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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당 (2020년 10월호)

 

  복음주의는 왜 페미니즘과 만날 수 없는가
  양혜원의『종교와 페미니즘, 서로를 알아가다』비아토르, 2020

본문

 

이 책은 종교와 페미니즘이 왜 서로 협력적으로 만날 수 없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를 위해 페미니즘의 특징을 대략 소개하면서 어떤 지점들이 종교에 그대로 적용시키기에 무리가 있는지를 설명하며 페미니즘의 문제점이 다양한 여성들의 실제적 경험과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고 소개한다. 이러한 페미니즘의 특징 중 하나로 저자는 ‘전통’이나 ‘종교’를 지키려고 하는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이 어려운 부분으로 다가간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종교를 향해서도 요구하는 바가 있는데, 바로 “종교는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의 필요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여성들의 생활이 변함으로써 달라지는 고민과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는 가르침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129쪽)라는 점이다.
이런 방식으로 저자는 페미니즘과 종교가 서로 차이는 있지만 받아들이고 변해야 할 지점들을 다양하게 서술하면서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종교와 페미니즘 사이에서 혹은 기독교와 페미니즘 사이에서 두 분야를 조금씩 연결해보고 함께 안고 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면에서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몇 가지 대안이나 제안을 제공해줄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필자는 여성학 전공자가 종교와 페미니즘이 어떻게 서로 대화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종교와 페미니즘이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서 어떤 생각이 필요할 것인가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 책이 아닐까 상상해보았다. 그런데 막상 이 책을 읽어보니 저자는 종교와 페미니즘의 대화나 서로를 알아가는 것에 대해서보다는 종교, 정확히 말하자면 복음주의 기독교에서 페미니즘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나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자가 말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페미니즘은 인간의 ‘평등’이나 ‘인권’을 추구하는 인본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기독교 신앙에서는 인간을 구원과 은혜를 바라는 죄인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이 둘은 배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아마도 저자처럼 피임이나 이혼 문제에 대해서 페미니즘적 적용을 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인으로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실망스러웠던 이유는 페미니즘이나 기독교 페미니즘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에서 세심하게 설명하지 않고, 주관적으로 그리고 부분이 전체인 것처럼 페미니즘과 기독교 페미니즘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본인이 여성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한 사람이면서도 페미니즘이나 기독교 페미니즘을 ‘정형화’(어느 한 면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점이 전체를 다 말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페미니즘의 유일한 특징인 것처럼 묘사한다.)하여 왜곡해서 전달하는 경우가 매우 많이 발견
된다.
기독교 페미니즘을 설명할 때, 저자는 로즈마리 류터라는 여성신학자‘만’을 인용해서 페미니즘의 문제를 소개한다. 저자는 류터가 공격하는 기독교 신학의 내용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변호하면서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제가 속한 복음주의 그룹은 신을 남성형으로 일컫지만 그래서 신이 실제로 남자라고 믿지 않았고(그는 신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여자나 남자나 다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믿었고, 교회에서 여자의 지도적 역할은 제한되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금지된 것은 아니었고, 사회에서 여자가 지도적 역할을 하는 데에는 제약을 두지 않았으며,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창조되었지 남자에게 종속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55쪽)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근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실제로 교회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한국말로는 명백히 중성인 ‘하나님’을 ‘아버지’라는 남성명사를 덧붙여 부름으로써 하나님은 남성이라는 생각을 어릴 때부터 갖도록 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모습은 여성보다는 남성으로 각인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남성 혹은 아버지이다!’라고 고백하면서도, 엄격하고 무서운 현실의 아버지(남성)의 이미지가 아니라 자애롭고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필자는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교회에서 여자의 지도적 역할은 제한되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금지된 것은 아니라는 말도 사실과 다르다. 한국교회에는 아직도 여성에게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교단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저자는 페미니즘을 소개하고 있는 ‘듯’한 글을 쓰고 있지만, 객관적이거나 학문적 근거에 기반을 두고 면밀하게 전달한다기보다는, 저자 자신이 처한 입장에 따라서 페미니즘을 단순화해서 주관적 판단에 따라 설명하고 있다. 이 글을 접하는 사람이 만약 페미니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페미니즘을 균형 감각 있게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페미니스트 기독교 신학자(저자는 ‘여성신학자’라는 말보다 이 표현을 더 선호하고 있다.)들을 지나치게 일반화하거나 왜곡해서 전달한다고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지점은 “페미니스트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성경은 신자로서 신뢰의 자세로 대해야 하는 책이 아니라 의심의 자세로 대해야 하는 책이 되었습니다.”(57쪽)라고 비판하는 부분이다. 여성신학자 엘리자베스 피오렌자가 ‘의심의 해석학’에서 전하는 바는 성서를 의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해석학적 관점을 달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여러 명의 남성이 한 여성을 성폭행하는 ‘레위인의 첩’ 이야기를 하나님의 뜻이 반영된 글로 단순히 해석하기보다는, 그 내막에 남성 우월주의라든가 레위 지파 우월주의 등과 같은 편견이 내재되어 있음을 시대적 한계로 의심하면서 하나님은 이 사건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해석해야 하며, 이렇듯 하나님의 뜻을 더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성서를 ‘돌’이 아니라 생명의 ‘빵’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같이 소개하지 않으면서 그저 페미니스트 기독교 신학자들은 성서를 의심하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하면,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과연 여성신학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측면에서 페미니스트 기독교 신학자들을 왜곡해서 전달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여성신학이 서구 우월주의를 가지고 있다.’고 분석한 부분이다. 이렇게 비판하기 위해서는 여성신학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지만, 저자가 유일하게 소개하고 있는 사람은 ‘로즈마리 류터’뿐이다. 여성신학은, 저자가 지적하듯 소위 ‘서구 여성신학’은 로즈마리 류터가 대표할 만큼 단순하지도, 역사가 그렇게 짧지도 않다. 메리 데일리를 1세대로 잡는다고 해도 로즈마리 류터, 엘리자베스 피오렌자 등 2세대에 속한 여성신학자들이 있다. 그리고 여성이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 인종, 계급, 사회적 위치, 성 정체성에서 다양성을 띨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 엘리자베스 존슨은 2세대와 3세대의 중간쯤에 위치한 여성신학자이다. 또한 북미에서 나온 또 다른 흐름으로, 돌로레스 윌리암스나 레니타 윔스와 같이 흑인 여성의 현실과 그들의 생존 역사를 신학화하려는 여성신학자들은 3세대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파란만장하고 다양한 여성신학의 입장을 소개하지 않은 채, 여성신학은 서구 우월주의이며 그러한 기독교 페미니즘을 무비판적으로 한국 사회에 적용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렇게 페미니즘이 서구 우월적이라는 전제하에 반대로 이런 논리를 펼치는데, “비서구/비백인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해방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문화와 종교를 부정해야 하는 입장으로 내몰렸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2017년 하반기에 일어난 미국의 ‘미투’ 운동은 미국 여성들이 이루었다고 믿었던 남녀평등이 사실은 허구였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 사건이었습니다.”(81쪽)라고 설명한다. 그 이유는 서구 페미니즘이 이슬람이나 기독교 복음주의에만 가부장제가 있다고 비판했는데, 자신들에게서 가부장제가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서구 페미니즘이 여성 인권운동을 펼치는 것은 미국에 가부장제가 없기 때문에 아니라 그러한 현실을 고발하고 개선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닌가! 서구 우월적인 페미니즘이 이슬람의 베일이나 중국의 전족이 더 가부장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에 오리엔탈리즘이나 우월의식이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미투 운동이 왜 여성운동의 허구를 드러내는 것인지 필자는 이해할 수가 없다. 자유주의나 기독교 페미니즘이 따르고 있는 여성 인권이 ‘서구적’이라고 저자는 믿기 때문에, 따라서 이슬람 페미니즘이나 유교 페미니즘은 적어도 서구와는 분리된 ‘주체적’ 페미니즘이라고 평가한다.
“유교 페미니즘은 이 인(仁)의 덕목을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돌봄의 윤리와 연결하여 여성과 남성 모두가 실현할 수 있는 보편적 윤리로 삼습니다.”(212쪽)라든지, “유교 사회에서 자식을 둔 어머니는 성적 존재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성으로 대변되는 여성성을 넘어설 수 있고, 이 세상에 어머니 없는 아들은 없으므로 효의 윤리에 기반해 남성들의 존경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217쪽)라는 설명을 통해 유교 페미니즘이 훨씬 한국에 맞게 현실화된 페미니즘이라고 제안하기도 한다. 그리고 “페미니즘의 변호가 없이도 이미 여성들은 자신이 가진 문화 유산을 활용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 셈입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221쪽)라는 설명을 통해 한국 여성에게는 유교적 생각이 더 현실적이지 페미니즘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사람들 혹은 교회 안에서 여성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서구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저자가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저자 세대의 여성들은 모르겠으나, 한국에서 살고 있는 20-30대 여성들이 살고 있는 한국의 상황이 그저 어떤 면은 서구적이며 어떤 면은 유교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투 운동은 그렇다면 온전히 서구적일까? ‘여성의 인권이 중요하다.’라든가 ‘여성들도 목소리를 낼 수 있다.’라는 생각이 서구에서 흘러 들어왔다고 해도, 구체적으로 어떤 단체에서, 어떤 공동체에서 여성에 대해 폭력적이고 불의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했을 때, 그것을 고발하고 문제제기하는 것을 어떻게 ‘한국적이다’ 또는 ‘유교적이다’, 혹은 ‘서구적이다’ 하고 구분할 수 있겠는가! 한국 여성들이 이 땅에서 복잡하고 다양하게 겪고 있는 경험이란 한국 여성들의 고유한 경험이지 않겠는가.
역설적이게도, 저자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144쪽) 서구가 자신이 보고 싶은 모습을 마음대로 보면서 비서구 지역의 사람들과 여성들을 대상화하고 타자화했다고 비판하지만, 정작 한국인에게는 ‘유교’가 그 근본 사상이고 현실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오리엔탈리즘을 스스로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후반부에 있는 “한국 복음주의 페미니즘은 어디로?”라는 소제목의 글에서는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받아들인 기독교 페미니즘이 “진보 정치에 가담하는 것으로 기독교를 대변하려 하면서 진보와 합세해 보수 교회를 욕하는 양상입니다.”라고 묘사하거나, 이들이 “유교 사회의 특성상 남편을 두지 않고는 남자들에게 인정받기가 힘들고 그래서 자신도 그 규범 안에서 사는데 그렇다고 그런 현실을 내놓고 인정하면 페미니즘 이념에 어긋나니까 여성들의 실제적인 문제는 덮어 두고 남자들처럼 구호만 외치기 때문입니다.”(309쪽)라고 분석하면서, 기독교 페미니즘을 일반화하여 비판하는 글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종교학과 여성학 전공자가 학제간 다른 분야를 객관적으로 균형감 있게 소개하고 있음을 암시하지만, 실상 안으로 들어가 보면 저자 자신이 위치해 있는 ‘한국 복음주의 페미니즘’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문적 학문의 자료를 출처로 표시하지 않은 내용이 많으며, 따라서 종교학이나 여성학 전공자가 학문 자료로 사용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글이다. 오히려 복음주의 입장에서 왜 페미니즘이 종교로 들어오면 안 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에, 복음주의 입장에서 ‘부정적으로’ 페미니즘을 알아가기 위한 안내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최순양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드류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표 논문으로는 “스피박의 서발턴(하위주체)의 관점에서 바라본 아시아 여성신학과 민중신학적 담론에 대한 문제 제기”(「신학논단」 72권,
2013)가 있다. 협성대학교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고, 이화여대 대학교회에서 청년부 담당 목사로 일하고 있다.

 
 
 

2020년 10월호(통권 7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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