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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당 (2022년 9월호)

 

  교권과 속권의 대립, 속권을 지지한 마르실리우스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 황정욱 옮김, 『평화의 수호자』(길, 2022)

본문

 

1. 『평화의 수호자』(Defensor Pacis)는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Marsilius of Padova, 1275?-1343?)가 중세의 황혼 또는 르네상스의 여명에 해당하는 1324년에 저술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법 제정권이 국민 전체에게 있으며, 통치는 법에 근거하여 이루어져야 하며, 황제 또는 국왕의 세속 권력은 교황이 이끄는 교회 권력을 지배해야 한다는 근대적 정치사상을 요지로 담고 있다.
『평화의 수호자』는 세 강의로 구성되는데, 제1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원리에 따라 국가의 기원과 목적, 명분, 구성, 통치 수단 등을 다룬다. 이 책에 따르면, 국가의 책무는 구성원들이 충족한 삶을 누리면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공동체를 구성·유지하는 것이며, 정부는 평화유지를 위한 통치를 사적으로 악용하지 않도록 국민 전체가 제정하는 법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마르실리우스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솔즈베리의 존(John of Salisbury, 1115/20-1180) 등이 펼친 국가 유기체론을 주장하였다. 존은 『정치가론』(Policraticus)에서 유기체론을 상술하였는데, 존이 펼친 유기체론의 이론적 근원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에 있으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관과 비슷하다. 즉, 인간이란 본성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서로 충족하기 위하여 국가라는 결사체를 결성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존의 인식은, 정치적 동물인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구현하기 위하여 국가라는 공동체를 구성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기체론과 비슷하다.
존은 또한 법치 원칙으로서, 국가 공동체에서 군주의 권위는 법의 권위에 우선할 수 없으므로, 군주가 무소불위의 통치자는 아니라고 강조한다.1 『평화의 수호자』는 존이 말한 법치의 원칙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으며, 특히 입법권자로서 국민[시민] 주권론을 강조한다. 지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강제력을 가진 인정법(lex humana)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마르실리우스는 교황 주권론과 나아가 교권(sacerdotium)과 속권(regnum)의 병존을 전제로 한 중세의 ‘이원론적’ 정치질서에 도전하였다. 그의 국민 주권론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지만, 국민 주권의 주체가 ‘개인’이 아니라 ‘국민집단 전체’ 또는 ‘더 강한 편’(비중 있는 다수)이고, 주권적 시민 대상에서 남자 어린이, 노예, 외국인, 여성을 제외한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가 주장했던 국민 주권은 종교개혁과 절대주의를 지나 계몽주의에 이르러서야 ‘집단주의’ 한계를 벗어나 ‘개인 주권’의 단계에 도달하였다.
제1강의 평화유지 이론이 『평화의 수호자』의 총론이라면, 이 책의 중추이자 각론에 해당하는 제2강에서는 평화유지를 저해하는 장본인으로서 교황과 교권을 비판하고 있다. 제2강은 성직자의 세속에 대한 정치권력, 성직자와 종교조직, 교황의 전권, 반론 등으로 구성되는데, 교황과 교회를 가장 자극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주요 내용을 보면, 사제는 스스로 강제적 권위를 가지지 않아야 하며, 세속적 법률과 정부의 권위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황의 절대권 요구는 제1강에서 강조한 평화를 파괴하고 권위의 단일성을 파괴함으로써 사회의 투쟁을 초래한다. 세속 통치자들은 국민에 의해 선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이 내려준 권리에 의해서 통치하는 것이므로 신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전권을 가진다. 마르실리우스는 교회법이나 교황령을 신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성사 집행과 구원의 길 안내를 본업으로 하는 사제는 강제적 권위까지 수반하지 못한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 돌려주라.”는 예수의 가르침대로, 교황을 포함한 성직자들은 이 세상의 일을 속권 통치자에게 맡기고 관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영적 영역도 세속적 영역에 포함되기 때문에 파문과 사제 보직 선임과 같은 비본질적인 권위와 관련된 문제들은 신도 전체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당시 신도 전체는 세속적 입법권자인 국민 전체와 같은 것이므로, 세속 업무와 종교적 업무에 대한 제도적 관리도 동일한 기구(국민 전체)에 주어진다.

2. 『평화의 수호자』가 등장하게 된 역사적·시대적 배경을 살펴보자. 중요한 배경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르네상스 이론의 선구자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는 중세를 14-15세기(특히 15세기)로 한정하고 ‘암흑시대’로 규정하면서 고대와 르네상스 이후 근대 사이의 역사 단절론을 주장하였다. 보카치오(Giovanni Boccacio) 역시 단절론자였다. 이들 인문주의자는 아리스토텔레스나 키케로 같은 고대 현인들의 가르침에 관한 중세의 수많은 주석을 불신하고 오로지 ‘원전으로’(ad textus originalis)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원전으로’는 이탈리아에서 ‘그리스·로마 고전’으로 회귀하는 것을 뜻하였지만, 알프스 북쪽에서는 성서로 돌아가자는 ‘성서주의’로도 해석되어 종교개혁의 핵심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평화의 수호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전을 기본으로 하므로 이에 따라 종교개혁과 연결된다. 이 작품은 또한 그리스의 법체계(또는 그것을 발전시킨 로마법)를 강조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12세기 르네상스』의 저자 해스킨스(Charles Haskins)는 “중세는 더 어둡고 덜 정체되었으며, 르네상스는 덜 밝고 덜 갑작스럽다.”라고 말하면서 고대-중세-근대 사이 역사의 연속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르네상스의 시작을 12세기로 2-3세기나 앞당겼다. 『중세의 가을』을 쓴 후이징아(Johan Huisinga)는 “고전주의는 중세적 사고의 뜰 안 무성한 식물들 사이에서 조금씩 자라났다.”라고 말하며 역사 연속론을 지지하였다. 그는 해스킨스와 달리 중세와 르네상스의 경계를 뚜렷이 정하지 않았지만, 르네상스를 중세의 끝자락 또는 중세의 가을로 보면서 르네상스 앞부분을 중세로 편입하여 중세를 연장하였다. 그는 “15세기에도 도시의 건물들 위로 교회가 높이 솟아 도시 전체를 군림하며, 교회의 종소리는 생활의 모든 요소를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증오와 폭력이 횡행하고 불의가 만연하며, 악마는 그 어두운 날개 밑으로 땅을 암흑으로 뒤덮고 있었다. 새로운 르네상스 시대는 중세적 혼에서 나왔으므로, 삶의 가락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라고 서술하였다.
마르실리우스는 『평화의 수호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전을 기본 전제로 내세우며, 교황이 속세 정치에 간섭하는 중세적 교권통치를 거부하고 법치를 강조한다. 이러한 점에서 마르실리우스는 중세를 부인하는 역사 단절론에 근거하고 있다.
둘째, 마르실리우스가 교회의 권위를 배척하고 속권 통치를 주장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추락한 교회의 위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한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12세기부터 귀족과 시민 사이에 신분의 동화가 이루어졌으며 교회가 더 이상 귀족의 자녀들을 부양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지 않았다. 밀라노의 경우 교황파(겔프)와 황제파(기벨린) 사이에 대립이 발생하는 와중에서 신흥 상업 세력이 교회 세력을 누르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주교, 참사회 의원, 수도원장 등의 자리가 이제 혈통에 따라 주어지지 않았다. 단테가 〈신곡〉에서 “혈통이란 나날이 새로운 가치를 덧붙이지 않으면, 세월에 잘려나가는 외투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상황과 연결되어 있다. 교회에서는 교리의 순수성이 흐려졌고, 이에 교회는 절대권을 행사하기 위해 갖은 강제력을 동원하여 왜곡된 교리를 참된 진리로 관철하였다. 이처럼 교회는 신성불가침만을 믿으며 타락의 길로 빠져들었다. 성직자 중에서도 특히 수도사들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이 가장 컸다. 13세기 이탈리아의 수도회들은 이제 막 움트턴 이탈리아의 근대정신을 내리누른 반동의 첨병으로 인식되었다. 수도사들은 신도들 앞에서는 원죄설을 내세우고 연옥을 이용하여 금전을 착취하였고, 뒤에서는 그들이 전유물로 여기던 수녀들을 임신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수도사들에게 가장 합당한 징벌은 당장 연옥을 없애 더 이상 현금 획득의 빌미를 차단하는 것이었으리라.2 네덜란드의 신학자 에라스무스(Desderius Erasmus)는 어릴 때 수도원에서 극심하게 매질을 당하여 “(수도원보다는) 차라리 사창가에 순수한 영혼이 더 많을 것 같다.”3라고 한탄하였다.
셋째, 마르실리우스는 파도바대학을 거쳐 파리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파도바대학에서 아바노(Peter Avano)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복원한 이슬람계 학자 아베로에스(Averroes/Ibn Rushd)의 사상을 배웠다. 이 사상에 영향을 받은 마르실리우스는 중세의 대표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특히 근대성을 지닌 위대한 지성인으로서 무한한 자유정신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최초의 진정한 교수로 평가되는 아벨라르(Peter Abelard)가 열정적으로 강의하였던 파리대학에서 1310년대 초와 1320년대 초 두 번에 걸쳐 머물렀으며, 짧은 기간이지만 총장까지 역임하였다. 파리는 1160년대 솔즈베리의 존이 ‘야곱의 사다리’라고 칭송한 학문의 중심지였다. 당시 파리대학의 교수 4분의 3 이상이 외국인이었으며, 유럽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의미의 대학이었다.4 특히 파리대학은 정치적으로 국왕 필립 4세를 후원하는 속권주의자들의 중심이었을 뿐 아니라, 복음적 청빈(Evangelical Poverty)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교황청과 심각한 마찰을 빚고 있던 정통파 프란시스회주의자들(Fraticelli)의 반 교황 활동 아지트였다.5 바로 이곳에서 마르실리우스는 『평화의 수호자』를 저술하였으며, 그의 사상은 파리대학에서 자라서 마무리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중세 말기와 르네상스 초기의 사상서 중 가장 중요한 대작 중 하나에 속하는 『평화의 수호자』의 라틴어본을 황정욱 박사가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는 물론 라틴어에까지 이르는 외국어 실력과 해박한 신학 지식으로 힘들여 번역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 이 번역서가 국내 중근대사 인문학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주(註)
1 이희만, “존 솔즈베리의 국가 유기체론”, 「서양사론」 제106호(2010): 115-125.
2 야코프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 이기숙 옮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en)』(한길사, 2003), 543-551.
3 James D. Tracy, Erasmus of the Low Countries (Berk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6), 91-92.
4 이석우, 『대학의 역사』(한길사, 1999), 129-164.
5 박은구, 『서양중세 정치사상 연구』(혜안, 2001), 71.


정병국|연세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후, 외교부 소속으로 약 20년간 독일, 호주, 남아공 등지에서 근무하였다. 강원대학교에서 서양사를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저서로 『세계 영토분쟁의 과거와 현재』(공저)가 있다.

 
 
 

2022년 11월호(통권 7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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