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필자는 『중용』(中庸)을 읽기 전에 ‘중용’이란 말을 혐오했다. 중용이 자신의 견해와 입장을 숨기며 전선에서 도피하려는 처세술의 하나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불행한 시대에는 사람들에게 이쪽이냐, 저쪽이냐 선택하기를 강요한다. 이런 시대의 생존의 수사법이 바로 중용이었다. 그래서 중용을 모르는 범부(凡夫)들도 중용을 내세워 자신의 비굴한 태도를 합리화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입장을 중용으로 말함으로써 어느 한 입장에 서는 것을 비난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것이 중용을 모르던 내가 중용을 혐오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그러던 어느 날 ‘중용’에 대한 도올 김용옥 선생의 일갈이 내 심장을 찌르고 들었다. 그는 ‘중용은 중앙값이 아니라, 양극단을 끌어당겨 가운데로 모으는 힘’이라고 했다. 중용이 이쪽도 저쪽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에 서서 점잖은 척 양비론으로 남 탓이나 하는 비루한 생존의 수사법이라고 생각하던 필자의 관념이 깨진 것이다.
세계는 대립과 투쟁의 전선이다. 전선은 경계를 만들고 경계는 안쪽과 바깥쪽을 나눈다. 안쪽에 있는 사람은 바깥쪽에 있는 사람을 ‘이방인’이라 부르고, 내집단(ingroup)의 입장과 반대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규정한다. 마찬가지로 마녀, 빨갱이 등도 이렇게 만들어진다. 이것은 정치와 종교가 분화되기 전부터 나타난 인간 사회의 정신 현상이었다. 치유받아야 할 질병이다.
인류 역사에서 이런 인간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그간 많은 노력이 있었다. 그중 한 방법이 종교이다. 예수의 갈릴리 사역도 그러했다. 갈릴리는 수많은 외침(外侵)과 제국의 지배로 인해 이방의 문화와 종교가 유대 전통과 함께 혼재해 있는 곳이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혼합된 경계 도시이며 유대와 이방의 경계였다. 그곳에서 예수는 경계를 허무는 일을 했다. 복음의 사회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면, 결국 복음이란 경계를 허무는 일이라는 사실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는 경계를 허무는 종교로 출발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혁명적인 고백으로부터 모든 경계는 허물어져야 했다. 신과 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제국의 권력과 손잡으면서 경계를 허무는 일보다 경계를 만드는 일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세속적으로는 성장하고 성공한 종교이지만, 본질에서는 실패한 종교이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안에서 끊임없이 경계를 허물기 위한 노력은 그치지 않았다. 오늘 내가 읽은 책의 저자인 서정민 교수도 그러한 삶을 사는 한 사람으로 주목된다. 2020년에 발간한 그의 에세이집 『타인의 시선 경계에서 읽기』와 2022년에 발간한 칼럼집 『일본이라는 이웃』은 그가 경계인으로 살면서 양극단을 끌어당기기 위한 중용의 삶을 살아온 과정과 사유의 궤적이다.
2. 『타인의 시선 경계에서 읽기』 서문에서 저자는 자신이 처한 경계 상황과 개념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끝은 경계선, 혹은 접경이다. 접경은 양쪽을 다 포함할 수도 있고 필요에 따라서는 어느 한 쪽을 단호히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지향점은 경계선이라 해도 서로를 아우르는 긍정적 경계선이다. ‘포지티브 콘택트 존’인 것이다.”(4쪽) 한국인으로 일본에 산다는 것만큼 엄중한 경계는 드물 것이다. 그것은 마치 무슬림 국가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큰 간극이라는 것을 수많은 재일동포들의 역사가 증언해주고 있다.
그런 간극에서 그는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어느 한쪽을 강하게 선택하고 자신의 입장을 갖고 싶은 유혹은 경계선상에 있는 사람에게 닥치는 시련이다. 이럴 때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단순함의 평안이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다. 하지만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보다 양쪽을 다 끌어안을 수 있는, “긍정으로 바라보는 접경의 시선”을 갖는 건 훨씬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때로 고통을 수반한다. 지식인의 눈으로 양극단을 바라보고 그것을 끌어당기려는 노력은 수도자의 고행 같은 것이기도 하다.
두 책에서 서정민 교수는 자신이 일상에서 경험한 것을 토대로 한·일 간의 역사와 문화, 종교적 특성 등을 비교한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한결같다. 어느 하나를 부정하거나 긍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양자가 가진 역사적 맥락과 특성의 고유성을 존중하며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비교와 우월의식으로 가득 찬 한·일 관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입장이다. 특히 『일본이라는 이웃』은 「아사히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묶은 것인데, 그동안 일본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것들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그는 『타인의 시선 경계에서 읽기』 두 번째 장에서 한·일 간의 기독교 역사를 비교하는데, 종교사적 접근보다 정치사회적 맥락으로 접근하고 이해한다. 이것이 한국과 일본의 서로 다른 기독교 양태를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 아시아인의 눈으로 볼 때 서구 신학에 종속된 한국과 일본 기독교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주장이다. 때문에 그는 김흥수 교수 등이 결성한 ‘아시아기독교사학회’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인다.
또한 다섯 번째 장 “다시 종교를 생각하며”에는 기독교 본질에 대한 이해와 통찰로 가득하다. 그는 한국과 일본에 기독교가 전파되는 과정의 정치사회적 맥락을 다룰 때에는 종교사와 그 나라의 역사를 분리시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한다. 특히 저자의 이러한 관점은 “정교분리에 대한 이해”라는 글에서 통렬한 비판의 날을 세운다. 정교분리의 의미와 연원을 따져 말하고 그것이 권력과 야합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경우에 대해 “생각만 해도 역겨운 일”이라는 표현으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시종 냉철한 지성으로 정연한 논리를 펼쳐가다가 갑자기 격한 감정을 표현하는 대목에서, 그가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평화를 말하는 데는 그리스도교든 불교든 이슬람교든 신도(神道)든 큰 차이가 없다.”(253쪽)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종교가 정치권력이나 국가에 종속되어 폭력성을 띠는 것을 극히 경계하는 것이다. 종교의 목적은 인류 보편의 가치인 평화를 실현시키는 것이지 “(자기가) 믿는 신이 그 정권을 선택한 것으로 초점을 맞추어 놓고” 그 정권으로부터 주어지는 혜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고 일갈한다. 그것은 ‘정교분리’가 아니라 ‘정교유착’이라는 것이다. 종교가 가장 파렴치해질 때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이 바로 정교유착이라고 그는 말한다.
3. 역사와 문화, 무오성과 절대성을 강조하는 종교마저 해석의 영역에 둘 때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건강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지니게 된다. 다만 그 해석이 국수주의의 방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경계 너머를 볼 수 있는 넓은 시선과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지성의 촉수가 예민하게 발달해야 한다. 서정민 교수는 그런 점에서 매우 탁월한 시선과 촉수를 가진 지식인이다. 한완상 선생의 말대로, 지식인은 경계를 기점으로 어느 한쪽을 선택하여 다른 쪽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시선을 가져야 한다. 해석은 지식인의 영역이고 사명이다. 그런 지식인의 통찰력으로 해석한 사례를 『일본이라는 이웃』의 한 꼭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대규모 지하시설을 건설하던 중 패전하여 건설이 중단된 시설이 있는데, 바로 미츠시로 대본영 유적지이다. 그는 그곳 갱도를 관람하며 한국인 징용 노동자가 쓴 낙서를 만나게 된다. 그동안 일본 연구자들은 낙서를 해독(해석)하지 못했는데, 서정민 교수가 설득력 있는 해석을 내놓았다. 강제로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가 가지고 있던 가장 근원적인 감정이라는 것이다.
서정민 교수는 그것을 새해 설날을 맞아 고국에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 특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새겨 놓은 것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일본 연구자들이 해석하지 못한 ‘구운몽’이라는 세 글자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풀이했다. 『구운몽』은 조선 시대 고위 관직에 오른 김만중이 정치적 사건으로 유배지에 있을 때 어머니께 올려드리기 위해 쓴 소설인데, 바로 이 점에 착안한 해석인 것이다. 가혹한 환경에서 강제노동을 하는 징용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구구절절 많은 이야기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간결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정민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낙서의 주인공이 대단한 지식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김만중의 소설을 알고 있고, 또 소설의 외재적 의미까지 알고 이를 활용해 짧은 단어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였으니, 그것은 불행한 시대를 고통스럽게 살아간 한 지식인의 초상이라는 것이다.
한 편의 문학작품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간결하게 표현할 줄 알았던 지식인 징용자의 슬픈 운명 앞에 저자는 민족주의 감정을 내세워 일제의 만행을 비난하기보다는 한 인간의 슬픈 운명에 동화되어 깊이 애도한다. 그렇다. 모든 경계는 ‘인간’이라는 근원을 향해 시선이 열릴 때 걷히게 된다. 하나님이 인간이 된 사건도 신과 인간의 경계를 넘어 인간이라는 고유한 가치에 눈을 돌렸을 때 일어날 수 있었다. 유대인의 혈통으로 태어난 예수가 갈릴리의 혼혈 문화 속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배척받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우애를 드러낸 것도 종교적 경계를 넘어 인간을 보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유대의 보수적인 바리새파 전통과 헬레니즘이라는 트렌드 사이를 오가며 경계인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선주|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저서로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 『우리집 고양이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 등이 있다. 대전에 있는 길위의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