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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당 (2022년 9월호)

 

  인어공주의 해방일지를 그리다
  이숙진, 『한국 근대 기독교와 여성의 탄생』(모시는 사람들, 2022)

본문

 

1. 어린 딸을 둔 제자의 하소연이 늘었다. 나름 진보적이라 자부하는 그는 딸을 주체적으로 키우고 싶어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였는데, 아이가 막상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니까 말짱 도루묵이 되더란다. 아침마다 ‘샤방샤방’한 공주 옷을 입혀달라, ‘블링블링’한 왕관 머리띠를 씌워달라 떼쓰는 딸을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며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아, 소비문화의 가공할 힘이여! 공기처럼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그것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란다는 자체가 얼마나 부질없는지.
그렇다고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에 영혼을 팔아넘길 수는 없는 일. 해서 “공주 코스프레(만화나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복장을 따라 하는 것)도 한 때야.”라는 말로 서툰 위로를 건넨다. 그래, 언젠가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동화 속 공주가 모두 행복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특정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곧 자기 삶의 주체로 살기 위해서는 ‘샤방샤방, 블링블링’한 비단길이 아니라 ‘피, 땀, 눈물’이 범벅된 가시밭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진리까지도.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가 대표적이다. 인어공주는 폭풍에 난파된 배에서 왕자를 구하고, 그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인어와 인간 사이에는 단순히 한 글자 차이만 있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도 왕자가 사는 지상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꼬리 대신에 다리가 있어야 한다. 인어공주는 다리를 얻기 위해 목소리를 포기한다. 목소리를 잃는다는 것,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다는 것, 자기를 표현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한 채.

2. 이숙진의 『한국 근대 기독교와 여성의 탄생』을 읽는 동안, 인어공주 이야기가 저절로 떠올랐다. 기독교(개신교)가 들어오기 전, 이 땅의 여성들에게는 다리가 없었다. 집 밖을 마음대로 나다니지 못하고 ‘안방’과 ‘규방’에 유폐될 바에야 다리가 달려 있은들 무슨 소용인가? ‘삼종지도’, ‘남녀칠세부동석’, ‘삼강오륜’ 등 유교적 도덕에 발이 묶여 운신의 폭이 좁았던 여성들에게 기독교는 다리를 선물했다.

나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했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으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를 안 후로 나는 자주한 인간이 되었다.(26쪽)

평안도 양반 출신으로 전형적인 ‘안방마님’의 삶을 살던 전삼덕의 고백이다. 그녀가 1895년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에게 ‘휘장 세례’를 받은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렇게 소심했던 그녀는 평양에서 매티 노블 선교사가 연 여자사경회를 거치며 완전히 달라졌다. 겁도 없이 거리를 누비는 ‘전도부인’이 되었다. “이렇듯 가정에 매여 있던 여성들은 기독교가 마련한 공간으로 나와 배우고 말하고 가르치면서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였다.”(27쪽)
이숙진은 ‘암글’로 천대받던 한글이 어떻게 기독교와 만나 여성해방의 이야기를 펼쳐냈는지를 섬세하게 들춰낸다. “개항기에 수용된 기독교는 한글을 매개로 기존의 지식 체계에서 배제된 이들에게 접근하였다.”(21-22쪽) 선교 준비 단계에서부터 ‘한글’ 성서 번역에 매진한 선교사들은 ‘하층민 선교’ 전략으로 한글 교육을 택해 성서를 널리 보급하는 일에 힘썼다. “하층민 선교의 교두보였던 사경회는 무지와 묵종의 삶을 살고 있던 한국 여성을 문자의 세계로 이끄는 주요 장치였다.”(24쪽)
기독교가 다리만 준 게 아니라는 분석이다. 목소리도 주었다! “기독교의 여성 교육 공간은 ‘말하는 주체’ 형성의 핵심 통로였다.”(29쪽) 이때의 말은 단순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의 수준을 넘어선다. 이른바 ‘사회문제, 여성문제, 민족문제’ 등에 대하여 남성들과 ‘토론’하거나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수준까지 나아갔다는 뜻이다. “한국의 1세대 여성 지도자인 박인덕과 김활란은 이문회(이화학당 동아리)가 탄생시킨 연설계의 스타였다.”(30, 45-64쪽)
공식 언어 혹은 공적 언어는 역사적으로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여성의 말은 언어라기보다는 ‘수다’나 ‘앵앵거림’ 혹은 ‘바가지 긁기’ 등으로 평가절하”(79쪽)되어 왔다. 그러하기에 여성이 공론장에서 자기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밝히는 행위가 전통사회에 던진 충격이란 거의 지진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현존질서에 균열이 생겼다. 이 균열을 타고 이른바 ‘근대’가 도래했다.
그러니까 이숙진의 책이 ‘한국 기독교와 여성’을 다룬다면, 이쯤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해도 충분히 ‘은혜’롭겠다. 하지만 그녀의 관심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2006년에 펴낸 첫 책의 제목도 『한국기독교와 여성 정체성』(한들)이 아니었나? ‘정체성’이 주요 재료다. 이 단어 하나로 그녀의 신학은 한국교회 지형도에서 각별한 위상을 점하게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거칠게 말하면 한국 기독교에 대한 사회윤리학적 접근에 더하여 기독교 여성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해명을 시도하는 전위 신학이라고나 할까?
첫 책을 출산한 뒤 그녀의 시선은 훨씬 더 깊어진 듯하다. 분석은 더욱 정교해지고 언어는 더욱 정갈해졌다. 이번 책의 방점은 ‘근대’와 ‘탄생’에 찍혀 있다. 그저 ‘한국 기독교와 여성’이 아니라, 『한국 근대 기독교와 여성의 탄생』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구한말 이 땅에 수용된 기독교와 더불어 본격적인 근대가 열렸다. 근대의 주요 표식 중 하나는 개인의 발견이다. 그 수혜를 기독교 여성이 톡톡히 입었다. 더 이상 아무개의 딸, 아내, 어머니로 호명되지 않고 자기 이름으로 불리는 시대가 왔다. 옛 사회질서 아래서 목소리를 거세당했던 여성들이 새 시대의 기독교와 접속하여 ‘말하는 주체’로 우뚝 섰다.

3. 이숙진의 예리한 시선은 이제 교회 내부로 향한다. 한국 기독교와 여성 사이의 화양연화(꽃같이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절)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음을 폭로한다. 개혁 운동으로 시작된 기독교가 ‘제도화’의 길을 걷게 되자, 다시 말해 1907년 ‘독노회’가 창설된 이후,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은 제한되고 핵심적 정책 결정, 설교, 각종 지도력 행사에서 배제”(125쪽)되는 일이 ‘정상’으로 굳어졌다. 도도한 교권이 여성의 혀에 재갈을 물렸다. “죄인 정체성”(94-99쪽)과 “성도 정체성”(99-106쪽)을 젠더화하면서 여성을 “순종적 주체”(121-127쪽)로 길들이는 프로젝트가 가동되었다.
여성이 교회 안에서 ‘말하는 주체’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은 교권의 감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성령운동’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1907년 대부흥운동을 시작으로 삼일혁명 이후(1920-30년대), 한국전쟁 직후(1950년대), 산업화·도시화 시기(1970년대) 등 “민족적 사회적 위기로 인해 공동체와 개인의 삶이 파편화되고 고통이 심화될 때”(69쪽) 성령운동이 더욱 활기를 띠었는데, 그때마다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교회 여성들은 ‘방언’이나 ‘간증’ 등 성령체험의 현상을 적극적으로 체현하면서 교회 부흥을 견인했다.
그러나 “고함치고, 신음하며, 엉엉 울며, 데굴데굴 구르며, 거품을 입에 무는 것과 같은, 무의식의 극에 달하는 현상들”(73쪽)이 교권의 재가를 받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신과의 만남을 독점하고자 하는 종교 엘리트들은 제도적 장치를 통하지 않고 직접 신을 만나려고 시도하는 성령운동을 검열과 박해의 대상으로 삼았다.”(72쪽) 이숙진의 통찰이 빛나는 건 이 지점이다. 그녀는 방언을 ‘민중의 언어’(81쪽)로 풀이한 서광선의 시각을 더욱 밀고 나가 “성령운동에서 발화되는 방언은 ‘아버지의 법’ 안에서 미리 설정된 부호에만 익숙한 이들에겐 해석 불가의 영역”(82쪽)이라며, 방언에 내재한 ‘저항성’에 주목한다.

방언에서 발견되는 해방의 힘은 언술 행위가 억압되고 있는 주변에서 생긴다. 주변은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이라면 따라야 할 그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 즉 ‘열린 공간’이다. 속성이 변화하는 지점, 즉 ‘경계’이다.(83쪽)

경계는 불안하다. 경계인의 아비투스(habitus)가 중심권력의 요구에 맹종하는 기회주의로 쉽게 둔갑하는 것은 그 불안한 존재론적 지위 때문이다. 이숙진은 “교회 권력의 총동원 지시가 있을 때마다 ‘믿음 좋은’ 교회 여성들이 거리로 나가 열성적으로 응답”(122쪽)하는 모습에서 그러한 위험을 감지한다. 이 위험은 교권이 용인한 “성적 주체-되기”(제3부)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는 모습에서, 나아가 “자기계발적 주체-되기”(제4부)에 자발적으로 동원되는 모습에서 꾸준히 포착된다. 모두 신앙의 사사화(私事化) 현상과 맞물려 있는 증후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기독교 여성의 이미지는 이런 경로로 ‘탄생’했다.
희망이 있을까? 가부장적 교권에 숨이 막힌 ‘알파걸’들은 이미 교회를 떠났다. 교회 안에 남아 있는 ‘착한 여자’들은 중심에 동화되어 문제에 둔감하다. 그렇게 한국 기독교는 근대에 포획된 채로 경계선 위에 있는 무수한 존재들의 구원과 해방 욕구를 배신하고 있다. 마치 사랑을 얻고자 목소리를 내어준 인어공주의 진정성을 무심하게 농락한 왕자처럼.

인어공주는 바다로 풍덩 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몸이 어느새 물거품처럼 녹아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 인어공주는 그녀의 깨끗한 팔을 하나님이 계신 태양을 향해 들어 올렸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김민웅은 『동화독법』(이봄, 2017)에서 이 부분에 덧글을 달았다. “현실의 종교는 인어공주의 편에 서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녀의 편에 서주신 것”(155쪽)이라고. 배신당한 사랑을 향해 복수의 칼을 들이대는 대신에 더 큰 사랑을 택한 인어공주는 마침내 “세상의 기운을 활기차게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던 것”(156쪽)이라고.
나는 이숙진의 서늘한 글에서 그처럼 따뜻한 욕망을 읽는다. 경계에서 춤추는 자매들에게, 그리고 이들과 손잡고 함께 스텝을 밟는 형제들에게 ‘거울 보기’를 권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내게는 무척 희망차게 들린다. 그녀가 들려줄 또 다른 ‘신학적 방언’을 목놓아 기다리는 이유다. 성실한 저자의 농익은 시간은 결코 독자의 사랑을 배반하지 않는 법이므로.

구미정|이화여자대학교에서 기독교윤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한 글자로 신학하기』, 『두 글자로 신학하기』, 『그림으로 신학하기』, 『교회 밖 인문학 수업』 등이 있다. 현재 숭실대학교 초빙교수와 이은교회 담임목사로 활동하고 있다.

 
 
 

2022년 11월호(통권 7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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