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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신학·목회 (2019년 2월호)

 

  한국인 권서와 선교사들의 개척 전도여행
  

본문

 

1883년부터 1894년까지 평양에서의 전도활동, 평양 선교지부를 설립하기 위한 한국인 권서(전도하는 매서인)와 선교사들의 탐사여행을 살펴보자. 1884-85년 미국 선교사들이 내한하기 전, 만주 심양에서 스코틀랜드연합장로회의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만든 한글 전도문서가 1881년부터, 한글 복음서는 1882년 봄부터 출판되었다. 한국인 권서들이 서간도와 서북 지역에 이 문서를 전하면서 수백 명의 신자가 생겨났기 때문에, 서울 선교사들은 서울 주변 전도와 더불어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 진출하였고, 그 결과 1894년에는 중심지인 평양에 선교지부가 설치되었다. 청일전쟁 이전의 평양은 비개항장이었기 때문에 서울 선교사들은 조약에 따라 정부가 발행한 호조(passport)를 소지해야 방문할 수 있었고, 부동산은 매입할 수 없었다. 따라서 평양 선교지부 개척사에서 주목할 주제는 만주 선교회와의 관계, 부동산 매입에 관한 정부와의 갈등, 주민이나 전통종교와의 갈등, 장기 선교정책과 단기 선교 방법론 등이다.

1883년: 심양에서 파송된 권서 류준천의 한글 성서 반포

평양에서의 첫 개신교 선교는 1866년 스코틀랜드성서공회 권서 자격으로 온 토마스의 한문 성경 반포였고, 두 번째는 1883년 영국성서공회 권서 류준천(Liu Chuin-tien, 혹은 류춘천)의 로스본 한글 복음서 반포였다. 1882년 봄 심양 문광서원에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각각 3,000부 출판되고, 식자공 김청송이 그해 5월에 서간도 한인촌의 전도인으로 파송되자, 류 씨는 두 번째 식자공이 되었다.
조선이 미국에 이어 영국과 조약을 맺고 개항하자, 로스는 1882년 10월 서상륜을 영국성서공회 권서로 서울에 파송했다. 의주에서 검거된 서상륜이 풀려나 서울에서 활동하자, 류준천도 고향 평양행을 결심했다. 로스는 5월 그에게 두 복음서 1,000권을 주어 평양에 파송했다. 자세한 보고는 없지만 그가 이후 7년간 영국성서공회의 전임 권서로 고용되어 사역하고 1890년에 사망했으므로, 평양에서의 성경 반포는 제대로 이루어졌으리라고 짐작된다. 1885년 3월 8일 서신에서 로스는 백홍준, 서상륜, 류준천 등의 반포 결과 의주에 20명, 소래에 18명, 서울에 70여 명의 신자가 있다고 보고했다. 또 한인촌에는 로스가 세례를 준 75명의 신자가 있었다. 하지만 평양에는 병인년 양란의 여파로 아직 개종자는 없었다.

1887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방문과 서울 권서들의 전도

1885년 언더우드와 헤론, 스크랜턴과 아펜젤러가 서울에 정착하자, 소래와 의주에서 신자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선교사를 초청했다. 평양은전략적 거점으로 떠올랐다. 부산에서 일본인 권서들이 로스본을 반포하고 있을 때,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1887년 봄 상임성서위원회를 조직한 후 첫 평양 탐사에 나섰다. 그들은 현지 사정을 파악하고 서울에 교회를 설립한 후 한국인 권서들을 평양에 파송했다. 이후 3년간 권서들의 성공적인 활동과 선교사들의 공격적인 전도여행이 맞물려 평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자 했다.
1887년 4월 아펜젤러는 세관원 헌트와 평양을 방문했다. 평안감사 남정철(南廷哲)은 그들을 위하여 기수(旗手)를 보내어 동헌까지 호위하고 환담한 후 숙소를 제공했다. 개화파 남정철은 감사직 후 서울로 돌아가 고위직에 오를 예정이었으므로 고종과 가까운 선교사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아펜젤러는 평양 시장과 도시를 살펴본 후, 대동강 하류까지 여행하며 탐사했다. 이후 서울로 돌아온 아펜젤러는 7월 24일 박중상에게 첫 세례를 주었고, 자신의 요한복음 번역을 도왔던 최성균을 8월 7일 첫 권서로 고용했다. 그리고 9월 27일 정동교회 조직 모임에 심양의 로스 목사가 참석했는데, 아펜젤러는 로스가 데리고 온 의주 출신 장 씨(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음)를 두 번째 권서로 고용했다. 아펜젤러는 10월 9일 상동에 벧엘교회를 설립했으며, 10월 26일 권서 최 씨를 황해도와 평양에, 장 씨는 평양과 의주에 3개월간 파송했다. 1883년 류 씨에 이어 4년 만에 이루어진 전도였다.
한편 1887년 1월 황해도 소래에서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가 서울에 와서 죽음을 각오하고 세례를 요청하였으나, 제중원 정부 관리 알렌은 이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정부가 금지한 일이라도 선교의 길이 열리면 불법을 감수하고 일해온 선교 역사를 근거로 세례를 주었다. 언더우드는 이때부터 네비어스 정책을 공부하면서 장기적인 북한 진출을 계획했으나 봄에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아펜젤러만 평양에 가게 되었다. 6월 초에 언더우드는 평북 안주에서 온 4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신중파 알렌 의사가 조선 사절단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자, 행동파 언더우드는 9월 27일 세례교인 14명으로 정동교회(새문안교회)를 조직하고, 10월 첫 주에는 2명을 장로로 안수했다. 로스는 서울 선교사들에게 삼자(三自) 정책을 가르쳐주고 로스본 수정 문제를 의논했다. 언더우드는 서상륜을 조사로 고용하고 북한에 파송한 후, 10월 28일 서울을 떠나 약 한 달 동안 소래, 평양, 의주를 처음 방문했다. 그는 소래에서 4명에게 세례를 주고, 안주에서 약 100명의 세례 신청자를 보았다. 1888년 2월 서상륜의 권서 결과 평양에 22명의 세례 신청자와 다수의 신자들이 있었고, 송도에는 12명의 세례 신청자가 있었다. 한국 신자들과 권서들이 선교사들의 적극적 행동을 선도하는 형국이었다.

1888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평양 방문

한국 생활에 익숙해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4월 17일 3개월 계획으로 송도-해주-평양-의주 전도여행에 나섰다. 그 전에 평양에서 26명의 신자를 대표한 2인이 서울의 언더우드를 방문하고 세례를 청하면서, 예배당을 위해 200달러를 준비하고 도움을 구했다. 개천에서도 동일한 요청이 왔다. 씨를 뿌리기 전에 추수를 해야 했다. 타 선교지에서 볼 수 없던 자생적인 교회가 서북 지역에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명동성당 건축 문제로 ‘반기독교 칙령’이 내려져 두 선교사는 평양에서 서울로 되돌아와야 했다. 그래도 10월에는 아펜젤러가 평양과 의주를, 11월에는 언더우드가 소래를 방문했다.

1889년: 언더우드의 4차 평양 여행

언더우드는 1889년 3월 13일 호턴 의사와 혼인하고 의주까지 신혼여행을 감행했다. 국내 전도 금지를 요구한 실(John M. B. Sill) 미국 공사의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정면 돌파에 능한 언더우드는 신혼여행을 전도에 이용했다. 따라서 호턴 의사는 평양과 의주 성문에 들어선 첫 여자 선교사/외국인이 되었다. 교인들은 그들의 평양 방문으로 힘을 얻었다. 이후 미국 공사와의 약속에 따라 언더우드는 의주에서 세례신청자 33인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가 만주 땅에서 세례를 주었다.

1890년: 아펜젤러, 마페트, 헐버트의 평양 방문

5월에는 산동 지푸의 네비어스 부부가 서울을 방문하고 2주일간 토착교회 설립 방법을 강의했다. 8월 29일 아펜젤러는 마페트, 헐버트와 함께 평양을 방문하고 2주일간 전도했다. 이후 마페트는 평양 개척의 주역이 되었다. 그는 1893년 평양에 정착하고 1934년 병으로 귀국할 때까지 40년 이상 일하면서 평양을 세계 최대의 선교지부로 성장시켰다. 그는 평양 개척을 위해 결혼을 미루고 전력을 다해 헌신했으며 정치와 문명의 중심지 서울을 떠나 복음과 교회 중심의 새 선교지부를 개척하기 위해 1891년부터 3년간 평양을 일곱 차례 방문했다.

1891년: 마페트, 게일, 서상륜의 평양 방문

언더우드가 안식년을 떠날 즈음 마페트와 게일은 선교지부 후보지를 물색하기 위해 북한과 만주 횡단 여행을 시도했다. 1891년 2월 25일 두 사람은 평양, 의주를 거쳐 만주의 심양과 통화를 방문한 후 자성, 함흥, 원산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하루 100리를 걷고 일부 마차를 타면서 3개월 동안 1만km를 이동한, 한국교회 사상 최장거리 전도여행이었다. 평양에서 여러 구도자를 만났으나, 주민들은 외국인을 의심하고 예수교 책을 두려워했다. 보수파 민병석이 평안감사(재직 1890-94)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페트는 계획한 집 매입을 보류했다. 서울에서 의주까지는 서상륜과 요리사 최윤하가 동행했고, 의주부터 백홍준이 동행했다. 의주 부활주일 예배에는 세례교인 10명이 참석했다. 장래 조사가 될 한석진을 만난 것도 수확이었다. 그는 심양에서 인상적인 도교 사원 양식을 접목한 봉천교회를 보고, 로스의 3자 선교 방법을 배웠다. 이후 네비어스-로스 방법을 평양에 적용하여 “세계에서 가장 토착적인 선교지부”를 설립했다. 그러나 마페트는 한인촌에서 로스의 세례교인들이 ‘쌀 신자’(rice Christians)임을 알고 실망했다. 그리고 9월에 평양과 의주를 다시 방문했는데, 의주에서 한석진과 여성 2명을 포함하여 5명에게 세례를 주고, 서문 밖에 선교관을 매입하여 의주서교회를 출범시켰다.

1892년: 존스, 홀, 마페트의 평양 방문, 김창식 조사의 거주

1891년 말에 내한한 북감리회 홀 의사는 존스 목사와 함께 1892년 3월 초순 평양을 방문하고 선교지부 개척을 준비했다. 8월에 평양 개척 선교사로 임명받은 홀은 11월에 조사 김창식을 평양에 거주시킬 계획으로 함께 평양에 왔다.
한편 5월에 마페트는 브라운 의사와 함께 평양과 의주를 4개월간 방문했다. 의주에서는 12명의 신자를 대상으로 보름 동안 사경회를 했다. 한석진의 신앙도 깊어졌다. 그리고 빈턴 의사가 와서 도왔다. 게일이 4월에 헤론 부인과 결혼해 원산으로 가고, 9월에 리 목사가 내한하면서 마페트는 리와 함께 평양 선교지부 개설을 계획했다.
한석진은 김관근(구성), 양전백(구성), 서경조(소래), 서상륜(서울) 등 16인과 함께 서울에서 열린 1개월 신학반(조사 사경회)에 참석했다. 1891년 채택된 네비어스 정책에 따라 조사 훈련이 심화되었다. 마페트의 조사가 된 한석진은 서울에 머물면서 거리 전도에 나섰다.

1893년: 평양 부동산 매입, 이기풍의 투석, 한석진 조사의 거주

2월에 노블과 함께 온 홀 의사가 김창식의 이름으로 집 두 채를 사고 집문서는 자신이 가졌다. 이를 보고받은 민병석 감사는 서울처럼 평양에도 병원이 설립되면 좋다고 보고 묵인했다. 1월에 열린 장로회공의회에서 평양 개척 선교사로 임명받은 마페트, 리, 스왈른은 3월 6일 서상륜, 한석진과 함께 평양을 방문했다. 마페트의 제5차 방문이었다.
이들은 서상륜과 한석진의 이름으로 보통문 밖 신양리(나중에 여자성경학교가 들어섬) 땅과 대동문 안 술막골 주택을 구입했다. 민 감사는 이들의 부동산 매입을 금하고 원 소유주에게 돌려줄 것을 명령했다. 이때 보통문 근처에서 이기풍 등 포졸이 마페트와 리에게 돌을 던졌다. 이때 돌이 마페트 턱에 맞아 선혈이 낭자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의 인친 흔적” 영광의 흉터가 생겼다고 전해지지만, 실상은 맞지 않았고 흉터는 본래 일부 서양인 남자에게 생기는 홈이었다. 감사의 지시로 주민 수백 명이 여관에 몰려와 위협했기 때문에 리와 마페트도 부동산을 포기했다.
5월 15일 마페트는 혼자 6차 평양 여행에 나섰다. 그는 한석진에게 서문 부근 홍종대의 집을 비공개로 사게 하고 가족과 함께 이사하게 했다. 이 가옥은 인천의 타운센드가 소유하고 집문서도 미국 공사관에 보관했으므로, 형식상 한석진이 타운센드에게 매입한 것이어서 법적인 문제가 없었다. 마페트는 그 집과 무관함을 보여주기 위해 여관에서 지냈다. 그는 20명 신자가 모이는 주일예배를 인도하면서, 한석진과 노방 전도를 하다가 6월 10일에 귀경했다.
북감리회는 8월 매년회에서 홀 의사 부부를 평양 선교 책임자에 임명했다. 한석진의 지도로 신자가 증가하자 마페트는 9월에 7차로 평양에 갔다. 여전히 주민들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 교인들을 조롱하고 과거 천주교인들처럼 참수될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
1893년 10월 북장로회 연례회의는 마페트를 평양 전담 사역자로 임명했다. 그는 11월 11일 8차 평양 여행에 나섰다. 이때 홀 의사도 평양을 방문하여 김창식을 격려했다. 감리교인도 21명의 학습인이 존재했다. 11월에 마페트도 객주 최치량을 포함한 22명으로 학습반을 조직했다. 이때 술꾼 최치량의 변화된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교에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페트는 한석진의 집에서 성탄절을 지내며, 이듬해 4월 초까지 사랑방에서 전도했다.

1894년: 홀 시약소 개설, 널다리교회 설립, 박해 사건, 홀의 사망

사랑방 대화와 거리 전도를 병행하던 마페트는 1월 7일(日) 학습인 7명에게 세례를 주고 성찬식을 거행했다. 널다리교회가 설립되었다. 평양 기독교회의 생일이었다. 예배당은 최치량의 여관을 매입해서 사용했다. 마페트는 5년간 1만km 이상 서북 지방을 여행하여 마침내 평양에 교회를 세웠다. 바울의 1-3차 전도여행 거리를 능가하는 전도여행이었다.
1월에 홀 의사도 맥켄지, 노병선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고 시약소(진료소)를 개설했다. 2월에는 홀과 스크랜턴이 방문했다. 음력설 성황제를 위해 발피(깡패) 김낙구는 청년들을 이끌고 홀 의사에게 가서 추렴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노병선을 구타하고 반기독교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4월에 마페트가 서울로 돌아간 후, 소강 상태에서 5월 6일 홀 부인이 어린 아들 제임스와 박에스더 부부를 데리고 평양에 나타나자 또 한 번 소동이 일어났다. 홀 의사의 영구 거주 의사를 파악한 김낙구의 아들 아전 김호영은 예방비장(종4품) 신덕균에게 선교사 추방을 제의했다. 치외법권을 가진 선교사 대신 한국인 신자들을 투옥해서 압박하기로 했다.
5월 10일 새벽 신덕균은 홀 의사의 조사 김창식, 마페트의 조사 한석진, 최치량, 송인서 등을 체포했다. 두 조사는 외국인에게 토지와 가옥을 사준 죄로 태형 후 사형을 선고받았다. 홍종대, 오석형도 구금되어 곤장을 맞았다. 홀은 서울의 스크랜턴과 가드너 공사에게 전보를 쳤다. 서울 선교사들은 특별 기도회를 열고, 공사들은 정부와 교섭하여 교인 석방을 촉구했다. 외부에서 평안감사에게 “國己許 卿何禁”(나라에서 이미 허락했는데, 경은 왜 금하는가)라는 전보를 보냈다. 마페트와 맥켄지는 평양을 향해 출발했다.
신덕균은 신자들을 고문하면서 배교를 강요했다. 태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김창식은 전보 덕으로 석방되었으나, 주민들이 돌을 던지며 “천주학쟁이 때려 죽여라.”라고 고함치는 길을 겨우 빠져나왔다. 25일 스크랜턴이 사태 수습차 도착했다. 결국 정부는 선교회에 500달러 손해 배상금을 지불했고, 예방비장 신덕균을 서울로 소환했으며, 감사 민병석도 연말에 재정 비리로 귀양을 갔다. 조약법을 최대한 이용한 마페트와 외세를 이용한 선교회가 승리한 것이다.
평양 기독교 박해사건은 신분적으로 신흥도시 중산층인 상인과 지방 토족인 향리(아전) 간의 갈등이었다. 약자인 상인들은 개종하고 선교사 세력에 의지하여 재산과 생명을 보전하려고 했다. 아전 김호영은 자기 집을 김창식에게 비싸게 팔려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앙갚음을 한 개인적인 측면도 있었다. 향리와 양반들은 부동산을 매입할 수 없었던 선교사들이 한국인 조사 이름으로 부동산을 구입하는 편법을 보고, 법적으로 싸우면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동아시아 전통 질서를 바꾸는 대변혁이 시작되었다. 동학전쟁과 청일전쟁으로 부적이나 전쟁의 신 관우가 총과 대포 앞에 무너지면서 화이관이 무너지고 평양 선교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 6월 1일 홀 가족이 평양에서 철수하는 날 동학군이 서울로 향했다.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25일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평양 주민들은 피난을 갔으나 마페트는 교인들을 지키다가, 교인들의 강권으로 8월 23일 서울로 돌아왔다. 9월 15일부터 3일간 평양 전투가 벌어졌다. 사방으로 흩어진 교인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해 도처에 신자가 늘었다. 10월 1일 마페트와 리와 홀이 평양에 돌아오자 주민들도 귀환했다. 홀 의사는 전투 후의 열악한 상황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다가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서울로 이송되었으나 11월 24일 사망했다. 헤론에 이어 양화진에 생긴 두 번째 희생의 무덤이었다.
마페트와 홀의 평양 방문으로 평양 선교지부들이 공식적으로 개설되었다. 핍박을 견딘 한국인들의 신앙과 마페트의 불굴의 열정과 주도면밀한 접근, 홀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결론

1894년 평양 선교지부가 설치되었다. 청일전쟁 후 일본 군인과 상인이 거주하기 시작한 평양은 실제적인 개항 도시가 되었다. 박해에 굴하지 않은 김창식의 신앙고백, 제국 열강의 공사관의 위력, 선교사의 치외법권, 청일전쟁 후 국제정세 변화, 주민과 ‘함께 있었던’ 마페트의 열심과 이성적 판단, 일본 상인의 거주, 홀 의사의 봉사와 희생 등 다양한 요소가 모여 평양 기독교의 문이 열렸다. 무엇보다 평양 개척에 목숨을 걸고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은 한국인 권서들과 선교사들의 협력으로 평양은 개척되었다.(다음 호에서는 1894-1903년 평양 선교지부 초기 발전기를 다루고자 한다.)

옥성득 |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하였다. 저서로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 등이 있다. 현재 UCLA 인문대 아시아언어문화학과 한국기독교학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9년 4월호(통권 7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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