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책마당 > [책마당]
책마당 (2020년 1월호)

 

  저항으로서의 성서비평, 끝나지 않는 독서
  R. S. 수기르타라자, 양권석・이해청 옮김 『탈식민주의 성서비평』 분도출판사, 2019

본문

 

‘탈식민주의’는 우리 학계에서 더 이상 낯선 담론이 아니다. 일반 문학비평과 문화이론에서 활발히 소개된 것은 물론이고, 신학계에서도 이미 1996년 제25차 한국기독교학회의 주제로 논의되었을 정도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성서학 분야로 좁혀서 보아도, 신구약 성서 본문에 대해 탈식민주의 해석을 시도한 논문은 드물지 않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분야에서 일반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단행본은 사실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탈식민주의 성서비평을 주도하는 대표적 학자 수기르타라자의 개론서가 최근 번역 출간된 것은 역자들이 언급했듯 ‘때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반가운 일이다. 수기르타라자의 제자인 양권석 교수와 그 제자인 소장학자 이해청이 함께 번역한 것도 눈에 띈다. 수기르타라자의 또 다른 제자인 박흥순의 책 『포스트콜로니얼 성서해석』과 함께, 이 번역서가 국내의 많은 독자들을 만나 우리의 상황에서 탈식민주의 성서 해석에 대한 많은 관심과 토론을 일으키기를 기대한다.
이 책의 5장까지는 탈식민주의와 성서 연구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검토하였다. 탈식민주의 담론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시작으로 대두하였다. 탈식민주의 성서비평은 그 자장 안에서 성서가 식민주의적 지배의 의도로 사용될 수 있다는 진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세상 끝이 이르기 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기독교적 사명,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개념, (남성) 유일신에 대한 신앙은 정복과 약탈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영토적 제국주의가 ‘공식적인’ 의미에서 쇠퇴했다고 해서 탈식민주의의 과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정신의 탈식민화’라는 과제는 아직도 유효하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시대에 시장의 통제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정치구조하에서 탈식민적 조건은 오히려 확장되고 다변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식민주의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도덕적 비판의 이데올로기적인 개입은 민족, 인종, 젠더, 계급 등의 차원으로 확장되고 있다. 그래서 현대의 탈식민주의는 “어떤 한 문화가 다른 문화에 대한 우월을 주장하는 곳”, 다시 말해 차이가 차별이 되는 모든 곳에서 패권적인 담론을 비판하고 수정하는 과제를 행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이제껏 표준적인 것으로 여겨진 성서비평 전체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지난 세기 성서에 대한 문학비평과 사회과학비평이 대두하면서 주류 역사비평에 대한 극복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고 그 점에서 탈식민주의로 가는 길이 놓였음을 인정하면서도, 저자는 그 안에서 끈질기게 지속되는 ‘타자화’를 비판한다. 사회학적 비평 가운데 ‘명예와 수치’를 비롯해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지중해 세계에 대한 인류학적 서술에도 “확신에 찬 일반화”가 만연해 있다는 고발은 성서 해석자가 오리엔탈리스트가 되어 식민주의를 재탕하지 않으려면 얼마나 민감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특히 우리가 당연하게 성서의 무대라고 여기고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성서학의 재구성이 그 지역에 있는 다양한 주민들의 역사를 침묵시키면서, 현대 이스라엘 국가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왜곡된 ‘재현’이 될 수 있다는 비판은 신랄하고 뼈아프다. 키스 휘틀럼의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도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을 볼 때, 이런 비판은 정당하며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저자는 식민주의 절정기에도 탈식민주의의 계기들은 있었다고 지적한다. 독일의 인도학자 막스 뮐러가 주도해서 편찬에 참여했던 『동방성전』과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의회(World’s Parliament of Religions)는 19세기 말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기독교가 세계의 다양한 종교들의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서 저자는 기독교가 번성했던 서구 유럽의 렌즈를 통해 고대 근동 세계를 이해해온 성서학을 ‘동양학’으로 다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와 같은 이론적 비판 작업 후에 저자는 6장에서 탈식민주의 성서비평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대위법적 읽기’, ‘말년의 양식’, ‘재현의 수사학 비판’을 제시한다. 그중에서도 대위법적 읽기는 우리가 다루는 텍스트를 단선율로만, 다시 말해 제국주의자들의 역사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사이드의 제안에서 온 것이다. 성서 본문 역시, 고대 제국주의자들의 관점과 지배받는 자들의 역사가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다성부 음악을 감상하듯 독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저자는 앞서 주장한 대로 ‘동양학’의 관점에서 복음서의 예수 탄생 이야기를 붓다의 탄생을 묘사하는 불교 전통과 나란히 읽는 독서를 대위법적 읽기의 실례로 든다. 이런 독해 방식은 하나의 텍스트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드러내면서 각각의 텍스트가 지닌 생명력도 보존하는 방식으로서 유의미하다.
한편, 앞에서 보여준 박력 넘치는 이론적 비판이 구체적으로 성서 해석의 실천을 논의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그 힘을 잃고 빈약해진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이러한 느낌은 저자가 편집자이자 해석자로서 주도해온 탈식민주의적 주석 작업이 이후에 더 많이 소개된다면 해소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혹시 이러한 한계가 탈식민주의를 적극적으로 표방하지는 않지만 지배와 권력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비판 작업을 수행해온 다른 연구자들의 관찰을 탈식민주의 성서비평 안으로 수용하기보다는 거리를 두려하는 저자의 경향 때문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저자는 성서의 해방적 역할을 강조해온 전통에 대해서도 “식민주의의 하나님을 탈식민주의의 하나님으로 대체해 버릴 위험성” 때문에 경계한다. 해방신학이 강조하는 일부 본문과 전승이 해방적이라 해서 성서 전체가 저항의 문서가 될 수는 없다. 저자도 지적했듯이 “어떤 사안에 대해 성서가 해방적 경향을 띨 수 있지만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지배적 규범을 긍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탈식민주의 비평은 성서가 “이론의 여지가 있으며 애매모호한 책”임을 인정하면서 “언제나 경계하고 날카롭게 인식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성서가 지배를 강화하는 원천이 되는 것을 경계하는 일이 반드시 성서의 해방성을 해체하는 방식으로만 가야 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또한 3장에서 최근의 탈식민주의 성서 연구 동향을 정리한 랠프 브로드벤트에 따르면, 수기르타라자는 크로산과 호슬리를 비롯한 최근 학자들의 연구를 반역사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그리스도 이미지를 정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점에 환영하면서도, 동양의 종교적 사고가 예수의 삶과 사상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은 침묵하고 삭제했다는 점에서 비판한다.
그런데 저자가 비판하고 있는 최근의 새로운 연구들은 브루스 멀리나 혹은 존 필치의 정태적인 인류학적 서술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가령 리처드 호슬리는 브로드벤트가 지적한 것처럼 “해방신학의 제1세계 유형”으로서 일부 신약성서의 문서를 제국에 저항하는 식민지 백성들의 목소리로 재건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호슬리는 예수의 이야기를, 한편으로는 로마제국과 그 통치를 팔레스타인 땅에서 대행했던 토착 지도자들에 대한 묘사와, 다른 한편으로는 동시대 피식민 백성들의 다양한 저항운동들에 대한 기록과 나란히 대위법적으로 읽는다.
반면 수기르타라자는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이 억압적인 제국 아래서 살았으나 예수가 공개적으로 로마 권력에 도전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가 한 말로 종종 인용되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라는 말은 너무나 불가사의해서 판독할 수 없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호슬리에 따르면, 지배와 권력에 맞서는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의 저항은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이것을 규명하기 위해서 역사상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는 여러 위계 체계 속에서 하위 주체들이 권력에 저항하는 다양한 형태들을 인식하는 차원에서 정치학자 제임스 스코트의 논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스코트에 따르면, 권력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하위 주체들은 ‘가면’을 쓴 채로 은밀하게, 힘 있는 자들이 단박에 알아채 억누르지 못하도록 ‘애매모호한’ 방식으로도 저항한다.
탈식민주의 성서비평이 이론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책임을 강조하는 비평이라면 현실에서 하위 주체들의 저항이 띨 수 있는 다채로운 형식에 대한 고찰도 무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점에서 탈식민주의 성서비평이 문화적인 차원에서 동서양 경전의 대화나 언어적 비판에 머물지 말고 정치적 차원에도 민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된다면 브로드벤트의 말처럼 호슬리의 연구가 탈식민주의의 선구적인 작업으로 재평가되고, 탈식민주의 성서비평의 맥락 안에 자리매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것은 탈식민주의 성서비평을 더 풍요롭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상의 제안은 사실 탈식민주의 성서비평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잠재력을 인정하기 때문에 한 것이다. 탈식민주의 성서비평은 “불평등한 문화적 상황과 왜곡된 재현에 대항할 줄 아는 분노”를 가지고 전체주의적인 서구 신학의 주류 경향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활력을 넣는 기여를 성서학계에 충분히 해왔다. 앞에서 탈식민주의 담론이 국내에 많이 소개되었다고 했지만, 가야트리 스피박이나 호미 바바와 같은 대표적인 이론가들의 글은 난해한 것으로 악명 높았다. 수기르타라자도 이 책에서 이들이 ‘이론적이면서 가독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탈식민주의의 이론적 배경을 설명하고 기존의 성서비평을 탈식민주의 해석학으로 비판하면서 구체적인 성서 해석의 실례까지 담은 개론서가 번역 출간된 것을 다시 한 번 환영한다. 탈식민주의 성서비평을 통해 성서를 새로운 눈으로 보고 싶은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정혜진 | 이화여대에서 신약성서학을 전공하였다. 공저로 『한국적 작은 교회론』, 역서로 『여성들을 위한 성서 주석』(구약편/신약편) 등이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기독여민회 연구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2019년 1월호(통권 733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