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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당 (2019년 6월호)

 

  문학과 종교의 창조적 긴장
  발터 옌스·한스 큉의 『문학과 종교』 김주연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9

본문

 

1
종교와 문학은 본래 한 뿌리에서 나왔다. 고대의 제천의식이나 무가가 그 증거이다. 고대 세계에서 미분화되었던 삶의 형식이 차츰 분화되면서 종교와 문학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론 경쟁하면서 발전해왔다. 종교는 거룩하고 영원한 것과의 교통 혹은 합일을 지향하는 인간 본성을 밑절미로 삼는다. 그러나 종교 체험은 비상한 체험에 속하기에 지속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카리스마의 범속화 혹은 제도화는 피할 수 없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탄생한 교권이 억압적이기 쉽다는 것이다.
문학은 교권적 질서에 담기지 않는 인간의 경험이나 욕구를 드러낸다. 문학은 기존 질서를 뒤흔든다.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세계에 의문 부호를 붙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그런 의미에서 우상 파괴적이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답을 제시하려 하지만, 문학은 거듭되는 질문을 통해 진리에 접근하려 한다. 종교는 단순화함으로 삶의 지향을 제시하려 하지만, 문학은 복잡화함으로 현실의 다층성을 드러내려 한다. 문학은 정답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문학과 종교』에서 신학자인 한스 큉과 고전 문헌학자인 동시에 문학가인 발터 옌스는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이 벌어지고 계몽주의가 대두되면서 시작된 근대가 제1차 세계대전과 더불어 종언을 고했다는 대전제하에, 한 시대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던 귀감적인 작가들 여덟 명을 통해 문학과 종교의 관계를 살펴본다. 두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책의 저술 취지를 이렇게 밝힌다. “모호성, 양면성, 불화스러운 일치, 상호 조명, 변증법이 하늘과 땅 사이에 (때로는 지옥마저 앞에 나타나며) 뻗어 있는 터인즉, 긴장스럽고도 두려운 이 관계, 문학에나 종교에나 마찬가지로 종요로운, 일부는 경건하고 일부는 도발적이며 때로는 실로 충격적인 성격이 있는 이 관계를 열여섯 편 논술로 해석하고자 합니다.”(7쪽, 이하 쪽수만 표시) 두 사람은 “절대자와 대면한 인간”(410)의 모습을 예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지난 300년 동안 인류의 정신사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밝히려 한다.
근대는 망원경과 현미경의 발명, 신대륙의 발견과 더불어 시작됐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산업사회가 열렸다. 세상은 급속도로 세속화되었다. 이전에 절대군주와 긴밀히 연결되어 권력을 누리던 교회가 왕좌의 지위에서 좌천된 것이다. 세속화가 진전되면서 교회로부터 독립적인 지적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종교는 폐위된 것인가? 두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근대 세계의 급격한 변화가 세속화를 초래한 것은 맞지만 인간의 영적인 갈망이 스러질 수는 없었다. 한스 큉과 발터 옌스가 다루고 있는 파스칼, 그리피우스, 레싱, 횔덜린, 노발리스, 키르케고르, 도스토옙스키, 카프카는 모두 자기 시대를 가장 예민한 촉수로 더듬으면서 초월적 전망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2
파스칼은 객관적 진리와 내면적인 확실성을 중시한 사람이지만 합리주의화된 근대가 결핍한 것이 ‘가슴’임을 직관했다. 무한함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유한함을 뚜렷이 자각했기에 그는 신앙의 모험을 감행할 수 있었다. 비록 그가 신과 인간의 수직 관계에 집중하기 위해 ‘나와 세계’, ‘나와 너’의 수평 관계를 소홀히 한 측면은 있지만, 그는 적어도 종교가 폐기되어야 할 쓰레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안드레아스 그리피우스의 삶은 30년전쟁에 의해 처절하게 찢겼다. 전쟁, 방화, 흑사병, 살인, 근친의 상실은 신앙의 위기를 초래했다. 신이 얼굴을 감추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참담한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순성에 주목한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밤과 어둠과 죄지음과 무덤의 밤을 한데 섞고 그것을 통해 무력화시킴으로써 그것들을 지양”(95)시키는 존재이다. 한스 큉은 그를 “온갖 동요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부동성을 보여주었음, 온갖 반동에도 불구하고 그의 하느님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를 잃지 않은 항심(恒心)의 바위”(72)라고 평가했다.
레싱은 삶에 대한 희망과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신뢰의 분위기가 지배적이던 계몽주의 시대에 살면서도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전통과 도그마에 기대지 않았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올바른 실행에서 입증된다고 본 것이다. 그가 형상화한 인물 나탄은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모범이다. “그는 머리와 가슴을 지닌 인간이다. 고난으로 시험받고, 투쟁하며, 자기 의지를 이성으로 하느님의 의지와 일치시킬 수 있고 올바로 숙고하는 지식으로부터 벗어나 몰아적인 상태에서 타인에 대해 행동할 수 있는 자가 나탄이다.”(119)
횔덜린은 후기 정통파의 독단주의와 도덕주의의 강박적 사고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생명력이 고갈되어버린 종교에 염증을 느낀 그는 밝고 행복한 신들의 정신과 자연의 경건성을 명랑하게 긍정하는 그리스 고대문화에 주목했다. 발터 옌스는 이것을 “도그마적 유일사상에 맞서 우주의 살아 있는 다면성을 신성의 빛남과 되비침으로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의 그리스화”(184)라는 말로 요약했다. 횔덜린은 프랑스 혁명 이후 복고주의적 신앙이 대두되던 때에 범재신론적 입장으로 선회했고, 숨결처럼 세계 안에 머물고 있는 신성과 신에 대한 믿음이 가능함을 증언하려 했다.
노발리스는 계몽주의 시대와 초기 낭만주의 사이에서 흔들리던 영혼이었다. 그는 절대영주와 성직자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인간의 해방을 지향한다는 측면에서 계몽주의에 속하지만, 인간의 의식 너머의 세상에 주목한다는 측면에서는 낭만주의자였다. 사랑하던 소피와 남동생 에라스무스의 죽음으로 인해 깊은 고독과 상실감을 느끼던 그를 구한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초지상적인 평화를 지향했다. 무한을 향한 동경, 파란 꽃을 향한 동경(227)을 품고 살던 그는 서른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쇠렌 키르케고르는 인식의 문제보다는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품고 살았다. “나의 사명을 이해하는 것, 도대체 하느님은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나에게 진리가 되는 진리를 발견하는 것, 내가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위해 죽고자 하는 그 이념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소위 객관적인 진리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 설사 내가 철학들의 체계를 샅샅이 연구하여 사람들이 요구할 때 그 체계들을 질서정연하게 제시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263-264) 그에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동시대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종교적 역설 속에서 실현되는 초월성을 탐구함으로 자기 시대의 문학을 앞섰다.
도스토옙스키는 거대한 근대적 전망이 환상에 지나지 않음이 드러나던 때(310), 시민적·봉건적 세계가 전쟁이라는 파국에 빠져들 수밖에 없음이 드러날 때 활동했다. 무신론이 급속히 확산되고, 가치관이 붕괴하던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민중으로부터 경원시되는 기생충 같은 귀족층, 반동적인 교회, 근대화된 서구적 지식계급, 신앙심과 함께 선과 악의 판단 기준마저 내팽개친 학생들, 끝으로 무엇에 의지할지 알지 못한 채 방향을 잃은 가난한 민중들”(322)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품어 안는 러시아적 영성을 통해 유럽이 직면한 모순을 극복하려 했다.
카프카는 근대적 파라디그마가 봉착한 문제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했다. 그에게 세계는 늘 저만치에 있는 성과 같았다. 엄청나게 크고, 접근할 수도, 뚫고 들어갈 수도 없는 세계 말이다. 카프카는 “실증적이고 과학적이며 관료적인 세계, 가시적인 것, 만질 수 있는 것, 계산할 수 있는 것만이 최후의 유일한 진실로 간주되는 세계”(376)에서 초월성을 지향한다. 성과 마을 사이에 머물 수밖에 없는 존재, 찢긴 존재이지만 성에 당도하리라는 꿈을 포기할 수 없는 존재의 흔들림을 그는 치열하게 드러냈다.
한스 큉은 여덟 명의 작가들에 대한 글을 마무리하면서 이들을 ‘예언자’라고 과감하게 명명한다. 이들의 외침을 외면한 결과가 아우슈비츠이다. 그에게 종교는 폐기되어야 할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의 세계에서도 빛을 발하는 희망이어야 한다. 종교는 원자화된 근대사회에서 흔들리는 영혼들에게 정신적 고향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전체주의적 체제의 강요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여덟 명의 작가들은 종교와 문학이 오월동주의 관계가 아니라 창조적 긴장을 통해 부조화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좋은 파트너임을 보여주고 있다.

3
이 책은 신학자와 문학가의 협업이 얼마나 풍요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어갈 수 있는지를 모범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작가들의 문체적 특색을 분석한 발터 옌스의 글은 독자들로 하여금 복잡하고 미묘한 이들 작가의 문학세계에 틈입할 수 있는 좋은 통로가 된다. 예컨대 독자를 혼란과 불확실성 속에 빠뜨리는 파스칼의 문체는 독자를 편안하게 내버려 두지 않고 인식의 불안 속으로 밀어 넣기 위해 선택한 문체(49)이다. 디테일에 집중하는 횔덜린의 문체는 “고상한 문체와 비속한 문체, 고귀한 것과 조야한 것, 그뤼네발트식의 파토스적 정열과 뒤러식의 꼼꼼한 사이의 경계를 고통 없이 무시해버리는 리얼리즘을 따라다녔다.”(201)라고 말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는 게 좋겠다. 그는 ‘현자 나탄’의 유명한 우화의 전주곡을 이루는 독백 시구를 분석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흠! 흠!’부터 ‘올 뿐이다’ 사이에 21개의 줄표가 보인다. 결정을 할 때가 되면 레싱은 먼저 서두르지 않고 오히려 느긋해지고, 곰곰이 생각해보고, 그만두었다가 새로 시작하고, 질문을 던지고, 이의를 제기하고, 상대방을 유희에 끌어들이고, 대안을 전개하고, 그 대안에 원래의 생각을 변증법적으로 실습시키고 한다.(133)

종교와 문학은 상호 수혈이 필요하다. 문학은 절대의 세계에 머무르려 하는 종교에 전복적 상상력과 우상 파괴의 정신을 제공할 수 있고, 종교는 사소한 것에 빠지기 쉬운 문학에 깊이와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 문학이 삶에 대해 던지는 질문에 신학이 창조적으로 응답할 때 신학의 언어는 한결 풍부해질 것이다. 신학자와 문학가의 대화와 협업이 일상이 될 때 근대 이후 시대의 어둠의 실체가 더욱 뚜렷이 드러날 것이고, 모든 가치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자본주의의 지배력 또한 약화될 것이다.


김기석 | 감리교신학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청파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으며, 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2019년 7월호(통권 7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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