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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당 (2021년 4월호)

 

  휴머니스트 예수의 윤리
  『예수와 철학: 윤리의 혁명』, 돈 큐핏, 류의근 옮김, 대장간, 2020

본문

 

돈 큐핏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30여 년간 종교철학을 가르친 성공회 사제이다. 그런데 대학을 떠난 후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과 결별하고 새로운 휴머니즘적 종교를 구축하는 데 힘쓰고 있다. 그가 이렇게 방향을 전환하게 된 이유는 ‘예수 세미나’( Jesus Seminar)의 학문적 결과를 진지하게 수용한 결과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1985년부터 펑크(Robert W. Funk)와 크로산(John D. Crossan)은 예수 세미나를 주도했다. 이는 18세기부터 시작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성서적 논의와 맥을 같이한다. 예수 세미나는 역사적 예수의 교훈과 행적을 찾기 위해 복음서와 도마복음, Q자료 등 기원후 30년에서 200년 사이에 쓰인 예수에 관한 여러 문헌을 비교·연구하였다. 그리고 1993년에는 예수의 말로 보고된 1,330개의 어록을 검토한 후 첫 연구 성과물인 『다섯 복음서』(The Five Gospels)를 내놓았다. 여기서 그들은 예수의 말을 네 가지 색깔의 등급으로 나누었다. 빨강은 예수가 실제로 한 말, 분홍은 예수의 교훈으로 간주할 수 있는 말, 회색은 예수의 생각을 담고 있는 말, 그리고 검정은 후대의 추종자나 다른 전승이 덧붙인 말이다.
그들이 내적으로 합의한 진정성 있는 예수의 어록에서 발견한 것은, 창조의 세계와 모든 이웃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예수의 신뢰와 사랑의 윤리였다. 큐핏은 바로 예수 세미나가 제시한 역사적 예수 연구를 수용하면서 예수가 급진적 휴머니즘 유토피아를 제시한 세속적 도덕 교사였다고 주장한다. 그가 설교한 하나님의 나라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꿈꾸던, 지상에서 실현되어야 할 보편적이며 세속적인 휴머니즘이 실현된 나라라고 확정한다.

종교의 유령

큐핏은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초자연적인 존재로 우상화하고 예수의 가르침을 변질시켰다는 말로 자신의 윤리적 서사를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그동안 서구의 합리주의적 윤리학은 신학적 도덕체계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인간의 실존을 종교적이며 율법적인 시공간에 묶 어두었으며, 그 결과 신의 이름으로 자기 의를 앞세우며 지적질에 능한 인간만을 양산하였다. 여기서 저자는 도덕의 역사적 기원을 신에게 두는 도덕적 실재론의 한계를 지적한다. 도덕적 실재론은 신이 역사를 통해 도덕적 질서를 계시해왔으며 도덕은 신을 만나는 인간의 경험에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큐핏은 이러한 도덕성을 ‘종교의 유령’이라 고 질타한다. 도덕성은 역사적 진화의 산물일 뿐이다. 이제 윤리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올 것을 주문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윤리학이 종교적 유령의 탈을 벗고 새로운 변곡점을 찾을 수 있을까? 큐핏에 따르면 도덕과 윤리가 종교적 권위에 대항하며 이에서 벗어날 때 가능하다. 도덕을 신이 명한 불변의 가치가 아니라 인간적 삶을 위해 인간이 만든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그는 우리 모두가 ‘신과 싸우는 자’(이스라엘)가 되자고 제안한다. 신에 대항해 휴머니즘적 반란을 시작할 때 인간의 도덕성은 바르게 이해되며, 예수는 이러한 반역의 원형과 모범이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서 신의 처벌을 감내한 반역자”이다.(38쪽) 그는 우리 대신 반역의 십자가를 졌고, 결국 우리를 신에게서 구원했다.

휴머니즘적 윤리

큐핏은 두 유형의 윤리 전통을 소개한다. 첫째는 신과의 관계에서 도덕성을 모형화하는 서구의 의무론적 윤리이다. 의무론적 윤리는 가학적이고 혐오를 부추기는 유대교의 신율적 ‘수직윤리’에 기초해 있으며, 신과 제도에 대한 절대적 복종과 정의 실현이라는 명목으로 복수를 향한 분노까지 정당화한다. 그러나 예수의 윤리는 서로를 향한 연민과 행복을 추구하는 ‘휴머니즘적 윤리’이고 서로를 포용하고 관용하고 사랑하는 ‘수평윤리’이다. 예수는 결코 받은 만큼만 돌려주는 상호주의를 윤리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원수사랑’을 명하였다. 원수사랑의 윤리는 죄와 같은 인간의 부정적 정서까지 뛰어넘어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는 마음의 윤리이다.
큐핏은 자신의 휴머니즘적 윤리의 근본을 성서적 전승, 엄밀히 말하자면 ‘예수 세미나’가 편집한 예수의 어록에서 찾는다. 이 어록에서 발견한 예수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방랑하는 도덕적 스승으로, 새로운 도덕적 질서의 도래가 임박했음을 선포하였다. 다시 말해 예수는 초자연성에 기초한 율법주의적 종교법이 아니라 지상에서 인간 사랑을 완성하려던 세속적 교사였다. 큐핏은 예루살렘을 자유로운 인간 사회의 꿈이 실현된 장소로 상징화한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원한 없이 살고 서로에게 완전히 편안한 인간 세계를 기술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예루살렘’이라는 용어를 대신해 그가 사용한 말”(115쪽)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세계가 아니라 모든 자들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진실한 사랑을 실현하는 나라이다.

사랑의 반란자

예수는 도덕적 실재론을 거부했으며, 신의 이름으로 표준화된 도덕적 규칙과 법을 거절하고 마음의 변혁을 통한 평화로운 인간 사회의 실현을 꿈꾸었다. 이는 예수가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종교적 이상을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급진화한 것으로 윤리의 세속화, 역사화, 그리고 인간화를 목적으로 하였다. 저자는 이러한 시도를 ‘타자술어적 사고와 삶’에서 ‘자기 술어적 사고와 삶’으로 변화하는 점진적인 과정이라고 말한다. 타자술어적 사고는 윤리의 기초를 입법자인 유일신에 두고 있으며, 그 신은 폭력적이고 통제적이다. 그러나 예수의 성육신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를 타자술어적 사고에서 자기술어적 사고로 이행시켰다. 그러므로 큐핏은 성 육신의 사건을 타자술어적 윤리에서 자기술어적 윤리로 옮겨가는 ‘십자로’라고 해석한다. 그렇다면 성육신은 어떤 윤리적 의미를 갖고 있을까?
큐핏은 신이 창조 이후에 자신의 권한을 점점 인간에게 이양했고, 도덕적 주권까지 넘겨주었다고 말한다. 그 결과 인간은 더 이상 입법자의 뜻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내면화된 주관적인 정서에 따라 행동하게 되었다. 신은 인간의 마음에 자신의 도덕적 가르침을 이양하기 위해 성육신했고, 십자가에서 죽었으나 부활은 없었다. 부활신앙은 제자들의 환상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 대한 환상은 언제나 흔히 있어 왔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매우 흔한 일이다.”(103쪽)
성서에 기록된 수난사화도 예수의 죽음을 신의 역사로 미화하려던 예수의 제자들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구하다고 단언한다. 제자들이 예수를 종교화하고 신학화했다는 것이다. 바울도 후발주자로 여기에 가세했다. 부활신앙은, 말을 전달한 사람은 죽었으나 그가 했던 말은 남아 마치 그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지적 오류’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종말에 대한 믿음도 우리가 현실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예수가 꿈꾸던 세계는 모든 이가 평등하고 모든 마음이 열려 있는 순수하게 인간적인 세계이다. “그가 가르친 것은 당신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상호적인 사랑이 아니라 분별과 정도를 무자비하게 넘어서는 사랑이다.”(205쪽) 그런 점에서 예수는 사랑의 반란자였다.

도덕화의 위험성

큐핏의 책은 경직되고 제도화된 교회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로 가득하다. 그는 교회가 지난 2,000년간 인간 예수를 신격화하고 인간의 도덕과 가치를 저평가하는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고 판단한다. 역사적 예수는 인간적 삶의 가능성을 신뢰했던 도덕 교사였고, 대립과 탐욕으로 가득한 세상을 사랑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급진적 휴머니스트였다. 예수가 부탁한 삶을 살아낼 자신이 없었던 제자들과 교회는 예수를 초자연적 존재로 우상화하고 그의 도덕적 요구를 종말의 날에나 실현될 수 있는 이상으로 추상화하였다.
큐핏은 예수 세미나를 통해 밝혀진 예수의 인간성을 명확하게 주목하지 않는 ‘신학 잔여적’(150쪽) 윤리는 생명 없는 빈껍데기와 같은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에 대한 그의 해석이 역사비평적 성서 이해라는 관점에서 얼마나 정합한지 분명치 않다. 혹시 자신이 원하는 예수를 자기 입맛에 맞게 재구성한 것은 아닌지 의심을 품게 된다. 신학적으로 이 부분이 그의 도덕철학의 가장 큰 약점이라고 본다.
그의 윤리적 주장에 대한 개인적 비평도 가능하다. 큐핏은 일관되게 예수의 윤리를 극단적인 휴머니즘의 윤리로 해석한다. 휴머니즘은 매우 오래되었고 별도의 해석이 필요한 개념이지만, 각 사람의 존엄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윤리적 의미의 휴머니즘은 교회가 회복해야 할 신앙적 가치임에 틀림없다.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형상을 상실했지만,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힘입어 다시 회복되었다. 큐핏이 강조한 성육신의 신앙과 인간의 하나님 형상에 대한 말씀은 기독교적 휴머니즘의 든든한 신학적 기초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휴머니즘이 중시하는 일차적 요소는 휴머니즘이 아니라 기독교의 본질, 다시 말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는 세속적 휴머니즘을 수용해 기독교적 휴머니즘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인간 사랑’의 역사가 먼저 있었기 에 가능했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을 때 우리는 쉽사리 ‘휴머니즘’의 이름으로 교회를 도덕화한다.
기독교적 휴머니즘은 인간의 기원(하나님의 피조물)과 종말(하나님의 미래)을 진지하게 숙고하면서 이에 맞게 윤리적으로 행동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적 휴머니즘은 ‘비판적’이다. ‘비판적’이란 하나님과 이웃으로부터 소외되고 유리된 인간의 현실을 직시하겠다는 뜻이다. 그 안에서 분열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 인간은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는다. 소외된 인간의 현실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미루는 행동은 원초적으로 분열되고 부패한 인간의 실존적 삶의 현장을 못 본 척하는 위선적 태도일 뿐이다.
큐핏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의 변혁을 이루자고 말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세상을 윤리적 공동체로 만들지 못한다. 실제로 사회적 제도의 도움 없이 세상의 변화는 불가능하다. 큐핏도 이를 실토하고 있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그는 ‘자유민주적 복지국가’의 도덕적 능력을 찬양한다. 현대의 자유복지국가를 인간의 필요와 가치와 권리와 같은 휴머니즘적 가치의 실현 가능성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가 예수를 종교적 교사로 우상화하고 제도화했지만 국가는 교회를 대신해서 그리스도의 윤리적 비전을 실천한다고 말한다. “국가의 윤리는 오늘날에 와서 교회의 공식 윤리보다 훨씬 더 많이 그리스도적이다.”(154쪽) 이러한 주장이 갖는 윤리적 함의가 무엇일까? 세상의 평화는 사회적 제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서구의 복지국가 시스템이 초대교회에서 시작된 디아코니아(교회의 사회봉사)와 같은 교회의 제도화를 통해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일깨울 필요가 있겠다.

김형민 |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하나님의 권리와 인간의 권리』, 역서로 『선의 매혹적인 힘: 그리스도교 윤리학의 이론과 실제』 등이 있다. 호남신학대학교 명예교수(기독교윤리학)이다.

 
 
 

2021년 4월호(통권 7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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