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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당 (2018년 12월호)

 

  우치무라 간조의 ‘예언자적 민족주의’
  시부야 히로시·치바 신 외의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우치무라 간조의 사회사상과 신학사상』 홍성사 2018

본문

 

이 책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여 우치무라의 삶과 사상을 알리기 위해 기획된 책이다. 영어권 독자들을 상대로 한 책이기에 원문은 영어로 작성되었고 필진 대부분이 일본인 연구자들이다. 한국 독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 꽤 많아서, 우치무라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꼭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우치무라의 청소년기인 초기 메이지 시대의 시대정신은 민족주의였고, 그의 성장기는 일본의 민족주의가 발전했던 시기와 일치한다. 청년 우치무라는 일본의 젊은 지식인들처럼 애국자였다. 그는 일본이 서양의 위협에서 ‘구원되어’ 동아시아를 이끄는 나라로 우뚝 서기를 바란 동료들과 뜻을 같이했다. 그러나 기독교를 받아들인 우치무라의 민족주의는 매우 독특했다. 그가 동료들과 달랐던 점은 조국이 초월적인 하나님의 정의로운 재판에서도 ‘구원되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야규 구니치카(柳父圀近)는 우치무라의 독특한 민족주의를 ‘예언자적 민족주의’로 파악한다.
우치무라의 꿈은 ‘두 개의 J’, 즉 예수(Jesus)와 일본(Japan)에 헌신하는 것이었다. 청일전쟁 발발 전 젊은 우치무라는 일본의 사명이 서양 문명과 동양 문명의 중개자가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공화제인 서양과 군주제인 동양 사이에서 서양의 종교와 정치를 동양의 토양으로 가져와 뿌리내리도록 법을 제정하고, 이웃 동양 국가들에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 일본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일본이 서양의 손아귀에서 자유롭게 된 것을 큰 복이라고 생각했다. 우치무라는 하나님이 이 일을 시작하신 이유가 일본이 이웃 나라들의 독립을 돕기 위함이라고 믿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우치무라는 “청일전쟁의 정당성”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조선의 독립에 방해가 되며, 중국이 조선의 근대화를 저해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일본이 나서서 조선의 독립과 근대화에 도움을 주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 그러나 일본이 승리한 직후 우치무라는 이 전쟁이 오직 일본의 이익만을 위해 벌어진 것임을 깨달았다. 일본은 애초에 명시한 목표와는 멀어졌고,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우치무라는 전쟁의 결과가 일본 정부와 대중의 윤리 수준을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그는 ‘어리석은’ 글을 쓴 것을 후회했다. 비윤리적인 전쟁을 지지했다는 뼈아픈 실수를 경험하면서 우치무라는 그의 민족주의 이론을 날카롭게 다듬을 수 있었다. 우치무라의 슬픔과 분노는 친러 성향으로 일본을 반대한 명성황후가 1895년 10월 경복궁에서 살해당하면서 더욱 격화되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조선에 있던 일본 공사관의 소행이었다. 우치무라는 “시세(時勢)의 관찰”이라는 장문의 글을 써 일본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메이지 정부는 서구화와 공업화를 위해 군수산업과 섬유산업 같은 수출산업에 집중했다. 이 정책의 결과 1893년 이후 소작농민이 급속히 늘어 전체 농민의 60% 이상이 되었다. 빈곤의 악순환에 갇힌 소작농민의 가족들은 도시의 공장에서 저임금 노동자가 되었다. 정치권력과 결탁한 자본가들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땅을 오염시켜 농민들의 삶을 피폐케 했다. 우치무라는 구약 예언자 아모스의 말을 빌려 메이지 일본의 정치·사회적 현실을 비판했다.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 흐르게 하라. 가난한 자들이 더 나은 삶을 살게 하자. 제대로 교육을 받게 하자. 세율을 공정하게 하자. 군 조달업자를 몰아내라. 부패와 뇌물을 뿌리 뽑자. 그러면 너희는 살리라.”
그는 젊은 날 미국 애머스트에서 대학생활을 하면서 역사가이자 철학자인 앤슨 모스 교수의 유신론적 역사철학 강의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 “역사는 인류의 진보를 기록한 것이다. 한 국가가 떠오르고 전 인류에게 무엇인가를 이바지한 후 사라진다. 이전 국가를 대신해 새로운 국가가 생긴다. 인류 문명의 개척자들은 ‘문명’에 대해 저마다 기여했다. 이집트와 바빌론이 문명을 일으켰고, 페니키아가 퍼트렸다. 유대는 정화했으며, 그리스는 갈고 닦았다. 그리고 로마가 보존했고, 독일이 개혁했으며, 미국은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우치무라는 50대 후반,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1917년 미국의 참전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역사가 진보의 기록이며 궁극적으로 신적 창조 목적에 이를 거라는 생각을 포기한다. 역사를 통한 인류의 진보를 누구보다 확신했던 그의 실망은 차라리 절망에 가까웠다. 세상에서 죄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 한 역사를 통해 인류를 개선하려는 노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치무라는 ‘재림’ 교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성취될 것이라는 희망을 얻었다.
그러나 우치무라는 여전히 ‘예언적 민족주의’를 버리지 않았다. 예언자들의 경고는 무시되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국가에 예언자는 필요하다. 국가의 이상과 문제점에 대한 날카로운 진단은 반드시 널리 공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애국자는 오직 기독교인 중에서만 찾을 수 있다. 루터, 밀턴, 크롬웰 등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애국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필자의 젊은 시절에 정신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우치무라였다. 우치무라를 처음 만난 것은 22살 대학생 때였다. 선배의 권유에 이끌려 ‘대학생성경읽기’라는 선교단체에서 1년 넘게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는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교회 한 번 가본 적 없는 ‘이교도’였던 필자에게 성서가 보여준 세계는 당혹스러웠다. 일종의 문화충격(culture shock)이었다. 서양 역사 속에서 형성된 교회 제도는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부자연스러웠다. 19세기 영국 사상가 토머스 칼라일이 『의상철학』에서 이를 “히브리의 낡은 의상”이라고 표현했음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다.
절박한 심정이었으나 주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찾아 나섰다. 친구들과의 교제도 끊었다. 폐가식으로 운영되던 대학도서관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틈만 나면 종로, 청계천 일대의 서점들을 뒤지고 다녔다. 그러던 중 종로2가의 한 서점에서 문고판으로 출간된 우치무라 간조의 『기독교문답』과 『나는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었는가』를 발견했다. ‘동양의 이교도’ 입장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공감의 폭이 넓어지면서 우치무라에게 자석처럼 끌렸다. 우치무라는 서구 문명과 동양 문명의 중개자 역할을 충실히 한 것이다. 적어도 필자에겐 그랬다.
우치무라와의 만남을 계기로 한국에도 무교회 모임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종로2가 YMCA에서 노평구(盧平久, 1912-2003) 선생이 주관하는 성서연구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노 선생은 우치무라의 제자인 김교신(金敎臣, 1901-45)의 신앙적 제자로서, 한국 무교회 진영의 제2세대 지도자이다.
노 선생은 젊은이들에게 학문적 노력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성서연구회에 참석하는 대학생들에게 인문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따기 전에는 성경공부를 하지 말라고 했다. 인간을 모르고서 신을 알 수 없다는 게 선생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역사를 전공하던 필자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신앙과 학문의 일치를 모색하게 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 우치무라의 『종교와 문학』, 『시인 휘트먼』 등을 읽으면서 영문학이 얼마나 기독교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지를 깨달았고, 필자의 대학원에서의 전공을 영문학으로 바꾸면 어떻겠냐고 그분께 여쭌 적도 있었다.
선생은 역사학이 얼마나 훌륭한 학문인데 그걸 바꾸느냐고 단번에 제안을 물리쳤다. 그러나 우치무라를 읽으며 느꼈던 영문학의 강한 인상은 지울 수 없었다. 이때부터 역사·종교·문학을 병행해서 공부해보겠다고 작정하게 되었는데,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공을 서양사로 정하고, 청교도 시인 존 밀턴의 대표 산문 “아레오파기티카”를 연구 번역한 것, 2008년 밀턴 탄생 400주년을 맞아 『밀턴 평전』을 출간한 것, 그리고 토머스 칼라일의 『의상철학』과 『영웅숭배론』을 번역한 것도 우치무라의 영향이었다.
학생 시절 일기장 안쪽에는 늘 우치무라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어느 해 3월 1일에 사진을 떼어버렸다. 예나 지금이나 그를 높이 평가하고 깊이 존경하지만, 내 마음 한구석엔 허전함이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그 허전함의 이유를 일부나마 알게 된 듯하다.
23세 때 미국으로 떠난 우치무라는 예레미야서를 읽으며 예언자적 민족주의자로 태어난다. 그는 일본 지도를 보고 울면서 기도한다. 우치무라는 “러시아를 바빌론에, 러시아 황제를 느부갓네살 왕에, 우리나라(일본)를 오직 하나님의 정의를 가짐으로써 구원받는 무력한 고대 유대에 비교했다.”
하지만 장차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동아시아의 침략국가로 군림하게 될 일본을 ‘무력한 고대 유대’와 동일시한 것은 매우 어색하다. 오히려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던 조선에 어울릴 표현 아닌가. 조선에게는 일본이 바빌론 아니었던가. 우치무라가 조선인으로 태어났어야 어울릴 역사적 상황이었다. 다행히 이 땅엔 김교신이 있었다.
김교신은 “조선지리소고”(朝鮮地理小考)에서 조선 지리를 지정학적인 면에서 고찰한다. 그리고 “조선 역사에 영일(寧日)이 없는 이유는 한반도가 동양 정국의 중심임을 여실히 증명한다.”라고 주장하며,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동양의 범백(凡百) 고난도 이 땅에 집중되었거니와, 동양에서 산출해야 할 바 무슨 고귀한 사상, 동반구의 반만년의 총량을 대용광로에 달이어(煎) 낸 정수(精髓)는 필연코 이 반도에서 찾아보리라.”
우치무라의 ‘예언적 민족주의’는 오히려 한국 땅과 한국 민족에게서 최상의 역사적 조건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다만 김교신의 말처럼 “문제는 거기 사는 백성의 소질과 담력이 중요할 뿐이다.”


박상익 | 서양사를 전공하였다. 저서로 『밀턴 평전』, 『번역은 반역인가』 외 다수가 있다. 현재 우석대학교 역사교육과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9년 2월호(통권 7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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