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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당 (2020년 8월호)

 

  선교? 아니면 평화? 무엇이 중요한가
  리처드 플레처, 박흥식・구자섭 옮김의『십자가와 초승달, 천년의 공존』21세기북스, 2020

본문

 

– 전 세계에서 단일 종교로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는 종교는?
– 전 세계 나라 중 이슬람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는?
– 유럽의 최대 종교는 가톨릭이다. 그렇다면 유럽의 종교 중 그 신자 수가 3위인 종교는?
– 전 세계에서 이슬람 인구 비율이 가장 낮은 국가는?


지난 몇 년간 필자는 재직 중인 대학의 교양학부에서 ‘세계 종교’라는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종교의 역사, 이론, 문화 등을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데, 이슬람에 관한 강의를 시작하기 전 학생들에게 위와 같은 유형의 질문을 열 개가량 한다. 질문의 의도를 눈치챘더라도 제대로 된 답을 하는 학생은 극소수이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전에 위 질문들에 대한 답을 먼저 살펴보자.
현재 이슬람 인구는 19억 명을 넘어서고 있다. 단일 종교로는 세계 최대의 종교이다. 물론 가톨릭과 개신교 인구를 합하면 이것보다 조금 많지만, 이제 개신교와 가톨릭은 같은 종교로 취급하기 어렵다. 500년 이상 헤어져 독자적으로 발전한 데다가 개신교인의 70%는 가톨릭이 자신들의 종교와 같다고 인식하지 않는다. 심지어 가톨릭을 이단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이슬람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는 어디일까? 대부분의 학생들은 사우디아라비아를 꼽는다.(아마 독자들 중에도 이렇게 대답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우디는 무함마드의 출생지이자 메카와 메디나 같은 성지를 갖고 있긴 하지만, 사실 이슬람 역사에서 중심 국가가 된 적은 없다.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인도네시아이다. 인도네시아 전체 인구 2억 7,000만 중에서 2억 5,000만이 이슬람을 신봉한다. 그리고 전 세계 이슬람 인구의 70%가 중동이 아닌 아시아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학생들은 놀라기 시작한다.
유럽에서 제3의 종교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거의 모든 학생은 눈치상 이슬람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정답은 ‘개신교’이다. 이 사실을 듣는 순간, 특히 신학대학생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실제로 현재 유럽에서 이슬람은 제2의 종교이며, 개신교는 3위가 되었다.
마지막 질문, 이슬람 인구 비율이 가장 낮은 나라는 우리 대한민국이다. 여기에 더해 사우디 국왕 전용기 겉면에 “God Bless You”라고 쓰여 있다거나, 말레이시아 성서에 하나님이 “알라”로 번역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학생들의 어리둥절함은 극에 달한다.
15세기에 활동한 대학자 주앙 데 세고비아(Juan de Segovia)와 니콜라우스 폰 쿠사(Nikolaus von Kues)는 당시까지 서유럽이 갖고 있던 이슬람에 대한 무지를 절감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슬람 신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꾸란을 서유럽 4개 언어로 번역하고 『대립물의 통합』, 『무지의 지』 등의 저작을 통해 이슬람을 넌지시 받아들인다. 추측건대 그들은 신심과 종교적 헌신의 차이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천 년 동안 이웃에 있던 이들에 대한 합리적 이해는 타자를 대하는 기본적 태도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일 것 같다.
“비난하고 미워하더라도 알고나 하자.” 만약 위의 두 사람이 환생한다면, 이슬람에 대한 최근 우리 사회의 태도를 이와 같이 말했을 것 같다. 글 서두에 언급한 질문에 정답은커녕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슬람’ 하면 테러, 폭력, 여성 학대, 타종교 핍박, 전쟁광, 잔인함, 오일머니 졸부근성 등을 떠올리며 엄청난 편견, 고정관념, 부정적 의식을 내비치는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중동과 이슬람은 절대로 동치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중동에서 사건 하나만 터지면 차마 읽을 수 없는 폭력적 댓글 공격이 이슬람을 향한다. 예멘 난민을 추방해야 한다는 청원에 70만 명이 서명하고, 할랄식품 특성화지역 지정에 피켓을 들고 반대시위를 한다. 이슬람교도들이 들어오면 범죄가 증가한다는 둥, 마을이 지저분해진다는 둥, 게을러서 국가 세금만 축낼 것이라는 둥 이슬람에 대한 대다수 한국 사람들의 인식은 ‘위험하고 야만스러운 종교’로 각인되어 있다.
왜 우리는 이러한 편견을 갖게 되었을까? 성지순례를 위해 이스라엘과 요르단을 방문해본 사람들은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수천 년을 살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향에서 4m의 거대한 벽에 갇혀 지낸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는 채 살고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성지와 같은 예수의 탄생지 베들레헴 전체가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안에 사람들이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왜?’라는 질문이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 감금되어 사는 사람들의 소식을 우리가 듣지 못하는 이유도 묻게 된다.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우리는 지난 100여 년간 감금된 자들이 보내는 소식은 듣지 못한 채, 감금시킨 자들이 보내는 소식만 듣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슬람에 대한 정보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한 통신사, 언론사, 잡지사 등을 유대인이 오래전부터 장악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슬람에 대한 필자의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 이번에 읽은 이 책은 꽤 괜찮았다. 에드워드 사이즈의 『오리엔탈리즘』을 제외하고 중동에 관한 책들은 대부분 재미있으며, 이 책도 예외는 아니었다. 재미있다는 것 외에 또 다른 장점은 쉽고 간결하다는 점이다. 독서의 속도가 빠른 사람이라면 휴일 하루면 충분히 완독할 수 있다. 간략하게 책의 내용을 검토해보자.
이 책의 제목은 『십자가와 초승달, 천년의 공존: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극적인 초기 교류사』이다. 우선 제목에 대해 딴지부터 걸면, ‘공존’이라는 표현도, ‘천년’이라는 기간도 애매하다. 사실상 ‘공존’이라는 단어보다는 ‘지배’라는 말이 더 현실에 맞다. 그리고 필자의 시각으로는, 이슬람 세계가 기독교 세계를 지배한 약 1,000년의 시기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집트를 정벌한 이후에 서유럽이 아랍 세계를 지배한 약 300년의 시기로 나누어야 한다. 이슬람 천년 지배가 불평등한 공존의 시대였다면, 서유럽의 지배(‘기독교의 지배’라고 하고 싶지 않음)는 일방적 수탈과 협잡의 시대였다. 물론 서유럽 중심부는 지배받은 적이 없다.
이 책은 총 5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이슬람 형성 전과 그 직후의 역사를 다룬다.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7세기 이슬람이 탄생하기 이전에 시리아–메소포타미아–팔레스타인 지역은 어떤 상태였고 그곳의 종교적 지도는 어떠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또한 아랍인들은 누구이며 아랍어와 아람어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의 단초도 설명하고 있다. 그토록 신비스럽던 기독교의 신비신학자이자 성상론자였던 다마스커스의 요한의 이름이 원래 아랍인 3세 만수르였다는 사실을 읽고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이 부분에는 재미있는 역사적 사실이 서술되어 있다. 이슬람은 처음부터 같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성서의 백성’이라고 부르며 절대 탄압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언급한 ‘성서의 백성’은 단적으로 말해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슬람은 유대교인들에게 더 마음이 갔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삼위일체를 주장하며 유일신 사상을 거부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의 순간순간마다 이슬람은 단성론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의 해방자 역할을 한다. 지금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과 아랍의 핵심인 시리아를 대하는 비인권적이고 무자비한 태도를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초기 이슬람제국 시대에 이슬람들과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협력하고 살았는지를 서술한다. 그리고 이슬람 세계에서 기독교 세계로 흘러 들어간 수많은 지적 유산과 문물을 소개한다. 이 부분 역시 기독교인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기독교가 소아시아로 전파된 1세기 이후 제국의 종교가 되기까지 300년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서유럽 전체를 기독교화하기까지는 천년의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이슬람제국은 불과 100여 년 만에 기독교 세계를 이슬람 세계로 거의 다 바꾸어놓았다. 기독교 공국들이 강압이나 위협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앞다투어 이슬람으로 국가적 개종을 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13세기에 활동했던 우리의 영웅 토마스 아퀴나스의 표현처럼 ‘한 손에 꾸란, 한 손엔 칼’이었을까? 세상 좀 살아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금방 알 것이다. 386세대가 그동안 외적으로 침묵했어도 결코 자신들의 민주화 경험을 버리지 않았고, 50-60대가 된 지금 그 신념이 선거에서 표로 드러나는 것만으로도 잘 알 수 있다. 신념은 수천 년 지속되어도 권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는 법,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2부에 잘 서술되어 있다.
3부에서는 셀주크투르크와 십자군의 이야기가 주제로 등장한다. 간혹 이슬람, 사라센, 셀주크투르크, 오스만투르크 등의 용어에 대하여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 이 부분에서는 우리의 혼동을 정리해주고 있다. 그리고 오합지졸 십자군이 어떻게 에뎃사, 안디옥, 트리폴리, 예루살렘까지 진격했는지 설명해주고 있다. 한마디로 당시 셀주크투르크는 내전에 분주했을 뿐 아니라 십자군 침략을 변경의 사소한 조폭싸움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문제는 십자군으로 인하여 이제까지 이슬람제국이 우호적으로 대했던 제국 내 기독교인들과 비잔틴제국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결국 서유럽의 기독교 오합지졸이 성지를 회복한답시고 준동한 사건은 정통 로마-기독교 제국의 멸망을 초래하게 된다. 이것이 현재 소아시아, 팔레스타인, 메소포타미아,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기독교가 소멸된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4부는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교류에 의한 금자탑과 같은 열매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신학이나 중세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익숙한 이름들, 곧 이븐 시나, 모세 마이모니데스, 이븐 바투타, 토마스 아퀴나스, 이븐 루시드, 성 도미니코 등이 4부에서 대거 등장한다. 신학, 의학 등의 금자탑들도 간략하게 소개된다. 신학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모세 마이모니데스,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의 유사성을 금방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5부는 별로 읽을 것이 없다. 실제로 읽을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저자의 말대로 또 다른 책 한 권 분량의 서술이 필요하다. 신의 말씀은 정결한 몸과 마음으로 쓰고, 읽고, 외우고, 낭송한다는 이슬람의 고집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계로, 대량으로 찍어내는 기술을 용납할 수 없었다. 오죽했으면 인쇄술을 습득하는 자들을 사형시켰을까? 여기에 이슬람 세계의 결정적 패착이 있다. 미개한 서유럽의 게르만인들과 어둑한 그 땅은 정복할 가치도, 지배할 가치도 없다고 느낀 이슬람제국의 무관심 속에 서유럽은 과학적 발전을 지속할 수 있었다.
글을 마치면서 독자들에게 언급해둘 점은, 이 책만으로는 현재 한국 사회의 이슬람 포비아(공포증)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했다시피 이 책은 ‘초기 역사’만을 다루고 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벌 이후 30cm짜리 자(尺)를 들이대고 중동의 영토에 색연필로 금을 그어 국가를 강제로 분할하고 독립시킨 서유럽의 횡포, 죽어버린 제국 오스만투르크의 썩은 시체를 먹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라는 좀비들이 취한 속임수와 모략, 그리고 2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원유탈취 사건들, 조지 부시의 이라크 주유소 습격사건(OPEC), 트럼프의 쿠르트족 배신 등에 관해서는 다른 책을 읽어야만 한다. 그 역사는 기독교인인 우리가 기독교 전통 속의 수많은 덕목과 수행을 뒤로하고 선교가 최고의 덕목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선교라는 미명하에 이슬람제국은 지난 300년간 철저하게 유린당했고, 협잡의 희생이 되었고, 수많은 학살이 지속되었다. 이것은 기독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솔직히 이 책은 너무 중립적이다. 아니 중립을 유지하려고 무척 노력한 흔적이–번역자인지 저자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버나드 루이스나 에드워드 사이드처럼 좀 더 편향적이었으면 좋겠다. 이젠 그래도 될 것 같다. 세계의 선진국이 된 작금의 대한민국, 57개국이 국교로 삼으며 19억 인구가 믿는 이슬람 세계를 경멸하면서 세계의 지도자급 국가라고 국수주의(소위 ‘국뽕’)에 취해 있을 수는 없다. 지도자급 국가는커녕 수출중심국 유지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교회가 선교 포화 상태의 지구촌에서 이슬람 선교 및 협력 없이 한국 기독교만의 생존이 가능할지 스스로 묻게 된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답답한 서식 생활을 하고 있는 이때, 더위를 잠시 잊을 수 있는 책을 추천하라면 이 책이 딱이다. 일독의 가치가 있다. 마지막으로 쿠란의 한 구절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 성서의 백성들[유대교+기독교]을 존중하고, 논쟁하지 말고, 좋은 방법으로 인도하라.(꾸란 29:46)


이충범 | 드루대학교에서 중세 신비주의 연구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저서로 『중세 신비주의와 여성』, 『중세여성 현대영성』, 『노래로 듣는 설교』 등이 있다. 현재 협성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0년 8월호(통권 7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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