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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당 (2018년 12월호)

 

  타인의 눈에 비친 로버트 토마스의 얼굴
  민경배의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J. 토마스』동연 2017

본문

 

한국 개신교 첫 순교자로 알려진 로버트 토마스 목사에 대해 처음으로 주목한 이는 오문환(1903-1962) 장로였다. 평양숭실학교 졸업생인 그는 1923년 『조선기독교회사의 일분수령인 평양양란(平壤洋亂)』을 저술하면서 토마스 목사의 행적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1927년 5월에는 토마스목사순교기념전도회를 조직했다. 이듬해에는 토마스에 대한 첫 연구서인 『도마스목사전』을 출판했다. 토마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1932년에는 The two visits of the Rev R. J. Thomas를 간행했고, 토마스목사순교기념교회당을 건축하기도 했다. 1935년에는 토마스호를 건조하여 대동강 하류와 연평도에 이르는 지역의 해상 전도에 사용했다.
그 이후 게일이나 김양선 등의 연구가 시도되었지만, 실제적으로 토마스 목사에 대해 학문적으로 연구한 이는 민경배 교수였다. 물론 그 이후에도 토마스 목사를 연구한 이들이 없지 않다. 고무송은 1995년 영국 버밍엄대학교에서 토마스의 생애와 선교사역에 대한 연구로 학위를 수득하고, 『토마스와 함께 떠나는 순례여행』(쿰란출판사, 2001)과 『토마스 찾아 삼만리』(드림북, 2013)를 출판한 일이 있다. 미국인 스텔라 프라이스는 토마스 목사 순교 150주년을 기념하여 『조선에 부르심을 받다』(코리아닷컴, 2016)라는 전기를 출판한 바 있다. 그 외에도 하기오그래피(Hagiography) 성격을 가진 칭송 일색의 여러 기록들이 있다.
민경배 교수는 자신이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18쪽), 1969-70년 영국 런던에서 유학할 때 토마스가 수학했던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서 공부하였고, 이를 계기로 토마스에 대한 1차 자료를 수득하여 토마스에 대한 그간의 오류와 오류의 반복적 유전(流轉)을 극복할 수 있었다. 우선 그는, 토마스가 백낙준 박사가 말한 에든버러대학교의 뉴칼리지가 아니라 런던대학교 뉴칼리지 출신이라는 점과 그가 스코틀랜드인이 아니라 웨일스 출신으로 런던선교회(LMS)의 파송을 받아 상해로 갔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런던선교회 고문서관인 리빙스턴라이브러리에서 토마스에 관한 다양한 문서를 섭렵하게 되는데 이런 1차 사료가 토마스 연구에 있어서 정시(正視, focusing)와 창신(創新), 즉 ‘역사적’ 토마스 탐색을 가능하게 했다.
필자가 알기로 토마스에 대한 민경배 교수의 첫 기록은 “토마스 목사와 한국 근대화의 문제”(「연세춘추」 1970. 9. 28.)이다. 48년 전이다. 그 글은 필자가 읽은 민경배 교수의 첫 논문으로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이 글에서 유학 시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1차 사료를 접하게 된 이야기에서부터 그의 내한이 갖는 성격을 해명하고자 했다. 그 후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중요한 논문 “로버트 토마스 한국 초기 선교사의 한 유형과 동서교섭의 문제”를 「연세논총」 15집(연세대학교, 1978, 129-158.)에 발표했는데, 그의 『교회와 민족』(대한기독교출판사, 1981)에도 수록되었다. 이 논문은 토마스에 대한 새로운 연구로서 그간의 하기오그래피적인 기록을 일신한 중요한 논문으로 인식되어 왔다. 1차 자료에 근거한 실증적(scientific) 연구였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 동원되었던 각종 사료를 망라하여 편역한 책이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J. 토마스』이다. ‘그가 주고받은 편지들, 기록들’이라는 설명을 곁들인 이 책은 런던대학교 뉴칼리지 수학기(1856-64) 교무위원회 기록 18건과 런던선교회 파송을 받은 후 중국 선교사 시절(1864-65)의 편지글 9건, 중국에 체류하며 독자적으로 일한 기간(1865)의 문서 19편, 조선 선교 시기(1865-66) 토마스와 관련된 문서 6편, 순교 이후(1866-99)의 문서 8편,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선교단체 혹은 선교 관련 저널과 선교 역사의 기록, 그리고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보고된 내용 등 13편의 토마스 관련 기록이 편집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약 60여 종의 문서인데, 절대다수가 영문으로 기록된 서신 형식의 보고이거나 보고서이고, 토마스 목사에 대한 런던선교회 관계자들 간의 교신 기록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즉 토마스 목사의 북경지부 동료이자 런던선교회 중국 지역 책임자 조셉 에드킨스(Joseph Edkins), 런던선교회 해외 총무 아서 티드만(Arthur Tiedemann) 박사, 북경 주재 해외 총무 조셉 뮬렌스(Joseph Mullens), 런던선교회 상해지부 책임자 윌리엄 무어헤드(William Muirhead), 그리고 천진의 조나단 리스(Jonathan Lees) 등과 토마스 목사의 상호 교신 기록이거나 이들이 작성한 토마스와 관련된 기록 혹은 보고서이다.
민경배 교수가 1969년 이후 발굴한 이런 기록이 50년 가까이 지나 이제야 발간된 것은 아쉽지만, 이 모든 자료를 취합하고 번역하여 토마스 연구의 기초 자료를 제공해준 일은 더없이 고마운 일이다. 이 다양한 문서에서 언급된 인명, 지명, 원자료의 표기 방식 등에 대한 자세한 해설적 각주 또한 매우 유용하고, 당시 세계를 헤아리는 편자의 식견을 반영한다. 이 문서가 보여주듯이, 토마스를 둘러싼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는 선교부 관계자들의 인식은 토마스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타인의 눈에 비친 토마스 상을 제시해 준다. 특히 이 책은, 이 책에 소개된 자료에 대해 검토 없이 기술된 기존 연구의 재검토를 요구한다. 그중 한 가지가 토마스를 순교자로 볼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어떤 이들은 토마스 목사를 순교자로 볼 것인가에 의문을 제기하며, 죽음의 원인이 선교 때문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책의 편자는 1970년의 논문에서부터 토마스를 ‘최초의 순교자’라고 적시하고 있다. 1978년의 논문에서 토마스는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로, 역시 최초로 순교한 인물”이라고 전제하고(『교회와 민족』, 41쪽), “토마스의 순교 노정”을 고종실록과 일성록을 중심으로 제시하고 있다.(『교회와 민족』, 63쪽 이하) 이번 책에서도 토마스를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라고 명시하고, “그가 주고받은 편지와 기록들을 통해 당시 중국의 사정이나 선교 현장의 상황, 그리고 그의 인간적인 고뇌와 아픔, 선교사로서의 자질과 행적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그의 조선행과 순교는 하나님의 경륜이었다.”(31쪽)고 이야기한다. 특히 이 자료집은 토마스의 내한이 선교를 위한 목적이었음을 자신의 증언을 통해 분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편자는 이 책의 출간으로 토마스의 순교의 의미가 다시 드높이 밝혀지기를 기대했다.(31쪽)
이 책에 수록된 기록을 보면 실제로 토마스는 선교 사명과 선교 열정이 충만했고(47, 49, 51, 53, 58, 107, 130, 147, 172쪽 등) 그의 1차 조선 방문도 가톨릭 선교사 외에 누구도 가지 못한 조선에 복음 진리를 전파할 목적 때문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165, 173-174쪽) 그가 1866년의 이른바 병인교난 당시 프랑스 신부 9명의 처형 소식과 대량 학살의 비보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181쪽) 조선행을 감행한 것은 복음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182쪽) 토마스는 조선의 해안 지리를 잘 알고 또 조선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제너럴셔먼호는 그를 통역관으로 고빙했고, 토마스는 조선으로 갈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제너럴셔먼호에 승선하였다. 1차 조선 방문 시 상당한 위험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166-168쪽) 그는 “이교 세계의 중심지에서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를 전파한다는 포부로”(174쪽) 다시 조선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토마스에게 방한은 선교를 위한 활동이었지만,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그가 선교사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또 그의 죽음이 정치적인 이유였다고 해서 순교자가 아니라는 해석 또한 설득력이 없다. 순교자들이 정치적인 이유에서 죽었다는 점은 교회사의 증언이다. 예수 또한 로마 제국의 정치범으로 죽은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가 선교 활동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따라서 순교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가 무장한 상선을 타고 입국한 것을 문제시하기도 하지만, 기독교가 금교인 당시 상황에서 다른 대안이 있었을까?
그는 1866년 8월 9일 제너럴셔먼호에 승선하여 지푸를 떠나 조선으로 향하는데 이보다 약 일주일 앞선 8월 1일 자로 티드만 박사에게 보낸 편지는(179-184쪽) 토마스가 조선행을 결심한 이후에도 제너럴셔먼호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음을 암시해 준다. 즉 “나하고 친한 영국 상인의 상선으로 조선으로 가는 여정에 오르기로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점은 토마스가 미국 선박인 제너럴셔먼호를 잘 알고 있지 못했음을 보여준다(183). 토마스의 죽음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제너럴셔먼호 승선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었지만, 통역관에 불과한 토마스에게 제너럴셔먼호의 만행을 대입하는 것은 균형잡힌 판단으로 볼 수 없다.
토마스를 순교자로 볼 것인가 아닌가는 개인이 선택할 문제이지만 이를 판단하는 근거가 무엇인가는 중요하다. 토마스가 정치적인 이유로 죽었다거나, 무장한 상선을 타고 입국한 상황을 문제로 제기하거나, 마지막 순간 살려달라고 애원했기 때문에 순교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남은 과업을 위한’이라는 거창한 언사는 차치하고라도 마지막 순간 생명에 대한 애착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현실일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토마스는 천주교도들이 외세의 침략자와 결탁한 원국지배(怨國之輩)로 몰려 대항 학살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으로 향했다는 점이다. 신앙의 힘 외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에게 신앙 외에 다른 무슨 기대가 있었겠는가? 토마스는 순교당하기 한 달 전에 이렇게 썼다. “나는 런던선교회 이사들께서 성서의 교리를 전하기 위해 아무 인간적 과오와 혼합되지 아니한 심정으로 이 미지의 나라에 향해 가는 우리들의 발걸음을 이해하여 주시리라 믿으며 먼 길 조선을 향해 떠나갑니다.”(184쪽)
한 가지 부기할 것은 토마스는 언어능력이 탁월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이 책 전편에서 드러나는데, 토마스 자신은 “유럽의 몇 나라 언어를 구사할 수 있고”(53쪽) “외국어를 쉽게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라고 자평한다.(58, 100쪽) 토마스와 불화했던 무어헤드 또한 그가 “여러 외국어에 대하여 상당한 것을 알고 있고, 탁월하다.”라고 썼다.(97쪽) 그를 조선으로 향하도록 안내했던 알렉산더 윌리엄스는 그가 “외국어 학습에 있어서 실로 놀라울 정도의 약진을 보여 주었다.”라고 증언했고(108쪽), 조나단 리스는 “그에 대해서는 정말 사방에서 칭찬이 자자합니다. 그의 언어 능력은 혀를 차게 합니다.”라고 증언했다.(125쪽) 조셉 에드킨스는 “그는 비상한 언어실력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라고 증언했다.(197, 233쪽) 이와 같은 여러 증언들을 고려해 볼 때 그를 ‘괴짜 선교사’ 혹은 ‘못 돼먹은 선교사’(Naughty missionary)라고 불렀던 것은 약간의 곡해인 셈이다. 이 책의 편자는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가 걸어갔던 짧은 여정을 새롭게 보게 해준다.


이상규 | 고신대학교 신학과에서 교회사학을 가르쳤다. 『초기 기독교와 로마사회』, 『한국교회의 역사와 신학』, 『왕길지의 한국선교』 등을 저술했다. 고신대 명예교수이며, 국제학술지 Unio cum christo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8년 12월호(통권 7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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