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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당 (2022년 4월호)

 

  신학과 미술의 교감과 ‘미적 가능성’의 신학을 위하여
  이은선·이정배·심은록 외 8인, 『李信의 묵시의식과 토착화의 새 차원: 슐리얼리스트 믿음과 예술』(한국信연구소, 2021)

본문

 

이 책은 화가이자 시인, 신학자였던 이신(李信, 1927-81) 목사의 소천 40주기를 맞아 총 11명의 전문가와 가족, 지인이 각자의 추억과 지적 관점을 담아 그의 삶과 학문과 예술을 추모한 글 모음집이다. 1부와 2부에서는 이신의 신학과 학문적 성과에 대해, 3부에서는 그의 시(詩)와 신학의 관계에 대해, 마지막 4부에서는 이신의 초현실적 그림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서평자로서 필자는 외람되게도 이신의 신학에 대한 전이해가 턱없이 부족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1, 2부의 신학적 글들을 열심히 탐독하며 공부했고 나름 깊은 감동 속에서 왜 이런 신학자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는지 의아했다. 그래서 필자는 책을 평가하기보다는 독자들에게 이신의 신학을 최대한 잘 소개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제한된 지면에서 효과적으로 잘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끝에 필자의 주된 관심사인 “미술을 통한 신학적 사유”를 방법으로 삼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이신의 ‘슐리얼리즘 신학’을 미술과 신학이 만나는 지평 융합(가다머)의 장(場)에서 풀어가며,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서 조금 아쉬웠던 미술작품과 신학의 ‘내적 관계’를 밝히는 데 중점을 두어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초현실주의 미술의 이해

이신의 신학을 가리켜 ‘슐리얼리즘 신학’이라고 부른다. 용어부터가 낯설다. 슐리얼리즘은 초현실주의를 뜻하는 미술사의 용어이며 프랑스어 ‘쉬르레알리즘’(surréalisme)으로 소급되는 영어 발음이다.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는 20세기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리던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의 한 줄기였다.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본래 군사용어로 전장의 가장 앞 열에 배치된 전위대(前衛隊)를 가리키는 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의 화가들은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기존의 모든 유파를 부정하고 완전히 새로운 미술과 세상을 꿈꾸었다. 초현실주의도 그렇게 생겨났다. 이 사조는 1924년 앙드레 브레통(AndréBreton, 1896-1966)의 선언에서 시작해 ‘오토마티즘’(Automatism)이라는 무위(無爲)의 기법을 내세워 의식 이전에 꿈과 환상의 무의식 세계를 드러내고자 했다. 또한 사물을 본래 있던 곳에서 떼어내 우연으로 재조합한 ‘데페이즈망’(Depaysement) 기법을 통해서는 익숙한 현실을 ‘해체’하고 새 현실을 여는 연출을 하였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시인 로트레아몽(Lautréamont)의 “해부대 위에서의 우산과 재봉의 우연한 만남처럼 아름다운”이라는 글귀는 데페이즈망 시기의 대표적 예로 초현실주의자들의 슬로건이었다.
초현실주의 미술의 아버지 데 키리코(de Chirico, 1888-1978)를 비롯해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같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에서 우리는 데페이즈망의 기이하고 섬뜩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데 키리코의 작품 〈사랑의 노래〉(1914)를 예로 들면, 아폴로 두상, 외과용 수술 장갑, 텅 빈 건물, 초록색 공, 달리는 기관차 등 그 어떤 연관성도 찾아볼 수 없는 사물들이 무작위로 조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랑’도 ‘노래’도 떠올릴 수 없는 사물 배치에 관람자는 당황스러워진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익숙한 현실을 ‘해체’하여 초현실의 길을 열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산출하는 이미지는 낯설고 기이하고(unheimlich) 섬뜩하다.
그렇다면 이신의 슐리얼리즘 신학도 낯설고 기이하고 섬뜩할까? 필자는 이 문제를 이신의 신학이 아닌 미술작품으로부터 풀어가고자 한다. 이신의 신학도 미술도 결국 같은 정신세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신의 미술과 믿음의 신학

이신의 미술은 정확히 말하면 초현실주의는 아니다. 기이하고 섬뜩하기보다는 오히려 정겹다. 현실의 무자비한 ‘해체’보다는 오히려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에서 초현실의 문을 여는 미술이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 스위스 태생의 독일 화가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가 떠오른다. 입체파,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다다(dada) 등 현대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이 사방에서 용광로처럼 들끓을 때 클레는 조용히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 세계를 개척해간 단독자 화가였다. 구상에서 추상으로 가는 길목에서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 추상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필자는 이신의 반추상 세계가 정확히 이 흐름에 상응한다고 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려면 상상력이 중요하다. 칸트와 니체가 세속화된 시대에서 종교의 대체물로 미학적 상상력의 중요성을 이미 강조한 바 있듯이, 이신 역시 현대 사상가로서 창조적 상상력의 중요성을 절실히 인식하고 있었다. “상상력의 부패”를 그는 “죽음에 이르는 병”(키에르케고어)이라 말했고, 이 병을 치유할 유일한 길을 ‘믿음’에서 보았다.
이신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는 믿음이었다. 신학 역시 그에게는 신을 말하는 학문 이전에 믿음을 말하는 학문이었다. 그래서 ‘信學’이다. 이신의 본명은 이만수였다고 한다. 목사안수를 받으며 ‘李信’으로 개명한 것도(133쪽) 그의 삶의 중심에 믿음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보인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그린다. 기호화된 반추상의 사람이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는 아니다.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는 자, ‘사람’을 그린다. 20세기 현대미술에서 화가들은 더 이상 객관화된 신을 그리지 않는다. 19세기까지는 전통적인 기독교 도상(Christian Iconography)의 연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렸지만 20세기에 오면 신이 아닌 인간을 그린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을 통해 신을 그린다. 즉 화가 자신을 통해 ‘해석’된 신, 화가의 몸과 신체를 통해 경험한 신을 그린다. 이신의 작품 〈예언자〉(1975)나 〈돌의 소리〉(1980) 등에 그려진 반추상의 사람 형상은 이신이 자신의 몸을 통해 상상하고 경험한 ‘믿음’의 세계를 시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보이는 세계에 경도되어 살아간다. 물질과 명예욕에 영과 혼을 빼앗긴 채 똑같은 매일을 살아간다. 그래서 상상력은 고갈되고, 어느새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된다. 스스로 속물이 된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키에르케고어는 이 상태를 “필연성의 절망”이라고 말한다. 겉으로는 규칙과 규율에 잘 순응하고 존경도 받으며 사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술을 찾는 것은 이 절망의 병으로부터 치유되고 싶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것에 빼앗긴 영과 혼을 되찾아 다시 맑은 영이 되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꿈꾸고, 상상력에 날개를 단 자유인이 되고 싶은 것이다. 이신의 미술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의미로 다가온다. 현실에 발을 굳건히 딛고 초현실의 세계를 꿈꾸는 그의 ‘사람’ 그림들은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믿음의 세계에 다리를 놓는다. 혼이 탁한 이들이 볼 수 없는 믿음의 세계를 다시 상상하고 꿈꿀 수 있게 한다. 그리하여 “죽음에 이르는 병”을 치유로 인도한다.

믿음의 실존적 변증법과 하나님 나라 운동

믿음은 오성(Verstend, 칸트)과 이성의 논리를 뛰어넘는 비약(Leap, 키에르케고어)의 범주이다. 그래서 현실과 초현실을 잇는 유일한 범주하다. 한편 초현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데에 있다.(137쪽) 바로 내 안이다. 내 안에 있지만, 나의 힘이 미치지 않는 ‘내 안의 안’이다. 그래서 나의 ‘밖’이고 ‘초월’이다. “너희 안에 천국이 있느니라”라는 말씀을 이신은 ‘Neo-transcendentalism’으로 개념화한다.(137쪽) 초월은 ‘내 안의 안’이자 ‘밖’이며, 나의 힘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다. 그래서 오직 믿음의 비약으로만 이를 수 있다.
이신은 ‘내 안’(현실)과 ‘내 안의 안’(초현실)의 경계에서 두 영역을 믿음으로 연결한다. 이것이 ‘실존’이다. ‘실존’은 “밖에 서다”(ex-istare)라는 뜻의 라틴어 어원을 지닌다. ‘밖에 선’ 것은 ‘경계’에 선 것을 말한다. ‘내 안’과 ‘내 안의 안’의 경계에 서서 ‘내 안의 안’을 그리워한다. ‘내 안’은 유한이고 시간이며, ‘내 안의 안’은 무한이고 영원이다. 실존은 무한과 유한, 시간과 영원의 양극 사이에서 양극의 요소와 동시에 관계하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키에르케고어)이다. 이 관계가 믿음이고 이신의 신학과 예술은 이 ‘자기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내 안’(현실)과 ‘내 안의 안’(초현실)의 경계에서 믿음으로 양극의 요소들과 관계하며 변증법적 종합을 이루어간다. ‘변화’는 이때 일어난다.
현실의 변화는 현실 안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초현실로부터 초월적 힘이 가해져 ‘병든 시간’ 속으로 영원이 침투할 때 일어난다. 그때 억압받는 무수한 ‘비존재’들은 ‘존재’로 변화하고 현실은 새로워지고 역사는 생성(becoming)하고 미래는 창조된다. 그래서 믿음은 창조적이다. 믿음의 매 순간은 새로운 창조와 변화의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 이 가능성은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가능성이 아니라 ‘내 안의 안’(초현실)으로부터 치고 들어오는 초월적 힘의 가능성이다.
이 힘의 수신자는 “창조적 소수”(55쪽)이다. 그들은 현시대에 대한 “철저한 부정에서부터 미래에 대한 철저한 긍정으로 나아가는 변증법적 전환의 좁은 길”(196쪽)에서 믿음으로 실존하는 자들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랬고, 예수가 그러했고, 제2 제3의 작은 예수들이 그러했고, 루터와 키에르케고어, 본회퍼가 그러했고, 아방가르드 전위예술가들이 그러했다. 이신도 이 “창조적 소수”의 전통에 서서 광야로부터 들려오는 살아 있는 신의 음성(계시)에 깨어 있었다. 그래서 그의 묵시신학은 수천 년의 시간 차이를 넘어 ‘지금’ ‘여기’ 현실에 맞게 토착화되어 ‘지금’ ‘여기’의 현실을 혁신하는 살아 있는 신학, 곧 ‘가능성의 신학’이고, 그의 환원신학은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현실에서 창조적으로 ‘반복’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45쪽)
이를 포괄하는 이신의 슐리얼리즘 신학은 믿음의 학, 곧 ‘信學’이다.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에서 믿음으로 두 영역을 관계하며 현실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믿음의 학문이다. 그리고 그의 슐리얼리즘 미술은 보이지 않는 믿음의 세계를 기호화, 상징화한 믿음의 증거(證據)이자 신 존재 증명이다. 그래서 그의 미술은 멋과 풍류가 아닌 치열한 실존의 과정으로 이해된다.(31, 92쪽) 그의 작품 〈영육〉(1972)이 영과 육의 양극으로 분열된 단독자의 실존적 내면을 그리고 있다면, 〈공존, 존재의 변증법〉(1972)은 이웃과의 상호유기적인 관계를 그리며 믿음이 나의 변화를 넘어 공동체의 변화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의 내적 분열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고 공동체의 화합으로 나아가는 힘의 원천은 믿음, 곧 신과의 관계이다. 신은 ‘내 밖’의 초월자지만 동시에 ‘내 안의 안’에 살아계신다. 그 역설이 작품 〈자유로운 선(善)〉(1975)에 그려져 있다. ‘내 안의 안’에 있는 둥근 형상이 하늘에도 똑같이 둥실 떠 있다.
이신에게 예술은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된 숨 막히는 세상에서 대자유의 가능성, 상상력의 출구였을 것이다. 그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불렀던 “부패한 상상력”을 회복하는 매개, 그래서 초현실로부터 치고 들어오는 종교적 계시를 수신하고 담지하는 건강한 ‘信學’의 미학적 계기(occasion)가 되어주었음이 분명하다.

미술을 통한 풍요로운 신앙생활을 위하여

중세 수도사들에게 그림은 신앙생활의 도구였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함께 이 전통은 사라졌고,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미(美)를 거부하는 경향을 가속해 진(眞)과 선(善)만으로 이루어진 건조한 신학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현대신학은 미술을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무감각한 신학이 되었다.
기독교는 서구의 찬란한 문화 예술을 낳은 정신적 배경이었다. 그러나 정작 기독교인들은 그 문화를 애써 외면하거나 온전히 향유하지 못하고 있다. 이 안타까운 현실에서 이신은 미술을 통해서도 신과 관계할 수 있고 오히려 더 창조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개신교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제도 교회의 ‘반미학적’ 이념을 초월하여 믿는 자의 내면에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덤덤히 붓과 펜으로 증거하고 있다.
이신의 그림은 서구의 섬뜩하고 기이한 초현실주의 미술과는 다르다. 왠지 정겹다. 한국 자연주의 미학이 품고 있는 정(情)이 어쩔 수 없이 배어 나온다. 이 책은 시와 미술을 통해 믿음을 사유하고, 상상력에 날개를 단 믿음으로 좀 더 풍요로운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성도들과 독자들에게 분명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 미와 예술을 통해서도 하나님과 관계하고 믿음을 내면화할 수 있다는 신앙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가갈 것이다.

신사빈|독일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미술사의 신학』, 역서로 『예술의 힘』이 있다.

 
 
 

2022년 4월호(통권 7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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