않게 하여 주시고
가족이나 이웃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는
기력이 있고 건강한 때가 되게 하소서
- 용혜원, <죽음이 나에게 찾아오는 날은>


시인 용혜원은 그의 시에서 죽음이 그를 찾아오는 날은 화려한 봄이 아니라 가을이 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그러면서 가족이나 이웃에게 불편함을 끼치지 않는, 그래도 기력이 남아 있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 시를 통해 우리는 시인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그의 마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는 겨울에 가장 많은 사람이 죽는다. 통계청 통계를 살펴보면 사망률이 가장 낮은 계절은 봄 후반부터 가을 초반에 이르는 하절기이다. 월별로 살펴보면 2015년의 경우 4-9월 사망자는 월 평균 약 2만 2,000명 내외였지만, 10-3월 사망자는 2만 3,000명에서 2만 5,000명을 웃돌아 4-9월 사망자보다 평균 12.6% 더 많았다. 특히 1월 사망률이 평균보다 유독 20% 정도 높았다. 일반적으로 계절이 뚜렷한 지역에서는 기온의 차이가 사망률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며, 여성은 계절의 변화에 남성보다 더 민감하다. 위도가 높은 지역일수록 춥고 건조한 계절의 사망률이 높아진다. 우리 몸도 자연의 일부인 까닭에 자연의 변화에 따라 반응하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야 할 때, 혹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준비해야 할 때가 오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며 준비해야 할까? 죽음은 여러 경로로 우리를 찾아온다. 과거에는 우리가 죽어가는 이의 자유와 책임, 그리고 자율성에 대한 숙고가 결여된 상태로 죽음을 이해했다면, 오늘날에는 죽어가는 이의 주체성과 그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특성이 있다.
과거에는 죽음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인식 때문에 죽어가는 이가 죽음이 다가오기까지 소극적으로 기다리는 것을 미덕으로 간주하는 풍토를 보였다. 수명이 짧았던 시대의 사람들은 어려서 죽는 경우도 많았고, 어린 시기를 잘 넘겼다 하여도 환갑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논의해온 바와 같이 현대인들은 대부분 70세 이상이 되어 죽음을 맞이하고 있으며, 그중 거의 50%가 암, 혈관 질환, 호흡기 질환을 비롯한 중증 질환에 의한 죽음이다. 그리고 고령 노인의 상당수가 치매를 겪는다. 이렇게 과거와 달라진 지금의 상황을 ‘긴 죽음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러한 시대에 과연 ‘좋은 죽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것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 죽음의 절차

수명이 길어진 현대인의 경우 남성은 70세 이후, 여성은 80세 이후에 대부분 사망하게 된다. 우리나라 100세 이상 인구는 2008년 2,179명에서 2017년 7월 1만 7,468명으로 무려 8배 이상 증가했다. 향후에는 이러한 증가 폭이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사람의 수명은 점점 더 연장되지만, 그에 따른 죽음 이해는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여 다양한 종류의 곤경을 겪는 이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우선 고령 노인이 겪는 죽어감의 길어진 시간에 대처할 제도적 장치가 없다. 우리나라 노인의 빈곤율은 50%나 되고, 9-14년에 이르는 유병기간을 겪는다. 특히 암 사망자는 1987년 3만 3,238명에서 2017년 7만 8,863명으로 2.6배 증가했으며, 그 비율은 4명 중 1명이 암으로 사망할 정도로 높다. 이들은 말기에 극심한 고통을 겪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단 몸에 이상이 생기면 병원으로 실려 가고, 병이 특정되면 긴 싸움이 시작된다. 이 싸움은 현대 사회에 만연한 일종의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핵가족 사회에서는 집안에서 환자를 보살필 인력이나 전문적 지식이 없는 데 반하여, 병원은 의료진을 두고 전문적으로 그 병과의 싸움을 대행해주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환자의 선택권은 거의 행사되기 어렵다.
병원에 입원하면 의사의 조치나 권고에 따라 환자의 투병생활이 시작된다. 각종 검사를 거쳐 여러 종류의 치료와 수술이 이어지고, 이 과정이 반복되기도 한다. 이런 험난한 싸움을 거쳐 건강을 온전하게 되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이 과정에서 생기는 불안과 곤경은 죽음의 과정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병원에서 의사가 행하는 모든 처치가 죽어가는 이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다. 특정한 경우, 예컨대 암 환자의 경우 약물치료나 수술요법은 거의 절반 이상 병세를 악화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나 가족들은 그 처치의 효과와 의미에 대하여 제대로 물을 겨를도 없다. 환자는 달리 갈 곳이 없고, 병원이나 요양원에서는 죽음을 유예하고 연기하는 것을 최선이라고 여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특히 환자가 극심한 통증에 시달릴 경우 통증을 완화시키는 치료 과정에서 환자는 절반 정도 죽은 사람처럼 연명하다가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심지어 화학적 요법으로 제어할 수 없는,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있는 경우 신경 계통을 절단하여 통증이 뇌에 전달되지 못하게 하기도 하고, 과도한 진정제 투약으로 환자가 가사 상태로 연명하다가 사망할 수도 있다. 진정을 목적으로 처방한 약이 환자의 죽음을 재촉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환자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데까지 연장하다가 더 이상 손쓸 여지가 없는 상태가 되어야 의사들은 환자를 가족들에게 돌려준다.
위와 같은 절차는 어떤 이에게는 수년에 걸치는 고난의 길이다. 필자의 지인 중 하나는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무려 7년이라는 긴 투병의 여정을 겪었다. 그의 가족들은 오랜 투병 끝에 가진 재산을 거의 소모했다. 마지막 단계에서 담당 의사는 확실한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면서 환자 가족들에게 무려 1억 원이나 되는 값비싼 주사제를 제안하기도 했다.

| 누가 결정하는 것인가

우리는 간혹 거짓 희망으로 죽어가는 이를 대할 때도 있다. 그리고 간혹 죽어가는 이를 위한다면서 그를 더 긴 고통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사람들의 기대와 요구에 밀려서 정작 죽어가는 이의 요구를 외면하는 것이다. 종교도 죽어가는 이를 기만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떤 목사는 죽어가는 이를 앞에 두고 “하나님이 살려 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의료진도 마치 오류가 없는 신이라도 되는 듯 자신들의 의료 행위를 정당화한다. 죽음을 거부하고 외면하며 부정하는 문화의 여파이다. 이런 문화에 사로잡혀 죽어가는 이는 숨을 거둘 때까지 죽음을 거부하다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우리는 어느 순간이 오면 지혜롭게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죽음은 다양한 공포를 수반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죽음 앞에서 사라지고 만다. 주어진 삶을 자유롭게, 책임 있게 살아왔다면, 이제는 그에 따른 죽음 또한 자유롭게, 책임 있게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니 사람이 손을 대면 안 된다는 주장은 사실 틀린 것이다. 우리는 의학을 통해 이미 사람의 생명에 손을 대 수명을 연장해 왔고, 무수한 선택을 통하여 생명을 관리해온 생명의 관리인이다. 그러므로 죽음 역시 우리가 관리해야 할 삶의 마지막 영역인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과거에 형성된 관습이나 전통, 종교적 가르침이나 법 체계에 맡기고 그것들이 요구하는 대로 죽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별다른 고통 없이 자연사하는 과정에서는 이런 태도가 그리 큰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오늘날의 죽음을 대처하기에 매우 부족하다. 수명이 연장되고 죽는 과정이 길어진 오늘날의 상황에서 과거의 죽음 이해는 이에 대처하는 적절한 방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에서 우리는 죽어가는 이의 주체를 부정하고, 그를 고통스러운 과정에 버려두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오늘날 ‘죽을 수 있는 권리’라는 개념이 생성되고 있다. 자기 자신의 삶 자체가 존엄하기를 원하듯이 자신의 죽음 역시 존엄하고 인간다워야 한다는 요구가 담긴 개념이다. 이런 요구는 “불확실한 죽음과 확실한 쇠락을 앞두고 있는 노인들이 비참하게 ‘느린 죽음’을 맞이하느니 죽음의 때와 장소 및 방법을 자기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의지”1에서 나온 요구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이런 권리를 법적으로 승인하고 있지 않지만, 언젠가는 사회적 합의를 거쳐 승인될 것이라고 본다.

| 삶의 마지막 선택권

죽음의 분류

환자의 자발적
요구가 있음
의사의
도움이 있음
의사의 처치직접적
조력사
존엄사
(Ending Life
with Dignity)
합리적 자살의 법적 요건을
충족할 경우 허용
의사의 처방간접적
조력사
생명유지장치 제거소극적
조력사
협의의 존엄사
(Letting die)
환자의 사전의료지시서
(Living Will)에 따름
의사의
도움이 없음
의사의
도움 치료 거부
소극적
안락사
자살생존 능력을 스스로 정지시킴
환자의 자발적
요구가 없음
자연적 죽음자연사생존 능력의 소멸
인위적 죽음살인타인에 의한 생존 능력 제거
(범죄)


위에서 표로 나타낸 죽음의 분류를 통해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죽음의 양태와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 나타내는 삶의 마지막 선택권 중 어떤 것은 우리나라의 법 제도 아래에서는 아직 허용되지 않는 것도 있다. 국가와 법이 인간의 마지막 권리를 인정하는 사회도 있지만 아직도 지난날에 형성된 죽음 이해를 따라 죽어가는 이의 마지막 결정권을 완고하게 가로막고 있는 사회들도 많다.
일단 도표에서 제일 오른편 항이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죽음의 방법이다. 범죄로 인해 살해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죽어가는 이가 선택할 수 있는 죽음은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자연적으로 생존 능력이 소멸하는 자연사, 둘째로 스스로 생존 능력을 정지시키는 자살, 셋째로 사전의료지시서(Living Will)를 작성하여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거나 무의미한 연명치료 장치의 제거를 요구함으로써 소극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경우, 넷째로 극심한 고통이 있을 경우 일부 사회에서 허락되는 존엄사가 있다. 네 번째 경우는 또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합법적 절차에 따라 의사가 약물로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직접적 조력사와 환자의 자발적 요구에 따라 의사가 처방하고 환자가 투약하여 사망에 이르는 간접적 조력사이다.
하지만 이 모든 영역의 경계가 아주 뚜렷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자살에는 스스로 죽음을 작정하고 단식하여 죽음에 이르는 수도자의 자살이 있을 수 있고, 조력사가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활동 능력의 상실과 무의미한 고통의 연속으로 인해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경우, 또 자연사의 과정에 들어선 이가 그 과정을 앞당기기 위한 경우도 있다. 이런 종류의 자살이 합법화된 사회는 의사 조력사를 허용하고 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조력사가 금지된 사회에서 극단의 고통을 겪는 말기 환자들이 선택하는 고독하고, 반사회적이며, 비극적인 자살의 비인도적 성격을 극복하기 위하여 의사 조력사라는 제도를 마련한 것이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존엄사는 고통을 극소화함으로써 죽어가는 이에게 인간답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도록 돕는 범주에 속한다. 여기에서는 ‘고통의 극소화’를 위한 인위적 개입을 인정한다. 다만 소극적으로 개입할 것인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인가의 문제는 개인의 선택과 더불어 법 제도의 용인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협의의 존엄사, 즉 이미 죽음의 과정에 들어선 이에게 행하는 의료적 처치로 죽어감의 시간을 연장하는 것을 포기하거나 거부하는 차원에서는 허용되고 있다.
아주 드문 경우가 되겠지만, 극심한 고통을 겪는 환자는 외국인의 조력사가 허용되는 스위스 디그니타스(Dignitas)로 가서 자신의 죽음을 앞당길 수도 있다. 2017년 말 기준 38명의 한국인이 디그니타스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는 것은 특정한 경우 그러한 과정을 선택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돕는 행위가 우리나라에서는 현행법에 저촉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OECD 37개 국가 중 자살률 1, 2위의 오명을 10여 년째 이어오고 있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는 2011년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약칭 ‘자살예방법’)을 제정하여 자살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회적 혹은 심리적 요인으로 발생하는 자살은 방지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이의 존엄한 죽음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분리하여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 죽어가는 이의 권리

전통적인 죽음 이해에 머물거나 죽음을 깊이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는 이들은 죽어가는 이의 권리가 무엇인지 생각할 여지가 없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장 무력하고 연약한 인간이 되어 죽어가는 이를 바라보며 그가 죽기까지 기다리는 것이 고작이다. 죽어가는 이가 무엇을 원하는지와 상관없이 죽음의 과정이 진행되는 것이다.
필자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근래에 우리에게 소개되고 있는 인간의 죽음에 관한 책들은 우리나라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이 쓴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다소 충격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법으로 죽을 권리까지 허용하다니….”라고 탄식하며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책들이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하나의 방향은, 자신의 죽음을 맞이해야 할 시간이 되면 자기 자신이 그 방식을 결정함이 옳다는 것이다. 누가 나를 대신하여 죽음의 방식을 결정해주겠는가? 내가 아무런 결정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관습적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거기서는 죽어가는 이의 권리는 거의 무시된다.
말기 폐암 환자가 된 내과의사 이나츠키 아키라의 『오늘부터 나도 암환자입니다』(2003)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삶의 질을 최우선’으로 선택하는 이유와 그 죽어가는 과정을 함께 기록하고 있다. 또 신문기자 출신의 마리 드루베(Marie Deroubaix)는 폐암에 걸려 고통이 극심해지기 시작하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며 죽기를 작정하고 의사 조력사가 허용되는 벨기에로 가서 편안한 죽음을 맞았다. 그녀의 이야기는 『내가 죽음을 선택하는 순간』(2013)에 담겨 있다. 이들은 불행하게도 말기가 되면 극심한 고통이 찾아오는 폐암 환자가 되어 세상을 떠났다. 필자의 한 동료는 폐암 말기에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뇌로 향하는 신경을 절단한 채 감각 없이 연명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과거에는 죽음이 다가오는 과정, 장소, 방법이 오늘날과 같지 않았다. 우리는 김형숙의 책 제목처럼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도시에서의 죽음이란 대부분 병원에서의 의료화된 죽음이다. 나의 삶을 타인에게 맡기지 않았듯이 나의 죽음도 타인에게 맡길 수는 없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면, 자신의 죽음을 ‘인간답고 존엄하게’ 맞을 권리를 담은 사전의료지시서를 작성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때를 미루다가 중환자실로 실려 가면 이미 늦는다. 그때부터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의료화된 죽음의 절차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죽음의 방식을 택하지 않으면 타인들이 나의 죽음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내가 결정하지 않으면 가장 가까운 이들조차 중요한 결정을 머뭇거리다가 관행적인 절차에 넘겨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아툴 가완디(Atul Gawande)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2015)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벌써 이 권리를 일부 인정하고 있다. 누군가가 음식이나 물, 투약이나 치료 등을 거부할 경우 그 뜻을 존중해주는 것이다. 그게 비록 현대 의학의 관성에 맞서 싸우는 일이 될지라도 말이다. 환자에게서 인공호흡기나 영양 공급관을 떼어낼 때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를 하는 셈이다. 약간의 저항이 있긴 했지만 심장전문의들도 이제는 환자가 원할 경우 의사에게 심박 조율기를 꺼달라고 할 권리가 있다는 걸 인정했다. 우리는 또 마약성 진통제와 진정제가 죽음을 앞당긴다는 걸 알면서도 고통과 불편을 줄이기 위해 처방하기도 한다.
- 아툴 가완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상의 내용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죽음을 앞당기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수용하고 있는 일이다. 이 밖에, 아직도 사회가 결정해야 할 많은 문제도 있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그가 원하는 약을 처방할 수 있도록 허락해 그를 더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죽어가는 이가 의미 없는 생명의 존속보다 무엇을 더 바라는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죽을 수 있는 권리이다. 이런 이해는 변화된 죽음의 이해를 받아들인 소수의 사회에서만 통용되고 있다.

| 나오는 말

죽음 이해의 중심축은 과거 자연사에서 오늘날 의료화된 죽음으로 이동하였다. 젊어서 질병에 걸린 이들은 병원에서 회복되어 병원 밖으로 나올 확률이 높지만, 중증 질환으로 입원한 70-80대의 노인들이 회복되어 나올 확률은 훨씬 낮다. 과거의 생명윤리는 환자의 생존을 돕는 의사의 역할을 중시했고, 동시에 죽음이란 거부하고 극복해야 할 과제로 여겼다. 그러나 고령사회에서 그러한 생명윤리는 죽어감의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오히려 박탈하고, 고통스럽게 죽는 과정을 더욱 연장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만드는 배경이 된다.
죽음의 윤리란, 생명윤리의 한 부분으로서 ‘죽음과 죽어감의 과정에서 무엇이 보다 나은 선이며, 무엇이 나쁜 것인가를 숙고하는’ 내용을 담는다. 인간의 죽음 이해가 과거와 현재 사이에 다소 거리와 차이가 있다면 결국 생명윤리가 소홀히 해온 죽음의 윤리에도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과거의 규범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래된 공리, 즉 행복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극소화하는 삶의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극한의 고통이 있거나 예상되는 경우 우리는 보다 인간적이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기 위하여 우리의 마지막 권리, 고통 없이 평화롭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인류 사회는 오랫동안 이 마지막 권리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가 고령화되고 죽어감의 시간이 길어지는 상황에서, 그리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동반되는 죽어감의 과정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비로소 죽어가는 이의 권리를 생각하게 되었다. 권리란 그저 주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주체적으로 행사될 때 가장 많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도적으로 인간의 권리를 더 적극적으로 보장해주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일 것이다.

1 알렉산드로스 벨리오스, 최보문 옮김, 『나의 죽음은 나의 것』(바다출판사, 2018), 124.


박충구 | 감리교신학대학교 및 동 대학원을 마치고 독일 본대학 및 미국 드루대학에서 공부했다. 감신대 기독교윤리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현재 생명과평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9년 6월호(통권 7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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