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탁한 뉴스 미디어를 소비하는 현대인의 병리적 증상
제프리 빌브로의 『리딩 더 타임스』는 국내에 출간되자마자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여러 기독교 매체에서 이 책을 소개하기 시작했고, 필자 주변의 지인들도 각자의 소셜 미디어(SNS)를 통해 이 책에 대한 소감을 공유했다. ‘이런 책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었고, 더 나아가 저자가 제기하는 오늘날의 뉴스 시장 및 소비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과 신학적 성찰에 공감을 표하는 긍정적인 반응들이 이어졌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뉴스 미디어에 대한 적지 않은 고민과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처한 뉴스 미디어 환경은 어떤 모습인가? 저자가 진단하기를, 현대인들은 수많은 정보에 노출되어 ‘정신적 소화불량’ 상태에 놓여 있다.(42-47쪽) 또한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기사에 익숙해져 도덕적인 나태와 권태감에 젖어 있기도 하다. 때론 악의적인 허위정보에 마음을 빼앗긴 채 누군가를 혐오하는 깃발을 흔드는 극단적 집단주의 증상도 보인다. 언제부턴가 매일 뉴스를 보는 것이 힘들어졌으며, 뉴스를 보며 누군가를 미워하고 불신하거나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일종의 집단 트라우마처럼 말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특정 매체에 대해서는 귀를 막거나 편부터 가르고 본다는 데 있다. 합리적 의사소통과 성숙한 시민의식이 사라진 것 같은 이 시대, 정말 뉴스 미디어는 우리를 구원할 도구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뉴스 미디어의 영향과 기독교인의 대응
이 책에서는 ‘기독교인은 시대를 잘 분별하기 위하여 뉴스를 잘 읽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저자는 ‘기독교인이라면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식의 윤리적 당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이라고 외쳤던 칼 바르트의 주장에 저자가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미국의) 기독교인은 한 손에 든 신문 때문에 다른 손의 성경을 놓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근대 합리주의와 진보적 역사관의 상징적 인물인 헤겔이 “아침 신문을 읽는 것은 현실주의자의 아침 기도다.”라고 주장한 것과는 그 결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112-121쪽) 오히려 저자는 근대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초월의 가치를 실천하는 종교 공동체의 역할이 현대 세속사회에는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크게 두 가지 관점을 견지한다. 하나는 뉴스 미디어에 대한 관점으로 오늘날 디지털화된 미디어 생태계와 뉴스 산업 구조는 언론 미디어 본연의 긍정적 기능보다 부정적 영향이 더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왜곡된 미디어의 영향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두고, 기독교인의 구속적 삶의 가치를 고민하도록 초청한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미디어 환경에서 기독교인의 고유한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고유한 정체성’이란 이 책을 구성하는 세 가지 질문에서 드러나는데, 즉 기독교인은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가?’, ‘시간을 어떻게 상상하고 경험해야 하는가?’, 그리고 ‘서로에게 어떻게 속해야 하는가?’로 나누어서 구체화하고 있다. 이 두 관점은 이 책을 구성하는 구조에서도 드러나는데, 세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각각 세속 미디어 담론의 문제, 신학적 성찰, 대안적 사례를 제공하고 있다.
1)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가
저자는 오늘날 뉴스 미디어가 가리키고 재현하는 내용이 실제 우리의 삶에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것들에 집착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특히 오늘날 미디어가 생산하는 담론이란 일관된 원칙 없이 파편화된 정보의 나열과도 같다. 이를 가리켜 ‘머캐덤 도로’(잘게 부순 돌이나 자갈로 만든 도로)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런 자극적인 정보를 반복적으로 섭취한 부작용으로 ‘정신적 소화불량’ 상태와 무기력과 권태감 증상을 호소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자본주의 소비문화에 물든 뉴스 미디어 생태계는 소비자로 하여금 습관적인 집착과 중독, 수동적인 반응과 관망 등으로 이어지게 하는 도덕적 악순환을 낳게 한다고 진단한다. 저자는 이런 뉴스 미디어로부터 떨어져 영원한 것을 주목하라고 제안한다.(29-56쪽)
이런 주장이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예로 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나 토머스 머튼은 내적 성찰과 비움의 영성을 통해 허무한 것에 집착하기를 멈추고 실제 우리 주변의 이웃과 관계할 힘을 찾도록 돕는 기독교 영성가이다. 현대인들은 “뉴스 매체를 세상을 바라보는 주된 렌즈로 삼다 보니, 먼 곳에서 일어난 충격적 사건들의 중요성은 커 보이고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사건들은 하찮게 보이는” 경험에 노출되어 있다.(51쪽) 이를 가리켜 ‘연관성의 위기’라고 한다.1 이는 매스미디어 시대만의 위기가 아니라, 다방향의 소통이 가능해진 포스트매스미디어 시대에도 지속되는 위기이다. 아니 어쩌면 ‘연관성의 초위기’ 상태에 봉착했는지 모른다.2
소셜 미디어의 발달이 서로를 연결하고 돌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과잉과 양극화를 초래하고 있다면,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은 단지 미디어 환경의 변화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저자의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저자는 뉴스 매체가 지목하는 세상에만 집착하거나 과잉 반응하기보다는 실제 우리 주변의 이웃, 마을, 공동체를 돌아보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뉴스 미디어로부터 멀어져야 하며, ‘거룩한 초연함’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2) 시간을 어떻게 상상하고 경험하는가
2부는 ‘시간’을 주제로 하는데, 정확하게는 인류 문화의 역사관에 대해 다루고 있다. 뉴스란 동 시간대에 발생한 다수의 사건 중에서 ‘뉴스로서의 가치가 있는’(newsworthy) 사건을 선택하고 재현한 결과이다. 이 말은 뉴스가 사회의 역사관에 따라 중요한 사건과 그렇지 않은 사건으로 나뉜다는 의미이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날의 세속 미디어가 어떤 시간의 체계를 따르고 어떤 관점에 따라 ‘뉴스거리’를 결정하는지 살피는 일은 어떤 사회를 상상하고 만들어갈 것인가와 깊이 맞닿아 있다.
저자는 인류 문화에 나타난 두 가지 시간의 이해 방식인 카이로스와 크로노스의 역사관을 구분하고, 그 장단점을 설명하는 데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다.(101-128쪽) 카이로스 문화, 예를 들어 신정국가나 위계적 사회에서는 “인간 문명이 상대적으로 정적이라고 보고 당대 사건들이 가지는 영속적 의미를 과소평가”하는 반면, 크로노스 문화, 예를 들어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는 “인류 문명이 진보하고 있으며, 이 진보를 시사 문제에서 확인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107쪽) 과거 사회에서 ‘일상’(서민의, 평범하거나 소외된 영역)이란 어떤 의미나 변화도 갖지 못했지만, 근대 이후 사회에서는 한 개인이 국가 및 역사를 변혁시켜 나가는 주체가 되었고, 그 권리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된다고 믿고 있다. 이런 관점을 가리켜 ‘역사적 현실주의’로 부르는데, 대표적인 철학자 헤겔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보았다.(112-115쪽)
철학자 헤겔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흥미로운데, 저자는 역사의 흐름을 권리 및 인정투쟁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결국에는 진보해갈 것이라는 낙관적 인식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다. 비록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진 않았지만,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최우선으로 주장하는 미국식 자유주의는 다양한 사회 갈등과 혐오, 탈진실 현상 속에서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문화전쟁 형태의 양상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비관적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이런 이념적, 정치적 갈등은 언론 미디어와 소셜 미디어에 의해 증폭되고 확대되는 경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독일의 언어학자 에리히 아우어바흐를 인용하며 ‘역사적 현실주의’ 대신 ‘예표적 현실주의’ 관점을 제안한다. ‘예표적 현실주의’란 인류 사회의 역사를 구원이라는 커다란 드라마 속에서 이해하는 것으로, 크로노스의 흐름 속에 드러난 카이로스의 의미를 구속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를 말한다. 그 예로서, 성서를 관통하는 구속사적 관점, 구약의 선지자적 메시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과 종말론적 신앙 등을 소개한다. 사실 이러한 사례들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특히 저자가 사례로 든 단테의 〈신곡〉은 신앙적인 도전과 통찰을 제공하지만, 오늘날 현실에 적용하기엔 시공간적 차이가 주는 괴리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저자가 뉴스를 읽고 시대를 분별함에 있어서 예표적 현실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구속의 드라마를 잊고, 현실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는 저자의 판단 때문일 것이다. 그가 〈신곡〉의 한 장면인 ‘파리나타와 카발칸티의 형벌’을 소개하는 이유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는 흐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당장 자신이 지지하고 옳다고 믿는 정당이나 정치 활동에 더 집착하기 때문일지 모른다.(149-151쪽)
이를 통해 독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서사보다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을 더 바라고 믿고 있는지 자문하게 될 것이다. 이는 나와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로 직결된다. 현실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 즉 역사적 포물선에서 갈등만이 진보의 원동력이 아님을 아는 것에서, 우리는 상호 간에 다름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공생할 가능성이 생길지도 모른다. 정치 폭력과 희생, 고통스러운 과거를 가진 개인과 집단, 국가는 과거를 어떻게 해결하고 화해할 것인지를 물을 수밖에 없다. 저자는 다양한 이익과 이권의 다툼을 넘어, 생존의 문제로 연결되는 다양한 사회 이슈 속에서 종말론적 시간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특수한 기여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찰스 테일러의 공동체주의적 관점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테일러는 근대 이성을 신봉하는 낙관적이고도 합리주의적인 관점만으로는 현대 사회의 근원적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종교(초월)의 영역이 세속사회에 더욱 필요하다고 강조한다.(132쪽) 저자는 세속 미디어가 만들어낸 현실 정치 집착, 지나치게 열광적이고 다른 모든 이슈를 삼켜버리는 정치 과잉 현상으로부터 ‘거룩한 초연함’을 유지하기 위한 종교의 역할을 기독교의 독특한 시간 개념으로부터 찾기를 기대하고 있다.(155쪽)
3) 서로에게 어떻게 소속할 것인가
현대 사회에서 나와 우리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어떤 신문과 어떤 매체를 주로 보는지가 곧 자기 자신을 규정한다는 저자의 지적은 옳다.(176쪽) 다시 말해, 무엇을 주목하느냐가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마지막 3부에서는 미디어에 의해 연결되고 소속되는 다양한 공동체에 대해 고찰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론장의 중요성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작금의 미디어 생태계가 공론장으로서 제대로 기능하는지에 대한 의심은 저자만의 것이 아니다. 저자는 다시 찰스 테일러를 인용하면서, 근대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 사회의 공론장이 가진 한계를 비판한다. 민족이나 국가의 개념은 ‘다수’와 ‘이익’이라는 이유로 마을, 공동체, 이웃, 약자보다 우선하기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미디어(와 종교)는 선전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더구나 저자는 디지털 미디어 환경이 ‘집단’을 ‘무리’로 만들고, 개인을 원자화하여 떨어져 ‘함께 홀로’(alone together)인 상태로 머물게 한다고 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저자는 공동체 바깥에서 대안 공동체를 살아낼 필요성을 소개하는데, 이것은 세상과의 분리를 말한다기보다는 공론장의 주요 담론으로부터 거리를 둔, 그래서 내가 사는 마을과 이웃과의 공동체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삶을 말한다. 그가 예시로 든 프레더릭 더글라스의 노예제 폐지 운동과 도로시 데이의 노동자 운동은 공동체 바깥에서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대안 공동체의 전형이다.
시대를 읽는 공동체와 공동선을 향한 비전
이 책이 가진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도 있다. 이 책은 오늘날 뉴스 미디어가 어떤 담론을 형성하는지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의 평가와 분석 기준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이를 분별하고 더 나은 가치와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이런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세속 미디어의 부정적 측면만을 부각하여 상대화하고 있다는 한계를 가진다. 또한 근대 합리주의와 세속화의 흐름에서 나타난 한계를 강조하여 초월적 영역(종교)을 강조한 것은 의미가 있지만, 개인의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지 못한 한국 사회에서 자칫 다시 국가나 공동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 주장이 왜곡되어 해석될 여지도 존재한다. 그리고 미국 정치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그 대안으로서의 공동체주의적 가치에는 일견 동의하지만, 이를 한국적 맥락에서 적용하고 해석하는 일에는 충분한 사회적 시간과 세심한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정의와 평화의 문제들은 투쟁과 해방, 그리고 희생과 저항이 없이는 불가능해 보일 때가 많다.
마지막으로 세상과 다른, 세속에 물들지 않은, 교회다운 교회를 회복하는 노력으로 기독교의 영성과 대안적 공동체의 삶은 권력과 자본에 물든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울림과도 같다. 하지만 그 실천이 자칫 개인의 영성과 대안 공동체로 끝난다면, 그것은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또 다른 분리주의와 게토화를 낳을 것이라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특히나 이 책은 뉴스 미디어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한 나머지, 언론 미디어의 공공성이나 세속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배우고 교회를 돌아보는 긍정적 기회 등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빌브로의 책이 뉴스 미디어가 형성한 세상을 기독교라는 안경으로 바라보고 그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제공했다면, 이제 뉴스 미디어를 통해 모든 인류의 번영을 위한 공공신학적 고민이 필요한 때다.
주(註)
1 김용찬, 『포스트매스미디어-연관성 위기에서 초위기로』(컬처룩, 2023), 280-312.
2 위의 책, 456-514.
보스턴대학교와 에모리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에든버러대학교에서 언론사진과 평화에 관한 공공신학을 주제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저서로 The Role of Religion in Peacebuilding, 『평화의 신학: 한반도에서 신학으로 평화만들기』(이상 공저)가 있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으로 일했으며, 연세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