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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초기 선교사의 한국어 교사]
문화·신학·목회 (2019년 2월호)

 

  언더우드를 가르치고 국문연구소 위원으로 활동한 송순용
  

본문

 

언더우드는 도쿄에서 두 달 동안 머물며 이수정을 비롯한 개화파 인물들로부터 한국어를 배운 뒤에, 이수정이 번역한 『신약마가젼복음셔언』를 들고 1885년 4월 5일에 한국에 도착하여 집중적으로 한국어를 공부하였다. 그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대표적인 교사가 송순용인데, 송순용은 출처가 명확치 않은 인물이다. 여러 기록에서는 자(字)인 송덕조(宋德祚)로 기록되었으며, 후반에는 송기용(宋綺用, 宋琪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것으로 나타난다. 공식적 기록인 『한국사』에서도 송덕조를 본명으로 인식하여 다음과 같이 표기하였다.

성경번역 추진사업은 滿洲(만주)에서 在滿韓人(재만한인)들에게 宣敎(선교)를 시작하였던 스코틀랜드 全國聖書公會(전국성서공회)와 日本(일본)에서 聖書韓譯(성서한역)에 착수하였던 美國聖書公會(미국성서공회)와 1887년에 로쓰譯(역) 新約全書(신약전서) 完譯本(완역본)의 출간비를 보조한 英國(영국) 外地聖書公會(외지성서공회)의 責任(책임) 主管下(주관하)에 진행되어왔고, 언더우드, 게일, 레이놀즈 등 3인과 그들의 同役者(동역자)이던 宋德祚(송덕조), 李承斗(이승두), 金鼎三(김정삼) 등이 다년간 譯經事業(역경사업)에 종사하였다.1

천주교 신부들과 언더우드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다

서울에 도착한 언더우드의 공식적인 직함은 제중원 교사였지만, 처음 2년 동안은 많은 시간을 한국어 공부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구한 한국어 교사는 천주교인이었다. 언더우드는 1885년 7월 6일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한국어 교사를 이렇게 소개하였다.

저는 지금 열심히 언어를 공부하고 있으며, 최선을 다해 빨리 익히려고 합니다. 말씀드린 것으로 압니다만, 저는 어학교사로 한 천주교인을 구했습니다. 얼마 동안은 천주교인 가운데 한 사람을 쓰는 것이 좋을지 몰라서 망설였으나, 그가 이 나라에서 가장 탁월한 교사이고(최소한 그는 모든 곳에서 그런 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그가 와서 고용되기를 청했으므로 그를 채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칠팔 명의 프랜시스파 신부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외국인을 가르친 풍부한 경험이 있는 자로 『한불뎐』(韓佛字典)을 편집하는 데도 관여했습니다.2


선교사들의 편지나 일기, 회고록에는 자신을 가르친 한국어 교사의 이름이 대부분 정확하게 기록되지 않는다. 이름을 아예 쓰지 않거나, ‘이 선생’이나 ‘김 씨’ 등으로 성만 쓰기도 했는데, 마찬가지로 이 편지에서도 이름을 쓰지 않았다.
언더우드는 천주교인을 한국어 교사로 채용하여 날마다 만나는 것이 문제가 될까 봐 망설였지만, 후에 “그것이 섭리였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 교사에게 만족하였다. 언더우드가 만족한 이유는 그가 외국인을 가르친 경험이 풍부하고, 『한불뎐』(韓佛字典)을 편집하는 데 관여한 경험까지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언더우드를 찾아와 한국어 교사로 고용되기를 청한 것은 그만큼 한국어 교육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송순용은 천주교가 앞서 축적해온 한국어 연구 결과를 개신교에 전달하는 다리 역할을 하였다. 근대식 교육이 없던 한국에서 송순용은 준비된 한국어 교사였으며, 언더우드는 자신이 계획하고 있던 이중어 사전의 편집 경험자를 만나면서 한국어 습득과 사전 편찬이 빨라졌다.
언더우드가 1885년 8월 29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언더우드는 정동에 새로 구입하여 수리한 집에서 어학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송순용을 어학교사로 처음 고용할 때 들었던 바대로 그는 능력 있는 교사라고 재삼 확인하였다. 이듬해인 1886년 1월 31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한국어 교수 방법이 간단히 소개되었다.

저는 이곳에 온 후 언어 공부를 열심히 해 왔으며, 최상급 교사의 도움을 받아 신속한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한글로 번역된 임브리 의사(Dr. Imbrie)의 일본어 책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국어에 맞게 약간씩 고쳐진 이 문장들은 한국어 공부에 대한 훌륭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미 알고 있는 한국어를 수집해서 한 권의 작은 한국어 입문서를 출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열심히 하면 6월이나 7월까지 그런 책자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3


임브리의 책 『영일어원』(English・Japanese Etymology)은 언더우드가 일본에 두 달 머무는 동안에 접한 책인데, 이 책의 일본어 부분을 송순용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로 번역하여 그의 『한영문법』(1890) 저술에 적용하였다.

성서위원회에 참여하다

1년 동안 정기적으로 한국어를 배워서 한국어로 강의까지 하게 된 언더우드는 1886년 4월 16일 편지에서 ‘제대로 된 한국어 성경 번역이 필요하다.’고 엘린우드에게 제안하였다.

로스 씨는 신약전서 한글 번역을 마쳤으나, 저는 그것이 서울에서는 쓸데없고 북한지역과 번역이 이루어진 만주 한인촌 지역에서만 유용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성서공회의 역본[이수정본] 역시 크게 쓸모가 없으며, 본토인들만이 수정하고 검토할 수 있었던 성경 역본을 발간하는 것은 약간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루미스 씨는 저에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읽고 수정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현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는 자신의 한국어 능력이 부족해서 수정이 불가능하다고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이 두 가지 번역에 처음부터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로스 번역본은 북한 지역의 사투리가 많았기 때문에 당시 한국의 중심인 서울에서 사용할 수 없었고, 이수정 번역본은 신학 교육을 받지 않은 본토인(한국인)이 단독으로 번역했기 때문에 사용하기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수정의 번역은 그 자신이 처음 성경을 읽으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출판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려면 용어 하나부터 본격적인 검토가 필요했다.
언더우드는 이미 1885년 10월부터 아펜젤러와 함께 이수정의 『마가복음』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공식적인 기구가 필요함을 느끼고, 1887년 2월 7일에 성서위원회를 구성했다. 한국인 어학교사들은 초고 수정, 개정, 교정 등 모든 과정에 일정한 도움을 주었다.4 예를 들어 1장 2절의 ‘예언’를 ‘션지쟈’로 수정한 것도 『한불뎐』 편집에 참여한 송순용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보인다.5
1893년 5월에 성서위원회가 상임성서실행위원회로 개편되면서 실무자 모임인 성서번역자회가 설치되었는데,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 5인이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이때 초기 번역에 참여한 한국인 조수들은 송덕조(송순용)·조성규·이창직·정동명·김명준·김정삼 등으로 파악된다.6
“선교사들은 헬라어 성서와 개정판 영어 성경(Revi-sed Version)을, 한국인 조수들은 중국의 대표자본(Delegates Version)을 저본으로 하되, 일본어 성서도 참조하여 번역한다.”7라는 원칙과 방법에 따라 언더우드에게 할당된 누가복음을 송순용이 한문 문리본을 저본으로 초고 번역을 하면 언더우드가 그 번역을 바탕으로 개인역을 완성하여 번역자회에 제출하였다. 각 번역자는 원고를 읽은 뒤 수정하여 원 번역자에게 보냈으며, 각 번역자가 재수정한 원고를 공동 독회모임에 제출하면 한 절씩 읽고 검토하여 다수결 투표로 시험 역본 원고를 결정했다. 한국인 조수들은 의결권이 없었는데, 1907년에 가서야 이창직과 김정삼이 정식 번역위원이 되었다.

언더우드 사전과 문법서 출판에 참여하다

언더우드는 1888년 3월 18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문서선교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서울에 인쇄소를 설치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인쇄소를 설치할 형편이 못 되자 결국 한국어 교사와 함께 일본에 가서 교정을 보기로 하였다. 언더우드는 1889년 3월 14일에 호튼 의사와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겸하여 황해도와 평안도 전도여행에 나섰는데, 돌아오자마자 한강가 별장에서 사전과 문법서 편찬에 몰두하였다.
이 별장은 원래 왕실에서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제천정(濟川亭)인데,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와의 관계가 달라지자 언더우드에게 매각되었다. 언더우드는 1889년 7월 10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 “다행히 한강변에 집을 얻어서 여름 삼복 더위에도 일을 계속할 수 있으며, 8월 중순까지 사전 원고를 인쇄소에 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 썼다.
언더우드는 원래 대사전을 만들려고 했으나 수요자들의 요구에 따르기 위해 우선 소사전을 출판하기로 하였다. 1890년 요코하마에서 출판된 『한영뎐』(韓英字典, A 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n Language: in two parts, Korean·English & English·Korean)의 서문에 그 과정이 밝혀져 있다.
영어로 된 한국어 사전이 없어 이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 나라에 들어온 후 수개월 만에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영어 단어들과 대응하는 한국어 단어들을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지 5년이 흘렀다.… 이 책의 대부분은 일에서 벗어난 여름 방학에나 가능했기에 지난 여름 초에야 겨우 만여 개 단어가 유의어와 함께 정리되었다.…
처음 한영사전 부분은 게일(Gale)의 도움이 컸고, 그 다음 영한사전 부분은 육영공원 헐버트(Hulbert)의 도움이 컸다. 이 작업 중에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한글 철자법에 규범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글 철자는 순전히 발음에 의존하는데, 모두가 자기 철자 법칙이 맞다고 우기는 상황이고, 심지어 그 법칙이 상황에 따라 서로 달라져서 동일한 철자 규범을 가진 두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다행히 『전운옥편』에 주어진 철자가 대부분 사람들이 수긍하는 편이라서 이 사전에서도 이에 근거하기로 하였다. 또한 옥편에서 찾지 못하는 단어들은 어떠한 단어에서 파생된 것인지를 확인하여 철자를 확인하는 노력을 하였다. 그 결과 많은 한국어 단어들이 한자에서 파생되었고 철자도 서로 대응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모든 단어들을 『한불뎐』에 실린 단어들과 꼼꼼히 비교하여 정통적인 철자 규칙이 발견되지 않을 시에는 그들의 철자와 일치시켰다.
맞춤법 통일안이 만들어지기 전이어서 책마다 사람마다 철자법이 달랐는데, 언더우드는 한국어 교사의 도움을 받으며 『전운옥편』의 철자를 규범으로 하여 사전을 완성하였다. 문자의 순서는 한국에 있는 영어권 학생들에게 이미 익숙한 『한불뎐』의 순서를 따랐다. 25개의 자음과 모음은 누구나 하루만에 터득할 수 있어서 번역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한불뎐』의 한글 단어 옆에 표기된 로마자 발음표기는 삭제하였다. 『한불뎐』에는 하나의 단어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소개되었는데, 언더우드는 한국어 교사의 자문을 받아 가장 단순한 정의를 소개하였다. 즉 상황에 따른 용법의 의미가 아니라 어원적인 근본 의미를 구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이룬 놀라운 사전 작업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음을 밝히게 되어 기쁘다. 철자나 의미 정의 면에서 다름이 많았지만 특히 한영사전 작업에 도움이 컸다. 송순용(宋淳容)에게 감사를 돌린다. 그의 꼼꼼한 작업과 언문에 대한 충분한 식견이 없었더라면 이 사전의 현재와 같은 정확성을 기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사전의 서문에는 언더우드의 한국어 교사 송순용(宋淳容)의 이름이 처음 드러난다. 원고 집필을 마친 언더우드 부부는 1889년 10월에 송순용과 함께 일본 요코하마에 갔다. 1890년 2월 언더우드는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최소한 한글 활자를 모두 만들었고, 사전 인쇄를 시작했다.”라고 밝혔지만, 3월 2일에 보낸 편지에서도 여전히 활자를 만들며 열심히 인쇄하고 있다고 밝힌다. “한국인 어학교사가 있고 그가 먼저 전체를 교정하지만… 책의 절반은 교정 대상 언어가 세 가지[영어, 한문, 한글]이므로 쉽지 않다.”라고 한 것을 보면 활자를 새로 만들고 교정을 보느라고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송순용은 일본 음식에 적응하지 못해 많이 고생하
였다.
사전 다음으로 출판된 책은 『한영문법』(An Introduction to the Korean Spoken Language)이다. 이 책은 한국어 문법을 체계적으로 기술하기보다는 학습자가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책이다. 언더우드는 임브리의 『영일어원』을 한국어 학습에 적용하였다.
1부는 12장으로 구성된 문법 설명(grammatical notes)을 실었다. 먼저 한국어 학습의 특징을 언급하면서 한글 자모와 발음을 소개하고, 이어서 품사별 어휘와 경어법, 문장 구조 순으로 한국어의 문법적인 특징을 설명하였다. 2부는 10장으로 구성된 영한대조문(Engilsh into Korean)을 품사별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영어 문장과 대응하는 한국어 문장을 예문으로 제시하였다.
이 책의 문법 설명에는 명사의 격 변화를 곡용(曲用)으로 인식하기보다는 후치사(後置詞)의 결합으로 인식한 점이 돋보인다. 이 외에도 경어법(honorifics)을 별개의 문법 부문으로 독립시키는 등 프랑스 선교사들의 문법서와는 다소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선유위원으로 활동하다

조선시대에 의병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정부는 선유사(宣諭使)를 파견하여 의병에 가담한 사람들과 소요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설득과 선유활동을 벌이게 하였다. 따라서 선유사는 정부와 국왕의 신임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선유 대상인 의병이나 일반 주민들에게도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이라야 했다. 정부에서 기독교인을 선유사로 임명한 것은 정미의병운동 때였다.8 정동교회 최병헌 목사의 선유활동은 최근 「기독교사상」에 연재되었다.9
기독교인 선유사의 임명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공립신보」 1908년 2월 5일 자에 “내보(內報) 1월 4일. 선교사 선유”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지방의 소요함이 일년이 넘어도 침식이 되지 못하여 옥석(玉石)의 구분(俱焚)하는 고로 선유사를 보내어도 효험 없고 자위단(自衛團)이 다녀도 쓸 데 없는지라. 근일에는 예수교 선교사 최병헌씨와 송기용씨로 선유위원을 차정(差定)하여 충청도 지방으로 보낸다더라.

여기에 예수교인 송기용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였는데, 송기용은 언더우드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던 송순용의 다른 이름이다. 대한제국 시기의 『승정원일기』에서 ‘송기용’(宋綺用)이라는 인명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고종 36년(1899) 1월 4일 임 탁지부 주사 송기용
고종 36년(1899) 1월 20일 탁지부 주사 송기용 의원면본관(依願免本官)
순종 1년(1907) 11월 21일 전 참봉 송기용 명 충청북도 선유위원


언더우드를 도와 성경을 번역하던 송순용이 탁지부 주사가 되기 직전인 1898년 12월 9일 자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에 “교인고”이라는 광고가 실렸는데, ‘음력 10월 23일에 보부상 도반수 길영수와 상무장 박유진과 홍종우 등이 정동교회에 보낸 글에 교우를 지목하여 독립협회 역당의 창귀가 되었다 하고, 교당을 헐어 부수고 교도를 도륙하겠다 하였으니 여러 교우는 음력 10월 26일에 상동 달성회당 앞으로 모이라.’고 송기용이 호소하는 내용이다. 실제로 송기용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 수백 명은 경무청 앞에서 시위하며 길영수 등의 처단을 요구하였다. 송기용이 다음 달에 탁지부 주사로 임명된 것도 이러한 활동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국내의 여러 신문에 송기용의 선유활동이 자주 소개되었는데, 1908년 2월 25일 자 「황성신문」의 “선유전문”(宣諭傳聞)에 그의 성공적인 활동 기사가 실렸다. 당시 일본군 수비대장과 경찰서장이 순병(巡兵)을 붙여 주겠다고 제안하지만, 송기용은 이를 사양하고 청주 화양동과 보은의 의병장을 찾아가 설득한 끝에 의병장과 부하들을 귀순시켰다. 그러나 3월 13일 『승정원일기』에 송기용의 해임 기사가 실렸는데, 18일 자 「공립신보」의 “선유소환”이라는 기사에 그 내막이 밝혀져 있다.10

정부에서 지방 소요를 진압하기 위하여 예수교인 최병헌 송순용 양인을 선유위원으로 파송하였더니, 일전에 어떤 의병이 연동교당 목사 게일씨에게 영서(英書)로 격문을 보내었는데, 그 대강에 말하였으되, “우리가 예수교인을 우대하는 것은 그 행위가 정당함일러니, 지금 소위 전도사 몇 사람이 벼슬에 욕심내어 정부의 사냥개로 선유위원을 도둑하였으니, 소위 교인(敎人)도 믿을 수 없는 물건이라. 그대는 즉시 불러가지 않으면 소위 교인은 모두 섬멸할 터이요, 그대의 생명도 장차 보전치 못하리라.” 하였으므로 게일씨는 대경(大驚)하여 미국 영사(領事)와 상의하고, 통감부(統監府)에 교섭하여 장차 불러오기로 결정이 되었다 하며, 정부에서는 영자(英字)의 필적(筆跡)을 장차 수탐(搜探)하는 중이라더라.

이 기사에 “예수교인 최병헌 송순용 양인을 선유위원으로 파송하였”다고 했으니, 『승정원일기』에서는 ‘송기용’으로 기록했어도 「공립신보」 기자는 예전부터 익숙하던 이름 ‘송순용’을 그대로 썼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전 해부터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었는데, 1907년 5월 8일 자 「대한매일신보」에는 “西小門內 聖書公會 視務人 宋綺用 壹圓”(서소문내 성서공회 시무인 송기용 일원)이라는 기사 또한 실려 있어, 성경을 번역하던 송순용이 송기용과 동일 인물임이 확실하다.

국문연구소 위원으로 활동하다

갑오개혁 이후로 국문 연구가 활발해졌으므로, 학부(學部) 내에 국문연구소가 설치되었는데, 순종 1년(1907) 8월 16일 『승정원일기』에 “전 교원 송기용 명 국문연구위원”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아무런 저서도 없던 그가 『대한국어문법』의 저자 주시경, 『국문정리』의 저자 이봉운, 『자전석요』(字典釋要)의 저자 지석영 등과 함께 국문연구위원에 임명된 이유는 언더우드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사전과 문법서를 함께 편찬하면서 터득한 지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문연구소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정음청(正音廳) 이후 최초의 국문연구기관으로, 국문에 관한 여러 학설을 통일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실무 경험이 적었던 탓인지, 10월 27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송기용 씨 외에는 국문 토(吐)도 제대로 달지 못해 말이 안 되는 구절이 허다하다.’는 기사가 실리더니, 송기용이 신문사에 찾아와 ‘위원들은 모두 국문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명하는 기사까지 10월 30일 자 같은 신문에 실렸다.
연구위원들은 1909년 12월 27일까지 23회에 걸친 회의를 열고 연구 토론한 결과를 정리한 『국문연구의정안』(國文硏究議定案)을 학부에 제출했는데, 국운이 기울면서 이 결과가 국정에 반영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아래아(·) 자를 그대로 쓰기로 한 것을 제외하면 이 의정안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문자체계와 맞춤법의 원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니, 당시로서는 앞선 정책을 제안한 셈이다.
송순용은 근대적인 학문을 배우지 못한 교사였지만, 프랑스 신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불뎐』 편찬에 참여한 경험을 언더우드에게 전수하여 그가 빠른 시일 내에 한국어로 설교하고, 사전과 문법서를 함께 편찬하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송순용은 언더우드를 가르치고 성경을 함께 번역하면서 체계화된 한국어 문법과 철자법 지식을 『국문연구의정안』에 반영하여 제1세대 한국어 교사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20) 근대문화의 발생』 Ⅲ. 基督敎의 展開, 1. 基督敎의 展開, (5) 基督敎書籍의 刊行, 1981(한국사데이터베이스).
2 이만열・옥성득 편역, 『언더우드 자료집 Ⅰ』(연세대학교출판부, 2005), 10-11.
3 이만열・옥성득 편역, 위의 책, 27-28.
4 옥성득, “1887년 개정판 『마가의젼복음셔언』,” 「성경원문연구」 제38호(2016): 124.
5 옥성득, 위의 글, 134.
6 이덕주, “초기 한글 성서 번역에 관한 연구,” 그리스도교와 겨레문화연구회, 『한글성서와 겨레문화』(기독교문사, 1985), 442.
7 이덕주, “‘제1세대 성서’를 통해 이루어진 복음의 토착화,” Canon & Culture 제4권 1호(2010): 89에서 재인용.
8 이덕주, “한말 기독교인들의 선유활동에 관한 연구,” 『한국 기독교와 역사 10』, 46-47.
9 최병헌, 한규준 역주, “충청남도 선유문안,” 「기독교사상」 2017년 10월호–2018년 11월호.
10 1908년 2월 18일 자 「대한매일신보」에는 같은 내용의 기사가 “선유낭패”(宣諭狼貝)라는 제목으로 실렸는데, 여기에서는 ‘송순용’(宋循用)이라고 표기하였다.


이 숙 | 연세대학교를 졸업하였고, 하버드대학교 언어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 강사와 하버드대학교 동아시아학과 전임강사로 일했다. 저서로 『한국어 이해교육론』(공저), Practical Korean(공저) 등이 있다. 현재 전주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9년 2월호(통권 7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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