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이 다가온다. 누가복음 2장 10절은 천사의 입을 빌려 예수의 탄생을 이렇게 전한다.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면서(요 1:14) 구원의 길을 보여주실 테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성탄절에는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인사도 나눈다. 그런데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그런 인사마저 나눌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형국에 송년호에서 기독교의 교세 감소를 특집으로 다루니 편집자의 마음이 무겁다. 교세는 신도의 수, 재정 규모, 사회적 영향력 등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이런 것들의 감소가 통계에 잡힌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보면 신도의 감소는 전에도 있었다. 1920년대 중반에는 신도들의 만주 이주와 교회 청년들의 사회주의 수용이, 1940년대 초반에는 신사참배 수용과 교회조차 가기 어려운 생활환경이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1943년에 <어서 돌아오오>라는 찬송가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현재의 감소 추세는 1990년대부터 조금씩 나타난 것인데 최근에는 더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줄어드는 것은 단지 신도 수만이 아니다. 우리는 크리스챤아카데미(대화문화아카데미), 한국신학연구소,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같은 기관들의 활동에서도 현저한 약세를 목격하고 있다. 크리스챤아카데미의 대화운동, 한국신학연구소의 민중신학 연구,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한국 사회 분석 등 이 세 기관이 남긴 교회와 사회에 대한 빛나는 업적을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하다.
우리 사회에서 시민운동을 이끌어온 서울YMCA의 활동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활동의 부진이나 쇠퇴는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같은 기독학생운동, 한국대학생선교회(CCC) 등의 학원선교 영역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한국 기독교의 한 축이 무너지고 있다. 그 기관들에 맡겨진 사명이 다한 것일까? 아니면 그 원인이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일까?
사정이 이렇지만 낙담할 필요는 없다. 원래 제도나 기구는 기독교 전파의 수단일 뿐이며 시대가 달라지면 소용 가치가 없어지기 마련이다. 한국교회에 조직과 프로그램, 이사회와 위원회가 급증하던 1930년대 초반, 이용도 목사나 스톡스(Marion B. Stokes), 블레어(William. N. Blair) 같은 선교사들은 오히려 그런 현상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런 것이 내적인 생명력의 근원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가 받은 소명대로 기독교인으로서 확고한 자의식과 긍지를 갖는 일이다. 신자들의 자기 긍정 없이 교회의 생명이 보존될 리 없다. 파울 틸리히의 말대로, 생명력과 긍지가 감소하면 결국 존재하려는 용기도 감소하고 말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 될까 두려운 것이지, 교세 감소 자체가 두려운 것은 아니다.
붓을 놓으려는데, 노동자 선교를 통해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던 산업선교의 역군 조지 오글(George E. Ogle) 선교사의 서거 소식이 들린다. 독자 제위와 함께 기쁜 성탄절을 맞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