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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당 (2019년 2월호)

 

  믿음은 평생의 과업이다
  메럴드 웨스트팔의 『키르케고르: 신앙의 개념』 이명곤 옮김, 홍성사, 2018

본문

 

기독교 세계에 기독교 새로 소개하기

키르케고르는 파토스를 철학의 주제로 부각시킨 현대 철학의 선구자이다. 그는 철학의 주제를 이성 중심의 로고스에서 인간의 정서와 의지의 역할을 강조하는 파토스로 전환시켰다. 당시에 철학은 위기를 맞았고, 형이상학은 종언을 고했다. 철학은 사변적 논리체계로 흘러갔으며, 삶을 해석하고 풍요롭게 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이다. 실존의 변화를 보여주지 못하고, 진리에 대한 정열이나 희열을 맛보지 못하고, 기복적인 신앙에 머무른다면 그런 기독교는 허구이거나 변질되고 왜곡된 것이다.
“논리의 체계는 있어도 실존의 체계는 있을 수 없다.”라는 키르케고르의 말은 실존주의의 시작을 알렸다. 삶은 앎보다 앞선다. 실존은 논리보다 더 크다. 키르케고르는 루터파 신학자로서 믿음과 행함, 은혜와 삶의 문제를 주제로 다룬다. 칭의의 구원은 신앙의 출발점이지 종착역이 아니다. 루터와 달리 키르케고르는 성서 가운데 야고보서를 가장 사랑했다. 그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 2:18)고 보았고,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고전 8:1)고 생각했다.
기독교 실존주의는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보는 데 머물지 않고, 따름의 대상으로 삼는다. 진리는 아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며, 진리는 지식이 아니라 양식이어야만 한다. 진리는 앎으로써가 아니라 삶으로써 배워야만 한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의 제자가 되어 고난과 자기부인을 겪는 것인데, 번영이나 성공을 가르치는 오늘날 기독교는 진리 추구의 본질인 고난이나 자기부인을 버리고 말았다. 본회퍼는 이것을 ‘값싼 은혜’라고 비판하고 키르케고르의 사상을 이어받아 예수를 믿음의 대상이자 따름의 대상으로 삼았다.
키르케고르의 모든 저술은 참된 인간이 되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 책의 저자 메럴드 웨스트팔(Merold Westphal)이 들어가는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키르케고르는 초기에 심미적 작품을 썼다가 후기에 종교적인 저술을 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기독교적 관점을 가진 사상가이다.(15-17쪽) 키르케고르는 ‘현대철학의 선구자’이며 ‘실존주의의 아버지’이자 ‘기독교 사상가’이다. 이 책은 기독교 사상가의 관점에서 키르케고르를 조망한다.
최근 출판계는 그를 기독교 사상가라는 관점에서 조명하기 시작했다. 2018년에 홍성사에서 『키르케고르: 신앙의 합리성』(토니 킴 저)과 『키르케고르: 신앙의 개념』을 출간했고, 샘솟는기쁨에서 『스스로 판단하라』(2017), 『자기 시험을 위하여』(2018), 『고난의 복음』(예정)을 출간하였거나 출간할 예정이다. 많은 사람들이 키르케고르의 저술을 어려워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그의 사상을 따라가다 보면, 참된 인간이 되는 길,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 영원한 행복에 도달하는 길을 반드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의 기독교 사상은 믿음의 보고(寶庫)이다. 쉽고 감동적이며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줄 뿐만 아니라, 삶의 변화를 일으킨다. 그의 사상은 기독교의 복음을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것으로 되살려 내는 힘이 있다.
이 책의 저자 웨스트팔은 현재 79세로 예일대와 뉴욕의 포드햄대의 교수를 지냈다. 그가 74세에 쓴 이 책은 원숙한 원로 학자로서 키르케고르 사상의 핵심을 조망해준다. 웨스트팔은 이 책에서 키르케고르가 세 개의 가명(假名)으로 쓴, 유명하고 많이 읽히는 다섯 권의 저술을 분석하고 소개하면서, ‘믿음은 ~이다’라는 열두 가지 관점으로 믿음의 본질을 규명한다. 또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라고 독자를 촉구한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처럼(골 3:12) 살라고 외치는 듯하다. 진리는 아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키르케고르의 다섯 권의 저술은 ‘요하네스 데 실렌티오’라는 가명으로 쓴 『공포와 전율』(1843),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라는 가명을 사용한 『철학적 단편』(1844)과 『철학적 단편에 부치는 비학문적 해설』(1846), 그리고 ‘안티 클리마쿠스’라는 가명으로 내놓은 『죽음에 이르는 병』(1849)과 『기독교적 실천』(1850)이다. 이 책은 키르케고르의 작품들을 심도 있게, ‘믿음’의 관점으로 꿰뚫어 본다는 점에서 탁월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요하네스 데 실렌티오, 믿음의 본질을 파악한 비그리스도인

『공포와 전율』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치는 내용(창 22장, 히 11장)을 다루면서 믿음의 본질을 규명하고 있다. 또한 딸을 죽인 입다와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 그리스의 아가멤논 왕의 경우와 아브라함의 경우가 어떻게 다른지를 제시하였다. 『공포와 전율』은 도덕과 종교의 본질적 차이를 논증한다. 아브라함의 순종에서 볼 수 있듯이, 믿음은 끊임없는 정열을 일으키며, 자기 부인을 가능하게 하며, 절대자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전적인 신뢰와 복종을 하게 하는 내면적이며 주체적인 힘이다.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은 결코 지루하거나 무료하지 않다. 왜냐하면 믿음은 평생의 과업이지 결코 이 땅에서 완성되는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믿음 생활이 무료하고 지루하며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다고 여기거나 진리에 대한 열정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아직 믿음에 들어서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성령의 불씨가 없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진리에 대한 사랑과 희열과 경탄(wonder)을 강조한다. 객관적인 정보, 완성된 교리에 머무른다면 이러한 희열과 경탄이 있을 수 없다.
저자는 『공포와 전율』에 나타난 믿음의 본질을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1) 믿음은 평생의 과업이다. (2)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전적인 신뢰이다. (3) 믿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다. (4) 믿음은 이성의 목적론적 중지이다. (5) 믿음은 최고의 정열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보라. 믿음은 결코 냉랭하고 차분한 감정이 아니라, 진리를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체념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선택하는 끊임없는 이중운동이다. 믿음의 본질은 역동적이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헌신과 정열이며 결단이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의 순례길을 떠난 사람의 자아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요하네스 클리마쿠스, 기독교의 본질을 간파한 젊고 논쟁적인 철학도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는 『철학적 단편』과 『철학적 단편에 부치는 비학문적 해설』에서 ‘진리는 주체성이다!’라는 주제를 인식론과 형이상학의 방법으로 다루었다. 주체성은 주관주의와 다르다. 주관주의는 객관성을 무시하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을 취한다. 소피스트의 궤변철학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주체성은 인격주의에 가깝다. 하나님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진리의 주체이시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객관적 정보를 배우고 머리로 이해하는 정도로는 안 되고, 믿음의 주체적 결단을 통하여 가능하다.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경구를 사용하여 국가교회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을 비판하면서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삶이야, 이 바보들아!”라고 외친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내면적인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면, 기독교는 계시적인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 계시적인 종교성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절대적 차이를 강조한다. 절대 역설인 예수의 성육신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든지, 실족하든지 모든 인간은 갈림길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쇠파리’였듯이, 키르케고르는 덴마크의 명목상의 국가 기독교를 괴롭히는 ‘코펜하겐의 쇠파리’를 자처했다.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는 소크라테스가 말한 상기설(recollection theory)이나 산파술로 대변되는 이성과 계시에 대한 믿음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논증했으며, 철학과 믿음은 환원 불가능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일체의 범신론(동일성의 철학)을 배제하고, 절대 역설(성육신)의 계시(차이성의 철학)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이다. 키르케고르는 성육신을 기독교의 본질을 바라보는 핵심으로 삼고 있다. 요하네스 클리마쿠스의 두 작품에서 말하는 믿음의 본질을 다섯 가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믿음은 계시의 수용이다. (2) 믿음은 죄를 넘어서는 행복한 정열이다. (3) 믿음은 객관적인 불확실성에 대한 열정적 수용이다. (4) 믿음은 도약과 분투이다. (5) 믿음은 이성에 대항하는 파토스적 노력이다.

안티 클리마쿠스, 영적으로 가장 수준 높고 이상적인 그리스도인

앞의 두 저자가 간접적이면서 철학적인 방법으로 기독교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논증했다면, 안티 클리마쿠스는 직접적으로 수준 높은 기독교를 제시하고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과 『기독교적 실천』은 가장 직접적으로 믿음의 본질을 말한다. 키르케고르는 외과 의사의 방식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밝힌다. 그 당시의 기독교는 단순히 약을 먹고 파스만 붙이는 간단한 처방이 아니라,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는 절망의 변증법을 보여준다. 절망은 단순히 우울이나 낙담과는 다르다. 절망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죽음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지독한 병이다. 절망은 하나님 앞에서 참된 자아로 존재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 이 절망을 치유하는 길은 믿음밖에 없다. 따라서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라 절망이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기도 하지만 영생으로 인도하는 복음이기도 하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언급하듯이 하나님은 ‘자아를 확립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 자기 자신과 바른 관계를 맺고, 타인과도 바른 관계를 맺게 된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했지만, 키르케고르는 “나는 믿는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절망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용기가 있어야 한다. 첫째는 죄인으로서 자신을 받아들일 겸손한 용기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용서라는 도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한 용기이다.(339쪽)
『기독교적 실천』에서 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와 동시성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역사적 정보를 습득한다고 그리스도와 동시성을 이루는 것이 결코 아니다. 객관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진리에 접근할 뿐, 결코 진리를 전유하지는 못한다. 절대 역설인 성육신의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한 사람을 사랑하여 그 사람과 동등하게 되려고 낮아지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때,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믿는 자와 동시성을 이룬다. 예수 당시의 사람도 믿지 않으면 예수를 모르는 것이고, 2000년 후의 우리라도 예수를 믿는다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동시성을 이루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은 예수에 대하여 똑같은 거리에 있다.” “동시성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기독교인이 아니다.” 오직 믿음, 시간 속에 오신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함으로써만 예수와 ‘동시성’을 이룬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아는 것은 역사 비평의 방법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주체적인 결단을 통해서 가능하다.
키르케고르는 많은 사람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라는 말씀을 오해한다고 지적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초대하신 것이 아니라 우선 비천함의 자리로 초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예수는 말씀하셨다. 예수의 초대는 안락한 생활로의 초대가 아니다. 진리를 따르고 좁은 길로 가는 초대이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가는 불편한 삶이 시작된다. 예수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셨다. 키르케고르는 고난을 통하여 영원을 사모하도록 하는 ‘고난의 복음’(Gospel of Sufferings)을 주장하며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을 계승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하지만, 번영의 신학은 ‘불가능은 없다.’고 신념처럼 외치게 한다. 번영의 신학, 성공의 신학, 영광의 신학은 영원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고난의 가치를 간과하여 복음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다.

나오는 말

대가답게 메럴드 웨스트팔은 말년에 키르케고르의 다섯 권의 책을 통하여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의 본질을 규명하며 믿음의 역동성과 정열을 우리에게 선물하고 있다. 평생 키르케고르를 연구해오지 않았다면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리기는 불가능하다. 이 책은 소위 ‘은혜가 되는’ 신앙서적이 아니다. 어렵고 난해한 것이 사실이다. 사실 기독교를 어렵게 만드는 게 키르케고르의 목적이다. 제도적 기독교가 믿음과 은혜를 너무나도 값싸고 천박한 것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그가 기독교를 어렵게 만든 것은 철학자들을 향한 하나의 위트요 유머이다. 이는 신앙의 세계가 철학의 세계보다 탁월함을 보여주는 것이자 학자들에게 인식론과 형이상학이라는 철학적 방법으로 유창하게 기독교를 설파함으로써 철학자들을 놀라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실존주의라고 해서 키르케고르가 기독교의 객관적 역사성을 부인한다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기독교 사상의 핵심은 성육신이다. 성육신의 계시적 사건은 시간과 공간 속에 일어난 역사적이고도 객관적인 사건임을 주목해야만 한다. 성육신 사건은 역사적이면서도 영원적이며, 객관적이면서도 주체적인 믿음의 결단을 통해서 이해해야 하는 신비이다.
왜 키르케고르는 요하네스 데 실렌티오와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라는 비그리스도인을 통하여 믿음의 본질을 말했을까? 원래 자신의 모습은 잘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의 본질을 배우게 함으로써 값싼 믿음을 버리고 참된 믿음의 정열을 가지도록 일침을 가하기 위해서이다. 왜 키르케고르는 완전하고 수준 높은 이상적인 그리스도인 안티 클리마쿠스를 통하여 기독교를 말하게 했을까? 그 이유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가장 이상적인 그리스도인 저자를 통하여 물 타지 않은 기독교의 본질을 가감 없이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믿음은 평생의 과업이다. 믿음의 과업은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에는 절대적으로 관계하고, 상대적인 목적에는 상대적으로 관계하는 것이다.(169쪽) 이 책을 통하여 독자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재정립하고 평생 믿음의 길을 완주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끝으로 어렵고 난해한 쟁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번역해주신 이명곤 선생님의 노고에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

윤덕영 | 영남대에서 심리학을, 장신대 신대원에서 신학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종교학(Ph.D.)을 전공했다. 미국 미네소타주 세인트올라프대학에서 키르케고르 도서관의 초빙연구원을 지냈다. 박사논문은 “다석 유영모와 키르케고르의 기독교 실존사상 비교연구”이며, 역서로 『키르케고르: 신앙의 합리성』이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 목사이며, 현재 경기도 파주에서 삼성교회를 섬기고 있다.

 
 
 

2019년 4월호(통권 7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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