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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문화·신학·목회 > [중세 사람들의 삶과 죽음]
문화·신학·목회 (2019년 2월호)

 

  쥐 한 마리가 송아지 한 마리 가격이었다니!
  

본문

 

현대에는 먹을 것이 너무 넘쳐나서 문제가 될 지경이다. 물론 이 말은 기근에 시달리는 국가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평균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경우 과거에 비해 훨씬 다양하고 많은 먹을거리를 접한다. 세 끼 식사를 모두 챙겨 먹는다는 사실 또한 과거와 달라진 점이다. 바로 몇백 년 전 유럽에서는 하루 세 끼가 아니라 두 끼만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먹을 것이 궁해서였는지 아니면 이들의 전통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기야 많이 먹는 것보다는 적게 먹는 것이 건강에도 좋다는 결론에 다다른 시대이니, 당시의 두 끼 식사가 오히려 좋은 습관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중세 시대에 인간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처한 환경에 따라서 어떻게 변모했으며, 특히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궁한 때에는 어떠했을까? 독일 기센대학에서 열린 심포지엄을 책으로 엮은 『중세와 근세의 음식과 음료』를 통해서 살펴보자.

전쟁 때의 먹거리들

기센대학의 심포지엄에서 신경병리학자인 슈푸란켈 교수는 중세 후기의 음식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그가 택한 연구시기는 바로 유럽의 ‘30년전쟁’ 때이다. 이 전쟁은 그 이름이 말해주듯 1618년에서 1648년까지 꼬박 30년 동안 계속 되었다. 3년도 아닌 30년간이나 전쟁을 지속했다면, 민중들의 삶은 어떠했을지 쉬이 짐작이 간다. 그리스도교 지배 아래에서 지켜지던 윤리와 도덕은 깡그리 무너졌으며, 그 자리에는 강간, 약탈, 고문이 일상사로 들어찼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참을 수 없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배고픔이었다. 먹을 것이 없다 보니 굶어 죽는 이들이 수두룩했고,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일단 배를 채우고 보자는 마음에 상한 음식을 먹기도 했다. 시골에서는 병든 소까지 먹어치웠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배를 채운 결과 병이 들어 죽는 사람도 많았다. 이 전쟁 중에 한 마을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면 그 심각성을 엿볼 수 있다. 전쟁 전에 90가구가 살았던 마을에 1644년에는 11가구가 남았고, 1년이 지난 1645년에는 8가구만 살아남았다 하니 얼마나 살기 힘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이 전쟁은 대략 90%의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것으로 여겨진다.

독일 그뤼넨부르크의 한 성당의 기록부

한 자료를 통해 더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30년전쟁 중인 1634년에서 1635년까지 2년간의 자료가 독일 그뤼넨부르크에 있는 한 성당의 기록부에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그 문서에는 신자들이 영세받은 날, 결혼한 이들의 이름과 날짜, 죽은 사람에 관한 기록, 그 외에 특수한 기록 등이 생생하게 남겨져 있다. 이 교회 기록 문서를 남긴 사람은 ‘요한 로자리우스’라는 신부였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는 각 도시와의 교역을 위하여 마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잘 닦여 있었다고 한다. 이는 교역을 담당하는 장사꾼들을 위해서였다. 장사꾼들이 마차에 실은 물건을 잘 운반할 수 있도록 좋은 길을 만들어놓고 마차가 통과할 때마다 통행세를 받았는데, 말하자면 오늘날의 고속도로인 셈이다.
하지만 그뤼넨부르크에 만들어진 이 마차길은 이 시기에 다른 역할을 했다. 1621년 이래로 90번이나 군인들에게 점령당한 이 마을의 마차길은 군인들의 이동을 위한 길이 되었다. 군인들 역시 먹을 것 때문에 온 마을을 다니면서 약탈을 일삼았는데 이 마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먹을 것이 없어 허덕이던 민초들은 그나마 남은 음식마저도 군인들에게 다 빼앗기고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다.
결국 민중들은 평소에 쳐다보지도 않던 것에 눈을 돌렸다. 바로 나뭇잎, 풀, 그리고 유피(楡皮)가 그것이다. 우리 역시 어려운 시기에 솔가지나 칡뿌리를 먹었다고 하니 이런 종류의 먹거리가 유별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외에도 그들은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고 토할 것 같은 것을 먹었는데, 그것은 바로 쥐였다. 시궁창 쥐, 집쥐, 들쥐, 그리고 산쥐까지 보는 대로 잡아서 식용으로 이용했으며, 이것마저도 구하지 못해 안달이었다고 한다. 당시 쥐 한 마리가 4굴덴(Gulden)에 팔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슈푸란켈 교수가 언급하기를 이 값은 당시의 송아지 한 마리 값과 유사하다고 했으니 정말 어마어마한 가격이다.
민중들의 기이한 먹거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쥐를 잡아먹는 고양이에게도 눈독을 들였고, 드디어 개고기를 먹기에 이르렀다. 사실 한국인들의 개고기 섭취는 그리 낯선 문화가 아니지만, 개고기를 먹는 일이 유럽인들에게는 일종의 터부였기에 당시 유럽에서는 어마어마한 사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로자리우스 신부의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배가 고픈 나머지 무덤을 파헤쳐 그 미라를 먹었다고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미라에 대한 해석도 달라지는데, 이런 미라는 인간의 시체가 아니라 일종의 ‘고기’(Fleisch)였다는 해석을 덧붙여 놓았다. 하지만 이렇게도 배가 채워지지 않는 경우에는 사람을 죽여 그것을 고기 대용으로 먹었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을 접한 필자는 사못 궁금해진다. 이런 기록을 한 신부 또한 굶주림에 지친 나머지 당시 민중들이 먹던 유사한 음식들(?)을 같이 먹었을까? 아니면 그는 호의호식하며 이런 괴이한 방법으로 목숨을 연명하던 민중들의 삶을 초연하게 기록했을까?
30년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시 페스트가 번지기 시작했다. 특히 1635년 6-9월 사이에 그뤼넨부르크에 발생한 페스트는 1224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자그마한 도시에 살던 절반의 시민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20세기 독일의 유명한 서정시인 브레히트(Brecht, 1898-1956)는 당시의 상황을 “일단 (게걸스럽게) 먹는 것이 해결되어야 그다음 윤리가 적용된다.”라고 표현했는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우리 속담과 유사하다. 인간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의식주가 해결된 후에야 도덕이나 윤리, 문화나 종교 등을 구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쥐고기를 먹으면서 연명하는 굶주린 사람들을 교회/성당에 붙잡아 두고, 삼위일체 교리가 어떻고 하늘나라와 천국이 어떻고 하는 설교와 강론을 한다면, 아마도 이들 사이에서는 당장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200여 년이 흐른 후에는

중세를 조금 벗어나 먹거리의 측면에서 이야기를 더 진행해보자. 모진 운명을 뒤로하고 살아남은 자들이 나라를 번성시켜 약 200여 년이 흐른 후 후손들의 이야기이다. 1870-71년에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 시기에도 많은 시민들이 죽어갔다.
물론 당시 사람들은 음식 때문에 고생을 했지만, 계몽주의 덕택에 미리 음식을 준비했기 때문에 중세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들은 말고기 같은 것을 소금에 절이거나 통조림을 만들어 저장해두고 종달새, 지빠귀, 야생 비둘기, 까마귀 등을 잡아 신선한 고기를 섭취하였다. 하지만 이 먹거리들이 동이 나자 다시 고양이, 쥐, 개에 눈독을 들였다.
프랑스 파리는 문화, 예술, 학문의 중심지인 동시에 완전히 사치에 빠진 사람들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는 서구의 여러 나라들 중 고약한 냄새가 가장 많이 나는 곳으로도 유명했는데, 그것은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길거리에 쓰레기가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쓰레기를 치우는 것이 문제로 대두되었고, 이 쓰레기 속에서 살던 쥐 또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당시는 동서양의 대규모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때인데, 쥐가 교역하는 짐에 따라 들어올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쓰레기로 뒤덮인 불결한 거리, 어두침침한 도시 곳곳에서 풍기는 악취와 들끓는 쥐 떼를 상상해보면 되겠다.
이런 상황에서 또 쥐고기가 등장한다. 때는 1870년 11월 17일,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름 있는 사람들 10명이 한 가정집에 모였다. 모인 이유는 아래 메뉴판에 나오는 음식을 먹어보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그리고 이 음식들을 시식한 후에는 어떤 평가를 남겼는지 살펴보자.

1. 말고기 육즙에 수수를 섞은 수프 요리-수수는 약간 단단했지만 전체적인 맛은 탁월하다.
2. 얇게 저민 개의 간 요리-10명 중 대다수가 느끼기를, 개의 간은 거세된 숫양의 신장 맛과 유사하며, 혀에 녹을 정도로 부드럽다.
3. 고양이 등 아래 살에 마요네즈를 곁들인 요리-맛이 아주 탁월했고, 흰색 부분의 고기는 아주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이 고기는 특별히 연한데, 차가운 어린 암소고기 맛과 유사하다.
4. 개의 어깨 살을 숯불에 구워 토마토 소스에 버무린 요리-특별히 연한 고기였고, 알프스의 양고기 맛과 낙타고기와 비슷하다.
5. 고양이고기를 후추로 요리해 버섯을 곁들인 요리-약간 질기지만, 만약 배고픈 상태였다면 아주 호감 가는 음식에 속한다.
6. 개의 뒷다리에 푸른 완두콩을 곁들인 요리-식초에 너무 절여서 식초 맛이 강했다. 이 고기 역시 나쁘지는 않았지만 섬유질이 약간 많아 질긴 것이 흠이었다.
7. 쥐고기에 로베르트 소스을 곁들인 요리-이 쥐고기의 맛은 매우 좋으며(sehr gut!) 새고기 맛과 매우 유사하다.
8. 쥐고기와 개의 뒷다리에 고명을 곁들여 후추 소스를 친 요리-개의 뒷다리 고기 맛이 특별히 좋았다. 특히 다 익히지 않고 적당히 익혀 피가 보이는 곳의 맛이 우월했다. 쥐고기는 너무 많이 익히다 보니 고유의 맛이 좀 사라진 듯하고 섬유질이 많았다.
9. 육즙에 베고니아(추해당)를 넣은 요리-승아(Sauerampfer)와 유사하지만, 승아보다 더 강하고 진한 맛이었다. 이런 음식은 소금 간이 많이 들어간 음식을 먹은 후에 먹는다면 염분을 중화시키는 데 최고일 것으로 보인다.
10. 건포도가 든 푸딩과 말의 골수를 넣은 요리-좌우지간 ‘최고의 맛’.


위에서 보듯이, 중세 시기에 기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먹었던 쥐고기, 고양이고기, 개고기 요리가 1870년의 메뉴판에 정식으로 다시 등장했다. 음식을 맛있게 먹고 난 후 그에 대한 평가까지 기록으로 남겼다. 왜 이런 음식을 먹었고, 왜 시식 후 평가서를 남겼는지 궁금하지만, 우리는 이들이 이런 음식을 먹고 평가를 남겼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위와 같은 메뉴와 그 음식에 대한 평을 읽고 난 후에 군침이 도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메스꺼움이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참여한 열 명의 유명인은 열 가지 음식의 그릇을 다 비웠고, 음식이 너무나 흡족했으며 먹는 동안 한없는 즐거움을 느꼈다는 후평을 남겼다고 슈푸란켈 교수는 언급했다.
슈푸란켈 교수는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해준다. ‘게오포’라는 사람이 아침식사로 들쥐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인데, 그는 이 고기가 새고기 맛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남겼다. 앞에서 소개한 10명의 평가와 유사하다. 그는 특히 앞다리의 근육은 뒷다리보다 연하며, 뒷다리 고기는 살이 풍성하다는 정확한 보고까지 남겼다. 머리를 자르고 털을 벗기고 내장을 빼낸 쥐고기의 무게는 130g인 반면에, 간이 크고 먹음직스러운 쥐의 무게는 30g이 더 많은 160g이라고 전해진다.
위 기록들을 통해 전쟁이나 극심한 기근의 상황에서 인간은 전에 먹지 못하던 음식도 먹게 된다는 사실, 또 그런 음식이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먹을 수 있게 고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궁핍과 기근 등 여러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먹었던 음식을 200년이 흐른 뒤에는 즐기면서 먹었다는 사실을 보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이라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못 먹는 것으로 이미 못박아 두었기 때문에 먹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너무나 많은 음식들이 있어서 선택할 여지가 많다 보니, 평소엔 뒤로 밀렸던 이런 희귀 음식들이 다시 등장하게 되는 것일까?
우리나라 사람 중 일부는 개고기를 아무 거리낌 없이 먹고 있다. 유럽에서도 궁핍할 때에 개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데, 어찌하여 일부 유럽인들은 개고기를 먹는 것 자체를 아주 나쁜 행위로 몰아가고 있는 것일까?

식탁 옆에 서서 고기를 썰어주는 사람

서양 요리에서, 고기를 먹을 때에는 나이프가 꼭 필요하다. 당시 중세 사람들은 식사 자리에 초대되어 다른 사람의 집에 갈 때에는 반드시 나이프를 가지고 가야 했다.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의 집에 하룻밤 머물 때 칫솔을 준비하듯이 말이다. 다만 아주 부유한 집안에서는 손님을 위해 식탁에 나이프를 챙겨주었지만, 더러는 한 개의 나이프를 두 사람이 공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따라서 나이프로 이를 쑤시거나 나이프의 날카로운 부분을 입에 대는 것은 금기 사항이었다.
오늘날 유럽인들의 식사 예절이 참 세련되어 보인다는 사실 때문에 과거의 이런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이런 일이 더러 있다 보니 이렇게 금기 사항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하기야 일부 상위층을 제외하고는 중세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자도 모르는 하층민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가능성 없는 이야기도 아닐 듯하다.
그런데 나이프를 사용하는 문화가 바뀐 시기도 존재한다. 나이프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음식을 먹는 시기가 있었다는 말이다. 나이프가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위험한 물건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기를 먹었을까?
그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음식을 썰어주는 사람이다. 도리스 룸-크로이터 박사가 언급하기를, 이들은 여러 종류의 칼을 몸에 지니고 있었고, 고기, 생선, 식용가축 등 각종 음식을 먹는 사람 옆에 서서 그 음식에 상응하는 칼을 선택하여 음식을 썰어주었다. 때로는 과일과 채소까지 썰어주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서비스를 받는 이들은 말하지 않더라도 귀족층이었을 것이다. 음식을 썰어주는 사람의 지위는 상당했으며, 심지어 예술가로 칭하거나 ‘마이스터’라는 타이틀까지 부여했다고 한다. 이들은 비록 단순한 작업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동물 해부학 지식까지 소유한 실력파였기 때문이었다.

양태자 | 독일 마르부르크 필립스대학교에서 비교문화학과 비교종교학 석사학위를, 예나 프리드리히 쉴러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중세의 뒷골목 풍경』, 『중세의 뒷골목 사랑』, 『중세의 길거리의 문화사』, 『중세의 잔혹사 마녀사냥』 등을 집필하였고, 영성 번역서로 『파도가 바다다』가 있다.

 
 
 

2019년 2월호(통권 7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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