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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당 (2021년 8월호)

 

  영등포산업선교회가 펼친 따뜻하고도 치열했던 노동운동의 역사
  『영등포산업선교회 자료집(Ⅰ-Ⅷ)』, 김명배 엮음, 영등포산업선교회·숭실대문화선교연구소, 2020. 장숙경

본문

 

1. 산업선교는 세계 교회가 펼친 사회선교의 한 방편으로, 한국에는 1957년 ‘산업전도’라는 이름으로 유입되었다. 고기를 잡기 위해서는 물가로 가야 하듯 전도를 하려면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야 한다는 논리로 공장들이 밀집해 있던 지역들을 대상으로 하였는데, 그중 한 곳이 영등포였다.
영등포산업선교회(이하 ‘영산’)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산업선교회이며, 1970-80년대 초 노동운동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노동 문제에 가장 깊게 관여한 조직이자 노동운동의 본산이었다. 군사독재와 유신, 긴급조치로 상징되는 이 시기에 노동 문제는 정치권력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노동자 편에 서서 그들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기업주에 대한 저항만이 아니라 정치권력에 대한 저항으로도 간주되어 모진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개신교는 전도와 반공을 위해서라면 어떤 정권과도 합의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기에, 교회는 군사독재 정권과 다양한 방법으로 유착하며 세를 넓혀나갔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대통령조찬기도회와 1970년대를 휩쓸었던 여의도 대형 집회들을 통해 교회는 반공을 앞세워 유신체제의 나팔수 노릇을 하였고, 경제 성장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며 교세가 급성장하였다. 그 과정에서 개신교 기업인들의 모임인 기독실업인회는 정권과 교회를 잇는 고리 역할을 하였다. 그 속에서 노동운동이라니!
보수적인 개신교의 한 조직인 산업선교회가 처음부터 노동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1964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최초의 산업전도 목사가 되어 영등포에 부임한 조지송은 기독교인 기업주가 있는 공장에 가서 예배와 전도를 하고, 기독교인 노동자들을 모아 평신도교육을 하는 전형적인 공장목회로 산업전도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영등포 내 700여 공장 중 3-4곳을 제외하고는 반응도 없고 오히려 반기독교적”(1965년 10월 보고서)인 것에 한계를 느꼈다. 노동자들의 현실이 얼마나 각박한지 직접 목격한 그는 갈등하기 시작한다. 이후 산업선교의 전개 방향은 점차 목회 중심에서 노동자 중심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2. 2020년 8월에 발간된 『영등포산업선교회 자료집』(총 8권)은 대부분 조지송 목사가 부임한 1964년부터 1999년까지의 1차 자료들을 모아놓은 자료총서이다. 8권의 방대한 자료집을 받아들고 가능한 한 꼼꼼하게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공문서, 특히 엄혹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작성된 공식 문서는 대부분 형식적이지만, 그 안에서 의미 있는 작은 단어와 문장을 발견하며 당시의 숨결을 더듬는 희열은 역사 연구자만이 누리는 즐거움이리라.
(1) 자료총서 1-2집은 사업계획 및 결과 보고서들을 1965-80년, 1981-99년으로 나누어 수록하고 있다. 영산 실무자들이 꼼꼼하게 기록한 연도별 사업계획 및 회계보고서, 월례보고서가 차례로 정리되어 있다. 특히 1집의 자료들은 산업전도가 산업선교로 변화하는 시점, 활동 내용이 교회 중심에서 노동자 중심으로 바뀌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기에 매우 중요하다. 초기에 조지송 목사가 직접 등사판으로 인쇄한 손글씨의 보고서에는 공장목회 활동과 역사상 처음으로 목사가 노총에서 실시한 노동조합 지도자교육에 참석한 일, 평신도교육에 노총 지도자를 초빙해 근로기준법에 대해 강의한 기록이 보인다. 이때는 영산이 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초기 단계인데, 1966년 7월 보고서는 대립적인 노사관계에 대한 우려와 함께 “노동의 강도는 높고 임금은 낮은 경제 현실에 사는 노동 대중은 모든 문제를 원망의 눈초리로 보게 되는 것이 현실”이라며 노동자들의 사정을 이해하고 있다. 1969년 5월부터는 감리교 김경락 목사와 함께 초교파적 활동을 시작하고, 공식 명칭이 ‘산업전도’에서 ‘산업선교’로 바뀌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같은 해 7월 보고서에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경제생활을 위해 신용조합 조직을 추진한다는 내용이 등장하고, 10월 보고서에는 “해고당한 노동자들의 복직운동을 위해 노조가 주로 만나는 장소가 산업선교회관”이라고 하여, 노동자들이 산업선교(이하 ‘산선’)를 자신들의 편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1970년부터 영산은 노동조합 조직이나 노동 현장에서 발생하는 일에 더 많이 관여했고, 1972년부터는 소그룹운동을 전개했다. 이 시기 소그룹 활동의 특성은 여성 노동자들을 의식화시켜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을 취한 것인데, 소그룹이 얼마나 활성화되었는지(1972년 말 이미 110개), 실무자들의 헌신은 어떠했는지 공문서에도 그 뜨거움이 묻어난다. 불과 3-4명의 실무자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처럼 엄청난 일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그들은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산선이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할수록 기업주들이나 한국노총과의 갈등은 깊어지고, 공권력의 견제도 심해졌다. “…가급적 직접 이 문서를 받으신 분 이외의 분에게 제공하는 것을 금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문구, “그럼에도 우리는 근로자들과 친구가 되고 그들과 같이 고난의 길을 가는 일에 주저하지 않으며 오히려 보람을 느끼며 지낸다.”라는 문구(1973년 활동보고서)는 영산의 시련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관계 근로자들의 안전을 위해 자세히 기록하지 못함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문구(1974년 5월 보고서)에서는 영산 활동이 제한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74년 1월 실무자 김경락, 인명진 목사의 긴급조치 1호 위반 구속을 시작으로, 실무자의 절대 부족, 교회의 몰이해, 기업주의 횡포, 재정 결핍, 유신-군사독재 정부의 불법사찰은 1980년대까지도 계속된다. 필자는 2003년 조지송 목사에게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는지 질문한 적이 있는데, “이 길이 예수 정신에 가장 합당한 길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가능했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조지송은 1974년 10월에 쓴 글에서 “노동자 선교는… 기업이윤의 공정한 분배를 통한 산업사회 정의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노동자 선교는 노동자를 인간으로 존경함은 물론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1975년 인명진 목사의 석방과 명노선 전도사의 영입으로 소그룹 활동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영산이 마련한 21평 아파트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노동자들의 출입으로 문턱이 닳을 지경이었다. 영산은 더 나아가 상황이 너무나도 열악했던 방림방적과 남영나이론, 해태제과 등에 의도적으로 소그룹을 조직하여 노동자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재야 민주화 세력과 연대(방림방적체불임금대책위원회 등)하여 문제를 타개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영산은 기업주 장로들과의 불화와 용공론에 휘말렸고(1976년 7월 보고서), 후원 교회와 단체들이 지원을 중단하는 사태를 맞이한다. 당시의 보고서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영산이 얼마나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갔는지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1977년 1월부터 영산은 탄압의 비를 피하기 위한 조치로 노동교회를 시작했다.
2집에서 눈여겨볼 내용은 1982년 노동 문제에 대한 영산의 입장문, 산선에 대한 비방과 왜곡 보도가 정도를 넘음에 따라 제67회 예장 통합 총회에 저간의 사정을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글, 1983년 1월 1일부터 노동교회가 성문밖교회로 이름을 바꾼 후 보고서의 내용도 노동운동에서 예배와 교회 활동 중심으로 기록된 점, 1970년대 소그룹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명노선이 사임하고, 1984년 5월 인명진 목사도 사임하면서 영산에 큰 변화가 온 것 등이다.
(2) 3집은 수기로 기록된 회의록, 예배를 비롯한 각종 행사와 모임의 초대장과 안내장, 행사 내용을 담은 팸플릿, 평신도산업선교교육 안내서와 각종 수련회 안내와 순서지, 그룹 리더들의 모임인 ‘파이오니아’ 정기모임 회의록, 그룹 회원 모임 자료들을 묶은 것이다. 1964년 조지송 목사가 시작한 평신도산업전도연합회의 회의록과 산업전도위원회 회의록, 산업전도 실무자들의 연구위원회 기록 등이 혼재되어 있다. 영등포도시산업선교위원회는 영산을 후원하기 위한 조직인데, 회의록을 보면 이들이 어떻게 영산을 위해 일했는지 알 수 있다. 실무자들의 인건비 책정, 영산회관 건립을 위한 의결, 노사분규로 영산이 피해를 입었을 경우 관계기관에 진정서 제출, 영락교회의 후원이 중단되었을 때의 대책 마련, 영산의 예·결산 처리 등의 내용을 볼 수 있다. 또한 산업전도/선교 교육 내용, 노동자 수련회, 강습회, 음악회 등 영산에서 진행한 노동자 프로그램의 초청장들이 있어 다양한 행사의 내용을 알 수 있다.
3집에서 특별히 중요한 자료는 한영섬유 노동자 김진수가 회사 측 불량배의 소행으로 억울한 죽임을 당한 사건에 대해 영산이 끈질기게 회사 측과 협상하여 합의점을 모색하고, 죽은 지 40일 만에 장례를 치른 일에 관한 기록들이다. 이 사건은 영산에 전태일 이상으로 비중이 크고 의미 있는 사건으로, 이후 어용노동조합과 손절하고 새로운 민주노조를 만들기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영산의 소그룹 노동자들이 감리교 인천산업선교 회원들과 교류한 내용과 해태제과, 남영나이론, 방림방적 등 노사분규가 발생한 사업장 사장에게 다른 회사 소그룹 노동자들이 해고된 노동자들의 복직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고 전화를 하는 등 측면 지원을 한 자료도 있다. 또 1977년 1월 노동교회를 시작할 당시 노동자들에게 미리 의견을 듣는 절차를 거쳤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으며, 수많은 노동자 모임에서 기록된 회의록과 자료를 통해 노동자들의 모임이 얼마나 민주적이고 자율적으로 운영되었는지, 그러기 위해 실무자들이 얼마나 큰 수고를 하였는지 알 수 있다.
(3) 4-5집은 영산이 발행하고 수신했던 국문 편지 모음으로, 4집은 1969-77년까지를, 5집은 1978-98년까지를 담고 있다. 영산이 주관한 다양한 행사 초청장과 노동자 교육 수강신청서, 노동자들의 웅변대회나 음악 콩쿠르 등을 위한 시상품 협력 의뢰서, 노사분규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대통령을 비롯하여 각 장관 및 부처에 보내는 진정서, 후원 기관들에 보내는 간곡한 재정 청원서, 감리교 산업선교와의 교류와 갈등을 알 수 있는 서신, 노동자 모임을 위한 집회 허가 신청서, 노동청장에게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알리는 서신, 호주 선교사 파송에 관한 의견 교환, 노사분규가 발생한 회사 사장에게 보내는 공개질의서들을 보면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들이 그려진다.
4집에서 눈에 띄는 자료는 조지송 목사가 미국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여성 노동자 소그룹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기획한 ‘동아염직사건’과 ‘대한모방사건’의 전말에 관한 것이다. 동아염직과 대한모방은 모두 기업주가 장로인 공장인데, 1973년 1월 동아염직은 ‘신앙의 자유와 사생활 간섭에 관한 건’으로, 대한모방은 ‘일요일 휴일과 점심시간 1시간 실시 요구’로 노동자들이 영산에 진정서를 내고 도움을 요청하여 큰 물의를 일으켰다. 동아염직사건 이틀 전날 영산이 소그룹 회원 전체 모임을 공지한 공문을 보며, 태풍 전야에 마음속에 비밀을 품고 하나둘 모여 들었을 노동자들의 모습이 그려져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이 두 사건 이후 자신들이 후원했던 영산에 대한 배신감으로 장로 기업주들의 불만이 커지자 경기노회 영등포도시산업선교연합회는 예장 총회장에게 서신을 보냈다. “일부 기업 내에서 기업주들이 봉건적이며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으로 기업을 경영하므로 근로자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 산업선교와 관련된 노사문제에 (개입하여) 본 위원회의 실무자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간섭이 있는 것으로 사려되어 유감의 뜻을 표하는 바이며,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적극 선도해주시기 바란다.”라고 한 부분에서는 호기로움이 묻어난다. 실무자 김경락, 인명진 목사가 구속된 후 1975년 2월 11일 조지송 목사가 호주의 변조은(존 브라운)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은 저 혼자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직 영등포산업선교를 계속할 모양입니다.” 하는 문장에서는 막막하고 힘들었을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1975년 인명진 목사 석방과 명노선 전도사 부임으로 영산은 다시 활기를 띠는데, 1976년부터는 사방에서 산선을 비방하고 재정지원을 중단하며, 영산 관련 노동자들에 대한 핍박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노동자들이 스스로 각성하고 부당한 현실을 거부하는 정신자세를 갖도록 개발하고, 단결하여 선한 힘을 행사하도록, 기업인들의 불의를 제지하고 산업사회 정의를 실현하여 주종의 관계에서 대등의 관계로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좌절하지 않고 정당한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재정지원을 요청”(1976년 9월 9일 작성된 ‘사업비 보조 청원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같은 달 시경부국장이자 영등포교회 장로인 김재국이 산업선교를 비방하는 책자를 써서 기업과 공유한 것에 대해 예장 총회에 철저한 규명을 요청하는 서신도 들어 있다.
5집에서는 특별히 유신 말기의 험난했던 시간들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눈에 들어온다. 영산은 1976년부터 기업주 장로들과 공권력으로부터 맹공격을 받으면서도 조직적인 노동운동을 일으키는 한편, 산업선교를 국제공산당의 활동이라고 거짓선전하는 거대 권력과의 싸움을 이어갔다. 1978년 2월 3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도시농촌분과위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산선이) 국제공산당의 활동인 것처럼 선량한 근로자를 현혹시켜 교회와 근로자를 분열시키려 하고, 기업주들은 공공연하게 산업선교 관련 근로자를 탄압하여 관계를 끊으려 하고”, “중앙정보부는 재무부를 시켜 산업선교회가 하고 있는 신용협동조합 감사를 지시하고 있으며, 또 재무부는 신용조합연합회를 시켜서 신용조합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어…”라며 영산의 활동에 대한 탄압을 막아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는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연상케 한다.
유신정권은 이러한 작전이 먹히지 않자 1978년 5월 1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인명진 목사를 구속하는데, 이것이 일명 ‘미가서 사건’이다. 이때는 산업선교위원회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총회의 지원을 받았는데, 자료들을 보니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들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1980년 5.17쿠데타를 계획한 신군부가 김대중내란음모죄로 인명진을 다시 구속하고 조지송까지 연행하여 난관에 부닥친 영산의 모습이 담긴 서신들, 석방 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호주교회의 초청을 받은 인명진 목사가 “호주에 가게 되면 몸은 편하지만 마음이 괴로울 거 같고, 여기 있으면 몸은 어려울지 모르지만 마음은 아주 편하고 떳떳할 거 같습니다.”라고 쓴 글에서는 실무자들이 고난 속에서도 어떠한 마음으로 영산을 지켰는지 알 수 있다.
(4) 6집은 영산이 수신·발신한 영문 자료들과 인명진 목사의 옥중서신이다. 여기에는 1970년부터 1994년까지 영산을 지원하고 재정적으로 후원한 세계교회협의회(WCC), 도시농촌선교회(CCA-URM), 동아시아기독교협의회(EACC, 1973부터 CCA로 바뀜), 호주와 미국의 기독교 기관 혹은 교회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이 담겨 있다. 1970년에서 1980년대 초까지의 자료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이 당시 세계 교회와의 교류가 얼마나 활발했는지 알 수 있다.
옥중서신은 1980년 영산에서 발행한 『구치소에서 온 편지』를 그대로 실은 것이다. 인명진 목사는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978년에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1979년에는 ‘YH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 혐의로, 1980년에는 김대중내란음모사건 노동책이라는 명분으로 구속되어 호된 고생을 하였는데, 이 서신집은 1980년에 나온 것으로 1978년과 1979년 두 번의 복역 기간에 가족에게 쓴 편지를 모은 것이다. 두려움과 걱정으로 날을 보낼 가족들에 대한 걱정과 안부, 영산과 노동자에 대한 염려, 자신이 해온 일에 대한 자부심 등이 묻어나는 진솔한 내용들이 실려 있다.
(5) 7집은 산업전도 초기 한국 사회의 노동 상황에 대한 각종 통계자료와 조지송, 인명진 목사가 각종 신문에 투고한 글, 산선에 관한 신문기사들이 혼재되어 있다. 7집 처음에는 자료총서에서 가장 오래된 자료인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44회 회의록에 실린 ‘산업전도 사업보고 및 계획’이 수록되어 있다. 이 문서는 산업전도의 초기 모습을 알 수 있는 귀한 자료로 산업전도를 처음 시작한 오철호 전도사가 작성한 것이다. 1957년 4월 12일 산업전도가 시작된 날부터 1959년 9월 2일까지의 기록, 1960년 사업계획과 함께 총회에 청원하는 내용이 8쪽에 걸쳐 상세하게 담겨 있다. 또한 115-117쪽에 실린 1967년의 ‘산업전도 화보’의 사진 10장은 영산의 초기 활동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이다. 1982-83년 정치권력과 언론이 전방위로 산선을 탄압하고 편파적인 보도를 하는 등 횡포를 부리는 상황에서 교회 내에서도 산선을 오해하고 노동운동을 공산당 운운하는 속에서 작성된 글들, 다른 자료집에는 없는, 산선의 마지막 아픈 손가락인 원풍모방사건 관련하여 작성된 글들이 눈에 띄었다.
(6) 8집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보관하고 있는 인명진 목사 개인소장 자료인데, 인명진 목사가 관련되었던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자료와 구술 녹취록이 들어 있다. 1978년 작성된 얇은 노트 한 권 분량의 ‘인명진 목사 구속사건 일지’는 구속된 인 목사를 위해 영산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기록되어 있다. 옥중 남편에게 보내는 손글씨 편지와 1978년 당시 수감된 목회자의 아내들의 글을 일본에 소개한 편지도 들어 있다.
무엇보다 압권은 2011년에 두 차례, 2020년에 한 차례 진행된 인명진 목사의 구술 녹취 전문이다. 총 14시간 동안 생애와 활동에 관한 내용, 보고서와 공식 문서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영산의 세세한 속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증언되어 있다. 여성 노동자 소그룹 활동을 어떻게 진행하고 노동운동을 어떻게 펼쳐나갔는지 알 수 있는, 보안을 위해 보고서 등에는 기록될 수 없었던 내용이 담긴 아주 귀한 자료이다. 또한 네 차례 옥고를 치른 이야기, 노동자들이 영산의 실무자로 헌신한 인명진 목사를 얼마나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기도하고 옥바라지를 했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소상하게 나와 있다.

3. 영산의 역사가 담긴 귀한 자료들을 한꺼번에 접하고 나니 2000년대 초반 산선 자료를 찾아 이곳저곳 수소문하고 찾아다니던 기억이 새로웠다. 또한 지금까지도 그 맥을 유지하고 있는 영산의 귀한 자료들이 유실되기 전에 이렇게 묶여진 것이 참 다행이다 싶었다. 다만 연도 표기와 분류가 좀 더 세심하게 이루어졌더라면, 또 자료들을 종류별이 아니라 연대기적으로 편집하였더라면 영산의 역사와 활동상, 당시 상황을 더 잘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인명진 목사에게 각 권마다 감수를 받아 해제를 덧붙였더라면, 마지막 권의 인터뷰 녹취 부분도 그대로 실을 것이 아니라 잘못된 인명과 단어들에 각주를 달아서라도 바로잡았더라면 후대에 이를 사료로 인용할 경우에 더 유용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자료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산업선교의 노동자운동은 치열했지만 참 따뜻했고, 엄혹한 시대에도 용감했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이 자료총서는 산선이 1980년대 노동운동의 디딤돌로 재평가받는 데 귀한 자료로 쓰일 것이라 확신한다.

장숙경 |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한 후 성균관대학교에서 한국현대사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산업선교, 그리고 70년대 노동운동』이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활동하였다.

 
 
 

2021년 8월호(통권 7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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