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의 해가 저물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기념식이 열렸다. 2・8독립선언,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다수의 논문도 발표되었다. 정부는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위원회를 통해 기념사업을 펼쳤다. 우리 시대에는 더 이상 볼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행사가 교회 안팎에서 개최되었다. 그 100주년의 해를 두 달 남겨놓고 있다. 사업과 행사는 모두 끝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서재로 돌아와 3・1운동이 어떻게 역사서에 기술되었는지, 3・1운동을 이해할 때 어떤 사항이 논쟁거리였는지 조용히 살펴보는 시간도 가져보자.
3・1운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숭실대학교 김양선 교수의 “3・1운동과 기독교계”가 처음이었다. 35쪽이나 되는 긴 논문이다. 기독교계의 3・1운동에 대한 첫 학문적인 연구였는데, 3・1운동 50주년을 기념하여 동아일보사가 펴낸 『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1969)에 실렸다. 김양선은 이 글을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하고 1970년에 사망했다.
김양선 사후에 등장한 교회사가는 연세대학교의 민경배 교수였다. 그가 1972년 『한국기독교회사: 한국 민족교회 형성 과정사』를 펴냈다.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서에서 3・1운동이 하나의 장으로 다뤄진 것은 이 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책은 민족교회 사관을 표방한 책인데, 3・1운동이 그 사관을 구성하는 주요 테마로 등장하였다.
그 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3・1운동 연구를 주도해왔다. 이 연구소는 여러 차례의 학술대회를 통해 3・1운동 연구에 매진했다. 올해 이 연구소에서는 방대한 분량의 자료집 『3・1독립운동과 기독교』(전 3권)를 펴냈고, 『3・1운동과 기독교 민족대표 16인』도 간행하였다. 이 두 간행물은 올해 교회사 학계의 3・1운동 연구에서 최대 성과였다.
3・1운동 연구에는 어떠한 쟁점들이 있었을까? 한국사 연구자들은 누가 3・1운동을 이끌었는가를 놓고서 오래전부터 ‘민족대표 주도론’과 ‘민중 주도론’으로 대립했다. 1980년대에 우리 사회에 맑시즘이나 주체사상이 수용되면서 급속하게 민중 주도론으로 기운 적이 있다. 이 시기에 교회의 역사가들은 기독교 민족대표 16인의 역할을 변호해야 했다. 올해는 ‘3・1운동’이라는 용어보다는 ‘3・1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부 역사가들로부터 제기되었다.
1919년 3월 1일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한다. 남북 분단 속에서 그 선언 100주년의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지난 9월에는 통일과 평화에 관해 여러 편의 글을 남긴 송기득과 손규태 선생도 우리 곁을 떠났다. 독립선언서의 한마디 한마디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