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공동의 기억’이라고 했던가. 필자는 전쟁 이후 세대임에도 6월이면 자연스레 한국전쟁의 아픔이 마치 나의 경험처럼 되살아난다. 교육과 문화를 통해 한국전쟁이 내 안에 스며들고 내면화되어 기억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전쟁은 전쟁 세대만의 경험이 아니라 한반도 모든 이들의 역사이다. 어찌 한국만이겠는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세상은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폭력 사회이다. 개인 간의 폭력이든 국가 간의 폭력이든 ‘법보다 주먹’이 가깝고 무섭다.
4세기 로마의 전략가 베게티우스(Flavius Vegetius Renatus)는 『군사학 논고』에서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을 남겼다. 이 명제는 그 후 수많은 권력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한 전쟁을 합리화하는 데 남용되었다.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는 말처럼 모순적인 논리가 또 있을까! 마치 이건 ‘동그란 네모’가 있다고 우기는 것처럼 들린다.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준비하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스도교는 평화의 종교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실 때, 천사들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를 노래했다. 그리스도가 평화의 왕으로 오셨음을 선포한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위해 사시고, 가르치시고, 죽으셨다. 따라서 초대교회와 교회사 면면에는 그리스도교 평화주의 전통이 흐른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박해받던 종교에서 국가의 종교로 바뀌자 교회가 국가의 이익을 위한 폭력을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고대교회의 아우구스티누스는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도나투스 분파를 진압하기 위해 ‘정당한 전쟁론’을 제시했다. 그리스도교가 국가의 권위와 이익을 합리화하기 위해 전쟁을 용인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중세교회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하겠다는 명분으로 ‘십자군 전쟁’이라는 기묘한 전쟁을 근 200년 동안 지속하였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그 의미와는 정반대로 가장 치열한 분쟁과 폭력과 전쟁의 도시가 되고 말았다. 과연 ‘정당한’과 ‘전쟁’이 한 단어로 묶일 수 있을까? ‘거룩한 전쟁’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리스도는 산상수훈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마 5:9, 표준새번역)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평화를 위해 기꺼이 죽은 한 알의 밀이 되었다. 한국전쟁의 아픔이 되살아나는 6월이 되면, ‘전쟁은 어쩔 수 없어’라는 체념이나 ‘전쟁은 평화를 위한 선택이야’라는 억지보다,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이 땅에 보냄 받은 밀알이야’라는 새로운 다짐이 필요할 것이다. 시인 신동엽의 외침이 새삼 새롭게 다가오는 6월이다. “껍데기는 가라 / 한라에서 백두까지 /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