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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당 (2021년 4월호)

 

  정치로의 초대
  『해나 아렌트의 행위이론과 시민 정치』, 이인미, 커뮤니케이션북스, 2020

본문

 

1. 한국의 기독교인에게 정치철학서는 아마도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인 것 같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들 수 있는데, 첫째, ‘정치’라는 주제의 껄끄러움이다. 한국의 기독교인은 은연중에 성(聖)과 속(俗)의 이 원론에 물들어 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저 본향, 저 천국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죄에 물든 세속의 땅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죄인들의 이합집산과 이전투구가 가장 강력하게 일어나는 곳이 정치판이니, 거룩하게 살아야 할 주의 백성에게 정치는 영 맞지 않는 옷 같다. 더군다나 정치에 관심을 보이는 목회자나 성도는 한편으로는 극우 보수가 되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 좌파가 되어버리니, 그동안 교회 안팎 에서 정치다운 정치를 경험해보지 못한 한국의 기독교인이 정치에 대한 건전한 상식을 가지기는 요원해 보인다.
둘째, 정치라는 주제도 껄끄럽지만, 정치를 주제로 다룬 책은 더욱 껄끄럽다. 정치철학서니, 정치이론서니 하는 것들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어려운 용어로 점철되어 있어, 현실정치도 제대로 안 되는 판에 이런 이론서가 무슨 소용인가 싶다. 너무나 뜬구름 잡는 소리 같지 않은가.
셋째, 정치도 싫고, 정치철학 서적도 싫지만, 외국학자가 쓴 정치철학서라면 더더욱 손이 가기 쉽지 않다. 그네들의 전통에서, 그네들만 아는 얘기를 읽노라면 이게 우리나라랑 무슨 상관인가 싶다. 전통과 역사와 문화, 모든 것이 판연히 다른데 말이다. 그네들의 잘 차려진 밥상에 우리의 숟가락을 놓을 틈은 보이지 않는다. 이래저래 한국의 기독교인에게 외국학자가 쓴 정치철학서는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인 것이다.
이 점에서 『해나 아렌트의 행위이론과 시민 정치』는 외국의 정치철학서에 대한 문턱을 낮추어주는 데 탁월한 효과를 지녔다. 이 책은 아렌트 (Hannah Arendt, 1906-75)라는 외국 학자가 쓴 『인간의 조건』을 중심으로 그녀의 정치철학을 우리나라의 현실 맥락에 맞추어 쉽고 평이한 언어로 풀어쓴 책이다. 책 서문에서 저자가 언급한 대로, “해외에서 외국인 이 구축한 행위이론을 날것 그대로 국내에 번역·소개하는 게 아니라 한국의 역사, 상황, 정치적 맥락에 적용하면서 풀어씀으로써 한국인이 접근하기 쉽게 하려는” 저자의 수고와 노고를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정치라는 것이 우리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 그야말로 우리나라의 맥락에서, 내가 매일 마주하며 부딪히는 우리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어떻게 인간적인 방식으로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정치이다. 그래서 이 책은 정치 혐오나, 정치 비하, 정치 무관심을 넘어서 정치다운 정치가 무엇인지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자고 우리를 초대하는 ‘정치 초청장’이다. 그러니 특히 정치 포비아가 강한 한국 기독교인들이라면 한번쯤은 진지하게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저자의 질문에 응해보기를 권한다.
2.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1부는 “아래”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을 담고 있다. 물론 건물의 아래, 지도의 아래가 아니라 우리가 은연중에 ‘아랫사람’으로 부르던 인간의 ‘아래’를 말한다. 오랫동안 유교적 전통 속에 살아온 우리는 계급도, 정치도, 예의도 위아래로 나누어서 줄 세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상하의 줄세우기가 의식과 몸에 새겨진 우 리는 학교에서는 성적순으로, 직장에서는 직급순으로, 사회에서는 갑과 을의 관계로 줄세워서 평가한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은사에 따른 직분 개념을 목사-장로-안수집사-서리집사-평신도의 상하 관계로 줄세우기 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서로 다른 사람들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일에는 상하 관계로 줄세우는 방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옆으로 나란히 세우는 방식도 있고, 병렬로 서서 마주 보는 방식도 있고, 원으로 둥글 게 마주 보는 방식도 있고, 둥글게 바깥으로 향하여 서는 방식도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의 1부 “아래”에서는, ‘정치’ 하면, 나라님들이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우리의 선입견을 다시 한 번 검토해보자고 제안한다. 아렌트는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방식의 정치가 아니라, 바로 그 아랫사람들이 동등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며 다른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의 정치를 그린다. 사실 이 아랫사람들은 멀리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가까이하시고 친구가 되고자 하셨던 세리와 창기, 병자, 가난한 자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한때는 백성으로 불렸고, 또 어떤 때는 민중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오늘날에는 시민으로 불리기도 하는, 바로 나와 너, 우리들인 것이다. 정치는 바로 이 시민이 주체가 되는 이야기임을 저자는 아렌트의 이론을 빌려서 역설한다.
그런데 정치는 아랫사람들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냥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것을 2부 “행위”에서 설명한다. 쉽게 말하자면, “나와 내 가족이 잘 먹고 잘사는 일에 초집중하며 하루하루 지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일에 자기대로 마음을 쓰고 특정 사안들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표현하며 살아가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사실 ‘행위’는 아렌트가 쓴 『인간의 조건』에 나오는 세 가지 활동 양식 중 하나이다. 아렌트는 인간이 활동을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보았는데, 그 활동의 양식은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노동은 누구나 생명으로 태어난 이상,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한 몸을 움직여서 먹고살아야 되는 필연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쉽게 말하여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우리는 그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뭐라도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 이처럼 먹고살기 위해 해야 하는 생계유지 활동을 아렌트는 ‘노동’이라고 불렀다. 노동은 수고로운 것이지만 노동 후에 주어지는 대가(소산)로 인한 기쁨이 있다. 그 누구를 막론하고 월급 타는 날이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 아닌가.
인간은 먹고살기 위해 뭐라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먹고사는 것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필연성 에 매인 노예와 진배없다. 그래서 예수도 사람이 빵으로만 살 수 없다고 하셨고, 내일 무엇을 먹을 것인지, 무엇을 입을 것인지에 매여서 살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먹고사는 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울 때 인간으로서의 삶이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아렌트는 그다음의 활동 양식을 소개하는데, 이것이 ‘작업’이다. 노동의 산물은 무상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아렌트는 이를 ‘무세계성’이라 불렀는데, 이 세계에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돈은 버는 족족 써서 없어지고, 먹거리는 먹는 족족 먹어서 없어진다. 자신의 몸을 위해 사는 삶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게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이 무상함을 깨달아서인지 인간들은 이 세상에 무엇인가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는 활동을 추구하였다. 그래서 똑같이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났지만, 자연환경에서만 살아가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집을 짓고, 법과 제도를 만들며, 예술작품과 문화를 만들어서 인간의 손으로 만든 세상 속에 살아간다. 이것은 다만 먹고살기 위해 사는 삶의 무상함을 극복하기 위해, 이 세상 속에 자신의 손으로 무엇인가 안정된 기반을 만들고, 그 가시적인 결과물 속에서 안정감과 성취감을 느끼는 인간 욕구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에 머무를 때 먹고살기 위해 사는 인간이 된다면, ‘작업’ 에 머무를 때 인간은 제작자로 살게 된다.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칠 때, 그것이 때로는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제작자의 오만으로 치달을 위험이 있다. 홀로코스트라는 전체주의의 공포를 겪었던 아렌트가 보기에, 이 제작자의 태도는 언제나 원재료를 파괴함으로써만 자신의 원하는 결과물을 얻어내는 위험을 수반한 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이 ‘행위’이다.
행위는 자기와 자기 가족들이 잘 먹고 잘사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노동을 넘어, 또 자신이 원하는 바를 가시적인 성과물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넘어, 나와 너,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계가 살 만한 곳이 되도록 함께 대화하고 논의하는 활동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직접적인 이득이 없고, 다른 한편으로 가시적인 결과물을 남기지 않는다는 점 에서 행위는 참으로 비생산적이고 무용지물같이 보인다. 하지만 아렌트는 이 행위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삶의 양식이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안에만 머물거나, 혹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 만들려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행위는 내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 공간(세계), 우리 다음 세대들이 와서 머무를 이 공간을 보다 안전하고 좋은 곳으로 만들어보자고 서로 머리를 맞대어 궁리하고 고민하고 의견을 주고받는 활동이다. 이것은 누군가의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한 사람의 강한 주도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각자가 자신의 존재를 다른 사람들의 틈새에 드러내고 참여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렇다면 나의 ‘행위’가 ‘행위’되도록 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타인, 이웃들이다. 행위는 나 혼자서는 결코 할 수 없고 언제나 나와 다른 타인과 함께해야 한다. 이 책의 3부 제목이 “협력”인 이유이다. 이 세계를 바꾸는 위대한 일들은 수많은 ‘나’들이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살지 않고 더 나은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함께 행위함’(act in concert) 속으로 나아올 때 가능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차별받던 평범한 한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Rosa Louise McCauley Parks)가 버스 기사의 부당한 차별에 반대하여 뒷자리로 가라는 지시를 거부했을 때 그것은 흑인차별에 항거하는 하나의 행위가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미국의 흑인민권운동으 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그 하나의 행위에 함께 참여하는 수많은 다른 흑인과 백인, 그리고 전 세계에서 이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 문이다. 아렌트는 공적 영역에서 자신을 주체로 드러내는 삶, 자신의 탄생성을 실현하는 삶을 정치적 삶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누구 한 사람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서 정해진 목적을 이루어내는 것과는 다르다. 이는 어떤 사안에 대하여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면밀히 따져보고 자기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한 사람의 행위자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하고 설득하고 함께 의미를 도출할 때에, 그럴 때에 수많은 ‘을’들의 다양함이 살아 움직이며 우리가 사는 세상을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키는 물결이 된다는 것이다.

3. 이제 정치에 대한 껄끄러움이 조금 사라졌는가? 그렇다면 용기를 내어 정치란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이 책에 한번 도전해보기를 권한다. 서두에 밝혔듯이 아렌트의 정치사상을 우리의 현실 맥락에 맞추어 쉽게 풀어쓰고자 애쓴 저자의 노고로 인해 서양의 정치철학서에 대한 진입 장벽이 상당히 낮아졌음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생기는 법, 지나치게 구체적 현실 맥락에 적용해서 풀어쓰고자 한 그 노력이 도리어 원저작의 아이디어를 왜곡되이 해석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그런 의문이 드는 분은 이참에 용기를 내어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일독해 보시기를 권한다. 그런 의문과 의지를 불러일으켰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 책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일 터이다.
더불어, 이 책을 읽고 정치에 대한 혐오가 어느 정도 없어진 사람들은 이보다 머리 아픈 질문도 생각해보면 더 좋겠다. 나와 너, 우리가 함께 살아갈 세상, 나아가 새로 오는 다음 세대(newcomers)를 위해 이 세상을 보다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기 위한 행위의 발현이 정치라면, 한국 땅에 살아가는 기독교인으로서 행위를 한다는 것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이 질문은 결코 녹록치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리를 믿지만,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로 상충하는 가치들 속에서 ‘함께 행위함’은 어떻게, 어디까지 가능할까? 믿는 사람들끼리 협력하면 된다는 단순한 대답으로는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나와 다른 가치를 가진 그 이웃은 바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친히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시기까지 구원하기를 원하셨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던 소중한 생명들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러한 질문들을 외면해버렸기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치적 감각을 상실해버리고, 아직도 구약 시대의 패권주의 패러다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21세기 한국 기독교는 우리의 이웃에게 가장 무례하고 오만하며 염치없는 종교로 전락해버린 것은 아닌지, 우리 모두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논의해볼 때이다.


박은주 | 서울대학교에서 교육철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한나 아렌트, 교육의 위기를 말하다』, 『한나 아렌트와 교육의 지평』(공저) 등이 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인문과학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1년 4월호(통권 7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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