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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당 (2022년 9월호)

 

  함태영의 법치, 기독교, 그리고 민주주의: 19세기 말-20세기 중엽 한국
  김정회,『송암 함태영』(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22)

본문

 

송암(松岩) 함태영(1873-1964)1은 최초의 근대식 사법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에서 교육을 받고 대한제국과 식민지 초기에 검·판사를 역임했으며, 식민지하에서 장로교 목사와 총회장으로 활동했다. 또한 해방 후에는 심계원(감사원) 원장으로 일했으며, 부통령으로 선출되는 등 관료 및 정치인으로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사실 함태영과 같이 다방면에서 다양한 직책으로 활동한 인물에 대해 평전을 쓴다는 것은 한국 근현대사에 관한 방대한 지식이 축적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지난한 작업이다. 특히 그가 몸담았던 법조계, 기독교계, 정치계 등에 대한 다각적이고 입체적인 인식과 더불어, 첨예한 사회 갈등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에서 ‘객관적’인 평전을 쓴다는 것은 큰 작업이자 도전일 것이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기존 연구에서 함태영을 조명할 때는 주로 법조인의 역할, 목사 및 기독교계의 지도자, 혹은 해방 후 심계원장이나 부통령의 역할에 대해서 개별적으로 다루어 왔다.2 특히 기독교계 지도자로서의 면모도 주로 3·1운동 당시 그의 역할에 대해서 다루었을 뿐이다.3 그런 점에서 이 평전은 앞서 언급한 함태영의 평생에 걸친 다양한 직업과 사회적 활동을 다루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이미 중요한 성취이다. 향후 함태영과 그의 시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려고 할 때, 반드시 참고해야 할 저서이다.

책의 구조와 여러 가지 쟁점들

저서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몇 가지 평을 달고자 한다. 이 책은 앞서 언급한 함태영의 세 가지 직업과 시기를 4부로 나누는데, 2장과 3장이 기독교 엘리트로서의 역할이다.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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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부 근대와의 만남
1장은 함태영이 함경북도 무산에서 태어난 직후의 시대적 상황과 그의 아버지 함우택에 대해 주로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함우택을 개화파 관료로 보고, 그의 사상이 1895년 법관양성소에 아들을 보내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의 개화와 위민의 애국정신이 아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고 묘사한다. 아쉬운 점은 함우택과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인물에 대한 자료를 더 이용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진정한 위민을 실행하는 것이 성리학의 인간관을 실현하는 것으로 보았고, 사민평등의 위민정신을 내세운 동도서기적 개화사상은 함우택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32쪽)와 같은 단정적인 표현을 어떤 근거나 방증자료 없이 그대로 쓰고 있는데, 이는 이후 언급하겠지만 책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다.
2장에서는 함태영이 법관양성소 1기생으로 6개월간 공부한 후 1896년부터 한성재판소 검사로 활동하던 시절을 조명하였는데, 특히 독립협회 인사들에 대한 조사와 판결에 관한 부분을 상세히 다루었다. 그러나 이 장에서도 매우 단정적인 표현들이 특별한 근거나 방증자료 없이 서술되어 있다. 예를 들면 “국가의 부정부패 문제를 정치구조의 문제로 인식했던 이준과 달리 함태영은 이를 법치와 법관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다.”(54쪽)와 “대한제국의 법관 함태영의 원칙은 공정함과 공평함이었다.”(62쪽)라든가, “함태영은 독립협회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독립협회가 추구하는 근대 국가로의 전환에는 공감하고 있었다.”(71쪽) 등이다. 한편 그는 한성재판소 검사로 있으면서 이승만을 취조하기도 했다. 이는 후일 이승만이 함태영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는데, 이에 대한 서술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2) 제2부 기독교와의 만남
3장에서는 판사로 활동하던 시절에 중병을 앓던 함태영이 1909년 언더우드의 기도를 통해 치료를 받고 기독교 신앙을 만난 과정과 아버지를 따라서 연동교회를 다닌 현실을 다루었다. 또한 105인 사건(1911-13)과 관련해서 이른바 일제 시기 판사로서의 역할에 대한 회의와 이후 신학교 교육(1916-22) 기간을 다루었다. 저자는 1912년 6월 경성복심법원 판사로 있었던 함태영이 7월에 휴직을 했는데(128쪽),4 이것이 105인 사건 기소자들에 대한 고문으로부터 오는 회의였다고 말한다(126쪽, “그 순간 함태영은 자신이 일본이라는 국가체제 안에서 법관으로 있는 것이 무의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이는 일본의 법치체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임과 동시에 일본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했다.”(129쪽)와 같이 단언하고 있다. 둘 사이의 인과관계가 있을 개연성이 높지만, 이를 증명할 자료는 언급이 없다.
이 장에서는 연동교회의 양반들이 독립된 교회를 세워 묘동교회로 분리되었을 때 함태영이 연동교회에 남았다는 측면에서 그의 신앙에 대하여도 논하고 있다. 여러 교회사 관련 자료들을 통해서 연동교회의 분위기라든가 1910년대 한국교회의 상황을 잘 서술하고 있지만, 함태영 자신의 목소리로 신앙체험 이야기 혹은 왜 판사를 휴직하고 평양신학교에 진학했는지 등에 대한 개인적인 기록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언더우드가 기대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의 신앙은 철저하게 내적회심을 통한 개인구원이 우선하는 것이었고, 영적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99쪽)와 같은 서술을 아무 근거 없이 하는 것은 역사학자/교회사가로서 반드시 피해야 하지 않을까?
4장에서는 함태영이 1912년 7월 판사 휴직 이후 신학을 공부하고 3·1운동에 참여한 이야기, 한국 장로교계에서의 활동을 자세히 설명한다. 사실 이 지점은 일반 역사가들이 함태영을 다룰 때 평가하기 힘든 부분인데, 장로교 총회나 노회 회의록 등을 통해서 분석해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특히 1910년대 말에서 20년대 초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할 때와 곽안련(Charles A. Allen, 1878-1961)의 조사로 활동하던 시절의 그의 신학적 교육과 사상에 대해 중요한 정보들(특히 교과목)을 알려준다.(136-137쪽) 이를 통해 교회 정치와 헌법 등에 대한 곽안련의 사상에 함태영이 큰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보수적이며 개인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부흥회를 통한 경건을 특징으로 했지만(142-143쪽), 곽안련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기도 했다.(146-147쪽) 이는 함태영이 YMCA와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되는 지점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함태영]에게는 복음이 개인구원의 영역에서 국가구원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하는 문제였고, 이를 나누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148쪽)라고 설명하고, 이후 개인구원과 국가구원이 병립했다고 자세히 언급하는데(217쪽), 여기서 ‘국가구원’이라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호하다. 독립이 곧 국가구원이라는 의미인지, 국가 자체의 기독교화를 의미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3·1운동 당시 함태영은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가 이승훈과 더불어 기독교 측의 의견을 모아내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자세히 서술한 것은 이 책의 중요한 기여라고 할 수 있다.(173-178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의문이 있다.
저자는 3·1운동 당시 피해 상황에 대해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인용하여 “사망자 수는 7,509명, 부상자수 15,961명, 투옥자수 46,948명, 소실 교회수 47개, 소실 학교수 2곳, 소실 민가수 715채”(193쪽)라고 설명하며 총독부의 통계도 박은식의 기록과 비교해 큰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데(193쪽, 각주 212), 이는 사실과 다르다. 총독부 경무국의 통계를 살펴보면, 시위가 집중된 1919년 3-4월의 사망자 수는 553명, 부상자 수는 1,409명으로 훨씬 축소해서 보고 있다.5
또한 저자는 그의 죄명으로 ‘출판법 위반’(194쪽)을 들고 있으나, 공훈전자사료관에 따르면 함태영은 “소요 및 출판법·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기소되었다.6 특히 보안법은 1907년 고종 황제의 퇴임에 따른 통감부의 조치였는데, 주로 회합이나 시위 등과 관련된 탄압을 주목적으로 했다.

3) 제3부 함태영과 적극신앙단
5장 “목회자 함태영”과 6장 “적극신앙단과 사회복음주의”로 이루어진 3부는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이라 말할 수 있는데, 20년 이상 목회자로 활동한 함태영의 행적과 사상을 기독교 측의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조명했다. 특히 5장에서 총회 회록이나 연동교회 당회록 등을 통해 목회자 함태영의 활동을 차분히 복원해냈다는 점이 돋보인다. 그가 청주읍교회에서 목회할 때 망선루를 복원한 일, 청주제일교회와의 관계 등은 기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이다.
게다가 총회와 노회와의 갈등에 대해서도 다룬 점은 매우 중요한 진일보라 할 수 있다. 1930년대 변화하는 신학과 사회환경에서 함태영은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장로교 측과 상당한 갈등 관계에 있었던 것 같다. 이는 그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기독신보」를 통해 연합공의회 주도의 활동에 깊게 관여하면서 보수적인 장로회 측과 거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일환이 YMCA를 통해 활동한 감리교 신흥우와의 ‘적극신앙단’ 활동이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들의 활동에 대해 “단일 복음주의 교회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233쪽)라고 평가하는데, 이는 1910년대까지 선교사들이 가졌던 기대로, 당대 장로교 총회에서 활동한 현실 목회자 함태영의 입장에서 얼마나 실현 가능성이 있었을까 의문이다.
또한 저자는 1930년대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논쟁과 교권투쟁의 중심”에 함태영이 있었다고 인정하면서도, 이를 장로교의 평양 중심 보수파와의 갈등을 통해서 “복음주의 교회 본래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사명감, 그리고 일제의 강도 높은 압박과 농촌경제의 악화, 공산주의 대두로 인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 교회의 역할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뇌”(233쪽)로 설명하며 함태영을 옹호하고 있다. 그런데 역시 앞서 지적한 부분과 마찬가지로, 함태영 자신이 이 문제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직접적, 간접적 자료를 더 찾아볼 필요가 있다.
적극신앙단 활동과 관련해서 저자는 적극신앙단을 사회복음주의와 관련된 것으로, “신학적 전환”은 아니고 “한국장로교 본래의 복음주의가 가지고 있었던 복음의 영역을 세상 속에서 확장하여 구체화시키는 신학적 발견을 의미하는” 것이며 결국 함태영이 “개인의 구원이 국가의 구원으로까지 이어져야 했고 사회복음주의 속에 그러한 국가구원의 이상이 담겨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았다.(239쪽) 또 1920년대부터 한국교회가 반공주의적인 태도를 보였음을 언급하며 함태영도 강력한 반공주의하에서 활동했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239쪽) 역시 함태영 본인의 언급을 찾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특히 함태영이 “신학적 입장에서 이 운동[적극신앙단]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라고 본 근거가 무엇인지도 애매하고, 저자가 말한 ‘정치적 목적’과 ‘신학적 입장’의 경계선이 과연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사실 적극신앙단 문제는 경성노회에서도 분규가 일어나서 노회가 분리될 지경에 이르렀기에 이를 단순히 ‘신학적 입장’으로만 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함태영과 조선신학교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한 것도 이 책의 중요한 기여이다. 신사참배 문제를 둘러싸고 평양신학교가 폐교된 후 우여곡절 끝에 1940년 조선신학원이 개교했는데, 이는 함태영과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 등의 협력에 의해서 가능했다. 여기서 함태영이 신학교 운영을 위해 결국 신사참배에 나서야 했고, 그가 1941년에 은퇴한 것이 그 일과 직접 관련 있는 듯한 서술을 하고 있다.(274쪽) 사실 함태영은 은퇴 후 오늘날 성남 지역에 있는 둔전교회에서 목회를 했는데 저자는 『둔전교회 100년사』를 인용하면서 그가 제일 먼저 했던 일이 “궁성요배와 황국신민서사”를 철폐한 것이라고 언급하나(279쪽), 근거가 명확하지 않아 보인다. 당시 시골에서 약식이나 생략은 가능했다고 믿어지지만 “철폐”까지는 자료가 더 확인되어야 한다.

4) 제4부 함태영과 대한민국의 건국
4부는 가장 긴 부분인 만큼 내용도 많고 논쟁점도 많다. 7장 “해방과 재건”은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출범과 해방 정국에서 함태영의 역할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함태영은 한국민주당의 창당 발기인, 독립촉성기독교협의회 의장 등을 역임하면서(290쪽) 후일 남한 단독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949년 제35회 총회 이후 기독교장로교 내에서 ‘장로회신학교’의 설립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고 이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가 총회 직영 신학교로 승인되자, 결국 조선신학교는 제37회 총회에서 이탈하게 되었다.(294-295쪽) 그런데 저자는 기장, 즉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출발에 관해 “교권주의를 내세웠던 박형룡 등이 장로교 교권을 주도하기 시작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신학적 기반과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301쪽) 정도로 설명하는데, 이는 지나치게 함태영을 중심으로 변호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장로교에서 기장의 분립 문제는 신학적 문제, 신학교 운영 문제, 신사참배 문제, 선교사와의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함태영 본인의 발언이 아닌 김재준, 송창근 등 주변 동료들의 입장을 살펴서 함태영도 그랬을 것이라는 식으로 주장을 전개하는 방식은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8장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의 이상”은 정부수립 전후로 함태영의 활동, 특히 이승만을 지지하는 기독교 세력인 ‘기독교흥국형제단’과 ‘그리스도교연맹’, 그리고 초대 정부의 심계원장 함태영에 대해 다루고 있다. 기독교흥국형제단은 1946년 10월 16일에 총재 함태영, 부총재 유재기 등으로 구성된 조직으로 농촌복음화운동을 주도했는데, 정치 활동은 그리스도교연맹이 담당했다는 지적이 흥미롭다.(321쪽) 특히 농민복음학교의 교장 유재기와 함께했다는 것은 함태영의 사회활동 범위가 굉장히 넓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지적이다. 또한 하와이의 함호용 목사의 재정지원 등에 대해서 밝힌 것도 이 책의 중요한 기여이다.(323쪽)
이승만과의 협의하에 1945년 12월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가 출범했을 때 함태영은 오하영, 조만식 등과 함께 기독교를 대표하여 고문으로 참여했고, 이승만이 주도하는 미군정 자문단인 ‘민주의원’에도 기독교 측을 대표하여 참여했다.(333쪽) 이러한 면을 볼 때 “건국의 과정에서 기독교적 가치가 적극적으로 실현되는 국가를 건설한다는 목표가 있었을 뿐”이라고 하면서도 “그는 직접적으로 이승만의 친위조직이나 정당에 가입한 적이 없었다.”(335쪽)라고 평가한 부분은 함태영의 주도성을 인정하더라도 어색하다.
한편 함태영의 기독교 단체를 정치세력으로 지원하는 이런 흐름을 “신구교가 기독교적 가치를 전제로 연합된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것과 그들이 내세웠던 가치들이 다르지 않았다.”라고 한 것이라든지 이를 “유럽에서 기독교 민주주의(Christian Democracy)가 등장한 것은 19세기 후반 이탈리아”로서(339쪽)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나 이탈리아 등이 영향력을 갖게 된 것과 같은 흐름으로 본 것은 향후에 연구자들이 곱씹을 만한 중요한 통찰력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그 연장선에서 함태영이 그리스도교도연맹 발기에 참여한 것으로 보았다. 공식적으로 1949년 말에 심계원장에 취임한 함태영의 현실 참여를 그 연장선으로 해석할 수 있다.7
당시 초대 심계원장인 명제세가 상공부 장관이었던 임영신을 뇌물 혐의로 고발함으로써 초대 내각의 신뢰성에 타격이 갔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이승만은 청렴했던 함태영을 심계원장에 임명해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함태영의 취임사 등을 통해 긍정 일변도로 보는 것을 넘어서 그의 재임기간(1949. 11. 24-1952. 7. 22) 활동에 대해 조금 더 면밀하게 조사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
9장은 “대한민국 부통령 함태영”을 다루고 있다. 이승만으로서는 1952년 직선제 개헌 후 정치적 부담을 강하게 느끼면서, 부통령 후보로 심계원장으로서의 활동의 연장선에서 청렴한 인물을 상징적으로 내세웠을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범석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범석을 견제하던 이승만, 장택상 등의 합작으로 함태영은 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364-367쪽) 선거 바로 직전인 1952년 7월 무초의 보고서에도 이승만의 의사가 절대적이라고 주장했고, 이범석을 견제하기 위해 경찰력과 공무원들이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범석”을 하루아침에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함태영”으로 바꾸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8
그런 상황에서 함태영이 과연 얼마나 자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함태영은 당선 직후부터 수많은 지역에 민정시찰을 다니면서 이승만에게 보고도 했지만, 이승만의 심기를 거슬려가면서 일을 할 수는 없었다.(378-382쪽) 저자는 함태영이 했던 여러 가지 일들(헌법위원회의 활동, 강성갑 등 억울하게 총살당한 지역 기독교 엘리트 등의 신원회복 등)을 언급하였고, 특히 헌법위원회의 활동을 통해서 인권 신장에 기여(387쪽)했다고 설명하는데, 1공화국의 헌법위원회는 그 자체로 연구되어야 할 대항이다. 1952년 개헌으로 양원제가 도입되었지만, 참의원(상원)이 열리지 않았기에 헌법위원회에 들어와야 할 참의원 2인(총 11인 중 부통령 1인, 대법관 5인, 민의원 3인, 참의원 2인)이 없다는 것을 빌미로 헌법위원회는 4·19로 1공화국이 붕괴될 때까지 제대로 구성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함태영의 헌법위원회에서의 역할을 과대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그는 1955년부터 진행된 3·1운동 선양사업을 지원했는데(393쪽) 이 활동에 대해서 그가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파고들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10장 “황혼의 여정”은 1956년 부통령 퇴임 이후부터 사망까지를 다루고 있다. 퇴임 직후인 1956년 미국과 유럽 등을 둘러보러 나간 것과 한국신학대학교에서의 그의 역할 등을 자세히 다룬 점에서 이 장의 서술은 많은 정보를 준다. 그러나 함태영은 4·19 이후 이승만이 하와이로 망명한 이후 그의 환국운동에 함께하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저서는 다루고 있지 않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함태영의 가계를 다루고 있는데, 세 명의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후손에 대한 면접조사를 통해 좀 더 보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책과 관련된 몇 가지 의문들

이 저서 전반을 관통하는 몇 가지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신부적(神賦的) 국가관’(90쪽 외)이라는 개념이다. 저자는 이를 함태영의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개념으로 설명하며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인식을 중심에 두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theocentrial’, 즉 ‘신본주의’(theocentrism)에서 온 것인데, 천부적(天賦的, natural)이란 의미에 반대되는 것으로 사용한 듯하다.(246쪽, 각주 91) 천부적이라는 말은 외부와 관련없이 이미 주어진 것(所與)이라는 의미가 강하므로 이와 반대되는 의미에서 ‘신부적’이라는 의미를 쓸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고, 무엇보다 ‘신부적’이라는 의미가 명확하지 않고 분석적인 개념이라 하기 어렵다. 특히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라고 해도 인간의 역할에 대해서 능동적, 수동적 참여 등으로 다양한 의견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신본적’ 혹은 ‘신부적’이라는 용어는 더 정교한 언어로 대체될 필요가 있다.
둘째, 용어의 문제이다. ‘복음주의’라는 용어는 사실상 1920년대까지 매우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다가(142, 219, 239쪽 등)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의미가 분화하는데, 저자는 이에 대해서도 그냥 ‘복음주의’로 계속 설명하고 있다. 즉 개인의 구원, 부흥회를 통한 경건, 사회봉사 등의 의미를 가진 복음주의의 범주가 실제 역사적으로 어떤 변용을 겪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9 또한 앞서 언급한 ‘국가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셋째, 함태영에 대해 너무 변호적인 입장에서 기술되었다는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함태영을 마냥 영웅으로 묘사한 서사(hagiography)가 아니라서 다행이긴 하나, 때로는 갈등이 있는 당사자를 다루지 않고 함태영을 변호하려는 입장은 역시 큰 한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예를 들면 서북지역과 대립하는 기호지방 엘리트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서 서북지역인들의 목소리를 전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흥우는 정치적 목적으로 적극신앙단을 활용했다고 기술한 반면(윤치호의 일기, 243-244쪽), 함태영은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의미에서 그렇게 했다고 기술한다면 과연 공정한 서술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인물에 대한 기본적 생몰연도 정보가 틀린 경우가 많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차례대로 짚으면 다음과 같다. 윤하영(1849-?) → 윤하영(1867-?), 이상설(1817-1917) → 이상설(1870-1917), 매커첸(마로덕, 1976-1960) → 매커첸(1876-1960), 최린(1878-?) → 최린(1878-1958), 이범석(1922-1983) → 이범석(1900-1972) 등으로 바로잡아야 한다.10 또한 어떤 이들은 생몰연도를 쓰고 어떤 이들은 표기하지 않았는데-예를 들면 2대 대통령을 역임한 윤보선(1897-1990)은 생몰연도가 어디에도 표현되지 않았다.-이 부분에 대해서 나름 일관성을 갖추어야 할 듯하다.
한자어 표기가 틀린 부분도 꽤 눈에 띈다. 예를 들면, “1898년 10월 수일파(守日派) 거두이 신기선이…”(55쪽)이라는 문장에서 ‘수일파’는 아마도 ‘수구파’(守舊派)의 오기로 보인다. 함태영의 심계원 원장 취임사에서 언급된 ‘여출일구’(如出一口, 한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여러 사람의 말이 같음)라는 표현은 본문에서 인용할 때에는 한자어가 제대로 표현되어 있으나(349쪽), 부록에서는 ‘여출일구’(女出一口)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438쪽) 책 뒤표지에도 실수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기에 독자 중 일부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실수들은 결국 저자 본인만이 아니라 출판사의 편집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결론: 한국 사회의 자서전으로서의 함태영

이 책의 출간은 법조인, 목사, 그리고 정치인으로 활동한 함태영의 생애 전반을 종합적으로 다루었으며, 일부 내용은 새롭게 밝혔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함태영을 너무 변호하는 입장에서 서술되었기에 판사를 휴직한 대목, 적극신앙단 관련, 그리고 대통령 이승만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는 더 파고들어갔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크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평전의 기본적인 서술 입장에 대해서 많은 질문과 숙제를 던져준다. 그럼에도 단점과 장점, 양자를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이 책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엽까지의 한국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꼭 읽히기를 추천한다.

주(註)
1 함태영의 출생일은 1873년 10월 22일(음력)로 추정된다. 이 책에서도 함태영의 출생일을 그렇게 말하고 있다.(23쪽) 하지만 ‘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서는 그가 1872년에 출생했다고 설명한다.(https://bit.ly/3SgB9Y3) 이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한 3·1운동 관련 수형자 카드(https://bit.ly/3zKkbdw)에 기록된 출생일 ‘482년 10월 22일’(482년은 조선 개국을 시점으로 계산한 연도로 1873년)을 잘못 읽은 것이 아닌가 한다.
2 법조인으로서의 함태영을 조명한 연구로는 김효전, 『법관양성소와 근대한국』(소명출판, 2015); 함동욱, “고종황제와 검사 함태영”, 「신동아」 8(1982)을 들 수 있다.(전자는 제도로서의 법관양성소에 대해서 다룬 연구이다.) 목사 및 한국 기독교 엘리트로 접근한 연구로는 류대영, “함태영, 해방정국에서 기독교 조직을 재건하다”, 『한국사 시민강좌 제43집』(일조각, 2008), 376-388; 김정준, “함태영: 풍운의 현대사와 종교심”, 『역사의 인물 9』(日新閣, 1979)을 들 수 있다. 해방 후 정치인으로서 함태영을 다룬 연구는 강성호, “1950년대 한국 개신교 선거운동의 주도세력에 대한 연구: 1952년 8·5정부통령 선거를 중심으로”, 「역사문제연구」 45(2021. 4): 405-444 정도이다.
3 김정회, “함태영을 통해서 본 삼일운동과 기독교의 관계”, 『韓國政治外交史論叢』(2019. 2), 5-50.
4 보다 정확히는 1912년 7월 29일 자로 휴직을 명 받았다. 「조선총독부 관보」 제3호(1912년 8월 2일).
5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서비스”(https://bit.ly/3A120Ps) 중에서 특히 류준범, “3·1운동 DB로 추정한 3·1운동의 규모: 참여자 및 사망자 추계”를 참고하였다. 이 데이터베이스 자체가 통계자료를 결론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위 참여자와 사망자에 대해 불명확한 현재 연구상황에서 최소한 일본 측 공식기록이 이를 축소 보고한 현상은 잘 보여준다.
6 공훈전자사료관(https://e-gonghun.mpva.go.kr/user/index.do)의 공훈록 참고.
7 심계원은 제헌헌법에 근거하여 세워진 헌법기관으로, 오늘날 기재부의 수입과 지출의 결산을 엄정하게 살펴보는 역할을 했다. 제헌헌법 제95조에서는 심계원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가의 수입지출의 결산은 매년 심계원에서 검사한다. 정부는 심계원의 검사보고와 함께 결산을 차연도의 국회에 제출하여야 한다. 심계원의 조직과 권한은 법률로써 정한다.”(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8 Records of the U.S. Department of State Relating to the Internal Affairs of Korea, 1952년 7월 23일 자 무초(Muccio) 대사의 편지. 류대영, “함태영, 해방정국에서 기독교 조직을 재건하다”, 360쪽에서 재인용.
9 1920년대까지 넓은 의미의 “복음주의”에 대한 설명은 류대영, “초기 한국교회에서 ‘evangelical’의 의미와 현대적 해석의 문제”, 「한국기독교와 역사」 15(2001. 8): 117-144 참고.
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국사편찬위원회 ‘직원록 자료’ 등을 통해 확인했다.


안종철|한국 근현대사, 한국 기독교사, 한국 법제사를 공부하였다. 대표 저서로 『미국선교사와 한미관계, 1931~1948: 교육철수, 전시협력 그리고 미군정』이 있다. 국립베네치아대학교 동양학부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2년 11월호(통권 7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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